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기도로 부탁하십시오 (이사야 31장 1-7절) < 드나베의 삶이 주는 축복 >
1996년 한 사람이 분당에 있는 자기 상가 4층 110평이 비어있는데 거기서 새로 교회를 개척해보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거절했는데 1년간 계속 제안해서 마침내 1997년 말에 목회지 이전을 결심했습니다. 인천에서 개척한 교회는 1달간 후임 목사님과 함께 심방하며 잘 인계해드렸습니다. 그때 분당의 큰 상가를 거저 얻은 은혜가 감사해서 교회나 후임 목사님으로부터 한 푼의 사례도 받지 않고 수중에 몇 십만 원만 들고 분당으로 이사했습니다.
1997년 11월 마지막 주일에 분당에서 새로 개척 예배를 드렸습니다. 110평의 큰 공간에서 시작했고 전도도 잘 되어서 교회가 단기간에 꽤 부흥했습니다. 6개월 만에 50명이 넘게 예배드리면서 썰렁했던 상가에 활기가 돌았습니다. 그런데 그 상가 주인이 저와 상의도 없이 그 장소를 1998년 5월에 타 교회에 팔았습니다. 상상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빈 상가의 가치를 올려주는 역할만 한 셈이었습니다.
거리에 나앉게 되었지만 저희 부부는 평안했습니다. 지인과 동료 목사들이 더 흥분하며 고소하라는 말도 했지만 저는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믿고 그냥 물러섰습니다. 얼마나 더 얻겠다고 목회자가 싸우고 소리치고 고소합니까? 저는 이제까지 남이 제 차를 7-8번 들이받았어도 늘 “앞으로 조심하세요.” 하고 모두 그냥 보냈습니다. 차에 상처가 나도 타고 다니는데 문제가 없으면 고치지 않으니까 따로 보상비도 받지 않는 것입니다. 보험사 좋은 일만 시킨다고 하지만 사실 제가 좋기 위해서입니다.
뭔가를 억지로 받아내려고 정신적인 에너지를 소모하면 목회자로서 말씀생활과 기도생활이 막히니까 웬만한 손해는 그냥 편하게 감수합니다. 그래서 가족의 생계가 걸린 큰 시련을 당해도 그 상가 주인에게 가서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당신이란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군요.”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를 멀리하면서 그 일을 깨끗이 잊어버리고 새로운 비전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제게는 가장 통쾌한 고소이자 통쾌한 복수였습니다.
그 일이 한과 상처가 되지 않도록 깨끗이 잊었어도 그 여파는 컸습니다. 미국 기독교 선교연맹(C&MA, 미국성결교) 출신 목사로서 당시 한국에 동역자가 전무했기에 왠지 외롭고 허전하고 미국에 있는 부모님과 동역자가 보고 싶었습니다. 결국 마지막 재산인 두 딸 이름으로 든 보험을 다 깨서 뉴욕행 왕복 비행기표를 구입하고 그 표가 3곳까지 무상 경유가 가능했기에 귀국할 때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하와이를 들리는 일정을 짰습니다.
보통 아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당신 미쳤어요? 이런 상황에서 돈을 벌 생각은 안 하고 어떻게 아이들 보험을 깨고 미국에 갈 생각을 해요? 정 깨고 싶으면 하나만 깨요.” 그러나 아내는 남편의 고독을 이해하고 생활비도 거의 없는 상황에서 상당한 비용이 드는 미국행을 묵묵히 지원했습니다. “남편이 적어도 우리 가족을 굶기지는 않겠지.”라는 믿음 때문에 그랬는지 몰라도 아무튼 아내에 대한 고마웠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때 약 1달 간 혼자 미국의 동부, 중부, 서부, 그리고 하와이까지 동역자 교회들을 방문해 설교하고 교제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위로와 격려와 선물과 재정 후원도 받았습니다. 가장 큰 힘과 격려가 되어주었던 동역자는 당시 뉴욕에서 목회하던 몽골의 임병철 선교사님입니다. 임 목사님이 강력히 말했습니다. “이 목사님! 목사님을 분당으로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겁니다. 집에서부터 다시 교회를 새로 개척해보세요.” 그때 교회개척을 새롭게 결심해서 지금의 분당샛별교회가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관광 대접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 환대가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내가 동역자 교회로 수금하러 왔나? 이렇게 대접받으며 동역자 목사님들의 소중한 시간을 빼앗는 것 같다. 앞으로 이런 일은 없게 하자.” 그때 다짐했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미국의 교단 총회에 참석하면 동역자 교회에 설교 사례비나 대접에 대한 부담을 주지 않도록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떠나게 하소서!” 그 다짐을 그 후 20년간 비교적 잘 지켰습니다.
자기 목회 지역에 와서 연락이나 설교도 안 하고 그냥 간다고 섭섭해 하면 겸손하게 설명했습니다. “목사님! 주일설교 강단은 담임목사가 지키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서 그래요. 저는 제 강단이 아니면 설교하는 것보다 설교를 듣는 게 좋아요.” 특히 주일 전에는 더 전화하지 않습니다. 저를 존중해준다고 주일설교를 부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동역자 교회에 가서 예배드릴 때는 사전에 얘기 없이 갑자기 가서 조용히 예배드렸습니다.
요새 미국의 동역자 목사님들이 한국을 많이 방문하지만 한국에는 그분들이 설교하러 갈 교단 교회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라도 설교하기를 원하지만 정중하게 사정을 말씀드리고 대부분 거절합니다. 저희 교인들을 위해서도 별로 바림직하지 않은 것 같고 매주 월요일마다 약 4천 명의 목사님들이 <온새기(온라인새벽기도)>를 통해 제 설교를 받아보는데 제가 직접 설교해보지 않을 상태에서 글로만 보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남의 강단은 안 빌리고 제 강단은 안 비우는 편입니다. 총회 참석 때는 어쩔 수 없지만 성도들과 일주일에 한번 말씀으로 깊이 만나는 시간을 한국에 있으면서도 외면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인은 미국 목사님이 한국에 부흥회를 오면 사례도 많이 받고 관광도 하고 최상의 대접을 받고 반대로 한국 목사님이 미국 한인교회에 부흥회를 가면 똑같이 그렇게 대접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오해도 받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흥회가 한국 교회 성장에 큰 역할도 했지만 반대로 부흥회를 통해 돈을 연상하고 부흥사의 웃기고 울리는 솜씨를 연상하면서 복음과 교회의 이미지가 손상되는 측면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외부의 설교 초청을 대개 정중히 사양합니다. 화려한 말솜씨가 곁들여진 외부 강사의 재미있는 말씀보다 자기 성도를 사랑하고 기도해주는 담임목사의 재미없는 말씀이 더 영혼을 살찌운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의 강단 교류를 돈이나 관광과 연계시켜 안 좋게 보는 교인에게 “왜 그렇게 부정적이냐?”라고 질책할 수만은 없습니다. 외부 강사가 개그맨 뺨치는 말솜씨로 잠깐 웃기고 울리는 것을 “은혜 받았다.”라고 여길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자세히 보면 담임목사는 말씀을 전할 때 지켜야 할 선을 대개 넘지 않지만 외부 강사는 그 선을 넘을 때가 비교적 많습니다. 유머에도 지켜야 할 선이 있습니다. 감동적인 얘기도 최대한 진실을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요새 왜 성도의 물질적인 헌신이 약해졌습니까? 교회가 물질을 잘못 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가 돈에 연연하면 성도들이 상처를 입습니다. 교회가 평안하고 목회자가 존경받는 교회는 대부분 담임목사가 돈 문제에서 모범적인 교회입니다. 그래서 저는 목회 초기부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물질 문제에 연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하소서.” 그런 문제에서 연약한 모습을 덜 보이려면 결국 사도 바울처럼 목회자가 자기 재능을 살려 텐트메이킹을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합니다.
저도 나름대로 힘써 텐트메이킹을 하며 도움을 받기보다 도우려고 했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글을 쓰고, 번역하고, 강의하고, 네트영어를 개발하고, 방대한 강해설교 파일을 구축한 것도 그것들이 목회자로서 할 수 있는 비교적 적합한 텐트메이킹이고 또한 외적인 교회성장보다는 후대까지 오래 지속될 선한 영향력을 꿈꿨기 때문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쳤기에 가정의 기본생활 정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책임질 수 있는 자비량 목회가 가능해진 것입니다.
매년 12월 10일은 1년간의 <온새기> 사역비를 지불하는 날입니다. 며칠 전에 그 사역비 기도제목을 <온새기>로 보내자 아내가 물었습니다. “여보! 궁색해보이거나 회원들이 부담을 느끼지 않을까요?” 제가 말했습니다. “괜찮아요. 가끔 받은 은혜를 표현할 기회도 주는 것도 필요해요.” 지난 10년간 온새기 사역비의 절반은 누군가의 헌신으로 채웠고 나머지 절반은 제가 텐트메이킹을 통해 얻은 재정으로 채웠습니다. 하나님은 받는 존재가 아닌 주는 존재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제목을 어느 정도 이뤄주신 것입니다.
신기한 일은 그렇게 ‘주는 삶’을 위해 힘쓰니까 거꾸로 ‘주는 삶’을 꾸준히 실천하는 신실한 데오빌로와 루디아를 하나님께서 붙여주셨고 지금은 <월새기(월간새벽기도)> 사역까지 이루게 하시면서 염치와 자존심의 손상이 없이 즐겁게 사역하게 하셨습니다.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더 돕는 동역자들을 붙여주십니다. 그것이 드리고 나누고 베푸는 ‘드나베의 삶’이 가져다주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할 때 그 믿음을 결코 헛되게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 의지하지 말아야 할 것 >
이사야 31장은 위급한 처지에서 잘못된 것을 의지하면 더욱 비참한 처지게 될 것을 잘 보여줍니다. 무엇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까? 첫째, 사람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애굽을 의지하면 안전을 얻기보다 오히려 화가 있다고 했습니다(1절). 사람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누군가 나를 도와주겠다면 감사히 받으십시오. 그러나 도와달라는 말은 가급적이면 힘써 피하십시오. 어려울수록 하나님께 나오십시오. 사람은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하지만 하나님은 강자에게는 한없이 강하게 나오시고 약자에게는 한없이 약하게 나오십니다.
둘째, 상담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없이 사람을 의지하고 사람의 지혜를 구하고 사람에게 상담을 요청하면 돕는 사람이나 도움 받는 사람이나 모두 같이 망할 때가 많습니다(2-5절). 어떤 사람은 상담을 참 좋아합니다. 때로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도 상담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상담은 자기를 잘 알고 더 나아가 자기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 받는 것이 좋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사람을 찾기보다 하나님을 찾아 상담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지혜는 물욕과 권력욕이 내포된 꾀가 될 때가 많습니다. 사람의 상담에 큰 기대를 걸지 마십시오.
셋째, 우상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고 우상을 버리고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6-7절). 어떤 사람은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는 십계명을 내세워 “각종 인형도 다 버리라.”고 주장합니다. 그런 행동이 오히려 무속적인 관념이 투영된 행동입니다. 그 십계명은 귀여운 인형도 일종의 형상이니까 절대 만들지 말라는 계명이 아니라 우상숭배의 대상으로서 어떤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다급해도 점, 무속신앙, 헛된 기적 신앙 등에 빠지지 말고 그때 말씀과 기도를 더욱 찾으십시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십시오. 힘들 때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사람을 찾아다니면 오히려 낙심과 절망만 커집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하나님 외에는 길도 없고 방법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저를 도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소서.” 가끔 기도를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별로 응답이 없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때 포기하지 마십시오. 세월은 피부를 주름지게 하지만 포기는 영혼을 주름지게 합니다. 기도를 포기하지 않으면 결국 믿음대로 되고 생각대로 되도 비전대로 됩니다. 사람에게 부탁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로 부탁하십시오.
< 하나님께 기도로 부탁하십시오 >
며칠 전에 <월새기(월간새벽기도)>로 큰 은혜를 받은 한 장로님이 찾아왔습니다. 월새기를 보고 “이렇게 예쁘고 좋고 내공이 대단한 책이 있나? 이 책을 어떻게 1000원만 받나?” 하고 감동되어 <월새기>를 많이 보급하고도 싶고 <월새기 영어판> 발행에 도움도 되고 싶어서 찾아온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이 알고 있는 유력한 인맥들과 잘 연결되면 <월새기>를 더 널리 전파할 수 있는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시종일관 피력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제가 최대한 겸손하게 말했습니다. “장로님! 유력한 사람을 연결시켜주시지 않는 것이 저는 좋습니다. 마음이 썩 내키지 않습니다. <월새기> 사역은 은혜 받은 사람들의 자발적인 헌신으로 지속되길 원합니다. 남의 인맥을 활용하기보다는 그저 장로님이 기도만 해주십시오. 중간에서 연결시켜주시려는 마음은 고맙지만 장로님처럼 책을 통해 감동한 분이 스스로 헌신하는 것을 원하지 누군가를 연결시켜주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그때 큰 것을 주고 싶으신 장로님의 마음을 약간 가라앉힐 필요성이 있어서 웃으며 말했습니다. “장로님! 대단한 분을 연결시켜주기보다 장로님이 먼저 직접 후원에 동참해주세요.” 그 장로님께 얼마 후원 요청을 했을까요? 제가 말했습니다. “1만원이라도요. 은혜 받은 분들의 조용한 헌신으로 소리 없이 순수하게 문서선교가 지속되기를 원하기에 ‘유력한 인맥의 연결’보다 ‘장로님의 1만원’이 더 기뻐요. 재정이 부족해 <월새기 영어판> 사역이 조금 늦어진다면 그것도 괜찮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니까요.”
제 말의 숨은 의도를 지혜로운 장로님이 잘 파악하셨을 줄 믿습니다. 은혜 받아서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것도 좋고 남에게 순수하게 후원을 도전하는 것도 좋지만 유력한 사람을 찾아 억지로 연결시키려고 하지는 말라는 의도였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들이 그 받은 은혜를 따라 헌신해서 사역이 지탱되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유력한 남의 인맥을 통해 혹은 이용해 사역을 빨리 키우면 그만큼 빨리 후퇴할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 좋은 제안을 할 때 덥석 물지 마십시오. 소리 없는 직접적인 헌신은 기쁘게 받아도 찬란한 인맥을 통한 찬란한 제안은 거절하십시오. 남을 엮어서 내놓은 찬란한 제안보다 자신의 순수한 헌신이 더 아름답습니다. 늘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남의 인맥을 이용해서 빨리 가거나 빨리 높아지려고 하지 않게 하소서.” 그렇게 기도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정말 늦추거나 낮추기만 하실까요? 아닙니다. 나중에 보면 오히려 더 빨리 가게 하시고 더 존경받는 위치로 올려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청탁을 결코 외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로 청탁하되 사람에게는 청탁하지 마십시오. 자녀를 위해서도 청탁하지 마십시오. 자녀를 위한 청탁이 자녀를 오히려 망칩니다. 정정당당히 승부하게 하십시오. 사람에게 청탁하면 청탁한 사람이나 청탁받은 사람이나 다 추락할 가능성이 많지만 하나님께 청탁하면 아무런 추락도 없이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아름다운 성취가 이뤄질 것입니다. 기도가 있는 곳에 기적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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