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전도자가 되십시오 (빌립보서 1장 15-18절) < 부를 잘 써야 행복해집니다 >
오하이오 라이마(Lima)에는 번듯한 자체 예배당을 가진 기독교 선교연맹(C&MA) 소속 한인 교회가 있습니다. 한인도 별로 없는 곳에 그런 멋진 자체 예배당 교회가 있게 된 것은 근처에 사는 미국인 할아버지가 건축비를 후원했기 때문입니다. 그 할아버지는 C&MA 선교사 카우만이 일본에 설립한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 Society, OMS)’를 1950년대부터 후원해왔던 할아버지로서 미국 최대의 선교 기업으로 유명한 유에스 플라스틱(US Plastic)의 회장이었던 스탠리 탬(Stanley Tam)입니다.
스탠리는 1936년 21세 때 첫 사업으로 은 재활용 사업을 했다가 곧 실패했습니다. 사업 실패로 낙담한 채 라이마의 집으로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 말씀했습니다. “스탠리, 네 인생이 파산한 것은 아니다. 자본이 없다고 너무 실망하지 마라. 진짜 자본은 나를 믿는 믿음이다. 네 기업을 내게 넘겨 내가 너를 위해 경영하게 해보겠니?” 그가 대답했습니다. “예, 제 기업을 넘겨 드립니다. 사업에 성공하면 하나님의 일에 힘써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습니다.”
당시 그에게는 25달러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12불을 빌려 37불로 하나님을 파트너로 삼고 다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 후 3년 동안 30개 주를 다니며 땀을 흘려서 회사가 조금씩 커졌습니다. 1940년에 그는 하나님을 기업의 선임 파트너(senior partner)로 삼고 세계선교를 위해 세운 스태니타 재단(Stanita Foundation)에 회사 주식의 51%를 기부한 후 거기서 나온 수익금으로 세계선교를 후원했습니다.
1955년, 남미 콜롬비아의 한 작은 교회에서 초청연사로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이 또 말씀했습니다. “스탠리, 한 영혼을 위한 투자가 가장 위대하고 영원한 투자라고 믿는다면 이제부터는 내 직원이 되어주겠니?” 그가 말했습니다. “직원이요? 지금 제가 그렇게 지내잖아요.” 하나님께서 말씀했습니다. “스탠리, 지금 우리는 파트너다. 네 지분 전체를 내게 넘기기를 원한다.” 그때 결심했습니다. “하나님! 그것이 당신의 뜻이라면 순종하겠습니다.”
남미에서 귀가 중 스탠리는 자기 결심을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아내가 기쁘게 동의해서 그는 주식 100%를 다 재단에 넘겼습니다. 게다가 기업에서 하나님께서 새롭게 일하실 여지를 드려야 한다고 여기고 이전 공장보다 4배 큰 5에이커의 공장을 새로 짓고 건물 벽에 “그리스도가 해답이다.”라는 글귀를 써넣었습니다. 그는 회사 이윤의 10분의 9까지 복음 전파를 위해 사용하면서 전 세계에 수많은 교회를 세우고 세계선교를 후원했습니다. 또한 은퇴 후에도 목공 일을 통해 직접 만든 물건을 팔아서 선교했습니다. 얼마나 행복한 전도자입니까?
그의 위대한 유산은 자본금 37불로 미국 최대의 플라스틱 회사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회사를 통해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고 일으킨 것입니다. ‘부자가 되려는 것(to get rich)’과 ‘부자로 존재하는 것(to be rich)’은 다릅니다. 부자가 되려는 것은 나눔도 없이 사람 앞에서 부자가 되려는 것으로서 결국 행복을 빼앗기기 쉽지만 부자로 존재하는 것은 나눔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부자로 존재하려는 것으로서 결코 행복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석유 왕 록펠러는 미국 최대의 부자였지만 “부가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강철 왕 카네기는 “백만장자는 웃음이 거의 없다.”고 했습니다. 자동차 왕 헨리 포드는 “정비공 일을 할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했습니다. 부를 많이 가진 것이 행복을 주기보다는 부를 잘 쓰는 것이 행복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수입을 올려주신 이유는 ‘삶의 수준’을 올리라는 뜻이 아니라 ‘나눔의 수준’을 올리라는 뜻입니다.
< 고난은 진보의 씨앗입니다 >
영혼 구원에 최대 관심을 두고 그 일을 위해 성공도 하고 인물도 되고 어떤 희생도 감수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된다면 어려움을 당해도 기쁘다고 했습니다. 복음 전파는 사도 바울의 최대 기쁨의 원천이었습니다. 그 기쁨이 빌립보서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빌립보서는 ‘기쁨’이란 단어가 19번 나와서 <기쁨의 서신>으로 불립니다. 그 서신이 로마의 차가운 감옥에서 쓰인 것을 보면 사도 바울의 기쁨은 만사가 형통해서 생기는 기쁨이 아니라 극심한 시련 중에 생성된 기쁨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기쁨의 이유를 언급하면서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전이 되었다.”고 했습니다(12절). 어떻게 복음의 진전이 있었습니까? 자신이 갇힘으로 예수님의 형상이 더욱 나타나서 오히려 그를 지키는 시위대 안팎의 모든 사람을 감동시켰습니다(13절).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빌립보서 4장 22절에 있는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 문안한다.”는 말은 로마 황제의 가족 중에 몇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힌 것은 실패도 아니었고 우연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대 로마 제국을 변화시켜 세계 복음화의 초석으로 삼으시려고 그를 로마 감옥에 갇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는 세계선교를 위해 당시 세계의 서울인 로마 복음화가 필요함을 알고 로마에 가기를 원했지만 그 길이 쉽게 열리지 않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전도하다 체포되자 로마 시민권자로서 로마 황제에게 재판을 청원해 로마로 호송되어 가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위대한 부흥사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환영 속에 로마로 입성하고 싶었겠지만 초라한 죄수의 모습으로 로마로 들어갔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를 죄수의 모습으로 로마에 가게 하셨을까요? 첫째, 여비 문제를 고려하셨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천막을 짜서 팔면서 자비량 선교를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로마행 여비 마련이 쉽지 않았을 텐데 체포되어 가니까 공짜로 로마에 갈 수 있었습니다.
둘째, 안전 문제도 고려하셨을 것입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했고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잠도 자지 않고 먹지도 않겠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만약 그가 로마로 가는 머나먼 여정을 혼자 가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지만 죄수로 잡혀 가니까 호위병까지 붙어서 안전하게 갈 수 있었습니다.
셋째, 복음 전파 문제를 고려하셨을 것입니다. 로마 황제의 집에 믿는 사람들이 몇 명 생긴 것은 그가 죄수로 로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가 일반인 신분으로 로마로 왔다면 황제 주변으로 접근할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수의 신분으로 황제의 재판을 받으려고 가는 중에 하나님의 섭리로 유라굴로 광풍 사건을 만났습니다. 그 광풍으로 다 죽게 될 때 바울을 호송했던 백부장은 바울의 놀라운 능력과 영성을 목격했습니다.
그 장면을 생생하게 본 백부장이 로마에 도착해서 황제의 시위대에게 바울을 인계하며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바울이란 사람은 보통 죄수가 아니오. 심오한 진리와 신비한 능력을 가졌소.” 그러면서 로마로 오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들을 다 말해서 바울에 대한 경외감이 시위대를 중심으로 급속히 퍼졌을 것입니다. 그때부터 로마 황제의 호위를 맡던 시위대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영접했고 결국 그들을 통해 로마 황제의 집 식구들까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입니까?
하나님은 때로 고난을 허락하시지만 그 고난을 통해 상상을 초월하는 멋진 일을 이루십니다. 성도의 삶에 우연은 없습니다. 모든 상황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 이뤄진 필연입니다. 우리의 고통, 불행, 돌발적인 사고, 절망적인 환경에도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가난으로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고난과 가난을 반전시키는 믿음입니다.
< 복음 전파를 크게 보십시오 >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복음을 확산시킬 때 감옥 밖에서는 2종류의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투기와 분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들과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들입니다(15절).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갇히자 바울의 역할을 대신하려고 순수하게 복음 전파에 힘썼습니다(16절). 반면에 투기와 분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없을 때 전도를 많이 하면 사도 바울의 존재가 별로 중요한 존재가 아님을 증명할 수 있다고 여기고 불순하게 복음 전파에 힘썼습니다(17절).
바울은 자기 체면과 자존심이 구겨지고 상처를 받아도 예수님이 전파되면 기쁘다고 고백했습니다(18절). 얼마나 복된 모습입니까?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상처를 받았다고 여기저기 다니며 교회를 썩었다고 하면서 치부를 드러내며 비판합니다. 그것은 결코 복된 모습이 아닙니다. 자신이 상처받아도 복음과 교회는 최대한 상처가 없게 하십시오. 내 뜻이나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 불편한 현실이 보여도 생각은 조금 더 하고 토로는 조금 덜 하십시오.
‘사려(思慮)’란 ‘생각하고 헤아려보는 것’이란 뜻입니다. ‘고려(考慮)’란 ‘살펴보고 헤아려보는 것’이란 뜻입니다. ‘배려(配慮)’란 ‘상대를 헤아려보는 것’이란 뜻입니다. 사려와 고려와 배려의 ‘삼려정신’을 가지고 한 영혼이라도 실족시키지 않으려고 애쓰면 하나님은 그 겸손한 마음을 반드시 기억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잘못된 상황이라면 바로잡아주시고 자신이 잘못된 마음을 가진 것이나 잘못 생각한 것이라면 깨달음의 기회를 주시면서 축복의 문도 열어주실 것입니다.
삶의 제일 목적을 영혼 구원과 선교에 두십시오. 왜 복을 받고 인물이 되어야 합니까? 영예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혼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존심이 뭉개지고 희생과 고난과 아픔과 상처가 있어도 복음 전파가 되면 좋다고 했습니다. 그처럼 복음 전파를 위해서라면 내가 무너져도 좋고 다쳐도 좋고 죽어도 좋다고 여기십시오. 안목이 넓고 통이 커야 합니다. 내가 상처를 입어도 ‘나’를 크게 보기보다 ‘복음 전파’를 크게 보고 인내하고 선교하는 삶처럼 복된 삶은 없습니다.
교회생활을 하다 보면 가끔 상처를 입습니다. 그 상처 때문에 혹시 다른 교회로는 옮겨도 교회를 완전히 떠나지는 마십시오. 또한 교회 밖에서나 인터넷에서 교회를 너무 비판하지도 마십시오. 그 비판으로 누군가 교회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교회에서 받는 아픔과 상처는 견디기 힘들어도 교회 전체를 싸잡아 비판하지는 마십시오. 내가 상처를 입어도 교회와 복음은 상처를 입지 않게 하겠다는 겸손한 자세를 가지십시오.
겸손이란 높은 자리에서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낮은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본래 낮은 자리에 있던 사람이 겸손하게 낮아지겠다고 할 것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색한 기도제목을 내놓습니다. “목사님! 제가 겸손하게 되도록 기도해주세요.” 그 말은 자신이 높은 사람인데 자신의 힘으로는 낮아지기 힘들어 하나님의 힘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자기가 높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만 알면 됩니다. 자기가 높다고 생각하니까 낮아지기가 그토록 힘들어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기도 부탁까지 한다면 얼마나 어색한 일입니까?
< 행복한 전도자가 되십시오 >
오직 하나님만 높이고 겸손하게 복음 전파에 힘쓰십시오. 복음 전파의 비전을 이루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당해도 기뻐하고 기뻐하겠다고 다짐하십시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축복은 원하지만 변화는 거부합니다. 삶의 목적을 축복 이전에 자기 변화와 세상 변화에 두십시오. 요새 자기중심주의가 얼마나 심합니까? 심지어는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도 발견됩니다. 어떤 부모는 자녀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내가 이제까지 너희들만을 위해 살아왔다.” 정말 그런 줄 알았는데 나중에 결혼할 때 보니까 혼수 문제로 본전을 다 뽑으려고 합니다.
어떤 부모는 “내가 얼마나 힘들게 키운 자식인데...”라고 하면서 자녀의 결혼에 상처를 입힙니다. 주려면 끝까지 주어야지 나중에 본전을 찾겠다고 하면 그것도 결국 자기중심적인 삶이었다는 뜻입니다. 끝까지 신실하고 충성해야 마음의 평안도 잃지 않습니다. 환경에 따라 믿음이 흔들리지 말고 남의 대접과 인정을 받는 것에 따라 마음이 흔들리지 마십시오. 늘 남의 형편과 처지를 살피는 성숙한 성도가 되십시오.
한 교회 구역에서 어느 해에 구역원 자녀 중 대입 수험생이 3명 있었습니다. 전 구역원이 3명 모두 원하는 대학에 가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둘은 합격하고 한 명은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합격한 자녀의 어머니들과 다른 구역원들은 다 침묵했습니다. 그때부터 대학 문제로 편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떨어진 아들의 어머니밖에 없었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그 어머니는 모든 구역원들을 초청해 성대한 합격 잔치를 벌여주면서 “내 아들은 떨어졌지만 우리 구역에서 2명이나 합격했으니 얼마나 좋아요?”라고 했습니다.
구역원들은 안도하며 기뻐했습니다. 더 나아가 “나도 앞으로는 저렇게 반전의 기쁨을 주며 살자.”라고 다짐했습니다. 하나님도 그 모습을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결국 하나님의 축복으로 다음 해에 그분의 자녀는 더 좋은 대학에 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런 일을 당하면 자녀에게 한숨을 푹푹 내쉬며 말합니다. “창피해서 못 살겠다! 남들은 다 합격했는데 너만 왜 그 모양이냐?” 그런 모습은 현재도 불행하게 만들지만 내일도 불행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고난 중에도 기쁨을 잃지 않는 믿음을 보고 복을 주십니다. 또한 그런 모습을 보면 불신자들도 “예수님을 믿는 것이 그렇게 좋은 것이냐?”라고 하면서 거룩한 호기심을 가지고 교회로 나올 것입니다. 그렇게 용기를 내고 교회에 나왔는데 안내자와 교인들이 친절히 맞아주고, 예배 중에는 성가대가 천사처럼 찬양해서 감동을 주고, 예배 후에 식사할 때는 선대와 당대와 후대의 3대가 어울려 천국 교제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점차 믿음이 뿌리내릴 것입니다. 늘 성도다운 삶을 통해 많은 영혼을 구원하고 이끌어주는 행복한 전도자가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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