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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태도 (이사야 25장 1-8절)

by 【고동엽】 2022. 12. 30.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태도 (이사야 25장 1-8절) 1. 고난을 긍정하는 태도

 진실하게 살아도 빈궁해질 수 있고 환난을 당할 수 있다. 진리의 길은 쉽지 않기에 진리를 추구했던 많은 사람들이 고독했고 고난을 받았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진리를 따른다면서 고독과 고난을 지나치게 회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늘 복만 추구하면 신앙의 본질을 망각하기 쉽다. 사람은 가끔 땅에서 밟혀 보아야 진실을 깨우친다. 낙관은 사실을 위장하게 만들 때가 많지만 애통은 사실을 깨닫는 지혜를 준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도구화하는 신앙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런 신앙을 솎아내려고 때로는 고난도 허락하신다. 거짓의 다리는 짧지만 진실의 다리는 길다. 진실해야 멀리 갈 수 있고 열매도 많이 얻을 수 있다. 사실상 고난도 열매다. 진실하지 않았다면 고난 대신에 부귀영화를 누렸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진실했기에 고난이 왔다면 그 고난도 진실이 거둔 열매다. 무조건 고난을 피하려고만 하지 말라.

2. 자랑을 주의하는 태도

 하나님은 불의한 사람의 환호를 그치게 하시고 포악한 자의 노래를 낮추신다(5절). 세상 영광과 자랑은 곧 사라진다는 암시가 담긴 말씀이다. 영광을 받을수록 더욱 자랑을 주의하고 자신을 감추라. 복 받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그 복은 자랑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 참된 성도는 찬양의 대상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와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예수님임을 잊지 않기에 늘 겸손하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짜 아는 것이다.”라는 옛말이 있다.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하지 말고 몰라야 할 것을 너무 알려고 하지도 말라. 지나친 호기심은 미혹으로 빠져드는 호랑이굴이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고 몰라야 할 것을 모른 채 놔두는 것이 진짜 유식한 것이다.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은 고통스런 일이지만 그런 인정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지혜를 구하면서 더욱 은혜롭고 지혜롭게 된다.

3. 위선을 경계하는 태도

 본문 6절은 심판 후에 하나님께서 친히 기름진 것(쉐마님)과 포도주(쉐마림)로 잔치를 베푸시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진실은 순수하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사는 모습 속에 자리할 때가 많다. 수도사적인 엄숙함을 통해 성결함을 증명하려는 태도는 위선을 낳기 쉽다. 선의 가면을 쓰고 성결하게 사는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려고 애쓰지 말라. 성결한 삶이란 애써서 취득한 외적인 삶이 표현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모신 내적인 삶이 저절로 표현된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가? 복음이 고도로 발달된 상업화의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과부와 가난한 자의 십일조가 부흥사의 호사생활에 쓰일 때도 많다. 어떤 이단 종교인은 욕심이 많아서 동전 한 닢을 빌어 예화 설교를 하셨던 예수님의 이름으로 헌금을 강요하기도 한다. 헌신생활은 탐욕을 극복하는 표식으로서 매우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상황을 잘 분별해서 자발적으로 지혜롭게 힘써 헌신하라.

4. 언행이 일치하는 태도

 마지막 심판 후에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와 소통이 이뤄질 것이다(7절). 그때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땅에 넘치고 언행의 불일치도 없어진다. ‘말’만 바치고 ‘행동’을 바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소통은 곧 막힌다. 한국 교회 초기에 한 외국인 선교사가 말했다. “한국 교인들은 집단적으로 거짓말을 잘합니다. 그들은 찬송할 때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라고 찬송하고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드립니다.’라고 찬송하면서 말로만 가고 말로만 드립니다.” 주님을 위해 생명을 바치겠다고 호언하기 전에 작은 일 하나도 충실히 이행하려고 하라.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믿음은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힌두교도였던 마하트마 간디에게 누군가 물었다. “선생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간디가 대답했다. “예수님이 하신 산상수훈 말씀대로 사세요.” 기독교인이 힌두교 선생보다 예수님의 길을 더 추구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말과 행동이 일치하게 하라. 말만 있고 실천이 없는 삶은 부끄러운 삶이다. 성도는 ‘예수님의 광고지’이면서 ‘예수님의 광고자’이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성도답게 살아야 예수님의 이름이 아름답게 전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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