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님께서 지옥에 내려가시다 Dr. A. H. Bogaards trans. by Seok-Jun Yun 저자 Dr. Arie (Attie) Hendrik Bogaards는 남아프리카 개혁교회(Reformed Churches of South Africa, Die Gereformeerde Kerke van Suid-Afrika, Dopper 교회로도 알려져 있다)의 목사이다. 그의 양친은 2차 세계대전 때에 화란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며, 저자는 1954년 6월 27일 Swartruggens, SA에서 태어났다. 1974년에 그는 포체스트롬(Potschefstroom) 대학에 입학했으며, 1982년 셈족 언어에 대한 M.A를 취득했다. 그의 교의학 학위는 다음의 제목으로 얻은 것이다: 헤르만 프리드리히 콜브럭의 그리스도론[The Christology of Hermann Friedrich Kohlbrugge(1803-1875)]. 1986년 이후 그는 Danielskuile 와 Delportshoop의 회중들의 목사로 섬기고 있다. 1. 복음의 박동(The heartbeat of the gospel) 우리의 사도적 신앙고백(사도신경, 우리 복음주의 신앙의 위대한 상징, SW)에서 우리 주님께서 지옥에(우리의 사도신경 번역에는 “음부에” 라고 되어 있으나 의미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 “지옥”으로 번역함-역자주) 내려가셨다는 내용을 접할 때 우리는 복음의 박동을 느끼게 된다. 그것을 고백할 때, 우리는 우리 주님의 고통의 가장 깊은 의미가 무엇인지를 우리 편에서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놀랍고도 위로를 주는 고백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사실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지옥에 계셨음으로 인해 우리가 낙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 뿐 아니라, 교회 역사에서 이 고백에 대한 많은 비판과 오해, 그리고 이 신앙의 조항과 관련된 많은 오류들이 있어왔다. 예를 들면, 그 고백으로부터 우리 주님께서는 지옥이라 불리는 장소에 계셨었다는 결론을 끌어낸 사람들이 있었다. 이 글을 통해 내가 의도하는 것은 이 모든 오류들이나 비판적 관점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나의 목적은 이 조항이 말씀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에 있다. 나는 이 조항이 얼마나 부요하며 얼마나 위로를 주는 내용인지를 이해하는 독자들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 2. 유일한 잣대인 성경 오늘날에도 역시 사람들이 이에 관하여 무엇이라 생각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확고한 것은 이 고백이 성경과 일치하는가 아닌가 하는 질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에서 조언을 들어야 한다: 우리 주님께서는 지옥으로 내려가셨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예스인가, 노인가? 3. “노!” 예수께서는 지옥으로 내려가지 않으셨다 성경에는 예수께서서 그의 죽음 이후에, 그리고 그가 무덤에 계시는 동안, 별도의 물리적인 공간으로서의 지옥에 계셨다고 보는 아무런 증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주님께서는 강도(murderer, 살인범)에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23:43) 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의 십자가에서의 마지막 말씀이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라는 것은 확실하다. 이 말씀들로부터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지옥에 계셨던 것이 아니라 낙원에서 그의 아버지와 함께 계셨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주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강도에게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겠다고 하셨으므로 돌아가신 그날 바로 낙원으로 가신 것이 분명하다-역자주)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을 때에 지옥으로 내려갔다는 관점의 옹호자들은 벧전3:18-22과 벧전4:6을 증거로 든다. 따라서 그 본문들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벧전 3:18-22절에서 우리는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다. 4장 6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 본문들은 실로 매우 어렵다. 그러나 성경의 더 어려운 부분들은 더 쉬운 본문의 빛에 의해 해석되고 설명되어져야 한다는 것이 해석의 원리이다. 성경은 성경에서 대조되어야 한다. 따라서 누가복음 23장 43절과 46절의 빛 안에서 볼 때, 베드로전서의 이 구절들이 우리 주님께서 돌아가신 후에 지옥(옥, prison)으로 승리의 행진으로 나아가셨다고 가르친 것이라고 해석될 수는 없는 것이 분명하다. 이는 누가복음 23장에서의 구절들과 상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화란 국역성경(Statenvertaling)의 난외주는 우리에게 올바른 해석을 제시해주고 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께서는 노아를 통하여 그의 시대의 사람들에게 설교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 설교에 주의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오랜 참으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불순종하는 사람들로 남았다. 그들의 불순종의 결과로 그들은 거기에 있게 된 것이다. 베드로가 이 편지를 썼을 당시에 그들은 지옥 혹은 감옥에 있었다. (‘Statenvertaling’은 가장 칭송받는 화란어 성경 번역판으로서 1618-19년의 도르트 총회에서 공인되었고, 대부분 화란 정부에 의해 지원되어 1637년에 처음 출판되었다; 이 판은 잘 알려져 있고, 소위 ‘kanttekeningen’-문자적으로 'edge notes'-라고 하는 우수한 주석적 난외주로 인해 많은 사랑을 받았다; a page from that 350 year old bible is shown to the right, SW) 4. “예스!” 예수께서는 지옥으로 내려가셨다 우리 주님께서는 비록 우리가 “그는 지옥에 내려가셨다” 라고 고백하지만, 장소로서의 지옥에 내려가신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우리 주님께서 내려가셨다는 것(descend)과 그가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는 것은 아무리 강하게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도신경의 이 조항의 모든 단어들은 절대적으로 진실이기 때문이다. 다음이 내가 말하는 성경의 근거들이다(오직 성경!). 가장 중요한 본문은 에베소서 4장 9절이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더 좋은 번역은 “땅의 아랫 부분(the lower parts of the earth)”이다. “더 아랫 부분, 즉 땅” 정도가 되겠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9절과 10절을 함께 읽어야만 한다. 거기서는 예수께서 “모든 하늘들의 위로(above all heavens)” 올리우셨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두 가지 절대적이고 완전한 두 반대진영을 만나게 된다: 그는 “모든 하늘들의 위”로 올리우셨던 것에 반하여 “더 아랫 부분, 즉 땅”으로 내려가신 것이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우리 주님의 가장 깊은 고통과 수치-지옥의 고통-이 표현되었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그의 극도의 높아짐이 나타났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9절은 장소로서의 지옥(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 이후에 구별된 장소로서의 지옥에 가셨다는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이 구절은 모두 지옥과 관련되어 있다. 그렇다면 말씀의 이 부분은 우리 주님께서는 땅에서 지옥을 경험하셨다는 것이다. 탄생으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하셨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지옥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우리에게 11절의 선물들을 주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 내려가셨다고, 즉 그가 지옥에 내려가셨다고 고백하는 것은 100프로 정확하다. 에베소서 3장에 대한 최고의 주석은 바울 자신이 빌립보서 2장 6-9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이다: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깊이 수치를 당하셨는지를 알기를 원한다면 빌립보서 2장의 말씀을 읽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지옥이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예수께서는 지옥으로 가시지 않으셨다. 단지 지옥이 십자가 상에서 그에게 다가왔다. 이 주장은 내게는 단지 부분적으로만 수용 가능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지옥의 고통을 체휼하기 위하여 땅에 내려오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정확하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지옥이 그에게 온 것 뿐만이 아니라, 그 또한 지옥으로 가셨다. 게다가 말씀에서 “그가 지옥에 내려가셨다”고 할 때는 단지 그의 십자가만을 포함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의 땅에서의 삶 전체, 즉 탄생부터 죽음까지가 포함되어야 한다(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44문답). 예루살렘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비아 돌로로사’(Via Dolorasa, 고통의 길.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길)가 본디오 빌라도의 뜰에서 출발하여 골고다에서 끝난다고 듣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비아 돌로로사’는 구유에서 시작하여 무덤에서 끝난다고 가르친다. 그의 탄생은 비아 돌로로사의 첫 번째 걸음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구유에서 이미 예수께서 우리의 구속을 위한 댓가를 지불하셨다. 그러나 가장 큰 모퉁이돌은 그가 겟세마네에서 죽음의 고통아래 엎드리셨을 때와 십자가의 암흑의 순간에 큰 목소리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라고 부르짖으셨을 때였다. 5. 모든 단어(말씀에서의)가 다 중요하다. 우리는 지옥이라는 단어를 다른 단어, 예를 들면 “가장 깊은 고통” 등으로 대치하여 그것을 느슨하게 하려 해서는 안된다. 지옥이라는 단어는 중요한 단어이다. 그것은 성경적인 것이다. 이 단어는 우리에게 우리 주님의 경험이 보통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오히려 그 배후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손을 보아야만 한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를 경험하셨다. ‘내려가셨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구원 역사에 기초하고 있는 단어이다. 이는 이미 에베소서 4장으로부터 명확해 졌으리라 본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내려오셨다는 것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그것은 가장 높은 하늘에서 가장 깊은 영원한 죽음의 깊이에까지 떨어진 것을 말한다! 그가 하늘로부터 지옥에로 내려가셨기 때문에-그리고 바로 그 이유로 인해- 그는 하늘로부터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생명의 떡이시다. 이 조항의 모든 단어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조항의 그 말씀들(성경말씀)은 필수적이다. 6. 우리 주님의 삶과 고통의 더 깊은 의미 이 조항이 말하는 바에 곤란함을 느끼는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 이후에 실제로 지옥에 계셨다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를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조항으로 이해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앞의 조항에서 고백된 모든 것이 차례로 일어난 사건들이다: 첫째로 우리 주님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되셨고, 그 다음에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으며, 그 다음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죽으셨고, 묻히셨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가 ‘그 다음에’(즉 그가 죽으시고 묻히신 다음에) 그가 지옥으로 내려가셨다고 이해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 단어들이 우리 번역에서는 첫 번째와 그 다음의 것이라는 식으로 나타나고 있지 않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원문에서도 그렇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존 칼빈의 발자취를 따라야 할 것이다. 이 조항에 관한 그의 견해에 따르면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고통의 가장 깊은 의미와 관련된 고백이다. 첫째로 사도신경이 모든 사건들을 예수님의 삶 속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저술하고 있고(그의 탄생, 십자가, 죽음 등), 더 나아가 사도신경이 이 의미를, 이것이(그의 탄생과 십자가 죽음 등) 지옥으로 내려가신 것을 구성한다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내용들이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44문답과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의 설명이기도 하다. 7. 우리는 모든 시대의 교회들과 함께 우리의 신앙을 고백한다 아마도 당신은 이 제목의 단어들에 익숙한지도 모르겠다. 남아프리카에서는 목사들이 과거에(그리고 다행히도 어느 정도는 지금도) 이 단어들로 사도신경을 소개했다. 이것들은 전혀 의미 없는 단어들이 아니다. 이는 고백이다: 나는 성도의 교제를 믿습니다. 이를 말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전 시대를 걸쳐 우리의 영적인 아버지로 인한 동일한 기초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하지만 이 단어들에는 더 많은 의미가 존재한다. 이것과 함께 우리는 사도신경이 과거로부터 받은 유산이며, 성도의 교제의 선물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성령의 손을 볼 수 있다: 수백년 전의 한 형제 혹은 여러 형제들을 이 고백에게로 이끌고, 또한 시대를 넘어 그것이 내게 주어지기까지 한 형제가 다른 형제에게 이를 건네주게 하신 분이 바로 성령님이시다. 이것은 또한 칼빈과 우르시누스의 해석에도 적용된다. 그렇다. 나는 성령님을 믿으며, 그가 만드신 성도의 교제도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이 항목을 쉽게 변경하거나 삭제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신앙고백을 말씀의 빛 안에서 시험해 보아야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성령께서 믿는 자들을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사실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나에게 있어 사도신경은 언제나 하나님의 경이로움이다. 단지 이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리고 전체가 얼마나 조화로운지를 보는 것 만으로도 말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그림의 한 부분에라도 손상을 가한다면, 그림 전체가 망가질 것이다. 이 조항의 삽입을 통하여, 우리는 내려가심(decent)과 오르심(ascent), 곧 지옥과 천국에 관한 고백을 갖게 된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작업일 수 없다. 오직 성령께서만이 그러한 절대적인 성경적인 걸작을 만드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시대의 교회들과 함께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지옥에 내려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8. 천국이 나에게 열려졌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지옥으로 내려가셨다. 하지만 그 내려가심의 결과로 그는 지옥에 있는(십자가에 달려 있는) 강도에게 천국을 열어주셨다. 그리고 마땅히 지옥에 떨어져야 할 모든 이들에게도 이 천국을 열어주셨다. 그를 믿기만 한다면 말이다. 그는 그의 이 내려가심이라는 열쇠-다른 열쇠는 없다-를 가지고 낙원의 문을 여셨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우리의 고백에 있는 이 단어들은 가장 위대한 위로가 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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