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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라 (누가복음 24장 1-6절)

by 【고동엽】 2022. 7. 14.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라 (누가복음 24장 1-6절)          

 

< 자기중심주의를 버리라 >

 

 일전에 한 집사 결혼 주례를 했는데 주례 후 몇몇 하객이 저에게 와서 말했다. “목사님! 결혼 설교가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다른 하객들도 목사님이 설교를 참 잘하신데요.” 속으로 잠깐 우쭐해졌다. “그럼 그렇지. 내 설교를 목회자들이 얼마나 많이 찾는데.”

 

 도대체 어느 설교 내용이 그렇게 감동적이었는지 알고 싶어 들뜬 음성으로 물었다. “집사님! 어떤 말씀이 그렇게 감동적이었나요?” 그가 말했다. “설교가 짧아서 제일 감동적이었어요. 다른 하객들도 주례 설교가 짧아서 너무 좋았대요.” 그 말을 듣고 김이 조금 샜지만 그래도 하객들을 기쁘게 해서 기분이 좋았다. 그날 제가 6분 설교를 했는데 원래 의도가 설교를 짧게 해서 신랑신부와 하객들을 행복하게 해주자고 미리 작정했기 때문이다. 그때 짧은 설교가 명 설교라는 말을 새롭게 실감했다.

 

 설교는 준비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점차 짧아진다. 저의 경우에는 1시간 분량의 설교를 한 번 더 다듬으면 52분 설교가 되고, 두 번 다듬으면 45분 설교, 세 번 다듬으면 39분 설교, 네 번 다듬으면 34분 설교, 다섯 번 다듬으면 31분 설교, 여섯 번 다듬으면 28분 설교로 줄어든다. 저의 목표는 초고 설교를 일곱 번 다듬고 28분 전후로 설교하는 것이다.

 

 물론 짧은 설교가 다 좋은 것은 아니지만 많이 다듬을수록 설교가 짧아지는 것은 사실이다. 어떤 부흥 강사는 3시간 이상 말씀을 전한다. 준비가 없이 과거에 했던 설교를 즉흥적으로 반복하면 설교는 늘어지고 가끔 걸쭉한 말과 상스러운 말과 욕 비슷한 말도 설교에 섞여 나온다. 그러면 웃음과 비속어가 주는 묘한 카타르시스를 통해 잠시 은혜 받은 것 같은 느낌을 받지만 점차 유머와 은혜가 남용되어 영혼에 치우침과 상처를 낳는다.

 

 설교가 개그 느낌을 주면 안 된다. 많이 웃은 것을 많은 은혜 받은 것이라고 여기는 피상적인 은혜는 진짜 은혜를 막고 영혼의 울림이 없는 자기중심적인 삶과 자기중심적인 리더십을 낳기도 한다. 기독교의 핵심 가치는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을 버리는 것이다. 가정생활과 교회생활 및 시간과 물질 문제 등에서 나보다 남을 더 힘써 생각하라. 그때 더 많이 얻는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남을 위해 십자가를 지면 더 많이 얻는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 용서받았으면 용서하라 >

 

 안식 후 첫날, 즉 부활절 새벽에 몇몇 여자들이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바르려고 무덤으로 갔다(1절). 예수님은 안식 후 첫날인 주일에 부활하셨기에 기독교인은 안식일에 예배하는 유대교의 전통을 깨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일에 예배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독교가 부활의 종교란 강력한 메시지이고 주일은 부활을 체험하는 날이란 강력한 메시지다. 그때 무덤으로 간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등이었다.

 

 조용히 약 1시간쯤 걸어 언덕을 넘자 멀리 희미하게 영문 밖에 예수님이 달리셨던 십자가와 다른 두 십자가가 보였다. 그 십자가는 전날이 안식일이었기에 아직 치워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들은 잠시 발길을 멈추고 멀리서 피로 물든 빈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그 빈 십자가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류의 죄가 용서받았고 내 죄도 용서받았음을 상징한다. 내가 아무리 부족한 죄인이어도 진심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이 얼마든지 새롭게 받아주심을 믿으라.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확신하고 더 나아가 누군가를 용서하라. 즉 용서받은 삶을 용서하는 삶으로 승화시키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정말로 믿으면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도 그렇게 어렵지 않다. 원수 갚는 일을 내가 맡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손길에 맡기면 된다. 원수가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의 손길에 언젠가 무섭게 펼쳐질 텐데 그때는 원수가 불쌍하게 여겨질 정도로 무섭게 심판받는다. 그런 결과를 인식하고 용서하면 이성을 잃어 분노의 덫에 빠지는 상황을 막을 수 있다.

 

 며칠 후 선거에서 누군가는 승리하고 누군가는 패배할 것이다. 그때 승리했다고 너무 승리감에 도취하면 안 된다. 승리하면 사탄이 교만의 덫을 놓는다. 그 덫에 걸리면 민심을 잃고 조만간 패배의 길로 들어선다. 반대로 패배했다고 너무 패배감에 젖어 절망하면 안 된다. 어떤 지지자는 선거에서 패배했다고 몇 개월간 상실감에 빠진다. 그것은 패배를 진짜 패배로 만드는 것이다. 패배보다 패배를 다스리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패배하면 사탄이 분노의 덫을 놓는다. 그 덫에 걸리면 더 올가미에 조이고 더 수렁에 빠진다.

 

 세상을 보면 불의와 부조리가 너무 많다. 나의 판단력이 틀릴 수도 있음을 전제하더라도 어떤 현실은 분명히 불의하고 부조리하다. 그에 대해 거룩한 분노를 가지라. 선거에도 힘써 참여해 의사를 표시하라. 다만 분노를 잘 통제하라. 분노의 덫에 걸리면 언행이 자신도 모르게 거칠어지면서 다음 번의 승리 기회가 더 미뤄질 수 있다. 사탄의 덫에 걸리지 않도록 주의하라. 하나님이 불의의 심판자이심을 굳게 믿고 냉철하고 겸손하게 내일을 준비하면 사탄의 덫에서 벗어나 부활의 삶을 현실로 만들고 다음번에는 이길 수 있다.

 

< 부활하신 예수님과 만나라 >

 

 그때 여자들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계속 무덤을 향해 갔다. 무덤에 가까이 가자 그들은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약 2톤쯤 되는 그 돌을 옮기려면 여러 사람이 필요했고 로마 군인들의 허락도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여기고 무덤 안으로 들어가자 예수님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다. 무덤이 비어있었다. 그 빈 무덤은 영생을 약속하는 상징이다. 그 약속을 기억하면서 잘 비워내고 내려놓아야 생명력과 은혜도 더욱 넘치게 된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사람에게 죽음은 더 이상 두려운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다른 어떤 것은 더욱 두려워할 것이 없다. 사망은 마귀의 벌침과 같다. 하나님은 그 벌침을 뽑고 빈 무덤의 상징을 통해 말씀하신다. “얘야! 이제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사망의 침을 뽑았기에 어떤 것도 너를 해칠 수 없다.” 벌침이 뽑힌 벌은 곧 죽는다. 그처럼 침이 뽑혀 거의 죽어가는 마귀 앞에서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말라.

 

 빈 무덤에는 빈 세마포만 놓여 있었다. 그 빈 세마포는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이자 동시에 예수님이 유령이나 환상으로 부활하지 않고 몸으로 부활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몸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실 때 제자들과 함께 대화도 하셨고 같이 잡수시기도 하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어떤 신비한 기운이 아니라 2천년 전에 제자들과 함께 인격적으로 교제했듯이 지금도 나와 인격적인 교제를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도 예수님을 더 깊이 알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아는가?(Do I know Jesus?)”라는 질문을 삶의 평생 과제로 삼고 더욱 예수님을 알려고 하라. 그 질문은 “나는 예수님에 관해 아는가?(Do I know about Jesus?)”라는 질문과는 다르다. 누군가에 대해 알면서도 그를 진짜로 알지 못할 때가 많다. 대중이 대통령에 대해서는 많이 알아도 사실 대통령을 잘 알지 못한다. 직접 만나 사귄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접 만나면 더 잘 알 수 있다. 예수님과의 깊은 만남을 통해 더 깊이 예수님을 알려고 하라. 대통령을 만나기는 어려워도 예수님은 내가 원하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라 >

 

 본문 6절을 보면 천사가 여자들에게 나타나 말했다.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그 말대로 여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보았다. 그러자 예수님이 일전에 제자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혀 3일 만에 살아나신다고 하신 말씀(눅 18:31-34)이 기억나면서 비로소 모든 상황이 이해되고 부활이 믿어졌다. 그처럼 늘 성경 말씀을 기억하며 살라. 엄청난 체험과 깨달음이 있어도 그 체험과 깨달음을 말씀에 비춰보지 않으면 진리를 깨달았다고 하다가 교만해져서 사탄의 앞잡이가 될 수 있다.

 

 어느 날 마귀가 부하 귀신들과 함께 걷는데 저 앞에서 한 사람이 뭔가를 발견한 것처럼 밝은 표정을 했다. 한 귀신이 물었다. “대장님! 저 친구가 뭘 발견했나요?” 마귀가 대답했다. “음. 진리의 한 조각을 발견했어.” 귀신이 다시 물었다. “대장님! 저 친구가 진리의 한 조각을 발견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하지 않으세요?” 그때 마귀가 말했다. “전혀 불편하지 않네. 이제 저 친구가 자신이 발견한 그 작은 진리로 교회를 어떻게 만드는지 그냥 지켜보면서 저 친구만 잘 이용하면 많은 영혼을 망칠 수 있네.”

 

 무엇인가를 깨달았다고 생각할 때가 조심할 때다. 말씀에서 이탈한 체험은 성경적인 체험이 아니고 말씀에서 이탈해서 극단에 치우친 진리는 진리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이 담긴 인생 최대의 보고다. 그 성경 말씀을 항상 기억하되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주어진 속죄와 영생과 교제의 약속은 꼭 기억하며 살라. 세상 약속에는 빈 약속이 많아도 하나님의 약속에는 결코 빈 약속이 없다. 하나님은 반드시 성경의 약속대로 축복의 문을 열어주시고 영육 간에 강건함을 주시고 부활의 약속대로 부활하신 것처럼 재림의 약속대로 재림하실 것이다.

 

 2001년의 미국 메이저리그 월드 시리즈에서 4연패를 노리던 뉴욕 양키스와 창단 4년 만에 월드 시리즈에 진출한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가 만났다. 그때 7차전까지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다이아몬드백스가 우승했다. 그때 놀라운 역전 드라마가 연출되어 미국에서 2천 만 명 이상의 독자를 가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잡지는 그해 11월호에서 다이아몬드백스의 우승을 ‘최고의 컴백’이라고 표현하며 잡지 편집자들이 나름대로 ‘역사상 최고의 10가지 컴백’이란 리스트를 만들었다.

 

 그 리스트에는 1968년 TV 특별공연으로 화려하게 컴백한 엘비스 프레슬리, 베트남 전쟁 징병을 거부해 복싱 계에서 추방된 후 7년 만에 포먼을 누르고 화려하게 컴백한 무함마드 알리,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이 야구를 포기하고 농구선수로 컴백한 것 등이 포함되었다. 그 10가지 컴백 중 2번째 순위에는 2차 대전 후 황폐화된 독일과 일본이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컴백해서 경제적 부흥을 이룬 것이 선택되었고 첫째 순위를 차지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컴백으로는 ‘예수님의 부활’이 선정되었다.

 

 예수님은 2천 년 전에 컴백하셨고 조만간 다시 컴백하실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진실로 믿는다면 잠깐 실패했어도 다시 컴백의 의지를 다지라. 현재의 모습이 초라해도 나는 컴백할 수 있다고 믿으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컴백을 이루신 예수님을 진실로 믿으면 내게도 위대한 컴백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다. 죽음은 예수님을 무덤에 가두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죽음과 문제에 갇히지 않고 이생과 내생에서 승리의 역사를 이룰 수 있다.

 

 복음을 영어로 굿 뉴스(Good News)라고 하는데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한 굿 뉴스가 아니라 베스트 뉴스(Best News)다. 예수님의 부활로 담대히 내일을 맞이할 수 있고 내 인생은 살만한 인생이 된다. 참된 행복을 원하면 지금 다시 내 삶을 예수님께 드리겠다고 새롭게 결단하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다. 오늘 부활절을 맞이해 하나님께 내 삶을 드리겠다고 새롭게 다짐함으로 찬란한 내일의 축복을 예비하는 복된 심령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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