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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그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줄 믿은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사도 하지 아니하시니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삽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교회력(敎會曆)으로 오늘을 종려주일(Palm Sunday)이라고 합니다. 십자가 지시기 닷새 전의 이 주일날, 예수님께서는 앞에 십자가의 고난이 있는 것을 확실히 아시면서도,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를 외치는 군중들에 둘러싸인 채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십니다. 이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에 종려나무가 쓰였다고 해서 이 주일날을 특별히 '종려주일'이라 일컫게 되었습니다. 종려주일에 이어서 고난주간(또는 수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일주일의 고난주간 끝에 부활절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 저자들의 성경 기록 의도를 깊이 생각해야 할 줄 압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생애가 33년이요, 또 3년 동안 복음을 전하셨다고 하지마는 그 기록의 구조로 본다면 마지막 일주일 동안에 된 사건을 전체 기록의 3분의 1 이상으로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 저자들의 의도는 이 마지막 일주일에다 촛점을 맞추어 집중적으로 예수님의 생애를 보았고, 그렇게 믿었고,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기록의 중심, 증거 하는 바의 촛점,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고난주간이라고 하는 일주일이 호산나의 승리의 노래로 시작하여 부활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승리에서 시작하여 승리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입니다. 복음의 진수입니다.
심리학에 '학습된 무기력증(Learned helplessness)'이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령 태국이나 인도 등지에서는 몸집이 아주 큰 코끼리를 길들여서 집안에서 일을 시킵니다. 그런데 코끼리를 그렇게 길들이는 방법이 재미있습니다. 야생 코끼리를 잡아다 발에 쇠사슬을 묶어서 마당에 박아놓은 말뚝에 빗걸어 매놓습니다. 처음에는 코끼리가 도망을 가려고 무진 애를 씁니다. 발에서 피가 날 정도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냅니다. 오랫동안 그렇게 기를 쓰다가 코끼리는 끝내 체념을 하고 맙니다. 이때쯤에 이르러 쇠사슬을 풉니다. 그런 다음에도 그 코끼리는 여전히 묶여 있는 줄 알고 말뚝 주위를 빙빙 돕니다. 마침내 길이 든 것입니다.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로 패배와 절망에 학습된 무기력증 환자가 많습니다. 다시 말하면 전혀 승리를 생각조차 못해보는 것입니다. 승리를 상상도 못하고 삽니다. 승리를 생각지 않는 자에게 승리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가난했기 때문에 이미 정신적으로 비굴한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병중에 있었다고 해서 정신까지 완전히 실의에 빠진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실패를 거듭함으로써 나중에는 실패가 마치 내 운명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완전히 좌절된 체질로,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의 인간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방탕과 타락은 절망의 부작용입니다. 무서운 파멸로 치닫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완전히 절망해버린 상태에서는 승리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엄청난 선언을 하십니다. 역경이 계속되고 환란이 있고 고통이 있을 뿐만 아니라 눈앞에는 바로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고백적인 승리, 영적인 승리를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내적인 승리를 확신하시고 외적인 승리를 구현하십니다. 먼저 개인적인 승리를 온전히 거두시고, 그리고 우주적인 승리를 체현하십니다. 이 본문은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을 두고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너무나 소중히 여긴 나머지 다음과 같이 경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로마까지 무릎을 꿇으며, 기어가면서 운반할 가치가 있는 말씀이다'---다시 한번 읽어보십시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노벨상을 받은 미국의 문호 헤밍웨이가 자살을 합니다. 온세계의 추앙을 받는 대작가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죽어버립니다. 그는 유서에 썼습니다. '나는 전류의 흐름이 그치고 필라멘트가 끊어진 전구처럼 고독하다.' 고독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죽습니다. 그는 패자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앞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바로 십자가 전야에 열두 제자와 함께 유월절 잔치를 가지시고 성만찬 예식을 행하십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들에게 귀한 예식을 가르쳐주십니다. 요한복음 13장, 14장, 15장, 16장, 17장에 걸쳐 그 귀한 유언적인 교훈의 말씀을 하십니다. 희미한 미래가 아닙니다. 먼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막연한 근심도 아닙니다. 분명하고 구체적인 십자가 사건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앞에 있는 고난을 몸으로 예견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이것은 선포요, 이것은 간증이요, 이것은 고백이요, 이것은 약속입니다. 그 귀한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그 마음속에서, 그 영혼의 문제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과의 관계에서 이미 실제적으로 문제의 해결을 다 보았습니다. 세상을 이겼노라고 선포하십니다. 승리의 선포가 먼저 있고 승리의 실제가 있었습니다. 승리는 우연이 아닙니다.
먼저 승리를 확신하고 선포하고 승리를 거두어갔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세상'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이것은 구체적으로 십자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곧 환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17장에 보면 '세상'이라는 말을 열아홉 번이나 쓰십니다. 세상은, 세상은…… 귀한 뜻이나 선한 목적을 이해 받지 못하는 그런 세상입니다. 소중한 메시야의 역사를 이루고 있지만 세상은 당신을 받아주지 않습니다. 영접해주지 않습니다. 이해하려고 들지도 않습니다. 믿어주지 않습니다. 그것이 세상입니다. 선한 일을 많이도 하셨지만 여전히 비난과 오해와 음모뿐입니다. 또한 핍박과 환난과 고통이 그를 괴롭힙니다. 불의와 거짓으로 가득찬 세상입니다. 고독한 세상입니다. '너희가 다 흩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마저 예수를 떠납니다. 배반이 있고 배신당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그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겼노라.'
요한복음에 한 번, 요한일서에 여섯 번, 계시록에 열 일곱 번 나오는 말씀 "이겼노라"---승리를 말씀하심입니다. 승리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승리는 망각이 아닙니다. 해탈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승리는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참 승리는 사건입니다. 역사적 사건이요, 우주적인 사건이요, 분명한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바로 승리입니다. 또한 승리는 생명입니다. 살아남아야 승리합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영생이 승리입니다. 승리는 곧 생명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승리요, 또한 승리는 영광입니다. 얻었다고 승리가 아닙니다. 빼앗았다고 승리가 아닙니다. 출세했다고 승리가 아닙니다. 얻었지만 두려워하고 있으면 승리가 아닙니다. 지위를 얻었지만 부끄러움이 있으면 승리가 아닙니다. 적어도 성경이 말씀하는 승리란 얻었느냐 잃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부끄러운 것이냐 영광된 것이냐, 의로운 것이냐 불의한 것이냐, 선한 것이냐 악한 것이냐---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의와 선은 항상 영광을 수반합니다. 자랑스럽습니다. 자랑스럽지 못한 일은 패배입니다. 또한 승리는 자유입니다. 근심과 걱정과 어두움과 모든 것에, 불가피한 것에 전혀 매이지 않습니다.
그 마음에 무한한 자유를 향유하게 될 때에 비로소 승리라고 합니다. 승리는 곧 자유요 화평입니다. '내 평안을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다'---승리는 평안입니다. 권투시합에서 보듯 한대 때려눕히고 두 팔을 번쩍 들면 승리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비참한 것입니다. 그런 게임에서 영원한 승자는 없습니다. 넘어졌다 일어섰다 할뿐입니다. 전쟁도 그렇습니다. 전쟁을 치르고나서 잿더미에 깃발 하나 꽂아놓고 승리했다며 만세를 부릅니다. 그것이 승리입니까?
참 승리란 평안입니다. 화평입니다. 샬롬입니다. 작년 크리스마스 때, 군종 사병들을 한 300명 모아놓은 자리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는데, 첫 시간에 제가 서서 "일년 동안 승리한 국군에 대해서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말했더니, "승리라니…… 우린 싸운 일도 없는데"하고 의아해하는 눈치입니다. 그래서 제가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총소리가 없는 승리가 진짜 승리라고요. 참 승리는 기권승입니다. 싸워볼 것도 없으니까요. 처음부터 엄청나게 차이가나니까 감히 대들지 못합니다. 이것이 승리입니다. 싸우다가 다 죽고서 하나 남아가지고 무슨 승리이겠습니까? 그것은 참패올시다.
평화가 승리요, 고요함이 승리요, 평안이 승리올시다. 참 승리는 싸움 없는 승리입니다.
그러므로 승리는 영적인 것이 먼저입니다. 참 승리는 평안이요, 자유요, 영광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러면 어떻게 승리를 선포하고 대처하시는지 한번 보십시다. 예수님은 승리를 선포하시고 적과, 환난과 직면하십니다.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승자는 눈을 밟아 길을 만들고, 패자는 눈이 녹기를 기다린다. 승자는 거친 바람이 불 때에 그 바람을 돛을 위한 에너지로 생각하고, 패자는 바람이 불 때에 돛을 내린다.' 여러분, 거친 바람이 불면 이것을 이용해서 내 배가 더 빨리 갈 수 있다고 하는 확신을 가질 것입니다. 그것이 승리입니다. 다시 말하면 도전적이어야 합니다.
미국 실업가들이 입버릇처럼 외는 구호(좌우명)가 있습니다.
사업에 성공하려면 3C(chance, choice, challenge)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chance--기회를 포착하라. choice--선택을 바로 하라.
challenge--도전하라. 도전의 용기가 없는 자는 승리를 바라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고난을 향하여 도전하셨습니다. 십자가를 향하여 도전하였습니다. 또한 당신이 당하는 고난의 의미를 알고 계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떠한 고난을 당하든 어떠한 사건이 있든, 그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모르고 행하는 일은 행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목적도, 의미도, 깊은 하나님의 뜻도, 내게 향한 경륜도, 이 사건의 선교적 의미, 구속사적 의미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이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을 때에 비로소 승리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 다음에 오는 일을 미리 예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전망할 수 있어야 됩니다.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아이들은 아버지 어머니가 싸우면 울고불고 하였다고 하는데 요즈음은 옆방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말다툼을 하고 있으면 그 옆방에서 아이들은 좋아한답니다. 그 싸움 끝에는 회식을 할 테니까 그렇다나요. 아이들은 벌써 그 다음 사건까지 내다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아버지 어머니는 정신을 못차리고 당장만 생각하고 싸우고 있는 셈입니다. 다음에 올 일을 한번 생각해본다면 얼마나 부끄럽습니까.
현재가 현재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멀리 내다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영광된 미래를 말입니다. 해산하는 여인이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것만 겪고 나면, 이 몇 시간만 겪고 나면 귀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한 미래의 축복을 바라보고 현재를 견디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지금 눈앞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십자가 다음에 있을 부활을 바라보십니다. 다가올 영광을 바라보십니다. 장차 천하만민이 주님 앞으로 돌아오게 될 구속사(救贖史)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조금 있으면 나를 못 보겠고,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6장에서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잠깐 있으면 못 보겠고 잠깐 있으면 보겠다. 잠깐 있으면 죽을 것이고 잠깐 있으면 부활하겠다'---잡다한 모든 현실 다음에 있는 세계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승리입니다. 그의 마음은 벌써 거기에 가 계십니다.
또한 초연한 사랑과 믿음을 느끼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 27절에 볼 수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조금 있으면 베드로가 예수를 모른다고 할 것입니다. 제자들이 다 도망갈 것입니다. 빤히 아시고 예언도 하셨고 경고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생각하십니다. 너희들은 나를 사랑하고 있고 나를 믿고 있고, 언젠가 다시 돌아와서 나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 다 순교하게 될 것이다---사랑을 믿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믿으시고, 제자들의 사랑과 믿음을 믿으셨습니다. 여러분, 혹 어린아이들이 당장의 눈앞에서 어떻고 어쩐다고 낙심하십니까? 아이들은 말썽을 피우면서 자라는 것입니다. 엎치락뒤치락하지만 결국은 다 돌아올 것입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뜻을 이해할 것이고, 자기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조금도 문제 때문에 자신의 소신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본래적인 목적 그것을 생각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28절)"---왔고 가노라 하십니다. 하나님께로서 중요한 목적을 가지고 사명이 있어서 왔다가 다시 하나님께로 가신다고 하십니다.
지금 복잡한 사건들이 좀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거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왔다가 가노라---여러분은 이 세상에 무슨 목적을 지니고 왔습니까? 이제 그 일을 다할 때가 되었으면 가야 합니다. 본래적이고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사명과 그 목적을 크게 생각한 나머지, 지금 눈앞에 벌어지는 복잡한 사건---십자가니 갈보리 언덕이니 비난과 고통에 대해서는 초연해집니다. 왔다가 가노라---이것이 승리의 길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결코 나 홀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거기에 승리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승리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승리를 말씀하십니다. 그의 승리와 우리의 승리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그가 대신 승리한 것입니다. 대장과 대장의 싸움입니다. 이미 승리는 끝났습니다. 잔병 처리만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 그는 우리를 대신해서 이기셨고 또한 승리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저는 6․25때 전장에서 작전상 해군 군함에 올라탄 적이 있습니다. 303이니 307이니 313이니 하는 조그마한 군함들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 군함이나 해군은 워낙 형편이 없었습니다. 제가 올라타 보니, 선체는 나무로 되어 있고, 대포라고 하는 것은 수류탄 만한 것들이 탄환이라고 퐁퐁 나가는데, 참 한심합디다. 하도 기가 막히기에 물어보았지요. "이 배, 어느 나라에서 만든 거요?" "미국사람들이 만든 거랍니다." "그렇다면 이 조그마한 목재 군함이 어떻게 태평양을 건너왔습니까?" 그랬더니 대답이 재미있습니다. "큰 군함이 오고, 그 뒤를 졸졸 따라왔지요." 그랬을 것입니다. 조그마한 배는 큰배의 뒤를 따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고 '내가 이겼노라,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제가 비행기를 타고 다니면서 보니까 비행기 안에도 파리가 있습디다. 미국까지 갔는데도 말입니다. 누가 그 파리를 죽이려고 하기에 "여보시오, 한국에서 여기까지 온 파린데 죽이지 마세요"하고 제가 말했습니다. 파리라는 놈도 비행기에 올라타니까 태평양을 건너가더라, 그 말씀입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또한 그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나와 함께 살아 역사 하십니다. 리빙스턴은 식인종이 우글우글하는 무서운 아프리카에서 16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16년만에 처음으로 런던에 돌아가서 보고대회를 할 때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 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깜짝들 놀랐는데, 한 청년이 "그 무서운 곳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가 있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리빙스턴은 서슴지 않고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성경구절 두 절을 외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요 14:18)"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이 두 말씀을 확실히 믿고, 그 약속을 믿고 승리할 수 있었노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승리를 약속해주셨습니다. 약속 받은 승리, 승리를 약속 받고 현재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처럼 쉬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세상을 이겼노라고 말씀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말씀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절대적 승리를 생각해보셨습니까? 이것은 은혜의 승리요, 사랑의 승리요, 믿음의 승리입니다. 생명은 싸움입니다. 생명은 사망과 싸우고, 진리는 거짓과 싸우고, 사랑은 증오와 싸우고, 소망은 절망과 싸웁니다. 믿음은 불신과 싸웁니다. 겸손은 자기교만과 싸웁니다. 싸움에 승리하지 못하면서 살아남지 못합니다.
제가 인천에서 한 16년 동안 목회를 했습니다. 가끔 친구들이 오면 자유공원에 올라가서 맥아더동상을 보여주었습니다. 맥아더동상에 이런 비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맥아더 장군의 좌우명이었습니다. 'There's no substitute for victory.'---그렇습니다. 승리에 대신할 것은 없습니다. 승리는 승리일 뿐입니다.
여러분, 승리 이외의 일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꿈에라도 실패나 낙담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승리하신 예수님을 믿고, 승리하신 예수님을 따르고, 승리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고, 그 안에 살 때에야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라고 지금 이 순간에도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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