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으로 세우는 부모 (잠언 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이 한 절은 부모의 마음을 환하게도, 동시에 두렵게도 비춘다. 환한 것은 길이 있기 때문이다. 두려운 것은 그 길이 “우리의 취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땅하심” 위에 세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녀를 사랑한다 말하면서도, 사랑의 이름으로 내 불안을 주입하기도 하고, 성공의 이름으로 내 욕망을 전수하기도 하며, 안전의 이름으로 하나님 없는 평안을 강요하기도 한다. 그러나 잠언은 말한다. 아이에게 길을 “가르치라.” 여기서 길은 단순한 생활 습관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사람으로 서는 길이며, 언약 안에서 은혜로 숨 쉬는 길이며, 결국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길이다.
부모의 가르침은 말 몇 마디의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인생관을 넘겨주는 일이요, 경배의 방향을 심어주는 일이요, 죄와 은혜를 해석하는 렌즈를 씌워주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단지 “교육”을 말하지 않는다. 더 깊이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한 세대를 다음 세대로 이어 붙이실 때, 부모라는 연약한 존재를 도구로 삼아 언약의 길을 전수하시는 구속사의 방식이 이 안에 숨 쉬고 있다. 부모는 구원자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모를 “통로”로 부르신다. 부모는 은혜의 근원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모의 입술과 삶을 “수단”으로 사용하신다. 부모는 자녀의 미래를 소유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모에게 “오늘”을 맡기신다. 오늘의 작은 가르침이 내일의 큰 습관이 되고, 내일의 습관이 평생의 길이 되며, 그 길 위에서 하나님이 친히 붙드시는 은혜가 떠나지 않게 하신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씨앗을 심는 일이 아니라, 씨앗이 자랄 “밭”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가꾸는 일이다. 밭은 말로 갈지 않는다. 밭은 삶으로 갈린다. 아이는 부모가 무엇을 말하는지보다, 부모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를 더 빨리 배운다. 아이는 부모가 무엇을 가르치는지보다, 부모가 무엇을 예배하는지를 더 정확히 읽는다. 그러므로 부모의 가르침은 결국 부모 자신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회개의 길을 포함한다. 자녀의 길을 가르치려면, 먼저 부모의 길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 위에 서야 한다. 부모가 진리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자녀에게 진리를 사랑하라 할 수 없고, 부모가 은혜를 누리지 않으면서 자녀에게 은혜를 의지하라 할 수 없고, 부모가 십자가를 피하면서 자녀에게 십자가를 지라 할 수 없다.
첫째, 이 말씀은 “마땅한 길”이 인간이 발명한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길임을 전제한다. “마땅히 행할 길”은 시대마다 변하는 유행의 도덕이 아니다. 그것은 창조의 질서에 합당하고, 타락의 현실을 직시하며, 구속의 은혜를 의지하고, 영화의 소망을 바라보는 길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는 방향이 있다. 방향은 하나님께로 향한다. 타락 이후 인간은 그 방향을 잃어버렸고, 길을 잃은 인간은 스스로 길이 되려 한다. 그러므로 아이의 마음에도 죄의 씨앗이 있다. 아이는 순수한 백지로 태어나지 않는다. 아이는 작고 연약하지만, 그 작은 마음에도 하나님을 밀어내려는 본성이 꿈틀거린다. 그래서 부모의 가르침은 “나쁜 습관 교정”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죄의 굴절을 바로잡고, 마음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영적 사역이다. 여기서 칼빈주의적 통찰이 빛난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고, 그러므로 가정도 은혜 없이는 거룩한 교육을 이룰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은혜로 역사하셔서, 부모의 연약한 손을 붙드시고, 말씀과 기도로 아이의 마음을 새롭게 하신다. 부모는 결과를 통제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수단을 명하신다. 그 수단은 “가르침”이다. 말씀을 들려주고, 말씀을 해석해주고, 말씀을 삶으로 번역해주는 가르침. 그러므로 부모는 두 극단을 피해야 한다. 하나는 “내가 다 해야 한다”는 율법주의적 압박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하시니 나는 상관없다”는 무책임한 운명론이다. 개혁신학은 말한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되, 수단을 통해 역사하신다. 가정에서의 가르침은 그 수단의 중심에 있다.
“가르치라”는 말은 단지 지식을 전달하라는 뜻이 아니다. 아이를 “훈련하라”, “전념시키라”, “헌신시키라”는 의미가 포함된다. 길을 설명만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길 위에 세우고, 걷게 하고, 넘어지면 일으키고, 방향을 다시 잡아주라는 뜻이다. 부모가 아이의 인생을 대신 걸어줄 수는 없지만, 아이가 걸어야 할 길이 무엇인지 분명히 보여줄 수는 있다. 그리고 그 길은 단지 “착한 아이”의 길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길이다. 경외는 감정이 아니라 중심이다. 하나님을 가장 무겁게 여기는 마음, 하나님을 가장 실제로 두는 삶, 하나님을 가장 마지막 기준으로 삼는 선택. 이것이 아이에게 심겨야 한다.
둘째, 이 말씀은 “아이의 고유함”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진리의 보편성”을 포기하지 않게 한다. “아이에게” 가르치라. 아이는 어른의 축소판이 아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독특한 인격이며, 고유한 기질과 재능과 한계와 상처의 가능성을 가진 존재다. 그래서 부모는 아이를 “한 모델”로 찍어내려는 우상숭배를 버려야 한다. 자녀가 내 자존심을 세워주는 트로피가 될 때, 부모의 가르침은 사랑이 아니라 폭력이 된다. 그러나 또 한편, 아이의 개성이라는 이름으로 진리를 상대화해서도 안 된다. 아이가 어떤 기질을 가졌든지,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는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아이가 어떤 재능을 가졌든지, 죄를 미워하고 은혜를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는 바뀌지 않는다. 아이가 어떤 시대를 살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는 부르심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부모의 지혜는 “길은 하나”이되 “가르침의 방식은 다양”해야 한다는 데 있다. 같은 진리를, 아이의 이해력에 맞게 풀어주고, 같은 복음을, 아이의 상처를 고려해 들려주며, 같은 계명을, 아이의 상황을 살펴 적용해주어야 한다. 아이가 넘어지는 지점은 다르다. 어떤 아이는 두려움으로 무너지고, 어떤 아이는 교만으로 무너지고, 어떤 아이는 인정욕구로 흔들리고, 어떤 아이는 분노로 폭발한다. 부모는 아이의 죄를 단지 “나쁜 행동”으로만 보지 말고, 그 행동 아래에 숨은 마음의 욕망과 두려움을 읽어야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복음이 무엇을 말하는지 들려줘야 한다. “너는 왜 그랬니?”라는 추궁만으로는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니?” “예수님이 너를 위해 무엇을 하셨니?” “그 은혜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돌이켜야 하니?” 이런 질문들이 아이의 영혼에 길을 낸다. 훈계는 죄를 드러내되, 절망으로 몰지 않아야 한다. 사랑은 품되, 죄를 정당화하지 않아야 한다. 복음은 죄를 가볍게 만들지 않으면서도, 회개의 문을 넓게 연다.
셋째, 이 말씀은 “지속의 약속”을 주지만, 그 약속을 자동장치로 오해하지 않게 한다. “늙어도 떠나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부모에게 소망의 문장이다. 그러나 이 문장을 기계적으로 읽으면 큰 상처가 된다. 잠언은 보통의 원리를 말할 때가 많다.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 속에서, 경외의 교육이 아이의 삶에 깊게 새겨지는 일반적 원리를 말한다. 동시에 우리는 성경 전체가 말하는 더 큰 틀을 들어야 한다. 구원은 교육의 결과가 아니라 은혜의 선물이다. 그러나 은혜는 교육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은혜는 교육을 통로로 삼아 역사하신다. 부모는 “결과”를 움켜쥐려 하지 말고, “순종”을 붙들어야 한다. 하나님은 부모에게 자녀의 마음을 완벽히 통제하는 능력을 주신 적이 없다. 다만 하나님은 부모에게 가르칠 책임을 주셨다. 책임은 내 몫이지만, 열매는 하나님의 몫이다. 그렇다고 열매를 기대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기대하되, 하나님께 맡기라는 뜻이다. 기대하되, 우상이 되지 않게 하라는 뜻이다. 기대하되, 기도가 끊기지 않게 하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구속사적 시야가 필요하다. 하나님은 한 가정을 통해 한 민족을 부르셨고, 한 언약을 통해 한 백성을 세우셨으며, 마침내 한 아들을 보내어 모든 민족 가운데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다. 가정은 구속사의 작은 무대다. 부모는 왕이 아니라 청지기다. 아이는 내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업이다. 그래서 가정의 목표는 “세상에서 잘 되는 아이”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다. 세상이 요구하는 스펙과 성공은 언제든 바뀌지만, 하나님께 속한 사람의 정체성은 흔들리지 않는다. 부모의 가르침은 아이를 세상에 적응시키는 기술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세우는 제자훈련이다. 제자훈련은 언제나 십자가의 향기를 가진다. 때로 아이는 “왜 나는 이것을 못 하게 해?”라고 묻고, “왜 우리 집은 이것을 안 해?”라고 불평할 것이다. 그때 부모는 단지 금지의 이유를 설명하는 관리자가 아니라, 십자가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더 좋은 기쁨을 위해, 더 큰 자유를 위해, 더 깊은 사랑을 위해, 예수님을 따라 이 길을 택한다.” 아이가 그 말을 단지 언어로만 듣지 않도록, 부모의 삶에서 그 열매를 보여주어야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예화를 들어보자. 어느 집에 아들이 있었다. 공부를 곧잘 했고, 무엇이든 빨리 배웠다. 그러나 마음이 쉽게 무너졌다. 작은 실패에도 자기를 혐오했고, 칭찬이 없으면 자기 존재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늘 말했다. “넌 최고가 돼야 한다.” 어머니는 늘 말했다. “사람들한테 인정받아야 한다.” 아이는 그 말을 사랑으로 들었다. 사랑이니까 더 무거웠다. 그리고 어느 날, 아이는 성적표를 손에 쥐고 방 안에 숨어 울었다. 그때 교회에서 한 권사님이 아이에게 조용히 물었다. “너는 성적표가 너를 말해준다고 믿니?”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권사님은 다시 물었다. “그럼 십자가는 너를 말해주지 않니?” 아이는 말문이 막혔다. 권사님은 아주 짧게 말했다. “십자가는 네가 사랑받기 위해 잘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사랑받기에 돌이켜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말해줘.” 그날 이후 부모는 바뀌기 시작했다. 칭찬을 줄이거나 규칙을 바꾼 것이 아니라, 언어의 중심이 바뀌었다. “잘했어”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너는 성적보다 더 크고, 너는 성공보다 더 귀하고, 너는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산 존재야”라는 고백이 그 집의 공기가 되었다. 아이는 즉시 완벽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나는 이유가 생겼다. 부모가 아이에게 준 것은 목표가 아니라 복음의 기초였다. 그리고 그 기초 위에서 아이의 길이 조금씩 “떠나지 않는 길”로 굳어졌다.
부모의 가르침에서 중요한 것은 “말씀의 집요함”과 “은혜의 부드러움”이 함께 가는 것이다. 말씀은 집요하다. 죄를 덮지 않는다. 하나님 없는 욕망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은혜는 부드럽다. 회개의 가능성을 닫지 않는다. 넘어짐을 끝으로 선언하지 않는다. 부모가 말씀만 집요하면 아이는 숨는다. 부모가 은혜만 부드러우면 아이는 흐른다. 말씀과 은혜가 함께 갈 때 아이는 서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그리스도가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 없는 도덕은 아이를 자기 의로 만들거나 자기 혐오로 만든다. 그리스도 없는 성공교육은 아이를 자랑의 노예로 만들거나 불안의 노예로 만든다. 그러나 그리스도 있는 가르침은 아이에게 “나는 주님께 속했다”는 해방을 준다. 그 해방이 결국 길이 된다.
부모가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첫째,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은 아이의 소원을 들어주는 소원성취자가 아니라, 창조주요 주권자요 아버지시다. 하나님은 도덕 경찰이 아니라, 거룩과 사랑이 동시에 완전한 분이시다. 둘째, 사람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귀하나, 죄로 깊이 부패했다. 그러므로 자기 마음을 신뢰하는 것은 지혜가 아니라 위험이다. 셋째, 죄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야 한다. 죄는 규칙 위반을 넘어,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지 않는 마음의 반역이다. 넷째, 복음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의를 주시고, 성령을 보내어 새 길을 걷게 하신다. 다섯째, 교회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야 한다. 교회는 종교 서비스가 아니라, 말씀과 성례와 공동체 훈련 속에서 자라게 하는 하나님의 집이다. 여섯째, 삶이 무엇을 향하는지를 가르쳐야 한다. 우리의 종착지는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다. 우리의 소망은 오늘의 성취가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이다.
그러나 이 모든 가르침은 강의실의 문장으로만 남아서는 안 된다. 아이가 보는 것은 가정의 예배다. 가정의 예배는 무엇으로 드러나는가. 돈을 대할 때 드러난다. 실패를 대할 때 드러난다. 다툼을 해결할 때 드러난다. 약자를 대할 때 드러난다. 교회를 이야기할 때 드러난다. 용서를 구할 때 드러난다. 부모가 아이에게 사과하는 장면은 가르침의 정점이다. “아빠도 죄인이다. 엄마도 은혜가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 돌아간다.” 그 한마디가 아이의 마음에 복음을 새긴다. 부모가 완벽하기 때문이 아니라,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에 아이는 길을 배운다. 돌아갈 곳—그리스도의 십자가. 그곳은 부모도, 아이도 함께 무릎 꿇는 자리다. 그 자리에서 가정은 비로소 “가르침으로 세워진다.”
그리고 마침내 가르침의 목표는 아이가 부모를 닮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 부모는 언젠가 아이의 인생에서 뒤로 물러나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아이의 인생에서 결코 물러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기 영향력을 영원히 유지하려 하지 말고, 아이가 하나님 앞에서 홀로 서도록 도와야 한다. 아이가 기도할 수 있도록, 말씀이 스스로 읽히도록, 죄를 스스로 고백할 수 있도록, 교회를 스스로 사랑하도록, 복음을 스스로 붙들도록 길을 내줘야 한다. 부모가 붙드는 것은 아이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어야 한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이 약속이 부모에게 먼저 붙들릴 때, 부모의 가르침은 조급함을 잃고, 두려움을 내려놓고, 더 깊은 인내와 소망을 품는다. 그리고 그 소망이 아이에게 전해진다.
요약
- 잠언 22:6은 부모가 자녀에게 “하나님이 정하신 마땅한 길”을 전수하라는 언약적 요청이다.
- 가르침은 단순 지식 전달이 아니라, 삶으로 길을 내고 복음으로 마음의 방향을 돌리는 제자훈련이다.
- 칼빈주의/개혁주의 관점에서: 구원은 은혜이지만, 하나님은 가정의 가르침이라는 “수단”을 통해 역사하신다.
- “늙어도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자동장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 속 일반적 원리이자 부모에게 주시는 소망의 약속으로 붙들어야 한다.
- 목표는 ‘성공한 아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며, 부모는 결과가 아니라 순종과 기도를 붙든다.
묵상 포인트
- 나는 자녀에게 “하나님의 길”을 가르치고 있는가, 아니면 “나의 불안과 욕망의 길”을 주입하고 있는가?
- 자녀가 넘어질 때 나는 정죄로 몰아가는가, 아니면 죄를 직면시키되 복음으로 회복의 길을 내는가?
- 우리 집의 일상(돈, 실패, 말투, 용서, 교회)에 드러나는 “예배의 대상”은 누구인가?
- 내가 자녀에게 가장 자주 반복하는 말은 무엇이며, 그 말은 복음을 드러내는가?
- 내가 자녀에게 사과하고 회개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최근에 있는가?
강해
- 본문은 부모의 책임을 강조하면서도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을 배경으로 한다.
- “가르치라”는 말은 시작(헌신/전념)과 지속(훈련/형성)의 뉘앙스를 품는다. 즉, 가르침은 사건이 아니라 과정이다.
- “길”은 단순 규칙이나 생활요령이 아니라 하나님 경외의 방향성이다. 잠언 문맥상 지혜는 곧 여호와 경외에서 시작한다.
- 교육의 핵심은 행동 교정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 전환이며, 그 전환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 가정은 작은 교회이며, 부모는 말씀을 삶으로 번역하는 “가정의 목회자적 청지기”로 부름 받는다(권위가 아니라 섬김의 형태로).
주석
- 잠언은 “경험적 지혜”로서 삶의 일반 원리를 제시한다. 그러므로 본절은 마술적 보장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아래에서 경외 교육의 지속적 힘을 선언한다.
- “마땅한 길”은 상대적 윤리가 아니라, 창조-타락-구속-완성의 큰 이야기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 본절은 부모에게 신앙교육의 책임을 부여하되, 결과의 주권을 하나님께 돌리게 하여 율법주의와 방임주의를 함께 경계한다.
(히브리어-구약) 원어 주석
- “가르치라”로 번역된 표현은 히브리어 동사 חנך (ḥānak / ḥinnēḵ) 계열로 이해되며, ‘봉헌하다/전념시키다/훈련시키다’의 뉘앙스를 포함한다(단순 설명이 아니라 방향 설정과 습관 형성).
- “아이”는 **נַעַר (naʿar)**로, 어린아이부터 청소년까지 폭넓게 지칭 가능하여, 가르침이 유아기에만 끝나지 않는 지속적 사역임을 시사한다.
- “길”은 **דֶּרֶךְ (dereḵ)**로, 단순한 선택지 하나가 아니라 삶 전체의 행로·방식·세계관을 뜻한다.
- “마땅히 행할”로 흔히 이해되는 구절은 עַל־פִּי דַרְכּוֹ (ʿal-pî darkô) 구조로 읽히며, ‘그 길의 기준/입에 따라’라는 표현이 포함되어, (1) 하나님의 정하신 기준에 따른 길, (2) 아이의 상태를 고려한 적용이라는 두 측면을 함께 성찰하게 한다(진리는 변치 않되 적용은 지혜가 필요).
(헬라어-신약) 원어 주석
- 본문 자체는 구약이지만, 신약의 부모-자녀 교훈과 연결될 때 복음적 균형이 선명해진다.
- 예: “주의 교훈(παιδεία, paideia) 과 훈계(νουθεσία, nouthesia) 로 양육하라”(엡 6:4)에서 paideia는 훈련/형성 전반, nouthesia는 마음을 바로 세우는 권면을 뜻해, 잠언 22:6의 “가르침”이 지식 전달을 넘는 전인적 형성임을 뒷받침한다.
금언
- “가르침은 말이 아니라 방향이며, 방향은 결국 예배다.”
- “부모는 결과를 쥐는 손이 아니라, 약속을 붙드는 무릎이다.”
- “그리스도 없는 훈계는 정죄가 되고, 말씀 없는 사랑은 방임이 된다.”
- “아이의 길을 내기 전에, 부모의 길이 먼저 회개로 닦여야 한다.”
- “가정은 작은 교회이고, 부모의 언어는 아이의 신학이 된다.”
신학적 / 주제별 / 목회적 정리
- 언약신학적 관점: 자녀는 하나님의 기업이며, 가정은 언약의 전승이 이루어지는 장이다. 부모의 가르침은 ‘구원의 원인’이 아니라 ‘은혜의 수단’으로 자리한다.
- 인간론(전적 타락): 아이의 문제는 단지 습관이 아니라 마음의 죄성이다. 따라서 교육은 도덕 개선이 아니라 복음 중심의 회심적 방향 전환을 목표로 한다.
- 성화론: 길을 “떠나지 않음”은 성령의 역사 아래 반복과 훈련을 통해 형성되는 습관적 순종의 열매로 이해된다.
- 교회론: 가정교육은 교회교육과 경쟁하지 않는다. 말씀과 성례와 공동체 훈련 안에서 가정이 함께 서야 한다.
- 목회적 균형: 실패한 날에도 부모는 회개로 돌아서며, 자녀에게 복음의 “귀환로”를 가르친다(사과, 용서, 기도, 말씀으로 돌아감).
성도들의 결단 및 적용
- 오늘부터 우리 가정의 목표를 “성공”이 아니라 “경외”로 다시 세우겠습니다.
- 자녀가 죄를 드러낼 때, 정죄로 몰지 않고 복음으로 회개의 길을 열겠습니다.
- 하루의 일정 속에 짧더라도 말씀과 기도가 스며드는 리듬을 세우겠습니다(길은 사건이 아니라 습관이므로).
- 부모인 내가 먼저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모습을 자녀에게 숨기지 않겠습니다.
- 교회를 소비하지 않고, 자녀와 함께 교회를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살겠습니다.
- 결과의 불안을 내려놓고, 순종과 기도를 붙들며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신뢰하겠습니다.
𝓕𝓾𝓵𝓵 𝓢𝓸𝓾𝓻𝓬𝓮 : 𝓐𝓻𝓽𝓲𝓯𝓲𝓬𝓲𝓪𝓵 𝓘𝓷𝓽𝓮𝓵𝓵𝓲𝓰𝓮𝓷𝓬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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