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 그리스도인 (요한일서 2장 1-6절) < 성숙한 그리스도인 >
필자는 1993년부터 1997년까지 5년간 여러 신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그 중의 한 신학교는 강남 교대역 근처의 5층 건물에 있었다. 그 건물 3층 절반과 아랫부분은 다단계 회사가 썼고 3층 절반과 윗부분은 신학교에서 썼다. 그때 신학생이 많을 때는 600명까지 있었는데 신학생보다 훨씬 많은 청년들이 정장을 한 채 그 건물에서 다단계 세미나를 들었다. 화장실에서는 수시로 싸우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네가 이럴 수 있니? 나를 이런 곳으로 데려왔니?”라고 하면 다른 누군가가 또 소리쳤다. “친구가 그것도 못해? 세미나 끝까지 듣고 가란 말이야.”
다단계에 가입하면 금방 떼돈을 벌 것 같다. 자기가 3사람만 모집해 자기 밑에 두고 그렇게 밑으로 19단계만 내려가면 전 인류가 이론적으로는 그 회사 다단계 멤버가 된다. 그러나 몇 단계 밑으로만 내려가도 더 이상 인원이 늘지 않는 임계점(critical point)이 온다. 그런 한계를 깨닫지 못하고 다단계에 가입하면 대개 인생과 젊음과 시간을 낭비한 채 얼마 후에 그만둔다. 지금은 그 다단계 광풍이 약화되면서 다단계 창시자나 도입자 주변의 탑 그룹만 그나마 돈을 벌고 나머지는 거의 소모품처럼 된 상황이다.
다단계는 “대단해. 그곳에 가면 떼돈을 번다.”는 소문을 듣고 가입하는 사람이 “별 거 없어. 그곳에 가면 오히려 돈을 떼인다.”는 실상을 알고 떠나가는 사람보다 많을 때만 돈이 벌게 되는 체계다. 그처럼 다단계는 회원이 계속 늘어야만 수입이 생기는 ‘사람 장사’에 가깝기에 가입자를 늘리려고 가족, 친구, 친지, 심지어는 교인까지 유혹해 끌어들여서 수많은 인간관계를 실망시키고 파괴시켰다.
사람을 끌어들일 때는 돈을 벌어준다는 명목으로 끌어들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돈 벌이의 대상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결국 다단계는 자기가 돈을 버는 체계가 아니라 탑 그룹에게 돈을 벌어주는 체계다. 그러다가 점점 실망해 떠나가는 사람이 희망을 품고 가입하는 사람보다 많아지는 임계점이 되면 아무리 홍보하고 발버둥치고 심지어는 납치해서 끌어들여도 더 이상 자신이 들이는 시간과 정성과 노력과 노동력 이상의 가치를 얻기 힘들다.
요새 가상화폐 광풍을 보면 당시의 다단계 광풍이 연상된다. 가상화폐를 만든 초기의 탑 그룹이 떼돈을 번 소식을 듣고 추격해 매수하면 대개 소모품이 된다. 가상화폐는 “대단해. 그것을 사면 떼돈을 벌어.”라는 소문을 들은 추격 매수자보다 “벌 거 아냐. 그것을 사면 오히려 돈을 떼여.”라는 실상을 체험한 실망 매도자보다 많은 때만 가치가 올라간다. 결국 매수자가 더 늘지 않는 임계점이 언젠가는 오고 그때는 저절로 가치가 내려간다. 그런 가상화폐 주고받는 것을 진짜 큰돈을 걸고 하니까 얼마나 위험한가?
물질을 추구할 때는 기본적으로 ‘사람 장사’보다 ‘가치 창출’을 통해 바르게 추구하려는 정직한 식성을 가지라. 다단계의 사람 장사는 누군가 가져야 할 정당한 노동력의 몫을 희생시켜 소수에게 돈을 몰아주는 것이기에 로또와 속성이 유사한 측면이 있다. 다단계는 주도 세력의 일원이 아니면 로또보다 대박 확률이 더 낮다. 사실상 거의 없다.
로또는 매주 수백만 명이 몇천 원씩 손해 보고 무작위로 당첨된 약간 명이 수백억 원을 나눠가지는 것이다. 다단계도 수만 명이 자기 몫 이하를 얻고 탑에 위치한 약간 명이 큰 몫을 차지해가는 것이다. 가상화폐도 초창기 주도 세력 약간 명이 추격 매수자들의 손해를 발판으로 떼돈을 버는 것이다. 그러나 조만간 추격 매수자보다 실망 매도자가 많아지면 그 가치는 떨어진다. 그런 부정적인 소문이 더 퍼지면 나중에는 더 가치가 떨어져 ‘고차원의 게임 머니’ 신세로 전락할 가능성도 크다.
사람 장사로 돈을 벌려고 하지 말라. 저렴한 좋은 물건이라도 구비한 다단계는 그나마 낫지만 폭리를 얹어 물건을 팔게 하는 다단계는 더 주의해야 하고 금융다단계는 가장 주의해야 한다. 가상화폐는 블록체인 기술이 가미된 금융다단계와 속성이 유사하다. 블록체인 기술의 발전은 격려하되 가상화폐로 떼돈을 벌려고 뛰어들지는 말라. 사람 장사는 인류가 무한정 있지 않고 70억밖에 없기에 반드시 손해 보는 사람이 더 많아지는 임계점이 온다.
원유를 많이 쓰면 고갈되듯이 다단계 가입자나 가상화폐 참여자가 고갈될 때는 반드시 온다. 많은 사람이 빨리 참여해 빨리 성장하면 그만큼 더 빨리 참여자가 고갈되어 곧 추격 매수자보다 실망 매도자가 많아진다. 사람 장사는 빨리 성장하면 빨리 추락한다. 요새 가상화폐는 세계적인 열풍이 불어 빨리 가치가 올랐다. 그래서 임계점도 빨리 올 것이기에 그만 놔두어도 그 광풍은 저절로 잠재워지지만 그래도 정부가 빨리 통제해야 하는 이유는 버블이 꺼지면 거액을 떼여 인생을 비관하고 정부를 원망할 사람이 너무 많아지기 때문이다.
요새 가상화폐 경고음이 커지고 있다. 추격 매수자보다 실망 매도자가 더 많아지는 임계점이 가까워진 전조다. 앞으로도 가상화폐 같은 체계의 추격 매수자가 되어 돈을 벌려고 하지 말라. 떼돈 버는 정보가 자기 귀에까지 들어올 때는 이미 돈 벌기에는 늦은 정보다. 게다가 많이 알려진 상태에서 자신이 뛰어들려고 마음먹을 때는 대개 임계점 직전이다. 투기로 큰돈을 벌 때는 돈 버는 소문이 안 났을 때다. 또한 투기가 진행 중인 상태에서 번 돈은 실제로 번 돈이 아니다.
가치 있는 유익을 창출해 돈을 벌려고 하라. 우리 교회는 다단계 청정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우를 돈 버는 수단으로 삼지 말라. 교우를 끌어들이는 다단계만큼 교회를 아프게 하지는 않아도 가상화폐나 로또도 최대한 멀리하라. 돈을 부당하게 추구하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 왜 성도들조차 세상 욕심에 휘둘리는가? 신앙의 미숙 때문이다. 구원받은 것으로 끝나지 말고 계속 자라 가라. 성공보다 성숙을 추구하라. 건강도 중요하지만 건강보다 더 추구해야 할 것이 성숙이다.
건강하지만 성숙하지 못한 경우도 많다. 6세 아이가 60세 어른보다 건강해도 성숙하지는 않다. 감격적인 구원의 역사로 중생하거나 심지어는 영적으로 건강해도 성숙하지 못할 수 있다. 신비한 은사를 많이 받았어도 성숙하지 못할 수 있다. 고린도교회는 은사가 많이 나타났던 큰 교회였지만 사도 바울은 그 교회를 육신에 속한 교회로 여겼다. 영적인 은사가 있다는 것이 성숙의 증거는 아니다.
< 성숙을 위해 필요한 것 >
성도에게 성숙이란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완전함’ 혹은 ‘온전함’이란 표현은 성숙함을 뜻한다. 목회자에게 좋은 교회와 좋은 교인과 좋은 사역이 있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가장 감사한 일은 성도가 성숙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목회의 핵심 목표도 교인을 예수님처럼 만드는 것이다. 성숙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1. 구원
예수님을 영접해야 죄 사함을 얻고 구원받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1-2절). 죄 사함을 통한 구원은 성장을 위한 기초 씨앗이다. 중생이 없다면 영적인 성장도 없다. 구원이 그처럼 중요한 것이지만 절대적인 것이나 전부는 아니다. 구원파는 구원을 거의 절대시한다. 그들이 가장 중시하는 질문은 “구원받았습니까? 구원을 확신합니까?”라는 질문이다. 구원을 확신하면 구원받은 날짜도 생일처럼 분명히 알아야 한다면서 “언제 구원받았습니까?”라고 묻는다. 그처럼 구원을 중시하지만 구원 이후의 성도다운 삶은 크게 중시하지 않는다.
구원파의 논리는 초대 교회 때 사도 요한이 가장 주의시켰던 영지주의와 속성이 유사하다. 영지주의는 영적인 지식을 통해 구원받으면 죄와 분리된다고 여겼다. 영지주의자에게는 2개 파가 있었다. 구원받으면 육신을 초월한 존재가 되어 죄를 지을 수 없는 완전인이 된다는 ‘완전파’와 구원받으면 죄가 육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초월인이 된다는 ‘초월파’다. 그들 모두 구원 이후의 성도다운 삶을 경시했기에 윤리성과 도덕성이 약했다.
한때 구원파가 ‘구원의 확신’을 내세워 스스로를 1등 신자인양 여기며 극성스럽게 전도했기에 그 영향을 받아 구원파가 아닌 교인 중에도 “기독교는 도덕이나 윤리가 아니다. 구원에 대한 강조가 없는 설교는 윤리적인 설교다.”라고 말하며 마치 기독교가 도덕, 윤리, 상식을 경시해도 되는 줄 아는 경우가 꽤 많다. 구원이 전부인 것처럼 기독교를 잘못 알면 구원파가 나오고 사회적인 책임성과 윤리성과 도덕성도 떨어지면서 성숙한 성도의 모습을 상실한다. 구원도 중요하지만 구원 이후의 삶도 중시해야 더욱 성숙해질 수 있다.
2. 순종
본문 3-6절은 말씀을 지키는 삶의 중요성을 반복해 강조한다. 말씀을 읽고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까지 있어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바른 지식은 바른 삶을 수반한다. 아무리 입술로 “오직 예수야!”라고 말하고 천사처럼 찬양해도 성숙한 행위가 없다면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행동하고 순종하는 믿음이 중요하다. 미국의 열정적인 찬양과 경배 모임을 보면 많은 은사들이 나타나지만 문제는 집회 후에 성도다운 삶으로 잘 연결되지 않는 것이다.
불신자들은 성도의 찬양하는 모습보다 사는 모습을 보고 감동하고 존중한다. 삶이 따르지 않고 빛이 드러나지 않으면 선한 영향력도 없다. 초대 교회에는 찬양과 경배와 치유도 있었지만 자기 소유를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고 나눔으로 행동하는 사랑도 넘쳤다. 그런 나눔과 교제로 백성들의 칭송을 받아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이 더해졌다. 영성과 더불어 책임적이고 실제적인 삶의 능력이 있어야 한다.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너무 염려하지 말라. 할 수 있는 좋은 일을 발견해서 그 일을 하면 얼마든지 복된 삶을 살 수 있다.
말씀에 순종하려고 힘쓰라. 사람은 ‘기발한 방법’을 찾지만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을 찾는다. 순종이 가장 중요한 가치 중의 하나다. 고난과 문제도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있게 하셨다고 믿으라.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죽도록 일해도 성공은 자신을 쉽게 기다려주지 않는다. 밤새 수고하는 삶보다 말씀에 의지하는 삶이 먼저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따라 십자가를 지고 죽을 각오를 하면 사는 길과 복된 길과 성숙의 길이 펼쳐질 것이다.
3. 시간
성숙함이란 평생 과정이다. 가시덤불은 40일이면 무성하게 자라지만 참나무는 40년이 되어야 무성하게 자란다. 성숙은 단시일에 이뤄지지 않는다. 응답에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아도 초조해하지 말라. 많은 시간은 많은 인생 경험도 준다. 믿음 생활을 오래 했던 경험도 무시하지 못한다. 오랜 믿음생활을 통해 다양한 체험을 하면서 분별력도 커진다. 쓴 맛의 경험도 중요하다. 그 경험을 통해 사람의 의도와 동기를 파악하는 능력도 커진다. 그런 분별력은 성숙한 성도가 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다.
어떤 교인은 자기 담임목사를 매우 존경한다. 그때 이단이 신령한 척 말한다. “성도님! 사람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세요.” 말 자체는 신령한 말 같지만 사실상 그 말을 하는 사람의 평소 언행과 의도도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말이 자신의 영성을 드러내려고 하는 말일 때도 많고 교회생활을 잘하는 교인을 그 교회에서 혹은 담임목사에게서 마음을 멀어지게 하려는 말일 때도 많기 때문이다. 이단들은 겉으로는 신령한 말을 하는 척 하면서 사람의 마음을 기존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할 때가 많다.
분별력은 오랜 신앙생활을 통해 이단의 미혹으로부터 쓴 맛도 경험해본 사람에게 생긴다. 영적인 능력보다 영적인 노련함과 분별력이 더 중요할 때가 많다. 일을 빨리 이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할 때 사고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왜 자동차 보험사들이 청년에게 더 보험료를 많이 내게 하는가? 힘과 스피드와 반응성은 청년이 좋지만 노련함이 부족해서 더 자동차 사고가 많이 나기 때문이다. 노망, 노회, 노파심 등은 좋지 않은 단어지만 노련은 좋은 단어다. 성도는 더욱 성숙해짐으로 영적인 노련미를 갖춰야 한다.
< 성숙을 위한 실천 원리 >
성숙한 삶을 위해 필요한 구체적인 실천 원리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 중에 간단히 3가지만 생각해보자. 첫째, 시야를 키우라. 작은 것을 무시하지 말라. 작은 것도 살피는 근시안을 가지라. 한꺼번에 크게 호강시켜주겠다고 하지 말고 작은 선물부터 주라. 반대로 문제는 작게 보라. 문제에 집착하지 말고 멀리 보는 원시안을 가지라. 남의 일거수일투족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비판자나 감시자처럼 행동하지 말라. 사람을 자기 맘과 뜻대로 재단하거나 조정하거나 소유하려고 하지 말라. 사람은 소유의 대상이 아닌 사랑의 대상이다.
둘째, 범사에 감사하라. 작은 일에도 감사하고 큰일에도 감사하라. 큰 문제가 있어도 더 큰 문제가 없는 것으로 인해 감사하라. 감사하는 마음으로 작은 일도 잘 챙겨주고 남을 인정해주라.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자기 생각과 감정 안에 가두어 놓으면 더 반대로 나가기 쉽다. 개인의 형편과 개성을 인정해주라. 개성을 죽이는 것은 행복을 죽이는 것이다. 인정받으려는 욕망도 개성으로 표출된다. 남의 부족한 모습에도 감사하라. 사람에 대해 너무 기대하지 말라. 사람에 대한 기대가 클수록 상처가 커질 수 있다.
셋째, 드나베의 삶을 실천하라. 드나베의 삶이란 위로는 드리고 옆으로는 나누고 아래로는 베푸는 삶을 뜻한다. 받으려고 안달하면 이상하게 더 받지 못하는 상황으로 흐르고 드리려고 애쓰면 신기하게 더 받는 상황이 펼쳐진다. 인간적인 계산으로는 <월새기(월간새벽기도)> 사역의 지속이 불가능할 것 같다. 수익도 없는 발행권수가 계속 늘어나고 기증권수까지 계속 늘어나는 상황에서도 <월새기> 사역이 늠름하게 지속되는 것을 보라. 그것이 ‘나의 드림’을 통해 ‘너의 드림’을 도전함으로 결국 다수가 더 많은 것을 받는 진리를 소리 없이 증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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