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귀하게 되는 길 (이사야 52장 13-15절) < 십자가는 헛되지 않다 >
요새 한국 사회는 정치적인 격변기다. 사회는 보수와 진보의 양 날개가 잘 기능해야 건강하게 되는데 지금은 보수가 많은 약해졌고 회복 기미도 작은 편이다. 왜 그런가? 깨끗하게 “내 잘못이오.” 하고 자기를 던지고 책임지려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희생도 없이 책임회피에 급급하면 지켜보는 사람의 마음을 얻기 힘들다. 보수주의가 보신주의가 되면 안 된다. 보신에 급급해 희생할 줄 모르면 개인도 살아나기 힘들고 공동체도 살아나기 힘들다.
약 10년 전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 후 돈 문제와 대통령 기록물 반출 문제로 수사받자 3가지 선언을 했다. “첫째, 기록물 반출은 회고록을 쓸 목적으로 내가 지시해서 했다. 둘째, 내 잘못이니까 내게 죄를 묻고 진보 진영과는 연결시키지 말라. 셋째, 진보 진영은 나를 버려라.” 그리고 높은 바위 위에서 자신을 던졌다.
자살은 “내 인생의 주인은 나다.”라고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가장 교만한 행동이고 회개 기회까지 완전히 틀어막기에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죄다. 자살은 가장 불신적인 행위로서 자살하면 영원한 지옥 형벌이 기다리기에 성도는 죽음을 넉넉하게 맞이하되 자기 맘대로 행사하면 안 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노 대통령이 자신을 던진 것은 진보 진영의 붕괴를 막고 반전의 기회를 만들어낸 모멘텀이 되었다. 즉 그의 피를 통해 팬덤이 생겨났고 그 팬덤이 현재의 대통령을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자신을 자살이 아닌 상태에서 제물로 삼으면 누군가를 살리는 큰 자산으로 작동할 때가 많다. 희생이 있어야 팬덤도 형성된다. 보수를 내세우면서도 보수 진영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을 제물로 내놓지는 않고 책임을 회피하면서 자기 보신을 위해 진영을 끌어들여 진영 싸움으로 몰고 가면 더 밉상이 됨으로 인해 국민의 매가 계속되면서 보신도 이루지 못하고 보수도 일으키지 못한다.
억울해도 국민의 매를 일단 그치게 하려면 “내게 책임을 물으시오. 보수 진영은 나를 버리시오.”라고 당당하게 나오는 보수 진영의 인물이 나타나야 보수가 살아날 수 있다. 그런 책임적인 희생을 통해 밉상의 고리를 끊지도 않고 정치적인 공격만으로는 국민의 마음을 얻기가 쉽지 않다. 보수 진영에도 보신을 버리고 자살이 아닌 상태에서 자신을 제물로 드릴 줄 아는 누군가의 희생과 낮아짐이 있어야 국민의 마음을 얻어 보수 진영도 다시 살릴 수 있고 빠르면 5년 안에 정권을 다시 잡을 수도 있게 된다.
기독교 리더가 명백히 잘못했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책임적인 리더라면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 잘못이지 교회의 잘못은 아닙니다. 제 잘못을 교회와 연관시키지 마십시오.”라고 하면서 자신 때문에 교회에 잘못된 이미지가 덧칠되지 않게 해야 교회가 밉상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하지는 않고 자기를 살리려고 “내가 무슨 큰 잘못을 했느냐? 너는 떳떳하냐? 교회를 탄압하지 말라.”라고 하면서 교회까지 끌어들이면 사람들은 교회까지 밉상으로 보게 된다. 얼마나 비겁하고 수치스럽고 무책임한 태도인가?
살기를 원하면 먼저 죽기를 각오하라.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죽음조차 세상을 변화시키는 반전의 기회가 될 때도 많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의로운 희생과 죽음은 얼마나 그 영적인 파급효과가 크겠는가? 십자가의 의로운 희생과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다. 그 죽음과 희생이 혹시 이 땅에서 평가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생명책과 거룩한 천국 계산서에는 뚜렷하게 기록되어 영원히 평가 받을 것이다.
< 존귀하게 되는 길 >
<이사야>에는 4편의 <고난당한 종의 노래>가 있다. 본문은 넷째 노래가 시작되는 부분이다. 고난당한 종인 메시야는 십자가를 지지만 결국 부활하심으로 지극히 존귀한 분으로 높이 들리신다(13-14절). 그런 극적인 승리의 역사를 보면 사람들은 너무 놀라서 말문이 닫힌다(15절). 본문의 노래처럼 사람이 존귀하게 되고 승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겸손하게 되라
예수 믿고 겸손해지는 삶은 예수 믿고 능력 받는 삶보다 더 복된 삶이다. 능력을 받아도 그 후에는 겸손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겸손한 삶은 명예나 권세나 부요를 가진 삶보다 더 복된 삶이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능력과 실력을 가진 사람보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겸손한 사람이다. 예수님의 마음이란 ‘빈 마음’보다 ‘비운 마음’이다. 하나님은 비운 마음을 통해 역사하신다. 사람끼리도 비운 마음들이 만날 때 역사가 일어나고 행복을 얻는다.
어느 날 한 부유한 여성이 딸을 위해 일등 신랑감을 찾는데 세상적인 기준의 일등 신랑감은 대개 아파트 열쇠와 자가용 열쇠 등을 요구했다. 그래도 딸이 행복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돈을 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신랑감을 찾아서 결국 일등 신랑감을 만났다. 한참 결혼을 진행시키는데 신랑 될 청년이 신부 될 처녀와 커피숍에서 대화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당신 어머님이 여러 개의 열쇠를 해준다고 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그 말을 듣고 그녀는 자초지종을 알아본 후 신랑 측에서 열쇠를 요구한 것을 알고 즉시 그 남자와 헤어졌다. 참으로 잘한 결정이다.
결혼 생활에서 열쇠가 많으면 잘살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오히려 마음이 깨끗하고 진실하고 정직하고 겸손한 사람이 잘 산다. 세월이 지나면 외모나 물질의 힘은 다 사라진다. 마음이 맞는 것이 중요하다. 언제 마음이 맞는가? 겸손한 마음과 겸손한 마음이 만날 때다. 물질의 복도 겸손한 마음의 바탕 위에서 진짜 복이 된다. 생각은 크게 가지고 실력은 탁월하게 가지되 마음과 자세만은 힘써 낮추라. 성령님은 교만한 사람의 마음에 자리하지 않으신다. 결국 겸손은 은혜와 축복과 승리를 위한 필수과목이다.
2. 십자가를 지라
겸손한 삶도 복된 삶이지만 그것보다 한 차원 더 깊이 들어가서 십자가를 용기 있게 지려고 해야 한다. 십자가가 없는 영광은 없다. 십자가는 자기 극복이란 과제를 이루는데 꼭 필요한 것이다. 자기 상처와 감정도 극복하지 못하면서 이루는 성공과 성취는 큰 의미도 없고 행복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복된 일은 자기를 극복하는 일이다. 나를 극복해야 남도 극복할 수 있고 환경도 극복할 수 있다.
한국의 부모 중에는 자녀의 명문대 진학에 유난히 집착하는 부모가 많은 편이다. 그러나 공부를 열심히 해서 명문대학은 갔지만 자기를 극복하지 못해 불행하게 사는 사람도 얼마나 많은가? 명문대학을 나와야만 행복하고 잘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일시적인 승리자가 아닌 영원한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언제 영원한 승리가 주어지는가? 남과의 경쟁에서 이길 때보다 나와의 경쟁에서 이길 때 주어진다.
남보다 조금 더 실력 있고 조금 더 소유했다는 것은 믿음의 시각으로 보면 사실상 큰 차이가 없다. 가을의 찬바람에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큰 잎이나 작은 잎이나 다 똑같이 떨어진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남기느냐 하는 것이다. 인생에서도 “낙엽으로 남느냐? 열매로 남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낙엽으로 남는 삶과 열매로 남는 삶은 어디서 갈라지는가? 십자가를 지는 삶에서 극적으로 갈라진다. 십자가를 외면하면 낙엽 인생을 면하기 힘들지만 십자가를 기꺼이 지면 열매 인생이 된다.
3. 믿음으로 살라
“믿음으로 살라.”는 말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라.”는 뜻도 있지만 “믿는 사람답게 살라.”는 뜻도 있다. 믿는 사람은 믿음직한 사람도 되어야 한다. 믿는다고 하면서 믿음직한 모습이 없다면 잘못된 믿음을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 하나님은 약속을 확실히 지키기에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언약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사람과의 약속도 잘 지킴으로 믿음직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약속을 잘 지키는 삶은 성도의 가장 기초적인 삶 중의 하나다.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다. 상대를 존중하는 삶은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는 삶에서 뚜렷하게 표현된다. 약속 시간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지나친 기대를 가지지 말라. 진실한 친구와 제자는 많지 않다. 진실한 친구와 제자를 원하면 시간 약속을 잘 지키느냐를 유심히 살피라. 시간 약속을 잘 지키지 않으면 생명 친구나 동지나 제자로 여기기보다 ‘무리 중의 하나’로 여기라. 그래야 신앙과 인생의 상처가 줄어든다.
상대에 대한 존중심은 약속 시간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는 태도와 거의 비례한다. 약속 시간에 일찍 나타나고 출근 시간에 일찍 오는 사람은 인간관계를 깊게 할 가치가 있다. 약속을 잘 지키고 약속 시간도 잘 지키면 큰 점수를 얻는다. 약속을 잘 지키는 책임적이고 믿음직한 사람이 되라. 더 나아가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희생의 십자가를 지면서 죽기를 각오하면 나도 살고 남도 살고 공동체가 살게 된다.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나 심지어는 죽는 것도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 그것도 일종의 십자가로 여기고 잘 극복하면 더욱 복된 삶이 펼쳐진다.
< 믿음직한 사람이 되라 >
자신의 실수와 못난 모습이 남에게 즐거운 웃음을 줄 수도 있다. 바보처럼 행동해서 웃음거리가 된 것을 속상해하지 말고 남에게 웃음을 주었다고 기쁘게 생각하라. 그 다음에 심기일전해서 반전의 역사를 만들어내면 된다. 그런 반전의 인생처럼 통쾌하고 유쾌하고 상쾌한 삶이 어디에 있는가? 의도적으로 바보처럼 행동해서 즐거움을 주는 사람이 있다. 바로 개그맨과 개그우먼이다. 지금 바보처럼 보인다고 해서 실망할 것이 없다.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한 개그맨이나 개그우먼이 되면 된다.
개그(gag)란 네트영어의 원리대로 뜻풀이하면 ‘객객거리는 것(구역질, 토), 객객거리다(구역질하다, 토하다), 객객거리게 하는 것(재갈, 입마개), 객객거리게 하다(입마개하다, 재갈물리다), 깩깩거리는 것, 낄낄거리는 것(익살), 낄낄거리게 하는 것(익살 부리기)’이란 뜻이다. 그렇게 바보가 된 것처럼 익살을 부리며 남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개그다. 바보처럼 보여 남을 즐겁게 해주는 존재였는데 나중에 보니까 대단한 인물이 되어 있다면 얼마나 감동이 되는가? 죽 쑨 인생을 작품 인생으로 만들어내는 삶처럼 멋진 삶은 없다.
설교할 때 죽 쑤면 목회 초창기에는 너무 부끄럽고 속이 상했다. “성도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다음 주에는 실망한 성도들이 많이 빠지겠지.” 설교자가 설교에 죽 쑤면 청중에게 웃음거리가 된다. 그런 웃음거리가 된 것이 처음에는 속상했지만 오래 설교자로 지내면서 ‘웃음거리가 된 것’을 ‘웃음을 준 것’이라고 생각하는 여유가 생겼다. 웃음이 줄어드는 시대에 남에게 웃음을 한 컵 선사한 것이 얼마나 좋은가? 그 다음에 더욱 잘 준비하면 된다.
몸이 아프면 밥 대신 죽을 먹는다. 그 죽으로 병을 이기고 건강을 회복한다. 죽 쑨 설교로 인해 웃음거리가 된 후 깊은 기도와 묵상으로 한 주간 열심히 말씀을 준비하면 그 다음 주 설교는 영적인 대박을 칠 때가 많다. 그처럼 한때 웃음거리가 된 것이 나중에는 별 일 아닌 것이 되고 그 상태에서 반전의 역사를 이뤄내면 사람들에게 더욱 감동과 찬탄을 줄 수 있다. 그런 극복 과정들을 거치면서 땀은 배반이 없기에 필자는 <성경 전권강해> 완성을 목전에 둘 수 있게 되었다.
잠깐 웃음거리가 된 것을 즐긴 후에 반전의 역사를 일으키는 거룩한 개그맨과 개그우먼이 되라. 믿음만 잃지 않으면 죽 쑨 삶 때문에 건강을 회복할 때도 많다. 더 나아가 ‘죽 쑨 삶’에서 ‘죽는 삶’까지 각오하면 더욱 멋지게 살아날 수 있다.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남을 감동시키는 책임적인 행동도 나온다. 그런 책임적인 행동이 있어야 영혼도 살아나고 공동체도 살아나고 환경도 변하고 거룩한 역사도 쓰인다.
지난 주중에 올림픽 추월 경기에서 동료 선수를 외면하고 결승선으로 들어온 선수들에 대한 비난 여론이 거세게 일었다. 팀 추월 경기는 팀원 3명 중 가장 늦게 들어온 선수의 기록으로 순위를 매긴다. 그래서 앞선 2명이 아무리 일찍 들어와도 소용없기에 앞에서는 뒤떨어진 사람의 바람막이를 해주고 뒤에서는 밀어주면서 같이 결승선을 통과해야 한다. 그런데 앞선 두 선수가 뒤떨어진 한 선수를 외면했다고 큰 비난을 받은 것이다.
지금은 국민의 의식 수준이 높아져서 무조건 금메달만 따라고 하지 않는다. 옛날 같으면 뒤처진 사람 때문에 기록이 나빠지면 “저것 때문에 기록이 나빠서 성적이 못 나왔네.”라고 했지만 요새는 “메달을 못 따더라도 동료 선수를 챙겨야지.”라고 한다. 수준 높은 삶이란 외모로 평가하지 않고 내면의 가치를 살피는 삶이다. 학생이 공부를 못하면 “공부도 제대로 못하면서...”라고 하지 말고 “공부를 못해도 교회를 잘 섬기고 친구를 잘 챙기라.”고 하라. 챙길 줄 아는 책임적인 사람을 하나님께서 챙겨주시고 책임져주신다.
추월 팀에 대한 국민적인 비난이 거세지자 다음 날 선수와 감독이 기자회견을 열어 책임을 전가하거나 회피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오히려 비난의 불에 기름을 끼얹었다. 잘못했을 때 진솔한 책임 인정을 하고 벌을 닫게 받겠다고 하지 않고 책임을 회피하면 오히려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 잘못했을 때 확실히 책임을 지고 더 나아가 자신을 십자가의 제물로 삼으려고 할 때 그를 통해 가정과 교회도 살아나고 사회와 나라도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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