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바른 이해편◑/종합 전체 모음

창조의 지혜와 능력 (예레미야 10:12)

by 고동엽 2026. 1. 27.

 

창조의 지혜와 능력 (예레미야 10:12)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소리 없이 우리를 설득합니다. “세상은 원래 이런 것”이라고, “힘이 곧 법”이라고, “결국 남는 것은 내가 쥔 것”이라고. 그러나 성도는 세상의 설득보다 더 오래된 음성을 듣는 사람입니다. 바람보다 먼저, 산보다 먼저, 역사의 시작보다 먼저 들려온 음성—창조의 음성입니다. 예레미야는 혼란한 시대, 흔들리는 나라, 무너지는 마음 한복판에서 한 문장으로 세계관을 세웁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능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의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그의 명철로 하늘을 펴셨으며.” 이 한 구절은 단지 자연을 찬양하는 시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상의 거짓을 무너뜨리는 망치요, 두려움에 눌린 영혼을 일으키는 지팡이요, 흩어진 삶을 한 중심으로 모으는 왕의 선언입니다.

예레미야가 이 말을 하는 자리에는 우상이 있습니다. 사람 손으로 깎아 만든 신, 금으로 입힌 신, 못으로 고정해 넘어지지 않게 만든 신. 웃지 못할 비극입니다. 넘어지지 않게 못으로 박아 두어야 하는 신이 어떻게 사람을 구원하겠습니까. 말하지 못하는 신이 어떻게 진리를 밝히겠습니까. 걸어 다니지 못하는 신이 어떻게 길을 인도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람은 우상을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우상은 내가 원하는 만큼 작아질 수 있고, 내가 조종할 만큼 조용하며, 내가 숨길 만큼 어두운 곳에도 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 하나님은 다릅니다. 참 하나님은 우리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으시고, 우리 마음의 취향에 따라 편집되지 않으시며, 우리의 죄를 덮어 주는 장식품으로 머물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창조주이십니다. 능력으로 땅을 지으시고, 지혜로 세계를 세우시며, 명철로 하늘을 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회개의 요구입니다. “너희가 섬기는 것이 무엇이냐? 너희가 두려워하는 것이 누구냐? 너희가 의지하는 토대는 어디에 놓여 있느냐?”

“능력으로 땅을 지으셨다”는 말은, 세상이 우연과 방치의 산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땅이 지어졌다는 말 속에는 의도가 있고, 뜻이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힘을 과시하기 위해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 안에서, 선하심 안에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 창조하셨습니다. 창조는 하나님의 성품이 밖으로 흘러나온 첫 역사입니다. 능력은 단지 강한 팔이 아니라, 선한 뜻을 끝까지 관철하는 거룩한 주권입니다. 그러니 성도에게 “능력”은 공포가 아니라 위로입니다. 세상 권세가 요동치고 내 몸이 약해지고 내 계획이 어긋나도, 창조의 능력이 허물어진 적은 없습니다. 땅을 지으신 능력이 오늘도 땅 위의 작은 존재인 나를 붙드십니다. 내가 모르는 길에서 내가 감당 못할 일을 만날 때, 능력의 하나님은 “너는 모르지만 나는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할 수 없지만 나는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능력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불안의 왕좌에서 내려옵니다. 내가 내 인생의 창조주가 되려는 시도를 멈추고, 창조주 앞에 피조물로 서는 순간, 마음은 놀랍도록 가벼워집니다. 그 자리에 진짜 평안이 들어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능력으로만 창조하신 분이 아닙니다.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다.” 능력만 있는 창조는 폭풍 같을 수 있지만, 지혜가 함께하면 창조는 질서가 됩니다. “세계를 세우셨다”는 표현에는 구조가 있고, 균형이 있고, 기초가 있습니다. 세계는 흔들리는 임시 건축물이 아니라, 지혜로 세워진 집입니다. 믿음이란, 이 집의 기초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세상이 혼돈처럼 보여도 궁극의 질서는 무너지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물론 우리는 많은 “왜” 앞에 섭니다. 왜 선한 사람이 아픕니까. 왜 악인이 형통해 보입니까. 왜 기도가 즉시 응답되지 않습니까. 왜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야 합니까. 그런데 예레미야는 ‘모든 질문에 대한 즉시 해설서’를 주지 않습니다. 대신 지혜의 창조주를 보여 줍니다. 질문의 바다에서 우리를 건져내는 것은, 모든 조각을 다 이해하는 지성이 아니라, 조각들을 붙들고 계신 손에 대한 신뢰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의 이해보다 넓고, 우리의 시간보다 길며, 우리의 감정보다 깊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눈물로도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해로만 믿지 않습니다. 계산으로만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지혜가 나의 짧은 지혜를 꾸짖기도 하지만 동시에 안아 주기도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또 예레미야는 “명철로 하늘을 펴셨다”고 말합니다. 명철은 지혜가 세부로 흘러 들어갈 때의 빛입니다. 하늘은 펴짐을 당했습니다. 펼친다는 말은, 감춰진 것을 드러내고, 닫힌 것을 열고, 막힌 것을 넓힌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는 삶도 자주 접혀 있습니다. 두려움에 접히고, 죄책감에 접히고, 상처에 접히고, 실패의 기억에 접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늘을 펴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접힌 삶을 펴시는 분입니다. 닫힌 마음을 여시고, 갇힌 영혼을 넓히시며, 시야가 좁아진 자에게 하늘의 크기를 다시 보여 주십니다. 그래서 창조 신앙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 회복입니다. 창조주를 바라보는 사람은 현실을 더 선명하게 봅니다. 왜냐하면 현실은 창조주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작품을 올바로 보려면 작가를 알아야 합니다. 작가를 모르면 작품의 의미를 잃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내 욕망의 재료’로 보는 순간, 세상의 아름다움도, 이웃의 존귀함도, 자기 인생의 거룩한 소명도 잃어버립니다. 하지만 창조주를 아는 순간, 일상의 작은 일까지도 의미를 얻습니다. 밥상은 은혜가 되고, 숨은 선물이 되고, 노동은 소명이 되고, 관계는 맡겨진 거룩한 책임이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개혁주의 신앙의 단단한 뼈대를 만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그 창조는 하나님의 주권적 뜻의 표현입니다. 그 뜻은 결코 무지하거나 변덕스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혜로 세우시고, 명철로 펼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는 우연의 연속이 아니라 지혜의 직조입니다. 동시에, 이 창조의 고백은 인간의 교만을 무너뜨립니다. 우리는 “내가 중심”이라는 오래된 거짓말을 버려야 합니다. 피조물이 창조주 자리에 앉는 순간, 모든 질서는 무너집니다. 죄의 본질은 단순한 규칙 위반이 아니라, 창조 질서의 전복입니다. 내가 하나님이 되려는 욕망, 내가 선악의 기준이 되려는 오만, 내가 내 구원의 설계자가 되려는 자만—그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창조 신앙은 자연 찬양으로 끝나지 않고 회개로 나아갑니다. “주님,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려 했습니다. 내가 내 마음의 왕좌에 앉아 주님을 장식품처럼 두려 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런데 복음은 여기서 더 깊은 곳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방치하지 않으셨습니다. 창조의 능력은 심판의 능력이기도 하기에, 하나님은 죄를 반드시 다루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멸망시키는 방식으로만 다루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속의 방식으로 다루셨습니다. 창조의 지혜는 십자가에서 가장 눈부시게 빛납니다. 세상은 십자가를 약함이라 부르지만, 하나님은 십자가를 능력이라 부르십니다. 세상은 십자가를 어리석음이라 부르지만, 하나님은 십자가를 지혜라 부르십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한 점에서 만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그냥 덮어 둘 수 없습니다. 덮으면 하나님은 거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인을 그냥 버리면 하나님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는, 죄를 심판하되 죄인을 살리는 길을 여셨습니다. 그 길이 그리스도입니다. 창조주께서 친히 피조물의 자리에 오시고, 죄 없는 분이 죄인의 자리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은 거룩함을 잃지 않으시면서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지혜이며, 구원의 능력입니다.

이 구원의 능력은 “새 창조”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창조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은 처음에 빛을 명하신 분이시고, 지금도 우리의 어둠 속에 빛을 명하십니다. 하나님은 처음에 혼돈 위에 질서를 세우신 분이시고, 지금도 우리의 무너진 내면에 질서를 세우십니다. 그러니 성도는 ‘처음 창조’를 믿는 데서 멈추지 않고 ‘새 창조’를 사모합니다. 회개는 새 창조의 문이고, 믿음은 새 창조의 호흡이며, 성화는 새 창조의 걸음입니다. 우리는 자기 힘으로 새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창조의 하나님은 무(無)에서 유(有)를 부르신 분이기에, 절망에서 소망을, 무기력에서 순종을, 상처에서 사랑을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성도는 그 가능성을 자기 안에서 보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예화 하나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노인이 오랫동안 바닷가에서 작은 등대를 관리했다고 합시다. 어느 날 폭풍이 몰아치고, 밤은 유난히 짙어졌습니다. 배들은 방향을 잃고 암초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때 등대지기는 젖은 몸으로 계단을 올라가 불을 지키려 애씁니다. 바람은 창문을 두드리고, 파도는 벽을 때리고, 불은 꺼질 듯 흔들립니다. 마침내 그는 불을 지켜 냅니다. 다음 날 아침, 항구에는 밤을 건너온 배들이 들어옵니다. 선장들이 말합니다. “우리는 바람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파도를 멈출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불빛을 잃지 않으면 길을 잃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창조의 하나님은 폭풍을 한순간에 멈추지 않으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길을 잃지 않게 하십니다. 능력으로 땅을 지으신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붙드시고, 지혜로 세계를 세우신 하나님은 우리의 걸음을 헛되지 않게 하시며, 명철로 하늘을 펴신 하나님은 우리의 시야를 넓혀 끝내 소망을 보게 하십니다. 그러니 오늘 믿음은 폭풍이 없다는 증거가 아니라, 폭풍 속에서도 창조주를 바라보는 눈입니다.

이제 이 말씀을 우리의 삶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창조의 능력은 우리의 작은 우상을 무너뜨립니다. 우리가 의지하던 돈, 명예, 관계, 건강, 계획, 자녀, 성취가 어느 날 흔들릴 때, 하나님은 잔인하게 빼앗는 분이 아니라, 거짓 신을 내려놓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거짓 신은 결국 우리를 배신하기 때문입니다. 창조주만이 배신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창조의 지혜는 우리의 선택을 새롭게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무엇이 우리의 시간을 먹고 있습니까.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점령하고 있습니까. 창조주를 믿는 사람은 창조주의 뜻을 묻습니다. “주님, 내가 누구를 사랑해야 합니까. 어떤 말을 아껴야 합니까. 어떤 죄를 끊어야 합니까. 어떤 순종을 시작해야 합니까.” 이 질문은 억압이 아니라 자유입니다. 창조 질서 안으로 돌아올 때, 영혼은 숨을 쉽니다. 물고기가 물에서 살 듯,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밖에서 자유를 찾는 것은 물고기가 육지에서 자유를 찾는 것과 같습니다. 잠시 펄떡일 수는 있어도, 그것은 죽음으로 가는 몸부림입니다.

마지막으로, 창조의 명철은 우리의 예배를 새롭게 합니다. 예배는 종교 행사가 아니라 창조 질서의 회복입니다. 예배에서 우리는 자리를 바로 잡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리에, 나는 피조물 자리에, 그리스도는 구원자 자리에, 성령은 거룩하게 하시는 분의 자리에. 이 질서가 회복될 때, 마음은 다시 고요해집니다. 그리고 이 예배는 세상 속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창조주를 예배하는 사람은 피조 세계를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이웃을 물건처럼 쓰지 않습니다. 약자를 밟아 올라서지 않습니다. 말을 칼처럼 휘두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하나님께 속했고, 우리는 청지기이기 때문입니다. 청지기의 삶은 결국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제 인생은 제 것이 아닙니다. 창조주께서 지으셨고, 구속주께서 사셨고, 성령께서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레미야 10장 12절 앞에서 우리는 하나의 결단으로 나아갑니다. 우상의 소음을 끊고 창조주의 음성을 듣는 결단, 내 손으로 만든 안전장치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손에 나를 맡기는 결단, 보이는 것을 절대화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가장 실제로 믿는 결단. 능력의 하나님께 의지합시다. 지혜의 하나님께 순종합시다. 명철의 하나님께 마음을 엽시다. 그리고 그 모든 길의 중심에서 그리스도를 붙듭시다. 창조의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로 끝내지 않으셨고, 십자가와 부활로 새 창조의 길을 여셨습니다. 그 길 위에서 오늘도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지었다. 내가 너를 샀다. 내가 너를 이끈다.” 이 음성이 여러분의 밤을 지키고, 여러분의 아침을 열며, 여러분의 생애를 마침내 하나님 나라의 빛으로 데려가기를 바랍니다.


설교요약
예레미야 10:12는 우상 숭배의 허무를 드러내고 참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선포한다. 하나님은 능력으로 땅을 지으셔서 우리의 불안을 붙드시는 주권자이시며, 지혜로 세계를 세우셔서 혼돈처럼 보이는 역사 속에서도 섭리를 이루시는 분이시다. 명철로 하늘을 펴셔서 접힌 마음과 좁아진 시야를 넓히시고, 창조 신앙을 회개와 예배와 삶의 순종으로 이끄신다. 복음은 창조의 지혜와 능력이 십자가에서 절정에 이르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로 성도를 부르심을 밝힌다.

묵상 포인트

  • 나는 무엇을 “못으로 고정해 두어야” 안심하는가(내가 만든 우상은 무엇인가).
  • 내 삶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통제의 위협”으로 느끼는가, “붙드심의 위로”로 믿는가.
  • 이해되지 않는 현실 앞에서, 나는 해설서를 요구하며 하나님을 재판하는가, 지혜의 하나님을 신뢰하는가.
  • 예배가 내 자리(피조물)를 회복시키고 있는가, 종교적 습관으로 축소되고 있는가.
  • 새 창조의 은혜가 내 말, 시간 사용, 관계, 청지기적 삶에 어떤 변화로 나타나는가.

강해
예레미야 10장은 우상 제작과 숭배의 어리석음을 폭로한 뒤, 참 하나님을 창조주로 대비시킨다. “능력(권능)”은 무(無)에서 유(有)를 부르시는 창조 행위의 주권을 뜻하며, 이는 인간의 자기구원 시도를 무너뜨리고 하나님께 피조물로 돌아오게 한다. “지혜”는 창조가 단순한 힘의 폭발이 아니라 질서와 목적을 가진 세움임을 드러낸다. 세계는 우연의 부스러기가 아니라 섭리의 구조 안에 있다. “명철”은 지혜가 구체적 현실로 스며드는 분별의 빛이며, 하늘을 “펴신” 행위는 닫힌 것을 열고 접힌 것을 넓히는 주도권을 암시한다. 이 창조 고백은 결국 언약의 하나님—우상을 심판하시고 백성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촉구이며, 신약의 빛 아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창조의 지혜와 능력을 구속의 지혜와 능력으로 완성함을 보여 준다.

주석

  • “여호와께서… 지으셨고… 세우셨고… 펴셨으며”의 연속 동사는 하나님이 단회적 창조 이후 물러나신 분이 아니라, 지금도 세계의 존재 기반을 붙드시는 분임을 암시한다(창조-보존의 연속성).
  • “땅/세계/하늘”의 삼중 구조는 피조 세계 전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포괄적 주권을 드러내며, 우상이 미치지 못하는 전면성을 강조한다.
  • 본 구절은 우상 조롱 단락과 연결되어 “사람이 만든 것”과 “하나님이 만드신 것”의 대조를 극대화한다. 우상은 이동·발화·행위 능력이 없으나, 하나님은 창조 행위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원어 주석 (히브리어-구약)

  • “능력” כֹּחַ (koach): 단순한 물리적 힘을 넘어, 목적을 이루는 역량/권세를 포함한다. 창조의 ‘가능케 하심’이자 섭리의 ‘붙드심’으로 이해할 수 있다.
  • “지혜” חָכְמָה (chokmah): 기술과 통찰을 포함하는 지혜. 세계의 구조와 목적을 세우는 하나님의 설계적 지혜를 시사한다.
  • “명철(분별/통찰)” תְּבוּנָה (tevunah): 사물의 결을 꿰뚫는 이해, 분별의 능력. 하늘을 “펴심”이 단지 공간의 확장이 아니라 분별의 통치임을 암시한다.
  • “세우셨다” כּוֹנֵן (konen, from כּוּן kun): 견고히 세우다, 확립하다. 세계가 임시적·우연적이 아니라 안정적 기초 위에 놓였음을 강조한다.
  • “펴셨다” נָטָה (natah): 펼치다, 늘이다. 장막을 펴듯 하늘을 펼치시는 이미지는 창조의 능동성과 섬세함을 함께 보여 준다.
  • “하늘” שָׁמַיִם (shamayim) / “세계” תֵּבֵל (tevel): 피조 질서의 총체를 가리키며, 하나님 주권의 범위를 확증한다.

원어 주석 (헬라어-신약, 주제 연결)
(본 구절은 구약이므로 직접 헬라어 본문은 없으나, 신약의 대응 개념을 연결한다.)

  • “지혜” σοφία (sophia):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지혜(특히 십자가의 지혜)와 연결될 수 있다.
  • “능력” δύναμις (dynamis): 복음의 능력, 부활의 능력과 연결되어 창조 능력이 구속 능력으로 나타남을 보여 준다.
  • “창조/피조물” κτίσις (ktisis): 피조 세계의 탄식과 새 창조의 소망을 설명할 때 핵심어가 된다.
  • “말씀/로고스” λόγος (logos): 창조와 계시가 말씀으로 이루어진다는 신학적 축을 강화한다.

금언

  • 우상은 내 욕망의 크기만큼 작아지지만, 하나님은 내 필요의 크기만큼 커지지 않는다—그분은 언제나 창조주로서 크시다.
  • 이해의 끝에서 믿음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이해가 자란다.
  • 창조의 능력은 나를 겁주기 위한 힘이 아니라, 나를 붙드시기 위한 주권이다.
  •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가 가장 깊어지고, 하나님의 능력이 가장 부드러워진 자리다.

신학적 정리

  • 창조론: 하나님은 ex nihilo(무로부터) 창조하시는 주권자이며, 창조는 하나님의 영광과 선하심의 표현이다.
  • 섭리론: 하나님은 창조 후 방관하지 않으시며 지혜로 세계를 유지·통치하신다.
  • 죄론: 죄는 창조 질서의 전복이며, 피조물이 창조주 자리에 앉으려는 교만이다.
  • 구속론: 창조의 지혜와 능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구속의 지혜와 능력으로 완성된다.
  • 새 창조: 성령 안에서 성도는 새 사람으로 빚어지며, 성화는 새 창조의 진행형 열매다.

주제별 정리

  • 우상 vs 창조주: 사람이 만든 신은 말하지 못하나, 하나님은 창조 행위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 불안 vs 주권: 불안은 내가 주인이 되려는 시도에서 커지고, 평안은 창조주께 맡김에서 자란다.
  • 혼돈 vs 질서: 현실이 혼돈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지혜는 세계를 세우는 기초로 역사한다.
  • 닫힘 vs 펼쳐짐: 명철의 하나님은 접힌 삶을 펴시고, 좁아진 시야를 넓히신다.

목회적 정리

  • 상실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능력으로 땅을 지으셨다”는 고백은 “내 삶도 붙드신다”는 위로로 적용된다.
  • 의문이 깊어질수록, 해답의 목록보다 “지혜의 인격”을 붙들도록 돕는 것이 목회적 핵심이다.
  • 예배는 자리 회복이며, 예배의 회복은 삶의 질서 회복으로 이어지게 해야 한다(말, 시간, 돈, 관계의 청지기성).

성도들의 결단 및 적용

  • 매일 한 번, “나는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창조주”라는 짧은 고백으로 자기통제의 집착을 내려놓기.
  • 불안이 올라올 때, 문제를 먼저 붙들기보다 창조주를 먼저 바라보는 기도 습관 만들기.
  • 한 가지 우상적 의존(돈/인정/계획/관계/건강)을 구체적으로 적고, 그 자리에 순종의 실천 한 가지를 세우기.
  • 예배 전후로 “내가 누구를 가장 두려워하는가”를 점검하고, 두려움의 대상이 하나님으로 돌아오게 하기.
  • 피조 세계와 이웃을 대하는 태도에서 청지기적 절제와 사랑을 실천하기(말의 절제, 약자 배려, 정직한 노동).

Full Source : Artificial Intelligence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