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1 설교 제목: “태초의 한 문장, 영원의 주권”
태초에. 인간의 말로는 끝내 다 닿지 못할 그 첫 단어가, 성경의 첫 문장에 조용히 서 있습니다. 우리의 시간은 뒤에서 앞으로 흐르지만, 하나님의 계시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옵니다. 우리는 시작을 묻고, 하나님은 시작을 주십니다. 우리는 “무엇이 먼저였는가”를 헤아리며 살지만, 하나님은 “내가 먼저다”라고 선포하십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단지 어떤 이야기가 시작되는 서문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이야기 위에 얹힌 왕관이며, 인간의 모든 사유를 꿰뚫는 창이며, 구속의 역사 전체를 떠받치는 기둥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한 문장은 인간의 교만을 뿌리째 흔듭니다. 왜냐하면 이 문장은 우리의 자리를 한 번에 결정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그 다음에 창조가 있습니다. 창조가 있고, 그 다음에 피조물이 있습니다. 피조물이 있고, 그 다음에 우리의 숨과 생각과 문화와 역사와 문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첫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설명하려 애쓸수록, 이 문장은 더 단호히 말합니다. “너는 시작이 아니다.” 우리가 시대를 해석하려 애쓸수록, 이 문장은 더 깊이 말합니다. “시대는 나로부터 왔다.” 우리가 고통을 해석하려 애쓸수록, 이 문장은 더 엄중히 말합니다. “너의 고통도 나의 주권 밖에 있지 않다.” 그리고 우리가 구원을 갈망할수록, 이 문장은 더 은혜롭게 속삭입니다. “너의 구원은 너에게서 시작되지 않는다.”
태초라는 말은 단지 ‘시간의 맨 앞’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시간 자체를 세우시는 자리, 시간의 강이 솟아나는 샘, 피조 세계의 시계가 처음으로 똑딱이기 시작하는 지점입니다. 이 지점에서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시간의 산물이 아니라 시간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늙지 않으시고, 약해지지 않으시며, 소진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오늘의 힘을 내일로 이월할 수 없어 지치고, 어제의 실패를 오늘로 가져와 무너지고, 내일의 두려움을 오늘로 당겨와 떨지만, 하나님은 시간에 쫓기지 않으십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는, 우리를 안심시키는 가장 신적인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너의 시간보다 크시다.”
“하나님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증명하려 들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소개하기보다, 하나님 앞에 우리를 세웁니다. 신학은 이 지점에서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논증의 결론이 아니라 계시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이”는 논리의 수평선이 아니라, 존재의 태양입니다. 그 앞에서 모든 피조물은 자기 그림자를 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필요에 의해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으시면서도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충격 앞에 서게 됩니다. 순수한 은혜의 첫 폭발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핍을 채우기 위해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광이시기에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주권이시기에 창조하셨습니다.
“창조하시니라.” 창조는 단순한 조립이 아닙니다. 이미 있는 재료를 가공한 것이 아니라, 없던 것을 있게 하신 하나님의 절대 행위입니다. 교회는 오래도록 이 진리를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로 고백해 왔습니다. 무(無)는 어떤 잠재적 재료가 아닙니다. 무는 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무 위에 말씀을 얹으시고, 존재를 부르십니다. 그래서 창조는 하나님의 자유를 증언합니다. 세상은 필연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의 산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이 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결국 “하나님이 원하셨기 때문이다”라는 거룩한 단순함으로 돌아옵니다. 그 단순함은 가난한 답이 아니라, 가장 깊은 답입니다. 왜냐하면 그 답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천지”는 전체를 뜻합니다. 하늘과 땅,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물질과 비물질, 높은 것과 낮은 것, 광대함과 미세함, 우주의 장엄함과 한 방울 눈물의 무게까지 포함하는 총체입니다. 하나님은 부분의 하나님이 아니라 전체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인생의 한 구석을 장식하는 취미가 아니라, 인생 전체를 재구성하는 왕권의 선포입니다. 우리가 주일에만 하나님을 모셔두고 평일에는 세속의 논리로 살아가려 할 때, 창세기 1장 1절은 조용히 그러나 결정적으로 우리의 분열을 찢어 놓습니다. “천지”를 지으신 분 앞에서, 우리의 삶은 ‘영역’으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가정도, 일터도, 재정도, 관계도, 욕망도, 상처도, 노년도, 죽음도—모두 창조주 앞에 놓입니다.
이 지점에서 개혁주의 신학이 가진 고유한 맥박이 뛰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만 계시지 않고, 섭리하시는 주로서 계십니다. 창조는 한 번의 사건으로 끝난 과거가 아니라, 지금도 유지되고 지탱되는 현실입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독립적으로 굴러가는 톱니바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붙드실 때 숨 쉬고, 하나님이 허락하실 때 움직이고, 하나님이 정하실 때 목적을 향해 흘러갑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은 섭리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창조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고백이야말로 불안의 시대에 성도에게 주어지는 가장 깊은 평안입니다. 세상이 흔들려도, 창조주의 손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시장이 요동쳐도, 창조주의 뜻은 요동치지 않습니다. 인간의 권력이 교만하게 굴어도, 창조주의 보좌는 조금도 낮아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를 단지 우주의 장엄함 속에 세워 감탄하게만 만들지 않습니다. 성경의 창조 고백은 언제나 구속으로 흐릅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첫 창조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새 창조를 예표합니다. “태초”는 요한복음 1장의 “태초”로 이어지고, “하나님이”는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로 확장되며, “창조하시니라”는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라는 고백으로 더 밝아집니다. 창조의 빛은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빛을 명하셨다면, 복음에서는 우리의 심령에 빛을 명하십니다. 처음에 혼돈과 공허 위에 말씀이 임했다면, 구원에서는 죄와 절망 위에 말씀이 임합니다. 처음 창조에서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면, 새 창조에서 성령이 죽은 영혼 위에 운행하십니다. 창세기 1장 1절이 단지 자연신학의 출발점이 아니라, 구속사 전체의 첫 음표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칼빈주의적 복음주의는 창조를 말할 때 인간의 자율성을 해체합니다. 우리의 구원도 창조와 같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할 재료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죄와 무능과 변명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부르시듯, 무력한 죄인에게 믿음을 창조하십니다. 이것이 중생의 신비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불가항력입니다. 이것이 “오직 은혜”의 심장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우리 손에 맡겨 불안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당신의 손에 붙들어 안전하게 하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성이, 구원주 하나님의 신실함으로 우리에게 도착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확신은 자기 감정의 강도에서 오지 않고, 창조주와 구속주의 성품에서 옵니다.
한편 “하나님이 천지를”라는 말은 우상을 무너뜨립니다. 우상은 언제나 피조물을 창조주 자리에 앉힙니다. 돈을, 명예를, 혈통을, 심지어 교회라는 이름을. 인간은 자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기보다, 하나님을 이용 가능한 도구로 낮추려 합니다. 더 끔찍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면서도 실제로는 돈과 성공을 ‘태초’로 삼는 경우입니다. 내 마음의 첫 자리, 내 판단의 첫 기준, 내 두려움의 첫 원인, 내 기쁨의 첫 목표가 무엇입니까. 창세기 1장 1절은 그 첫자리를 다시 정렬합니다. “태초에 하나님.” 이것은 예배의 질서를 회복하는 선포입니다. “너의 시작을 바꿔라. 너의 기준을 바꿔라. 너의 주인을 바꿔라.”
여기서 목회는 학문과 만납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신학적으로는 존재론과 인식론의 토대를 제공하고, 목회적으로는 삶의 의미와 고난의 해석을 제공합니다. 존재론적으로, 우리는 우연의 찌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로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존엄은 성취가 아니라 창조에서 나옵니다. 늙어도 존엄하고, 병들어도 존엄하며, 약해도 존엄합니다. 왜냐하면 그 존엄은 기능에서 나오지 않고 창조주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인식론적으로,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을 알아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셔야 압니다. 그러므로 학문은 교만할 수 없고, 신학은 겸손해야 하며, 설교는 계시의 빛 아래서만 안전합니다. 목회적으로, 고난은 무의미한 난파가 아니라, 창조주께서 섭리로 다루시는 길입니다. 물론 우리는 고난의 모든 이유를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유를 다 알지 못해도, 주권자를 안다는 사실로 견딜 수 있습니다.
예화 하나를 들겠습니다. 한 장인이 오래된 바이올린을 수리하는데, 그 악기는 겉이 갈라지고, 울림판은 뒤틀리고, 줄은 끊어져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말했습니다. “이건 끝났어요. 버려요.” 그러나 장인은 조용히 악기를 가져와 분해하고, 내부를 살피고, 나무를 다듬고, 접착하고, 다시 조율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악기에서 놀랍도록 맑은 소리가 났습니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소리가 다시 나죠?” 장인은 대답했습니다. “이 악기는 스스로를 고칠 수 없어요. 하지만 누가 만들었는지, 어떤 소리를 내도록 설계되었는지 아는 손이 붙들면, 다시 노래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그렇습니다. 죄는 우리를 갈라지게 하고, 상처는 우리를 뒤틀리게 하고, 세월은 우리를 낡게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수리’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은 말합니다. 우리를 지으신 손이 계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손이 계시며, 마침내 우리를 영광으로 조율하시는 손이 계십니다. 창조의 손은 구속의 손으로 이어지고, 구속의 손은 새 창조의 손으로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세기 1장 1절 앞에서 두 가지 눈물을 흘립니다. 하나는 회개의 눈물입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었는데, 내가 주인처럼 살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위로의 눈물입니다. “내 인생이 혼돈 같아도, 창조주께서 여전히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눈물은 결국 예배의 눈물로 합쳐집니다. “태초에 하나님.” 이것은 신학의 문장이기 이전에, 경배의 문장입니다.
이 말씀은 또한 교회의 정체성을 정결하게 합니다. 교회는 어떤 인간 집단의 성공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교회는 창조주께서 부르신 새 인류의 씨앗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세상의 방식으로 존재하려 할 때—권력으로 세습하고, 황금으로 영혼을 달래고, 겉모양으로 신앙을 평가하고, 성도를 소비자로 만들고, 강단을 브랜드로 포장할 때—교회는 창조주를 잃고 피조물을 섬기는 우상숭배로 기울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교회를 처음으로 돌려보냅니다. “하나님이.” 교회의 시작은 인간의 야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교회의 운영은 세상의 논리가 아니라 말씀의 주권 아래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힘은 돈이 아니라 복음입니다. 교회의 영광은 사람의 칭찬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그리고 개인의 삶에도 동일합니다. 우리는 자주 “내가 내 인생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너는 만들어진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 말은 운명론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목적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내 삶의 작은 조각들도 그 목적의 큰 직조 안에 들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시간에도, 하나님은 결코 일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태초에만 창조하신 분이 아니라, 지금도 성도를 빚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먼 과거의 신이 아니라, 오늘의 주님이십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씀은 죽음을 바라보는 눈을 바꿉니다. 죽음은 창조의 반대처럼 보입니다. 생명을 해체하고, 관계를 끊고, 시간을 끝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자에게 죽음은 최종 권력이 아닙니다. 창조주께서 무에서 유를 부르셨다면, 무덤에서도 생명을 부르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은 창조의 연장선이며, 새 하늘과 새 땅은 창조의 완성입니다. 성도는 죽음 앞에서 허세를 부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슬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하나님이, 요한계시록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태초의 하나님이, 종말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시작하신 분이 끝내실 것이며, 창조하신 분이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의 삶이 혼돈하고 공허하다고 느껴질 때, 창세기 1장 1절로 돌아오십시오. 기도가 말라붙을 때, 이 한 문장을 천천히 되뇌십시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 문장은 단지 과거를 설명하지 않고, 오늘을 붙듭니다. 그 문장은 단지 우주를 가르치지 않고, 마음을 다시 창조합니다. 그 문장은 단지 철학을 이기지 않고, 죄를 꺾습니다. 그 문장은 단지 지식을 세우지 않고, 예배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그 문장의 끝에는, 창조의 빛이 아니라 구속의 빛으로 완성된 얼굴—그리스도의 얼굴이 있습니다. 창조는 그리스도에게로 흐르고, 그리스도는 새 창조로 우리를 데려가십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시작을 다시 받고, 목적을 다시 받고, 끝을 다시 받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다면, 오늘도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요약
- 창 1:1은 성경 전체의 토대이자 구속사(창조-타락-구속-완성)의 첫 문장이다.
- “태초”는 시간의 시작이자 하나님이 시간 위에 계심을 선포한다.
- “하나님이”는 논증의 결론이 아니라 계시의 출발이며 예배의 중심이다.
- “창조”는 무로부터의 창조로서 하나님의 자유·주권·영광을 드러낸다.
- 창조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로 이어지며(요 1:1–3, 골 1:16, 히 11:3),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의 역사다.
- 교회와 성도는 피조물을 우상화하는 시대정신(권력·황금·성공)을 거부하고 “태초에 하나님”으로 질서를 회복해야 한다.
묵상 포인트
- 내 삶의 “태초”(첫 기준·첫 두려움·첫 소망)는 무엇인가?
- 나는 하나님을 ‘필요 충족’의 도구로 쓰고 있지 않은가, 아니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경배하는가?
- “천지”를 지으신 주권 앞에서, 내가 예외로 남겨두는 영역(돈, 관계, 분노, 습관, 계획)은 무엇인가?
- 무에서 유를 부르시는 하나님이 내 심령의 혼돈에도 말씀하실 수 있음을 믿는가?
- 창조의 하나님이 구속의 하나님이심을 붙들며, 오늘의 두려움을 어떤 기도로 바꿀 것인가?
강해
창 1:1은 서사적 도입을 넘어 신학적 선언이다. 문장은 하나님-행위-대상(주어-동사-목적어) 구조로 단단히 서 있다. 주어는 하나님, 동사는 창조, 목적어는 천지다. 인간은 어디에도 끼어들 자리가 없다. 이 배치는 은혜의 질서를 미리 확정한다. 하나님이 먼저이고, 그 다음이 세계이며, 그 다음이 인간이다. 따라서 인간의 지식·문화·종교도 하나님보다 앞설 수 없다. 이 절은 우주론이면서 동시에 예배학이며, 존재론이면서 동시에 구원론의 전주다. “태초”는 시간의 기원을, “하나님”은 존재의 근원을, “창조”는 모든 현상의 궁극 원인을, “천지”는 통치 범위를 선포한다. 또한 정경적 읽기에서 창세기의 “태초”는 요한복음의 “태초”로 연결되어, 창조의 매개가 말씀(로고스)임을 밝힌다. 곧 창 1:1은 삼위 하나님의 창조 사역(성부의 뜻, 성자의 말씀, 성령의 운행)을 향해 열려 있다. 이때 구속사적 흐름은 “첫 창조”에서 “새 창조”로 이동한다. 구원은 인간이 자기 재료를 제공하는 협업이 아니라, 무에서 유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창조적 은혜다.
주석
- “태초에”: 단순한 연대기적 시작이 아니라 피조 시간의 개시를 가리킨다. 하나님은 시간 안에 갇히지 않으시며, 시간의 원인으로서 시간 위에 계신다.
- “하나님이”: 엘로힘(복수형 형태) 사용은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내며, 정경 전체에서 삼위 하나님의 계시로 확장될 여지를 제공한다.
- “창조하시니라”: 바라(bārā’)는 하나님을 주어로 취하는 창조 동사로 자주 사용되며, 하나님의 독특한 창조 행위를 강조한다.
- “천지”: 메리즘(양끝 표현으로 전체를 포괄)으로 우주 전체를 의미한다. 하늘과 땅은 모든 영역의 총체를 가리켜, 하나님의 주권이 전 영역적임을 드러낸다.
(히브리어-구약) 원어 주석
- בְּרֵאשִׁית (berē’šît) “태초에/처음에”: 전치사 בְּ(~에) + רֵאשִׁית(시작). ‘처음’ 자체가 하나님과 동등한 어떤 실체가 아니라, 창조 사건에 의해 성립되는 시작임을 시사한다.
- בָּרָא (bārā’) “창조하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주어로 자주 쓰이며, 피조 세계의 기원을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로 고정한다.
- אֱלֹהִים (’ĕlōhîm) “하나님”: 형태는 복수이나 의미는 단수로 쓰이는 경우가 일반적이며, 위엄/존귀를 표현하는 용례로 이해된다.
- אֵת (’ēt) 목적격 표지: “하늘과 땅”이 창조 행위의 직접 대상임을 문법적으로 못 박는다.
- הַשָּׁמַיִם (haššāmayim) “하늘들”: 복수형. 광대함과 층위를 암시하는 표현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 הָאָרֶץ (hā’āreṣ) “땅”: 인간의 거처이자 역사 무대의 총칭.
(헬라어-신약) 원어 주석
창 1:1 자체는 히브리어 본문이지만, 신약과의 정경적 연결을 위해 LXX(칠십인역) 및 신약의 “태초” 개념을 함께 본다.
- LXX 창 1:1: ἐν ἀρχῇ ἐποίησεν ὁ θεὸς τὸν οὐρανὸν καὶ τὴν γῆν
- ἐν ἀρχῇ (en archē) “태초에”: 요 1:1의 동일 표현과 강하게 공명한다.
- 요 1:1: ἐν ἀρχῇ ἦν ὁ λόγος
- λόγος (logos) “말씀”: 창조의 매개이자 계시의 중심. 창조가 곧 말씀의 사건임을 밝힌다.
- 히 11:3: καταρτίζω(정돈하다/지어지다) 계열 표현을 통해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님”을 선언하며, 창조 신앙이 믿음의 토대임을 강조한다.
금언
- “창조를 믿는다는 것은, 내 삶의 첫 자리를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일이다.”
- “무에서 유를 부르시는 하나님은, 절망에서 소망을 부르시는 하나님이시다.”
- “피조물의 빛은 꺼져도, 창조주의 말씀은 꺼지지 않는다.”
- “태초의 주권은 오늘의 평안으로 내려온다.”
- “창조의 시작은 예배의 시작이며, 구원의 시작은 은혜의 시작이다.”
신학적/주제별/목회적 정리
- 신학적: 창 1:1은 하나님 중심(신론), 무로부터의 창조(창조론), 전 영역 주권(섭리), 정경적 연결(그리스도 중심의 창조/새 창조)로 확장된다.
- 주제별: 시작/기원, 주권, 예배의 질서, 우상 타파, 인간 존엄(기능이 아니라 창조), 새 창조(복음)라는 주제들이 응집된다.
- 목회적: 불안과 혼돈 속에서 “하나님이 먼저”라는 질서가 치유를 낳는다. 교회가 세속적 성공 논리에 매이기 쉬운 시대에, 창조주 신앙은 교회를 정결하게 하고 성도를 담대하게 한다.
성도들의 결단 및 적용
- 매일의 첫 시간을 “태초에 하나님”으로 열기(짧아도 좋으니, 하루의 ‘첫 기준’을 하나님께 드리는 실제).
- 삶의 분열을 회개하기(신앙을 주일 장식으로 두지 말고 재정·관계·시간·습관을 말씀 아래 재배치).
- 우상 점검(내가 가장 자주 계산하는 것, 가장 두려워하는 것, 가장 집착하는 것이 무엇인지 적어보고 하나님 앞에 내려놓기).
- 고난 해석의 전환(“왜 나에게”에서 “주권자께서 나를 어디로 빚으시는가”로 질문을 바꾸기).
- 교회를 위한 기도(복음의 순수성, 강단의 거룩함, 물질주의·권력주의의 유혹에서 지켜 달라고 간구).
𝓕𝓾𝓵𝓵 𝓢𝓸𝓾𝓻𝓬𝓮 : 𝓐𝓻𝓽𝓲𝓯𝓲𝓬𝓲𝓪𝓵 𝓘𝓷𝓽𝓮𝓵𝓵𝓲𝓰𝓮𝓷𝓬𝓮
'◑ 바른 이해편◑ > 종합 전체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가르침으로 세우는 부모 (잠언 22:6) (0) | 2026.02.15 |
|---|---|
| 낳고 기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사야49:15). (0) | 2026.02.15 |
| 참뜻을 열어 주시는 주 (누가복음 24:45). (0) | 2026.02.12 |
| 지혜로 꿈을 해석함 (창세기 41:15–16). (0) | 2026.02.12 |
| 예언을 밝히 해석함 (베드로후서 1:20). (0) | 2026.02.1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