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에스 루이스의 ꡔ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ꡕ(Till We Have Faces) 서평(강유나 역, 홍성사, 2007)
김회권 교수(숭실대 인문대 기독교학과)
이 책은 클리브 스테이플즈 루이스(Cleave Staples Lewis)가 쓴 여러 권의 책들 중에서 비교적 덜 알려진 소설이다. 이 소설은 제목이 암시하고 있듯이, 자신의 참다운 얼굴(정체성)을 찾기까지 주인공 오루알이 치르는 정신적 영적 고투의 일지를 기록하고 있다. 주인공 오루알은 글롬의 왕 트롬의 장녀이자 아버지의 왕위를 이어받아 훌륭한 여왕이 된 인물로서 자신의 추한 얼굴을 인하여 자기 혐오에 빠진 인물이었으나 진선미의 통합적 구현자인 이복 여동생 프쉬케를 사랑하는 과정에서 프쉬케처럼 아름다운 인물로 변형되어 간다. 단순화시켜 말하면 이 소설은 오루알이 프쉬케에 대한 집착적 소유욕과 질투심으로 프쉬케를 사랑하다가 좌절과 파란을 겪어가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구현한듯한 진선미의 구현자인 프쉬케의 사랑에 감화되고 감동되어 자신도 프쉬케처럼 변화되어가는 이야기다. 이 책은 단숨에 읽히지만 여러번 읽을 수록 더욱 깊은 맛이 명상적 소설이다.
I. ꡔ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ꡕ(Till We Have Faces)의 신화적 전사(前史)
독자들이 이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 소설의 신화적 전사(前史)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를 가질 필요가 있다. “다시 쓰는 신화”(a Myth Retold)라는 부제에서 엿볼 수 있듯이 이 소설은 그리스-로마 신화인 규피드와 프쉬케 신화에서 원형적 모티브를 이어받고 있다. 제우스의 딸이자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믿는 여신 비너스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왕의 공주이자 여신 비너스를 잊어버리게 할 만큼 매혹적인 여인 프쉬케를 징벌하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아들 규피드에게 프쉬케가 가장 천한 남자를 향하여 욕정이 불붙도록 화살을 쏘라고 심부름을 시킨다. 하지만 미성숙하고 덤벙대는 남신인 큐피드는 프쉬케를 보는 순간 어머니의 명령을 잊어버리고 그녀와 사랑에 빠져버린다. 우여곡절 끝에 프쉬케는 인간 중에서 신랑을 구하지 못하여 신에게 바쳐진 신부가 되어 신들의 산으로 끌려간다. 그 때 큐피드가 나타나 그녀를 데리고 아내로 삼고 숲 속의 아름다운 궁전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다. 그런데 프쉬케의 두 언니는 프쉬케의 행복과 영화를 질투하여 그녀의 남편인 규피드 신을 배반하도록 부추긴다. 신부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그 남편이라는 자는 야수요 괴물일 것이라고 말하면 프쉬케가 그를 죽여버리라고 사주한다. 프쉬케는 동생이 신과 결혼하여 호화로운 궁전에서 행복하게 사는 두 언니의 질투심으로 촉발된 남편의 얼굴보기 모험에 뛰어들기에 이르고, 남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언니들이 준 단칼과 등잔으로 잠든 규피드의 얼굴을 등잔불을 갖다 댄다. 규피드는 배반감에 분노하며 프쉬케와 이별하게 되고 프쉬케는 도중에 꺾여버린 사랑을 그리워하면 번뇌어린 그리고 복수심에 찬 방랑자가 된다. 규피드의 궁전에서 쫓겨난 프쉬케는 두 언니를 찾아가 복수하는 한편 규피드의 사랑을 그리워하며 방황어린 여정에 돌입한다. 이 과정에서 비너스는 아들을 꾸짖고 프쉬케가 규피드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도록 온갖 모욕적이고 불가능한 과업들을 강요한다. 하지만 프쉬케는 비너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온갖 고초를 겪으며 규피드에 대한 애절한 사랑을 간직하며 자신에게 닥치는 환난과 곤경을 여러 신들과 피조물의 도움을 받아가며 극복해 간다. 지상의 모든 난관과 죽음을 무릅쓰며 지하세계를 넘나드는 등 상상할 수 없는 고초를 치른 후에야 프쉬케는 마침내 큐피드의 적극적인 열애를 되찾기에 이른다.
프쉬케에 대한 질투심으로 그녀를 추하게 만드려는 어머니 비너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규피드는 최고신 주피터를 찾아가 프쉬케와의 사랑을 완성시켜 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른다. 쥬피터는 신들의 동의를 얻어 프쉬케를 불사신으로 만들어 둘의 결혼을 승낙한다. 비너스마저 이 결혼에 만족해 하며 두 연인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프쉬케를 만나 사랑에 눈을 떠가며 규피드는 참 신으로 성장해간다. 규피드와 프쉬케의 신화는 사랑이 완성되기 위하여 치러야 할 연인들의 고통과 통과의례를 신화적인 상상력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2세의 로마 제국 시인이자 철학자인 루시우스 아펠레이우스 플라토니쿠스(123-179년)가 이 규피드와 프쉬케의 사랑 신화를 약간 각색하여 170년 경에 ꡔ변신ꡕ(Metamorphoses) (혹은 ꡔ황금 당나귀, Golden Assꡕ)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루이스는 대학 시절부터 이 프쉬케의 사랑 이야기에 매료되어 언젠가 다시 한번 이 이야기를 창의적으로 각색해 보려고 결심한 이래 약 30년에 걸친 상상과 숙고를 거쳐 이 소설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루시우스 아펠레이우스의 작품을 창의적으로 각색하여 기독교적 사랑과 우정, 자아탐색의 주제가 아름답게 교직된 작품을 만들어 내었다. 물론 루이스는 루시우스 아펠리우스가 큐피드와 프쉬케 신화를 각색한 것보다 훨씬 더 창의적이고 폭넓게 재주형하였는데 요소 요소에 성경적 은유와 주제를 이 소설 속에 내장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서도 원형 신화인 규피드와 프쉬케의 신화에 나오는 주제들 혹은 소재들이 주요한 서사적 모티브를 구성하고 있다. 아름다운 여인 프쉬케, 글롬 왕국이 신탁에 의하여 프쉬케를 괴물(야수)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상황, 아름다운 신이 프쉬케를 신부로 영접하여 아름답고 황홀한 신혼 살림을 아름다운 궁전에서 시작하는 상황, 남편 신이 목소리만 들려줄 뿐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상황, 언니가 프쉬케를 찾아가서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 그녀의 남편이 야수요 괴물이므로 그를 죽여서 그의 마법에서 풀려나야 한다고 요구하는 상황, 프쉬케가 징벌을 받아 방황하게 되는 이야기 등은 이 소설에서 주요한 서사적 동인이 된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점에서 루이스의 프쉬케 사랑 이야기는 기독교적 세례를 받아 재주형되었다. 소설 여러 곳에 기독교 세계관을 암시하는 크고 작은 장치들과 문학적 복선들이 눈에 띈다. 루이스의 버전(version)의 프쉬케 사랑 이야기가 보여주는 독특한 기독교적인 요소들을 예를 세 가지만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프쉬케가 회색산의 신(야수 혹은 괴물신)에게 제물로 바쳐지게 되는 상황이 원래의 프쉬케의 사랑 신화와는 다르다. 원래의 신화에서는 프쉬케가 괴물스러운 신의 신부로 바쳐지는 상황이 프쉬케의 미모 때문이었다. 그녀의 미모가 너무 출중하여 결혼할 남자를 찾지 못한 프쉬케의 아버지가 아폴로 신전에서 신탁을 들은 후에 그녀는 신의 신부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루이스의 소설에서는 글롬 왕국이 재난과 기근을 중지시킬 희생양으로 프쉬케가 신의 제물(야수적 신의 신부)로 선택된다는 것이다. 글롬 왕은 나라의 국운이 급격하게 쇠락한 상황에서 옹깃 여신의 노여움을 가라앉히기 위하여 제사장의 권고를 받아들여 회색 바위신 옹깃 여신(비너스의 글롬 왕국 발음)에게, 궁극적으로 옹깃의 아들 신 회색산의 신(규피드에 해당되는 신) 프쉬케를 바친다.
둘째, 원래의 신화에서는 프쉬케가 질투심에 복받쳐 규피드와 자신의 결혼생활을 망쳐버린 두 언니에게 가열찬 복수를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프쉬케가 그리스도적인 용서를 실천한다. 셋째, 원래 신화에서는 프쉬케는 다양한 신들과 피조물의 도움을 받아 비너스의 징벌과 복수어린 계략을 피해가다가 마침내 쥬피터의 중재로 큐피드와의 사랑을 완성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프쉬케가 인간적 존재로서는 죽고 불멸의 아름다움과 선(善)의 구현자로 부활하고 있다. 이 외에도 루이스는 기독교적인 세계관과 주제를 소설의 갈피 갈피에 숨겨 놓거나 암시해 놓고 있다(겔 47장의 생명강을 건너는 모습).
이처럼 원래의 그리스-로마 신화인 규피드와 프쉬케 이야기나 루시우스 아펠레이우스의 ꡔ변신ꡕ에서와는 달리 루이스의 소설에서는 소설의 줄거리를 움직여가는 동인들과 계기들이 다분히 기독교적인 음조를 띠고 있다. 사건들이 발생하거나 처리되는 서사적 상황들이 원래의 신화나 루시우스 아펠레이우스의 각색된 이야기와는 달리, 남녀간의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참된 자기와의 대면과 화해, 타인에 대한 사랑, 그리고 신과 대면하게 될 날에 대한 이야기로 승화된다는 점에서 더더욱 원래의 남녀 사랑 이야기가 보편적인 사랑을 논하는 기독교적인 색채로 덧입혀지고 있다.
II. 소설의 줄거리
소설은 오루알이 자기 조카에게 왕위를 양위할 계획을 세워둔 후 이제 마지막으로 그리스어로 자신의 생애에 일어난 사랑의 파국을 회고하며 그 파국에 대한 추후의 더 깊은 성찰을 전달하는 1인칭 작가의 자전적 회고담이다. 오루알은 자신의 고소장을 그리스어로 쓰는데 언젠가 인간들이 심지어 신들에게까지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는 그리스로 그녀의 회고록이 유포되기를 바라는 희망으로 그리스어로 쓴다. 1부가 신들을 기소하는 기록이라면(“신들보다 인간에게 유해한 존재는 없다”라고 주장한다) 2부는 1부에 쓴 자신의 결론(신들은 자신의 고소에 대답할 말이 없다, 즉 자신들의 유죄를 묵시적으로 인정했다)이 그릇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1부는 사건들의 이야기이며(프쉬케에 대한 오루알의 사랑과 좌절 이야기), 2부는 프쉬케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오루알 자신의 사랑의 본질에 대한 성찰과 후일담이다. 1부는 욥기 1-37장처럼 격렬하고 몰입적인 자기변명과 신들에 대한 대결의식을 드러낸다. 여왕이 된 오루알이 훗날 이웃 나라에 가서 프쉬케를 여신으로 숭배하는 사원의 사제에게서 언니 오루알의 질투로 동생 프쉬케가 파멸되었다는 이야기가 정설로 굳어져 전승되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게 된다(1부 21장 289쪽). 오루알은 1부의 마지막 장에서 프쉬케에 대한 자신의 숭고한(?) 사랑을 질투라고 말하는 신들과 인간들에게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 프쉬케를 자신의 손아귀에서 빼앗가는 신들의 처사가 불공평하다는 점을 주장하기 위해(신들의 법정에서 제출할 고소장) 책을 썼다고 고백한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막내 여동생 프시케의 박탈과 상실, 그리고 자신에게 덧씌워진 불명예(질투심이 많은 사람)에 대한 책임을 신들에게 묻기위해서 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녀의 요지는 프쉬케를 불행에 빠뜨린 것은 자신이 아니라 신들이었다는 강변이다.
오루알은 옹깃의 사제들에게 의하여 글롬 왕국의 재난을 막을 희생제물로 바쳐진 동생 프쉬케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이기지 못하고 동생이 묶여졌던 회색산으로 올라갔을 때 프쉬케게 죽지 않고 살아있음을 발견하고 너무나 기뻐한다. 그러나 프쉬케는 자신은 이제 신(회색산의 신)의 아내가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너무 아름다운 이복 여동생이 남편의 얼굴도 한번도 본 적이 없으면서도 행복하다고, 자신들의 부부 사이가 너무나 좋다고 말하자, 오루알은 프쉬케가 야수의 마법에 홀렸다고 생각하고 그 야수적 신적 존재로부터 프쉬케를 구해내기 위하여 온갖 안간힘을 다쓴다. 그리하며 프쉬케가 남편의 얼굴을 보도록 압박하기에 이르고 프쉬케는 등잔과 단칼을 듣고 곤히 잠든 신인 남편의 얼굴을 본다. 놀란 신은 상처를 입고 실망과 당혹을 감추지 못한 채 프쉬케에 유랑과 방황의 벌을 내리고 언니 오루알에게도 동일한 벌을 내린다. 그 후 여왕이 된 오루알은 겉으로 볼 때 선정을 베푸는 승리하는 여왕이었으나 그 내면은 애정에 굶주린 방황하는 영혼으로 살게 된다. 여우 선생과 바르디아를 지배하듯이 집착적으로 사랑하면 오랫동안 사랑의 감정에 시달리지만 자기 혐오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방랑하는 영혼이었다.
2부는 오루알이 나이가 많아 왕위에서 은퇴하려던 시점에서 자신이 쓴 책(1부)을 다시 한번 읽고 지나간 프쉬케 사랑 파국 사건을 반추하면서 시작된다. 신들에게 항변하며 섰던글을 다시 한번 읽어가며 오루알은 자신이 참 사랑이 아니라 소유욕에 가득찬 사랑의 사람이었다고 고백한다. 2부에서는 그래서 신들에 대한 고소장이 자신의 반성깊은 참회록으로 바뀌어 버린다. 오루알이 고백하듯이, 이런 변화는 글쓰기 자체를 통해서 일어났다(297쪽). “신들은 펜을 통해 내 상처를 철저히 탐색해 보게 했다”(298쪽). 오루알의 글쓰기는 자신의 행동들 근저에 있는 동기들을 검증하는 것이었다(300쪽)
2부를 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신화에서 프쉬케에서 주어졌던 과업들과 방불한 꿈들을 포함하여 신비한 일들과 환상적인 사건들을 통하여 오루알 자신에게 많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비록 꿈에서긴 하지만 오루알의 글쓰기는 마치 그리스 로마 버전의 프쉬케 신화에서 프쉬케가 사랑하는 큐피드를 만나기 위해서 겪는 고초와 같다. 밀과 보리와 양귀씨와 호밀과 기장 등이 뒤섞여 있는 곡식 낱알들을 종류별로 분류하는 작업이었다(301쪽). 여기서 오루알은 프쉬케의 고난을 추체험하면서 서서이 자신이 프쉬케처럼 닮아간다.
오루알은 자신이 썼던 1부를 다시 읽으면서 프쉬케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소유욕과 지배욕이라는 것을 하나 하나 깨닫는다. 프쉬케로 하여금 그녀의 남편의 얼굴을 보도록 압력을 가한 실제 동기는 회색산의 신에 대한 질투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프쉬케에 대한 질투가 아니라 프쉬케의 사랑을 훔쳐가 버린 산의 신에 대한 질투였음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이 깨달음이 그녀로 하여금 다시 프쉬케를 만나고 화해하도록 허용한다.
또한 타린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자신이 여동생 레디발에 대하여 가혹하게 매몰차게 굴었던 점을 반성한다. 여우 선생과 프쉬케에 쏟아진 사랑 때문에 희생당한 사람이 레디발이라는 것을 안다(300쪽). 또한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다고 믿었던 충직한 신하 경비대장 바르디아에 대한 자신의 사랑도 소유욕이 었음을 깨닫는다. 임종석상에 누워있는 바르디아를 병문안하여 “사랑했어”라는 말을 하고싶은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병문안을 가려고 하자 옹깃의 사제 아르놈은 즉각 반대한다. 임종석상에 있는 바르디아에게 왕이 달려가는 것은 신하의 병을 더욱 위독하게 할 뿐이라는 아르놈의 충고에 따라 바르디아를 병문안하는 일을 단념했다. 아르놈의 충고와 지혜로운 권면에 따라 바르디아에 대한 자기의 일방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내려놓는다. 소유욕과 집착, 지배욕이 사랑의 이름으로 포장된 것을 알고 오루알은 자신이 바르디아를 참으로 “사랑”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여자로서 남자인 바르디아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고 그를 떠나보낸 것 때문에 아쉬워하고 슬퍼하는 오루알의 모습 속에서 그녀가 진정 바르디아를 남녀간의 연애감정으로 사랑했음을 알 수 있다(303쪽). 그 후 오루알은 바르디아의 아내(안싯 부인)로부터 바르디아가 여왕을 섬기기 위해서 속에서부터 파먹히는 나무같이 살았음을 알게 되었다(305쪽). 성난 그의 아내의 푸념과 넋두리를 들으며 오루알 자신이 실상 그녀로부터 바르디아를 빼앗았음을 알게 된다. 이 과정에서 바르디아의 부인 안싯은 예언자처럼 신랄하게 오루알 여왕의 거짓 사랑을 지적하며 회개에 이르도록 돕는다.
“폐하는 남편의 피를 한 해 한 해 다 빨아 마셨고 그의 생명을 삼켜 버렸습니다”(309쪽). “폐하는 사랑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시는 것 같군요....신의 소생이니까 아마도 사랑도 신처럼 하시겠지요. 그림자 야수처럼 사랑하는 것과 삼키는 것은 하나라면서요. 그렇지 않나요? ”(310쪽). “흥! 배부르시겠어요. 다른 남자들의 목숨도 삼켰으니, 여자들의 목숨도 삼키고. 바르다와 내 목숨, 여우 선생의 목숨, 동생의 목숨, 두 동생의 목숨 다”(311쪽).
오루알은 안식의 말이 다 진실이라는 점을 인정했다(312). 자신이 하늘의 의사들에게 묶여 수술을 받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오루알은 깨닫는다. “자신은 아무 것도 주지 못하면서 모든 것을 차지하려 드는, 상대방을 갈아먺는 욕심”이 바로 자신이 바르디아에 품은 사랑의 실체였음을(313쪽).
2부 2장에서부터는 오루알이 프쉬케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소유욕과 집착적 탐닉이었음을 깨닫는 꿈과 환상 체험이 연속적으로 일어난다. 오루알이 꿈 속에서 자신을 학대하던 아버지 선왕과 함께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뛰어내리다가 어느 거울에 선 자신의 모습이 옹깃 여신처럼 변화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존재, 태처럼 생겼으나 생명을 잉태할 수 없는 존재였다. 글롬은 거미줄이었고 나는 그 중앙에 웅크리고 앉아 훔친 목숨으로 배워 채워 퉁퉁하게 부푼 거미였다”(324쪽). 자신의 혐오스러운 외모에 절망한 나머지 오루알은 이런 옹깃이 되지 않으려고 칼을 들고 자결하려고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이 꿈 무렵부터 오루알은 쇠약해 져서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녀는 더 이상을 베일을 쓰지 않고 자신의 맨얼굴로 다니기 시작한다(325쪽). 셰닛 강 가장 깊은 곳에 가서 투신자살을 하려고 새벽에 성밖으로 빠져나간다(326쪽). 강 속으로 뛰어들려는 순간 강저편에 한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지 말라.” 불꽃 같은 신의 소리였다. 그것은 자신의 인생을 산산조각내던 소리였다. 신의 목소리는 “죽기 전에 죽으라”였다(327쪽). 오루알은 그 신의 목소리를 듣고 변화되기 시작했다(328쪽).
오루알은 자신 안에 죽지 않으면 안 되는 옹깃(질투, 지배욕의 화신 비너스)이 살고 있음을 인정하면서 변화된다. “내가 옹깃이라는 것은 내 영혼이 옹깃처럼 추하다는 의미였다. 탐욕스럽고 피에 굶주렸다는 뜻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진정한 철학을 연마한다면 내 추한 영혼도 아름답게 변화되리라. 신들이 도와준다면 할 수 있으리라. 지금 당장 시작하리라”(330쪽).
오루알은 또 다른 꿈에서 또 하나의 프쉬케의 경험을 추체험한다. 규피드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황금빛 양털을 깎아가던 프쉬케처럼 오루알은 금빛 양털 한 뭉치를 훔칠 수만 있다면 정말 자신이 아름다워 질텐데라고 생각했다(331쪽). 여기서 오루알은 에스겔 47장의 생명강 도강 경험을 하면서 신들의 초장으로 건너간다. 황금빛 양떼가 자신을 행해 기쁨으로 돌진하여 자신을 쓰러뜨리는 경험을 한 것이다. 황금빛 털을 수확하는 여인을 본다(그녀는 프쉬케였다)(332쪽). 오루알은 자신이 바르디아는 애욕과 소유욕으로 사랑했다고 강변했지만 프쉬케만큼은 진실로 사랑했다고 믿었다(323쪽). 자신의 쓴 책 (1부)을 읽으며 자신이 프쉬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열심히 돌보고 가르쳤는지, 그 아이를 구해려고 애썼는지를 읽어보려고 했다. 다시 이상한 환상에 사로잡힌다. 이 환상 속에서 자신이 프쉬케에게 쏟은 사랑의 열정은 철저한 소유욕이자 지배욕임을 깨달았다.
오루알은 또 다시 프쉬케적인 경험을 추체험한다. 빈 그릇을 들고 저승의 강과 연결된 샘을 찾아 죽음의 물을 가득 채운 후에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옹깃에게 바쳐야 하는 여정에 자신과 프쉬케가 동행하는 환상을 본 것이다. 그러나 정작 오루알 자신의 손에 들려진 것은 빈그릇이 아니라 신들을 고소한 고소장이었다(책). 오루알은 마침내 신들의 법정에서 고소장을 읽어간다(338-339쪽).
“당신들은 그 아이의 사랑을 훔쳐가버렸습니다..... 그 아이는 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권리로 그 까마득히 높은 곳으로 그 아이를 훔쳐 가 버린 것입니까?(340)...어떤 신이든 신이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재앙이며 부당한 고통입니다....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되고 싶습니다. 나는 내것이었고 프쉬케도 내것이었습니다”(340쪽). “그 아이는 내것이었어. 당신들은 도둑이고 사기꾼들이야. 그게 내가 당한 불의야”(341쪽).
이처럼 신들에게 자신의 육성으로 고소를 터뜨린 후에야 오루알의 변화가 완성된다. 드디어 2부 4장에서 이 소설의 주제가 명시적으로 진술된다. 참된 자기 이해에 도달한 자만이 신들의 말걸어 옴을 감당할 수 있고(신의 대답을 들을 수 있고), 신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루알은 고백한다. “나는 신들이 우리에게 드러내 놓고 말해 주지도 않고 우리 스스로 대답을 찾지도 못하게 하는 이유를 잘 알게 되었다. 이렇게 자기 중심에서 무슨 말이 있는지 찾아내지도 못한 상태에서 이게 내 말의 의미입네 떠드는 소리를 신들이 뭐 하러 귀 기울여 듣겠는가?”(342-343쪽) “우리가 아직 얼굴을 찾지 못했는데 어떻게 신과 얼굴을 맞댈 수 있겠는가?”(343쪽)
신들의 최고 법정 판결을 기다리면서 유령이 된 여우선생과 함께 있으면서 마지막 환상을 본다. 프쉬케가 강물에 뛰어 내리려는 모습, 누더기를 걸치고 쇠차꼬를 찬 프쉬케가 곡식 낱알을 골라내는 모습, 황금빛 양털을 즐겁게 놀이하듯이 수확하는 프쉬케의 모습, 마지막으로 빈그릇을 들고 가는 죽음의 땅으로 걸어가는 프쉬케와 자신이 쓴 고소장을 든 오루알이 어디론가 가고 있다(349쪽). 프쉬케는 저승의 여왕, 죽음 그 자체로부터 아름다움을 받아 상자에 담아 와서 옹깃을 아름답게 변화시키기 위하여 저승으로 내려가고 있다. 옹깃인 자신을 아름답게 변화시키기 위하여 프쉬케가 죽음의 땅으로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351쪽). 이 점이 바로 루이스가 프쉬케와 규피드의 신화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야기로 재창조했다고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부분이다.
마침내 죽음의 이기고 부활하여 여신이 된 프쉬케가 죽음에게서 저승의 여왕에게서 아름다움의 상자를 받아들고 오신다(355쪽). 오루알은 여신 프쉬케에게 고백한다: “다시는 나는 당신을 내것이라고 부르지 않겠습니다. 오히려 제게 있는 것이 다 당신의 것입니다. ...저는 당신이 잘 되기르 바란 적이 없었고 사심없이 당신만을 생각한 적도 없습니다. 저는 욕심덩어리였습니다.” 오루알은 덧문을 열어 젖힐 때 쏟아지는 여름의 환한 아침 햇살 앞에 연회장을 밝혔던 횃불들이 빛을 잃듯이(356쪽), 신의 임재 앞에 자신의 옛 자아의 해체를 경험한다. 규피드의 화살에 맞은 자처럼 변화된다.
프쉬케를 통해서 매개된 “신께서 오루알을 심판하러 오신다”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오루알은 새사람이 된다. 프쉬케의 손에 이끌려 연못가로 갔던(세례 이미지) 오루알은 존재의 재창조를 경험한다. “숨을 쉴 때마다 새로운 두려움과 기쁨과 감당할 수 없는 감미로움이 밀려들었다. 화살이 내게 박혔다. 나는 해체되고 있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나는 한 때 더 이상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을 만큼 그녀를 위해서라면 어떤 죽음이라도 불사할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조차 참으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중요하다면 다른 분 때문이었다. 땅과 별과 해, 전에 있었고 앞으로 있을 모든 것은 바로 그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분이 오고 있었다....나는 눈을 떨구었다”(357쪽)
연못가에서 오루알은 수면 위에 비친 두 사람의 프쉬케를 보았다. 자신 또한 아름다운 프쉬케가 되리라는 위대한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358쪽). 그 때 오루알은 “주여 이제는 당신 자신이 대답이십니다. 모든 질문은 당신의 얼굴 앞에서 사라져버립니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해서 프쉬케에 대한 집착적 소유, 탐닉적 지배적 사랑에서 해방된다.
소설의 마지막은 불완전 문장으로 끝난다. “오랫동안 저는 당신을 미워했고 오랫동안 당신을 두려워했습니다. 이제는---”(359쪽). 옹깃의 사제 아르놈에 의하여 문장을 완성하지 못하고 고개를 앞으로 떨구고 죽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어떤 점에서 이 소설은 욥기의 구조를 닮았다. 1-37장까지는 신의 변명을 요구하는 욥의 드센 주장들이 주를 이루고 38-42장은 욥의 지적 질문에 대해 답변하는 대신 폭풍과 거룩한 어둠 속에서 하나님이 나타나 욥의 대답이 되는 것처럼, 이 소설의 2부에서는 신이 꿈과 바람과 환상 속에 나타나기도 하고 목소리를 통해 나타나기도 한다. 2부에서는 줄거리 진행은 현저하지 않고 1부에 쓴 자신의 글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며 신의 결정을 수용하면서 깊은 자기 이해에 이르는 과정이 부각된다.
III. 소설의 기독교적 주제
이 소설의 으뜸 주제는 “참 사랑이 무엇인가?”이다. 루이스는 지배욕구로서의 사랑(남녀사랑 포함)을 비판하고 프쉬케적 자기 내어줌의 사랑을 현양한다. 오루알은 자신이 여우 선생을 사랑하고 존경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애의 연장이다. 경비대장 바르디아에 대한 사랑도 자기애의 연장이다. 오루알은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그들을 희생시켰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르디아의 아내를 만나면서 그리고 여우선생이 떠나는 것을 보면서 자기 사랑의 본질이 자기애임을 알게 된다. 이에 비하여 프쉬케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처럼 순수하다. 자기 내어줌의 사랑이다. 그녀는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병자를 치유해 주려했다. 글롬 왕국의 재난을 막을 희생양으로 자기를 드린다. 그리스도의 그림자다. 복수의 화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적인 용서의 사람이다. 프쉬케와의 엮임과 접촉 속에서 오루알은 사랑과 애욕, 사랑과 지배욕, 사랑과 집착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서서이 지혜로운 분별의 사람으로 바뀌어간다.
또 다른 주제는 정체성이다. 어린 시절부터(특히 아버지로부터) 추녀라는 말을 듣고 자란 오루알은 자신의 혐오스러운 얼굴에 절망한다. 그래서 베일을 쓰고 다닌다.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신들에게 항변하는 글을 쓰면서 자신의 속생각을 털어놓게 되고 그리고 마침내 베일을 벗는다. 베일을 벗는 행위는 한편으로 글을 쓰는 행위다. 글을 통하여 질투심, 사랑, 증오, 경멸 모든 내면을 쏟아놓는다. 이것이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는 행위다. 글쓰는 행위는 자아 노출행위다. 신들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자신의 본 모습을 본다. 우리가 베일을 벗고 진정한 얼굴을 드러낼 때에야 비로서 신적 존재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고전 13장; 고후 3장 모세의 베일). 차용된 목소리가 아니라 참 자신의 목소리로 말해야 신의 말걸어 옴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베일에 가린 얼굴이 아니라 참 자아의 육성으로 내면의 진정성으로 말하는 자만이 신들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추한 얼굴을 반추하면서 내면의 모든 추한 생각을 다 쏟아 놓은 후에 오루알은 더 이상 신들의 처사를 부당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소설의 주제는 참된 자기 얼굴(자기 정체성)에 대한 탐색이다.
또 하나의 주제는 이성과 상상력의 갈등이다. 이성적인 것과 신성한 것의 긴장이 이 소설 속에 내장되어 있다. 합리론과 유물론을 대변하는 그리스 철학자 여우 선생은 초자연적인 인정하지 않는다. 신성한 것의 진정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옹깃의 사제는 신화적 세계관을 비판하고 그것을 미신적 세계관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의 경우 오루알을 지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만족시키는 지성적 깊이와 지혜를 보여주지만, 프쉬케가 신과 결혼하여 사는 이야기라든지, 오루알이 프쉬케를 계곡의 궁전에서 만난 이야기라든지, 혹은 프쉬케가 부활한 이야기라든지 등 초월적인 세계, 신들과 인간의 경계선상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교조적일 정도로 무기력한 합리적인 설명만을 제시한다. 그는 오루알의 영적 경험을 설명하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한다. 오히려는 그는 프쉬케를 아내로 맞이한 채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신을 괴물이라고 설명하며 프쉬케가 남편 행세를 하는 야수를 죽여서 어서 그 계곡 궁전에서 탈출하여야 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는 죽어서 유령이 되어서야 프쉬케와 오루알이 경험한 신비체험의 진정성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반면에 그리스 철학의 정신적 후예였던 오루알은 거듭되는 환상 경험과 꿈 같은 신비체험 속에서 이성 너머에 있는 신성의 영역이 존재함을 인정해 간다. 신비한 경험을 하면서 그리스 철학의 과오와 한계를 깨달아간다. 신비의 세계는 사제들이나 시인들이 지어낸 거짓말이라고 가르치며 그리스의 명석한 지혜를 대표하는 그 그리스 가정교사는 궁극적으로는 프쉬케의 진엉한 임무와 여정을 방해하고 유혹하는 장애물임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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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회권 교수(숭실대 인문대 기독교학과)
이 책은 클리브 스테이플즈 루이스(Cleave Staples Lewis)가 쓴 여러 권의 책들 중에서 비교적 덜 알려진 소설이다. 이 소설은 제목이 암시하고 있듯이, 자신의 참다운 얼굴(정체성)을 찾기까지 주인공 오루알이 치르는 정신적 영적 고투의 일지를 기록하고 있다. 주인공 오루알은 글롬의 왕 트롬의 장녀이자 아버지의 왕위를 이어받아 훌륭한 여왕이 된 인물로서 자신의 추한 얼굴을 인하여 자기 혐오에 빠진 인물이었으나 진선미의 통합적 구현자인 이복 여동생 프쉬케를 사랑하는 과정에서 프쉬케처럼 아름다운 인물로 변형되어 간다. 단순화시켜 말하면 이 소설은 오루알이 프쉬케에 대한 집착적 소유욕과 질투심으로 프쉬케를 사랑하다가 좌절과 파란을 겪어가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구현한듯한 진선미의 구현자인 프쉬케의 사랑에 감화되고 감동되어 자신도 프쉬케처럼 변화되어가는 이야기다. 이 책은 단숨에 읽히지만 여러번 읽을 수록 더욱 깊은 맛이 명상적 소설이다.
I. ꡔ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ꡕ(Till We Have Faces)의 신화적 전사(前史)
독자들이 이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 소설의 신화적 전사(前史)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를 가질 필요가 있다. “다시 쓰는 신화”(a Myth Retold)라는 부제에서 엿볼 수 있듯이 이 소설은 그리스-로마 신화인 규피드와 프쉬케 신화에서 원형적 모티브를 이어받고 있다. 제우스의 딸이자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믿는 여신 비너스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왕의 공주이자 여신 비너스를 잊어버리게 할 만큼 매혹적인 여인 프쉬케를 징벌하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아들 규피드에게 프쉬케가 가장 천한 남자를 향하여 욕정이 불붙도록 화살을 쏘라고 심부름을 시킨다. 하지만 미성숙하고 덤벙대는 남신인 큐피드는 프쉬케를 보는 순간 어머니의 명령을 잊어버리고 그녀와 사랑에 빠져버린다. 우여곡절 끝에 프쉬케는 인간 중에서 신랑을 구하지 못하여 신에게 바쳐진 신부가 되어 신들의 산으로 끌려간다. 그 때 큐피드가 나타나 그녀를 데리고 아내로 삼고 숲 속의 아름다운 궁전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다. 그런데 프쉬케의 두 언니는 프쉬케의 행복과 영화를 질투하여 그녀의 남편인 규피드 신을 배반하도록 부추긴다. 신부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그 남편이라는 자는 야수요 괴물일 것이라고 말하면 프쉬케가 그를 죽여버리라고 사주한다. 프쉬케는 동생이 신과 결혼하여 호화로운 궁전에서 행복하게 사는 두 언니의 질투심으로 촉발된 남편의 얼굴보기 모험에 뛰어들기에 이르고, 남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언니들이 준 단칼과 등잔으로 잠든 규피드의 얼굴을 등잔불을 갖다 댄다. 규피드는 배반감에 분노하며 프쉬케와 이별하게 되고 프쉬케는 도중에 꺾여버린 사랑을 그리워하면 번뇌어린 그리고 복수심에 찬 방랑자가 된다. 규피드의 궁전에서 쫓겨난 프쉬케는 두 언니를 찾아가 복수하는 한편 규피드의 사랑을 그리워하며 방황어린 여정에 돌입한다. 이 과정에서 비너스는 아들을 꾸짖고 프쉬케가 규피드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도록 온갖 모욕적이고 불가능한 과업들을 강요한다. 하지만 프쉬케는 비너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온갖 고초를 겪으며 규피드에 대한 애절한 사랑을 간직하며 자신에게 닥치는 환난과 곤경을 여러 신들과 피조물의 도움을 받아가며 극복해 간다. 지상의 모든 난관과 죽음을 무릅쓰며 지하세계를 넘나드는 등 상상할 수 없는 고초를 치른 후에야 프쉬케는 마침내 큐피드의 적극적인 열애를 되찾기에 이른다.
프쉬케에 대한 질투심으로 그녀를 추하게 만드려는 어머니 비너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규피드는 최고신 주피터를 찾아가 프쉬케와의 사랑을 완성시켜 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른다. 쥬피터는 신들의 동의를 얻어 프쉬케를 불사신으로 만들어 둘의 결혼을 승낙한다. 비너스마저 이 결혼에 만족해 하며 두 연인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프쉬케를 만나 사랑에 눈을 떠가며 규피드는 참 신으로 성장해간다. 규피드와 프쉬케의 신화는 사랑이 완성되기 위하여 치러야 할 연인들의 고통과 통과의례를 신화적인 상상력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2세의 로마 제국 시인이자 철학자인 루시우스 아펠레이우스 플라토니쿠스(123-179년)가 이 규피드와 프쉬케의 사랑 신화를 약간 각색하여 170년 경에 ꡔ변신ꡕ(Metamorphoses) (혹은 ꡔ황금 당나귀, Golden Assꡕ)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루이스는 대학 시절부터 이 프쉬케의 사랑 이야기에 매료되어 언젠가 다시 한번 이 이야기를 창의적으로 각색해 보려고 결심한 이래 약 30년에 걸친 상상과 숙고를 거쳐 이 소설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루시우스 아펠레이우스의 작품을 창의적으로 각색하여 기독교적 사랑과 우정, 자아탐색의 주제가 아름답게 교직된 작품을 만들어 내었다. 물론 루이스는 루시우스 아펠리우스가 큐피드와 프쉬케 신화를 각색한 것보다 훨씬 더 창의적이고 폭넓게 재주형하였는데 요소 요소에 성경적 은유와 주제를 이 소설 속에 내장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서도 원형 신화인 규피드와 프쉬케의 신화에 나오는 주제들 혹은 소재들이 주요한 서사적 모티브를 구성하고 있다. 아름다운 여인 프쉬케, 글롬 왕국이 신탁에 의하여 프쉬케를 괴물(야수)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상황, 아름다운 신이 프쉬케를 신부로 영접하여 아름답고 황홀한 신혼 살림을 아름다운 궁전에서 시작하는 상황, 남편 신이 목소리만 들려줄 뿐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상황, 언니가 프쉬케를 찾아가서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 그녀의 남편이 야수요 괴물이므로 그를 죽여서 그의 마법에서 풀려나야 한다고 요구하는 상황, 프쉬케가 징벌을 받아 방황하게 되는 이야기 등은 이 소설에서 주요한 서사적 동인이 된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점에서 루이스의 프쉬케 사랑 이야기는 기독교적 세례를 받아 재주형되었다. 소설 여러 곳에 기독교 세계관을 암시하는 크고 작은 장치들과 문학적 복선들이 눈에 띈다. 루이스의 버전(version)의 프쉬케 사랑 이야기가 보여주는 독특한 기독교적인 요소들을 예를 세 가지만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프쉬케가 회색산의 신(야수 혹은 괴물신)에게 제물로 바쳐지게 되는 상황이 원래의 프쉬케의 사랑 신화와는 다르다. 원래의 신화에서는 프쉬케가 괴물스러운 신의 신부로 바쳐지는 상황이 프쉬케의 미모 때문이었다. 그녀의 미모가 너무 출중하여 결혼할 남자를 찾지 못한 프쉬케의 아버지가 아폴로 신전에서 신탁을 들은 후에 그녀는 신의 신부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루이스의 소설에서는 글롬 왕국이 재난과 기근을 중지시킬 희생양으로 프쉬케가 신의 제물(야수적 신의 신부)로 선택된다는 것이다. 글롬 왕은 나라의 국운이 급격하게 쇠락한 상황에서 옹깃 여신의 노여움을 가라앉히기 위하여 제사장의 권고를 받아들여 회색 바위신 옹깃 여신(비너스의 글롬 왕국 발음)에게, 궁극적으로 옹깃의 아들 신 회색산의 신(규피드에 해당되는 신) 프쉬케를 바친다.
둘째, 원래의 신화에서는 프쉬케가 질투심에 복받쳐 규피드와 자신의 결혼생활을 망쳐버린 두 언니에게 가열찬 복수를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프쉬케가 그리스도적인 용서를 실천한다. 셋째, 원래 신화에서는 프쉬케는 다양한 신들과 피조물의 도움을 받아 비너스의 징벌과 복수어린 계략을 피해가다가 마침내 쥬피터의 중재로 큐피드와의 사랑을 완성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프쉬케가 인간적 존재로서는 죽고 불멸의 아름다움과 선(善)의 구현자로 부활하고 있다. 이 외에도 루이스는 기독교적인 세계관과 주제를 소설의 갈피 갈피에 숨겨 놓거나 암시해 놓고 있다(겔 47장의 생명강을 건너는 모습).
이처럼 원래의 그리스-로마 신화인 규피드와 프쉬케 이야기나 루시우스 아펠레이우스의 ꡔ변신ꡕ에서와는 달리 루이스의 소설에서는 소설의 줄거리를 움직여가는 동인들과 계기들이 다분히 기독교적인 음조를 띠고 있다. 사건들이 발생하거나 처리되는 서사적 상황들이 원래의 신화나 루시우스 아펠레이우스의 각색된 이야기와는 달리, 남녀간의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참된 자기와의 대면과 화해, 타인에 대한 사랑, 그리고 신과 대면하게 될 날에 대한 이야기로 승화된다는 점에서 더더욱 원래의 남녀 사랑 이야기가 보편적인 사랑을 논하는 기독교적인 색채로 덧입혀지고 있다.
II. 소설의 줄거리
소설은 오루알이 자기 조카에게 왕위를 양위할 계획을 세워둔 후 이제 마지막으로 그리스어로 자신의 생애에 일어난 사랑의 파국을 회고하며 그 파국에 대한 추후의 더 깊은 성찰을 전달하는 1인칭 작가의 자전적 회고담이다. 오루알은 자신의 고소장을 그리스어로 쓰는데 언젠가 인간들이 심지어 신들에게까지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는 그리스로 그녀의 회고록이 유포되기를 바라는 희망으로 그리스어로 쓴다. 1부가 신들을 기소하는 기록이라면(“신들보다 인간에게 유해한 존재는 없다”라고 주장한다) 2부는 1부에 쓴 자신의 결론(신들은 자신의 고소에 대답할 말이 없다, 즉 자신들의 유죄를 묵시적으로 인정했다)이 그릇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1부는 사건들의 이야기이며(프쉬케에 대한 오루알의 사랑과 좌절 이야기), 2부는 프쉬케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오루알 자신의 사랑의 본질에 대한 성찰과 후일담이다. 1부는 욥기 1-37장처럼 격렬하고 몰입적인 자기변명과 신들에 대한 대결의식을 드러낸다. 여왕이 된 오루알이 훗날 이웃 나라에 가서 프쉬케를 여신으로 숭배하는 사원의 사제에게서 언니 오루알의 질투로 동생 프쉬케가 파멸되었다는 이야기가 정설로 굳어져 전승되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게 된다(1부 21장 289쪽). 오루알은 1부의 마지막 장에서 프쉬케에 대한 자신의 숭고한(?) 사랑을 질투라고 말하는 신들과 인간들에게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 프쉬케를 자신의 손아귀에서 빼앗가는 신들의 처사가 불공평하다는 점을 주장하기 위해(신들의 법정에서 제출할 고소장) 책을 썼다고 고백한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막내 여동생 프시케의 박탈과 상실, 그리고 자신에게 덧씌워진 불명예(질투심이 많은 사람)에 대한 책임을 신들에게 묻기위해서 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녀의 요지는 프쉬케를 불행에 빠뜨린 것은 자신이 아니라 신들이었다는 강변이다.
오루알은 옹깃의 사제들에게 의하여 글롬 왕국의 재난을 막을 희생제물로 바쳐진 동생 프쉬케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이기지 못하고 동생이 묶여졌던 회색산으로 올라갔을 때 프쉬케게 죽지 않고 살아있음을 발견하고 너무나 기뻐한다. 그러나 프쉬케는 자신은 이제 신(회색산의 신)의 아내가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너무 아름다운 이복 여동생이 남편의 얼굴도 한번도 본 적이 없으면서도 행복하다고, 자신들의 부부 사이가 너무나 좋다고 말하자, 오루알은 프쉬케가 야수의 마법에 홀렸다고 생각하고 그 야수적 신적 존재로부터 프쉬케를 구해내기 위하여 온갖 안간힘을 다쓴다. 그리하며 프쉬케가 남편의 얼굴을 보도록 압박하기에 이르고 프쉬케는 등잔과 단칼을 듣고 곤히 잠든 신인 남편의 얼굴을 본다. 놀란 신은 상처를 입고 실망과 당혹을 감추지 못한 채 프쉬케에 유랑과 방황의 벌을 내리고 언니 오루알에게도 동일한 벌을 내린다. 그 후 여왕이 된 오루알은 겉으로 볼 때 선정을 베푸는 승리하는 여왕이었으나 그 내면은 애정에 굶주린 방황하는 영혼으로 살게 된다. 여우 선생과 바르디아를 지배하듯이 집착적으로 사랑하면 오랫동안 사랑의 감정에 시달리지만 자기 혐오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방랑하는 영혼이었다.
2부는 오루알이 나이가 많아 왕위에서 은퇴하려던 시점에서 자신이 쓴 책(1부)을 다시 한번 읽고 지나간 프쉬케 사랑 파국 사건을 반추하면서 시작된다. 신들에게 항변하며 섰던글을 다시 한번 읽어가며 오루알은 자신이 참 사랑이 아니라 소유욕에 가득찬 사랑의 사람이었다고 고백한다. 2부에서는 그래서 신들에 대한 고소장이 자신의 반성깊은 참회록으로 바뀌어 버린다. 오루알이 고백하듯이, 이런 변화는 글쓰기 자체를 통해서 일어났다(297쪽). “신들은 펜을 통해 내 상처를 철저히 탐색해 보게 했다”(298쪽). 오루알의 글쓰기는 자신의 행동들 근저에 있는 동기들을 검증하는 것이었다(300쪽)
2부를 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신화에서 프쉬케에서 주어졌던 과업들과 방불한 꿈들을 포함하여 신비한 일들과 환상적인 사건들을 통하여 오루알 자신에게 많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비록 꿈에서긴 하지만 오루알의 글쓰기는 마치 그리스 로마 버전의 프쉬케 신화에서 프쉬케가 사랑하는 큐피드를 만나기 위해서 겪는 고초와 같다. 밀과 보리와 양귀씨와 호밀과 기장 등이 뒤섞여 있는 곡식 낱알들을 종류별로 분류하는 작업이었다(301쪽). 여기서 오루알은 프쉬케의 고난을 추체험하면서 서서이 자신이 프쉬케처럼 닮아간다.
오루알은 자신이 썼던 1부를 다시 읽으면서 프쉬케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소유욕과 지배욕이라는 것을 하나 하나 깨닫는다. 프쉬케로 하여금 그녀의 남편의 얼굴을 보도록 압력을 가한 실제 동기는 회색산의 신에 대한 질투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프쉬케에 대한 질투가 아니라 프쉬케의 사랑을 훔쳐가 버린 산의 신에 대한 질투였음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이 깨달음이 그녀로 하여금 다시 프쉬케를 만나고 화해하도록 허용한다.
또한 타린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자신이 여동생 레디발에 대하여 가혹하게 매몰차게 굴었던 점을 반성한다. 여우 선생과 프쉬케에 쏟아진 사랑 때문에 희생당한 사람이 레디발이라는 것을 안다(300쪽). 또한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다고 믿었던 충직한 신하 경비대장 바르디아에 대한 자신의 사랑도 소유욕이 었음을 깨닫는다. 임종석상에 누워있는 바르디아를 병문안하여 “사랑했어”라는 말을 하고싶은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병문안을 가려고 하자 옹깃의 사제 아르놈은 즉각 반대한다. 임종석상에 있는 바르디아에게 왕이 달려가는 것은 신하의 병을 더욱 위독하게 할 뿐이라는 아르놈의 충고에 따라 바르디아를 병문안하는 일을 단념했다. 아르놈의 충고와 지혜로운 권면에 따라 바르디아에 대한 자기의 일방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내려놓는다. 소유욕과 집착, 지배욕이 사랑의 이름으로 포장된 것을 알고 오루알은 자신이 바르디아를 참으로 “사랑”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여자로서 남자인 바르디아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고 그를 떠나보낸 것 때문에 아쉬워하고 슬퍼하는 오루알의 모습 속에서 그녀가 진정 바르디아를 남녀간의 연애감정으로 사랑했음을 알 수 있다(303쪽). 그 후 오루알은 바르디아의 아내(안싯 부인)로부터 바르디아가 여왕을 섬기기 위해서 속에서부터 파먹히는 나무같이 살았음을 알게 되었다(305쪽). 성난 그의 아내의 푸념과 넋두리를 들으며 오루알 자신이 실상 그녀로부터 바르디아를 빼앗았음을 알게 된다. 이 과정에서 바르디아의 부인 안싯은 예언자처럼 신랄하게 오루알 여왕의 거짓 사랑을 지적하며 회개에 이르도록 돕는다.
“폐하는 남편의 피를 한 해 한 해 다 빨아 마셨고 그의 생명을 삼켜 버렸습니다”(309쪽). “폐하는 사랑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시는 것 같군요....신의 소생이니까 아마도 사랑도 신처럼 하시겠지요. 그림자 야수처럼 사랑하는 것과 삼키는 것은 하나라면서요. 그렇지 않나요? ”(310쪽). “흥! 배부르시겠어요. 다른 남자들의 목숨도 삼켰으니, 여자들의 목숨도 삼키고. 바르다와 내 목숨, 여우 선생의 목숨, 동생의 목숨, 두 동생의 목숨 다”(311쪽).
오루알은 안식의 말이 다 진실이라는 점을 인정했다(312). 자신이 하늘의 의사들에게 묶여 수술을 받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오루알은 깨닫는다. “자신은 아무 것도 주지 못하면서 모든 것을 차지하려 드는, 상대방을 갈아먺는 욕심”이 바로 자신이 바르디아에 품은 사랑의 실체였음을(313쪽).
2부 2장에서부터는 오루알이 프쉬케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소유욕과 집착적 탐닉이었음을 깨닫는 꿈과 환상 체험이 연속적으로 일어난다. 오루알이 꿈 속에서 자신을 학대하던 아버지 선왕과 함께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뛰어내리다가 어느 거울에 선 자신의 모습이 옹깃 여신처럼 변화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존재, 태처럼 생겼으나 생명을 잉태할 수 없는 존재였다. 글롬은 거미줄이었고 나는 그 중앙에 웅크리고 앉아 훔친 목숨으로 배워 채워 퉁퉁하게 부푼 거미였다”(324쪽). 자신의 혐오스러운 외모에 절망한 나머지 오루알은 이런 옹깃이 되지 않으려고 칼을 들고 자결하려고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이 꿈 무렵부터 오루알은 쇠약해 져서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녀는 더 이상을 베일을 쓰지 않고 자신의 맨얼굴로 다니기 시작한다(325쪽). 셰닛 강 가장 깊은 곳에 가서 투신자살을 하려고 새벽에 성밖으로 빠져나간다(326쪽). 강 속으로 뛰어들려는 순간 강저편에 한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지 말라.” 불꽃 같은 신의 소리였다. 그것은 자신의 인생을 산산조각내던 소리였다. 신의 목소리는 “죽기 전에 죽으라”였다(327쪽). 오루알은 그 신의 목소리를 듣고 변화되기 시작했다(328쪽).
오루알은 자신 안에 죽지 않으면 안 되는 옹깃(질투, 지배욕의 화신 비너스)이 살고 있음을 인정하면서 변화된다. “내가 옹깃이라는 것은 내 영혼이 옹깃처럼 추하다는 의미였다. 탐욕스럽고 피에 굶주렸다는 뜻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진정한 철학을 연마한다면 내 추한 영혼도 아름답게 변화되리라. 신들이 도와준다면 할 수 있으리라. 지금 당장 시작하리라”(330쪽).
오루알은 또 다른 꿈에서 또 하나의 프쉬케의 경험을 추체험한다. 규피드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황금빛 양털을 깎아가던 프쉬케처럼 오루알은 금빛 양털 한 뭉치를 훔칠 수만 있다면 정말 자신이 아름다워 질텐데라고 생각했다(331쪽). 여기서 오루알은 에스겔 47장의 생명강 도강 경험을 하면서 신들의 초장으로 건너간다. 황금빛 양떼가 자신을 행해 기쁨으로 돌진하여 자신을 쓰러뜨리는 경험을 한 것이다. 황금빛 털을 수확하는 여인을 본다(그녀는 프쉬케였다)(332쪽). 오루알은 자신이 바르디아는 애욕과 소유욕으로 사랑했다고 강변했지만 프쉬케만큼은 진실로 사랑했다고 믿었다(323쪽). 자신의 쓴 책 (1부)을 읽으며 자신이 프쉬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열심히 돌보고 가르쳤는지, 그 아이를 구해려고 애썼는지를 읽어보려고 했다. 다시 이상한 환상에 사로잡힌다. 이 환상 속에서 자신이 프쉬케에게 쏟은 사랑의 열정은 철저한 소유욕이자 지배욕임을 깨달았다.
오루알은 또 다시 프쉬케적인 경험을 추체험한다. 빈 그릇을 들고 저승의 강과 연결된 샘을 찾아 죽음의 물을 가득 채운 후에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옹깃에게 바쳐야 하는 여정에 자신과 프쉬케가 동행하는 환상을 본 것이다. 그러나 정작 오루알 자신의 손에 들려진 것은 빈그릇이 아니라 신들을 고소한 고소장이었다(책). 오루알은 마침내 신들의 법정에서 고소장을 읽어간다(338-339쪽).
“당신들은 그 아이의 사랑을 훔쳐가버렸습니다..... 그 아이는 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권리로 그 까마득히 높은 곳으로 그 아이를 훔쳐 가 버린 것입니까?(340)...어떤 신이든 신이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재앙이며 부당한 고통입니다....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되고 싶습니다. 나는 내것이었고 프쉬케도 내것이었습니다”(340쪽). “그 아이는 내것이었어. 당신들은 도둑이고 사기꾼들이야. 그게 내가 당한 불의야”(341쪽).
이처럼 신들에게 자신의 육성으로 고소를 터뜨린 후에야 오루알의 변화가 완성된다. 드디어 2부 4장에서 이 소설의 주제가 명시적으로 진술된다. 참된 자기 이해에 도달한 자만이 신들의 말걸어 옴을 감당할 수 있고(신의 대답을 들을 수 있고), 신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루알은 고백한다. “나는 신들이 우리에게 드러내 놓고 말해 주지도 않고 우리 스스로 대답을 찾지도 못하게 하는 이유를 잘 알게 되었다. 이렇게 자기 중심에서 무슨 말이 있는지 찾아내지도 못한 상태에서 이게 내 말의 의미입네 떠드는 소리를 신들이 뭐 하러 귀 기울여 듣겠는가?”(342-343쪽) “우리가 아직 얼굴을 찾지 못했는데 어떻게 신과 얼굴을 맞댈 수 있겠는가?”(343쪽)
신들의 최고 법정 판결을 기다리면서 유령이 된 여우선생과 함께 있으면서 마지막 환상을 본다. 프쉬케가 강물에 뛰어 내리려는 모습, 누더기를 걸치고 쇠차꼬를 찬 프쉬케가 곡식 낱알을 골라내는 모습, 황금빛 양털을 즐겁게 놀이하듯이 수확하는 프쉬케의 모습, 마지막으로 빈그릇을 들고 가는 죽음의 땅으로 걸어가는 프쉬케와 자신이 쓴 고소장을 든 오루알이 어디론가 가고 있다(349쪽). 프쉬케는 저승의 여왕, 죽음 그 자체로부터 아름다움을 받아 상자에 담아 와서 옹깃을 아름답게 변화시키기 위하여 저승으로 내려가고 있다. 옹깃인 자신을 아름답게 변화시키기 위하여 프쉬케가 죽음의 땅으로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351쪽). 이 점이 바로 루이스가 프쉬케와 규피드의 신화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야기로 재창조했다고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부분이다.
마침내 죽음의 이기고 부활하여 여신이 된 프쉬케가 죽음에게서 저승의 여왕에게서 아름다움의 상자를 받아들고 오신다(355쪽). 오루알은 여신 프쉬케에게 고백한다: “다시는 나는 당신을 내것이라고 부르지 않겠습니다. 오히려 제게 있는 것이 다 당신의 것입니다. ...저는 당신이 잘 되기르 바란 적이 없었고 사심없이 당신만을 생각한 적도 없습니다. 저는 욕심덩어리였습니다.” 오루알은 덧문을 열어 젖힐 때 쏟아지는 여름의 환한 아침 햇살 앞에 연회장을 밝혔던 횃불들이 빛을 잃듯이(356쪽), 신의 임재 앞에 자신의 옛 자아의 해체를 경험한다. 규피드의 화살에 맞은 자처럼 변화된다.
프쉬케를 통해서 매개된 “신께서 오루알을 심판하러 오신다”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오루알은 새사람이 된다. 프쉬케의 손에 이끌려 연못가로 갔던(세례 이미지) 오루알은 존재의 재창조를 경험한다. “숨을 쉴 때마다 새로운 두려움과 기쁨과 감당할 수 없는 감미로움이 밀려들었다. 화살이 내게 박혔다. 나는 해체되고 있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나는 한 때 더 이상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을 만큼 그녀를 위해서라면 어떤 죽음이라도 불사할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조차 참으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중요하다면 다른 분 때문이었다. 땅과 별과 해, 전에 있었고 앞으로 있을 모든 것은 바로 그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분이 오고 있었다....나는 눈을 떨구었다”(357쪽)
연못가에서 오루알은 수면 위에 비친 두 사람의 프쉬케를 보았다. 자신 또한 아름다운 프쉬케가 되리라는 위대한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358쪽). 그 때 오루알은 “주여 이제는 당신 자신이 대답이십니다. 모든 질문은 당신의 얼굴 앞에서 사라져버립니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해서 프쉬케에 대한 집착적 소유, 탐닉적 지배적 사랑에서 해방된다.
소설의 마지막은 불완전 문장으로 끝난다. “오랫동안 저는 당신을 미워했고 오랫동안 당신을 두려워했습니다. 이제는---”(359쪽). 옹깃의 사제 아르놈에 의하여 문장을 완성하지 못하고 고개를 앞으로 떨구고 죽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어떤 점에서 이 소설은 욥기의 구조를 닮았다. 1-37장까지는 신의 변명을 요구하는 욥의 드센 주장들이 주를 이루고 38-42장은 욥의 지적 질문에 대해 답변하는 대신 폭풍과 거룩한 어둠 속에서 하나님이 나타나 욥의 대답이 되는 것처럼, 이 소설의 2부에서는 신이 꿈과 바람과 환상 속에 나타나기도 하고 목소리를 통해 나타나기도 한다. 2부에서는 줄거리 진행은 현저하지 않고 1부에 쓴 자신의 글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며 신의 결정을 수용하면서 깊은 자기 이해에 이르는 과정이 부각된다.
III. 소설의 기독교적 주제
이 소설의 으뜸 주제는 “참 사랑이 무엇인가?”이다. 루이스는 지배욕구로서의 사랑(남녀사랑 포함)을 비판하고 프쉬케적 자기 내어줌의 사랑을 현양한다. 오루알은 자신이 여우 선생을 사랑하고 존경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애의 연장이다. 경비대장 바르디아에 대한 사랑도 자기애의 연장이다. 오루알은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그들을 희생시켰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르디아의 아내를 만나면서 그리고 여우선생이 떠나는 것을 보면서 자기 사랑의 본질이 자기애임을 알게 된다. 이에 비하여 프쉬케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처럼 순수하다. 자기 내어줌의 사랑이다. 그녀는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병자를 치유해 주려했다. 글롬 왕국의 재난을 막을 희생양으로 자기를 드린다. 그리스도의 그림자다. 복수의 화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적인 용서의 사람이다. 프쉬케와의 엮임과 접촉 속에서 오루알은 사랑과 애욕, 사랑과 지배욕, 사랑과 집착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서서이 지혜로운 분별의 사람으로 바뀌어간다.
또 다른 주제는 정체성이다. 어린 시절부터(특히 아버지로부터) 추녀라는 말을 듣고 자란 오루알은 자신의 혐오스러운 얼굴에 절망한다. 그래서 베일을 쓰고 다닌다.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신들에게 항변하는 글을 쓰면서 자신의 속생각을 털어놓게 되고 그리고 마침내 베일을 벗는다. 베일을 벗는 행위는 한편으로 글을 쓰는 행위다. 글을 통하여 질투심, 사랑, 증오, 경멸 모든 내면을 쏟아놓는다. 이것이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는 행위다. 글쓰는 행위는 자아 노출행위다. 신들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자신의 본 모습을 본다. 우리가 베일을 벗고 진정한 얼굴을 드러낼 때에야 비로서 신적 존재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고전 13장; 고후 3장 모세의 베일). 차용된 목소리가 아니라 참 자신의 목소리로 말해야 신의 말걸어 옴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베일에 가린 얼굴이 아니라 참 자아의 육성으로 내면의 진정성으로 말하는 자만이 신들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추한 얼굴을 반추하면서 내면의 모든 추한 생각을 다 쏟아 놓은 후에 오루알은 더 이상 신들의 처사를 부당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소설의 주제는 참된 자기 얼굴(자기 정체성)에 대한 탐색이다.
또 하나의 주제는 이성과 상상력의 갈등이다. 이성적인 것과 신성한 것의 긴장이 이 소설 속에 내장되어 있다. 합리론과 유물론을 대변하는 그리스 철학자 여우 선생은 초자연적인 인정하지 않는다. 신성한 것의 진정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옹깃의 사제는 신화적 세계관을 비판하고 그것을 미신적 세계관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의 경우 오루알을 지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만족시키는 지성적 깊이와 지혜를 보여주지만, 프쉬케가 신과 결혼하여 사는 이야기라든지, 오루알이 프쉬케를 계곡의 궁전에서 만난 이야기라든지, 혹은 프쉬케가 부활한 이야기라든지 등 초월적인 세계, 신들과 인간의 경계선상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교조적일 정도로 무기력한 합리적인 설명만을 제시한다. 그는 오루알의 영적 경험을 설명하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한다. 오히려는 그는 프쉬케를 아내로 맞이한 채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신을 괴물이라고 설명하며 프쉬케가 남편 행세를 하는 야수를 죽여서 어서 그 계곡 궁전에서 탈출하여야 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는 죽어서 유령이 되어서야 프쉬케와 오루알이 경험한 신비체험의 진정성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반면에 그리스 철학의 정신적 후예였던 오루알은 거듭되는 환상 경험과 꿈 같은 신비체험 속에서 이성 너머에 있는 신성의 영역이 존재함을 인정해 간다. 신비한 경험을 하면서 그리스 철학의 과오와 한계를 깨달아간다. 신비의 세계는 사제들이나 시인들이 지어낸 거짓말이라고 가르치며 그리스의 명석한 지혜를 대표하는 그 그리스 가정교사는 궁극적으로는 프쉬케의 진엉한 임무와 여정을 방해하고 유혹하는 장애물임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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