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길을 막히지 않고 영혼을 깨운다(사도행전 14:1–7)
복음은 언제나 문을 두드리며 들어오지만, 그 문이 열리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마음은 그 문이 닫혀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복음이 다가오는 순간 오래된 빗장을 스스로 풀어버리고, 어떤 마음은 이미 문 앞에 서 계신 하나님을 보면서도 문손잡이를 꼭 붙든 채 끝내 열지 않으려 한다. 이코니온이라는 도시는 그런 마음들이 뒤섞여 있던 자리였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그곳에 들어갔고, 그들의 발걸음은 조용했으나 말씀이 닿는 곳마다 마음의 깊은 곳에서 소리가 났다. 복음은 소란을 만들기 위해 오지 않았지만, 영혼이 깨어나는 순간 언제나 세상의 평온은 흔들리기 마련이다.
그들은 늘 하던 대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갔다. 특별한 전략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눈에 띄는 장치를 준비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입을 열었고, 그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사람의 말이 아니었다. 그 말은 오래전부터 예언자들의 입술을 지나 흘러온 말이었고, 십자가 위에서 피와 함께 완성된 말이었으며, 이제는 성령의 숨결을 타고 사람들의 귀를 지나 심장으로 내려가는 말이었다. 그 결과 유대인과 헬라인의 큰 무리가 믿었다. ‘큰 무리’라는 표현은 단순한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복음이 민족과 문화의 경계를 넘어 생명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복음은 언제나 경계를 넘는다. 언어의 경계, 종교의 경계, 선입견의 경계를 넘어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닿는다.
그러나 믿음이 생겨나는 곳에는 언제나 반대도 함께 일어난다. 믿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단지 듣지 않은 것이 아니라, 듣고도 거부한 사람들이었다. 그 거부는 조용한 무시가 아니라 적극적인 방해로 이어졌다.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또 다른 얼굴을 본다. 복음은 중립을 허락하지 않는다. 복음을 들은 사람은 믿든지, 아니면 그 믿음을 방해하려는 자가 된다. 침묵 속의 중립은 오래가지 못한다. 마음속에서 복음이 자리를 잡지 못하면, 그 빈자리는 결국 반감과 적대가 채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오래 머물렀다. 위험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었고, 상황을 읽지 못하는 순진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반대가 커지고 있었고, 분위기는 점점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떠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의지한 것은 사람들의 호의가 아니라 주님이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들이 담대히 주를 의지하여 말하였다고 말한다. 담대함은 성격이 아니라 신뢰에서 나온다. 자신을 의지하면 두려움이 생기지만, 주를 의지하면 담대함이 생긴다. 그 담대함은 고함을 지르는 용기가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다.
주님은 그들의 말을 증언하셨다.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셨다는 이 표현은 복음의 본질을 정확히 보여준다. 복음은 율법의 무게가 아니라 은혜의 숨결이다. 주님은 표적과 기사를 통해 그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보이셨다. 그러나 표적과 기사는 복음의 목적이 아니라 복음의 증언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기 위한 불꽃놀이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말씀에 신적 확증을 더하는 손길이었다. 은혜는 언제나 말로 시작되고, 삶으로 확인된다.
도시는 나뉘었다. 어떤 이들은 유대인을 따르고, 어떤 이들은 사도들을 따랐다. 복음은 사람을 하나로 묶기도 하지만, 동시에 분리하기도 한다. 이 분리는 미움의 분리가 아니라 선택의 분리다. 빛이 들어오면 어둠은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 그래서 어둠은 빛을 미워한다. 사도들을 따르는 이들은 완벽해서가 아니라 은혜에 붙들렸기 때문에 그 길을 선택했다. 반대하는 이들은 지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마음이 굳어 있었기 때문에 그 길을 선택했다.
결국 폭력이 계획된다. 이방인과 유대인과 관리들이 함께 모여 사도들을 능욕하고 돌로 치려고 했다. 복음 앞에서 이전에는 하나가 될 수 없었던 이들이 하나가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진리를 거부하는 데서 연합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것이 복음의 실패는 아니다. 오히려 복음이 얼마나 깊이 들어갔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표면만 긁는 말은 돌을 들게 만들지 않는다. 영혼의 기초를 흔드는 말만이 사람들로 하여금 극단적인 반응을 일으키게 한다.
사도들은 그 계획을 알고 도망하였다. 이것은 믿음의 후퇴가 아니라 지혜의 선택이었다. 복음은 순교를 미화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생명을 귀히 여기신다. 그들은 루가오니아의 두 성읍, 루스드라와 더베로 가서 거기서도 복음을 전했다. 장소는 바뀌었지만 사명은 바뀌지 않았다. 사람들은 떠났지만 말씀은 떠나지 않았다. 박해는 길을 막지 못했고, 오히려 복음의 지경을 넓혔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리듬을 본다. 들어감, 반대, 인내, 증언, 분열, 박해, 그리고 확장. 이 리듬은 초대교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 여정에도 동일하게 반복된다. 믿음은 항상 환영 속에서만 자라지 않는다. 오히려 긴장 속에서 깊어진다. 반대는 믿음의 부재가 아니라, 믿음이 실제로 살아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한 마을에 작은 등대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밤마다 그 등대는 불을 밝혔다. 배들이 안전하게 항구로 들어오도록 돕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불빛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불빛 때문에 잠을 설친다는 이유였다. 그들은 불을 끄자고 했다. 등대지기는 말했다. “이 불은 잠을 깨우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있습니다.” 결국 불은 꺼지지 않았다. 어느 폭풍의 밤, 그 불빛 덕분에 많은 배가 살아났다. 복음도 그렇다. 어떤 이들의 불편함보다 더 많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꺼지지 않는 빛이다.
사랑하는 성도여, 사도행전 14장의 이 짧은 본문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복음 앞에서 어떤 사람이었는가. 마음을 열고 믿는 사람이었는가, 아니면 다른 이들의 마음을 흔들어 복음을 멀어지게 하는 사람이었는가. 그리고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떠나야 할 때를 알고 떠날 줄 아는 지혜를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머물러야 할 때를 알아 주를 의지하며 담대히 서 있는가.
복음은 사람을 붙잡아 두지 않는다. 복음은 사람을 보내고, 흩어지게 하고, 다시 전하게 만든다. 그래서 복음은 길 위에 있다. 이코니온에서 시작된 길은 루스드라로, 더베로로, 그리고 땅끝을 향해 이어진다. 그리고 그 길 위에 오늘 우리의 발걸음이 놓여 있다. 복음은 여전히 길을 막히지 않고, 오늘도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영혼을 깨우고 있다.
복음은 한 자리에 머무르지 않는다. 복음은 언제나 움직이며, 사람을 통해 흘러가고, 막히면 돌아가고, 거부당하면 다른 문을 찾는다. 이코니온에서 일어난 일은 복음의 한 장면이 아니라, 복음의 성품 자체였다. 복음은 환영받을 때에도 진리였고, 박해받을 때에도 여전히 진리였다. 사람들의 반응이 복음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복음이 사람들의 내면을 드러내었다.
사도들이 담대히 머물렀다는 말 속에는 깊은 긴장이 숨어 있다. 그 담대함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온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언제 돌이 날아올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태어난 담대함이었다. 믿음은 언제나 위험을 완전히 제거한 후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주를 신뢰하는 선택이다. 그래서 믿음은 계산이 아니라 헌신이며, 보장이 아니라 의탁이다.
주님이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셨다는 이 장면은 우리 신앙의 중심을 다시 세운다. 복음은 사람의 설득력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아무리 논리가 정교해도, 아무리 언변이 뛰어나도, 주님이 함께 증언하지 않으시면 그 말씀은 지식으로 머물 뿐 생명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이 증언하시는 말씀은 투박해 보여도, 설명이 부족해 보여도, 듣는 자의 심령 깊은 곳에서 생명을 일으킨다. 표적과 기사는 그 생명의 흔적이지, 그 생명의 근원이 아니다.
도시가 나뉘었다는 표현은 오늘의 교회를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종종 교회의 분열을 실패로만 이해한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우리에게 더 깊은 질문을 던진다. 모든 나뉨이 실패인가. 진리를 따라 나뉘는 것은 때로 불가피한 선택이다.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 없는 것처럼, 복음과 복음의 왜곡도 한 자리에 오래 머물 수 없다. 문제는 나뉘는 것 자체가 아니라, 무엇 때문에 나뉘는가이다.
폭력을 계획하는 자들의 연합은 인간의 연약함을 보여준다. 진리를 거부하는 데서 사람들은 놀라운 결속력을 보인다. 왜냐하면 진리는 각 사람을 하나님 앞에 홀로 서게 만들지만, 거부는 서로의 어깨 뒤에 숨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연합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것은 두려움 위에 세워진 연합이기 때문이다. 반면 복음 안에서의 연합은 약해 보일지라도 은혜 위에 세워진 연합이기에 무너지지 않는다.
사도들이 도망한 장면에서 우리는 복음의 겸손을 본다. 그들은 자신의 사명을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히 여겼지만, 그렇다고 생명을 가볍게 여기지는 않았다. 살아야 전할 수 있고, 남아야 다음 도시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 신앙은 버티는 것이고, 때로 신앙은 물러서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물러서는 방향이다. 그들은 뒤로 물러섰지만, 복음에서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루스드라와 더베로에서도 복음은 계속 전파되었다. 이 문장은 담담하지만, 그 안에는 끊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흐른다. 장소가 바뀌어도 하나님은 바뀌지 않으셨고, 청중이 달라져도 은혜는 동일했다. 사람들은 사도들을 몰아냈지만, 말씀을 몰아내지는 못했다. 복음은 그렇게 역사의 틈을 따라 스며들었다.
오늘 우리 역시 다양한 이코니온을 지나고 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 안에서, 때로는 신앙의 언어가 환영받지 못하는 순간을 경험한다. 그때 우리는 쉽게 침묵을 선택한다. 침묵이 평화를 지켜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말한다. 참된 평화는 침묵에서 오지 않고, 은혜의 말씀 위에 설 때 온다고.
복음은 언제나 선택을 요구한다. 믿고 따를 것인가, 아니면 반대하고 밀어낼 것인가. 중간 지대는 오래 유지되지 않는다. 그래서 복음은 불편하다. 그러나 그 불편함은 영혼을 살리는 통증이다. 마치 굳은 살을 도려낼 때의 아픔처럼, 복음은 우리 안의 굳어버린 부분을 만진다. 그리고 그 자리에 새 살이 돋게 한다.
사도들이 다른 도시로 갔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복음이 거부당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계획이 막힌 것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 거부를 사용하여 복음의 지도를 넓히셨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실패처럼 보이는 장면 속에서도, 하나님은 다음 장을 이미 쓰고 계신다.
그러므로 복음의 길 위에 선 성도는 결과에 매이지 않는다. 순종은 우리의 몫이고, 열매는 하나님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코니온에서 맺히지 않은 열매가 루스드라에서 열릴 수도 있고, 우리가 뿌린 씨앗이 다른 사람의 손에서 추수될 수도 있다. 복음은 그렇게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로 남는다.
이 복음의 흐름 앞에서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복음을 평가하는 사람인가. 우리는 복음이 편안할 때만 곁에 두고, 불편해지면 거리를 두는가. 아니면 상황이 어떠하든 주를 의지하며 담대히 말하는 사람인가. 사도행전 14장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지만, 분명히 깨운다. 복음은 선택받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선택해야 할 모든 사람의 이야기라고.
복음은 끝내 말로만 남지 않는다. 복음은 언제나 삶의 자리에서 몸을 얻는다. 이코니온에서 시작된 긴장은 단지 한 도시의 소란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세상의 질서와 맞부딪힐 때 생기는 필연적인 떨림이었다. 복음이 들어오면 사람의 내면에 숨어 있던 것들이 드러난다. 믿음은 믿음을 부르고, 거부는 거부를 낳는다. 그 드러남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이자 은혜다. 왜냐하면 숨겨진 채로 죽어가던 영혼이, 비록 반대의 방식일지라도 반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도들이 다른 도시로 이동하면서도 복음을 전했다는 짧은 문장은, 사실 복음 사역의 가장 중요한 태도를 보여준다. 그들은 결과에 집착하지 않았다. 성공과 실패의 기준으로 사역을 재단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들에게 맡겨진 오늘의 순종만을 붙들었다. 하나님은 내일의 열매를 이미 알고 계시지만, 인간은 오늘의 순종만을 감당하도록 부름받는다. 그래서 사도들의 발걸음에는 조급함이 없고, 패배감도 없다. 그들의 발걸음은 쫓기는 발걸음이 아니라, 보내심을 받은 발걸음이었다.
복음은 언제나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 믿는 자에게는 죄와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를 주고, 전하는 자에게는 결과로부터의 자유를 준다. 그래서 복음의 일꾼은 흔들리면서도 무너지지 않는다. 상황은 계속 변하지만, 부르심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코니온의 문이 닫히자 루스드라의 문이 열렸고, 루스드라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땅이 이어졌다. 복음은 하나의 문이 닫히면 복도의 끝에 또 다른 문을 준비해 두신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 묻는다. “왜 여기서 안 됩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질문을 던지신다. “다음으로 갈 준비가 되었느냐?” 믿음은 머무는 힘이기도 하지만, 떠나는 힘이기도 하다. 붙들어야 할 것을 붙들고, 내려놓아야 할 것을 내려놓을 줄 아는 분별이 믿음이다. 사도들은 사람들의 인정은 내려놓았지만, 말씀은 내려놓지 않았다. 안전한 자리는 떠났지만, 사명에서는 떠나지 않았다.
이 본문은 교회에게도 깊은 메시지를 던진다. 교회는 언제나 환영받는 곳이기를 원한다. 그러나 복음이 살아 있는 교회는 때로 불편한 존재가 된다. 진리는 위로이기 전에 먼저 빛이고, 빛은 어둠을 드러낸다. 그래서 살아 있는 교회는 언제나 질문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 질문과 반대 속에서도 교회는 주를 의지하여 은혜의 말씀을 말해야 한다. 침묵으로 얻은 평화는 오래가지 않지만, 진리 위에 선 긴장은 결국 생명으로 열매 맺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4장의 이 장면은 우리 각자의 삶으로 내려온다. 어떤 이는 가정에서 복음의 긴장을 경험한다. 어떤 이는 직장에서, 어떤 이는 오래 다닌 교회 안에서조차 이코니온을 만난다. 그때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복음을 약화시켜 관계를 지킬 것인가, 아니면 관계를 하나님께 맡기고 은혜의 말씀을 지킬 것인가. 이 선택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선택의 무게를 우리 혼자 지게 하지 않으신다. 주께서 친히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기 때문이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언제나 상처도 함께 남는다. 사도들의 마음에도 아픔이 없었을 리 없다. 믿지 않는 이들의 완고함, 돌을 들려는 손들, 떠나야만 했던 익숙한 자리들. 그러나 그 모든 상처 위에 하나님의 손길이 덮였다. 그 손길은 상처를 지우는 방식이 아니라, 상처를 통해 더 넓은 길을 여는 방식으로 역사하셨다. 그래서 복음의 길은 눈물로 젖어 있지만, 동시에 소망으로 빛난다.
결국 복음은 멈추지 않는다. 사람이 막아도, 도시가 거부해도, 계획된 폭력이 기다리고 있어도 복음은 계속 전해진다. 왜냐하면 복음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그 길 위를 걷는 순례자일 뿐이다. 오늘은 이코니온이고, 내일은 루스드라이며, 또 다른 날에는 우리가 이름도 모르는 땅일 수 있다. 그러나 어디에서든 복음은 동일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십자가의 사랑, 부활의 생명.
사랑하는 성도여, 사도행전 14장 1절에서 7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복음을 전하는 길에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거부당했다고 낙심하지 말라고. 떠나야 할 때를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하나님은 언제나 다음 장을 준비하고 계시며, 그 장에도 동일한 은혜를 이미 써 두셨다고.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서, 주를 의지하여 은혜의 말씀을 말하라.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순종은 오늘 감당하라. 복음은 그렇게, 오늘도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세상을 지나 영혼을 살리고 있다.
1. 설교 요약
사도행전 14장 1–7절은 복음이 전파될 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두 가지 반응, 곧 믿음과 거부를 동시에 보여준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코니온에서 은혜의 말씀을 담대히 전했고, 많은 이들이 믿었으나 동시에 완고한 반대도 일어났다. 주님은 표적과 기사로 말씀을 증언하셨고, 도시는 나뉘었다. 결국 박해의 위협 속에서 사도들은 다른 도시로 이동했으나, 복음은 멈추지 않고 새로운 지역으로 확장되었다. 이 본문은 복음이 사람의 반응에 의해 규정되지 않으며, 박해조차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복음 확장의 통로가 됨을 증언한다.
2. 묵상 포인트
- 나는 복음을 들을 때 마음을 여는 사람인가, 아니면 마음을 굳게 닫고 있는 사람인가
- 복음이 불편해질 때 나는 침묵으로 피하는가, 주를 의지하여 담대히 서는가
- 하나님이 “머물라” 하실 때와 “떠나라” 하실 때를 분별하고 있는가
- 결과에 집착하기보다 오늘의 순종을 선택하고 있는가
3. 본문 강해
이코니온에서의 사역은 바울의 선교 전략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상적인 복음 방식이 반복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회당에서의 말씀 선포는 구약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증언하는 자리였고, 유대인과 헬라인이 함께 믿었다는 사실은 복음의 보편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동일한 말씀은 사람들의 마음을 갈라놓았고, 불신은 곧 적극적인 적대와 선동으로 발전했다. 그럼에도 사도들은 주를 의지하여 오래 머물며 말씀을 전했고, 하나님은 초자연적 표징으로 그 말씀의 진실성을 확증하셨다. 박해의 위협 속에서 사도들이 도망한 것은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복음의 지경을 넓히는 전환점이었다.
4. 주석적 정리
- “말씀을 전하매”(1절):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선포하는 케리그마
- “믿지 아니하는 유대인들”(2절): 무지보다 완고함이 문제였음을 암시
- “담대히 말하되”(3절): 파레시아(parrēsia), 성령이 주시는 자유롭고 두려움 없는 발화
- “주께서 증언하시니”(3절): 복음의 참됨은 하나님의 행위로 확증됨
- “도망하여”(6절): 박해를 무릅쓴 무모함보다 사명 중심의 지혜
5. 원어 주석 (핵심어 중심)
- παρρησία (파레시아, 담대함)
두려움이 없는 상태라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숨김없는 자유 - χάρις (카리스, 은혜)
자격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일방적 호의 - σημεῖα καὶ τέρατα (세메이아 카이 테라타, 표적과 기사)
메시지를 대체하지 않고, 메시지를 가리키는 표지
6. 금언(金言)
- 복음은 환영받을 때보다 거부당할 때 더 분명해진다
- 하나님의 일은 막히지 않지만, 일꾼의 길은 바뀔 수 있다
- 순종은 오늘의 몫이고, 열매는 하나님의 몫이다
7. 신학적 정리
구원론적 관점
복음은 전적으로 은혜에 근거하며, 믿음은 인간의 결단이지만 성령의 역사 없이는 불가능하다.
교회론적 관점
교회는 항상 환영받는 공동체가 아니라, 진리로 인해 세상과 긴장 관계에 놓인 공동체다.
선교신학적 관점
박해는 선교의 장애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선교 확장의 도구가 된다.
8. 주제별 정리
- 담대함: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서 나온다
- 분열: 진리 앞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선택의 결과
- 이동과 확장: 하나님의 선교는 고정된 장소보다 살아 있는 순종을 따른다
9. 목회적 정리
- 성도는 복음 때문에 겪는 갈등을 실패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 교회는 결과 중심이 아니라 충성 중심의 사역을 회복해야 한다
- 목회자는 머물 때와 떠날 때를 분별하는 영적 민감성을 길러야 한다
10. 성도들의 결단과 적용
- 복음이 불편해지는 순간에도 침묵 대신 기도로 반응하겠습니다
- 결과보다 순종을 선택하는 믿음의 태도를 배우겠습니다
- 하나님이 여시는 다음 자리로 나아갈 준비를 하겠습니다
- 어디에 있든 은혜의 말씀을 부끄러워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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