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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은혜를 받는 마음가짐/누가복음 1장 26-38절

by 【고동엽】 2023. 1. 23.

큰 은혜를 받는 마음가짐

2001-12-18 15:27:19 read : 775

 

누가복음 126-38

 

 

얼마 전에 바보처럼 살다가 돌아가신 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바보처럼 가장 좋은 옷을 입을 수 있었는데 소매가 닳아빠진 옷을 입었고,

가장 멋진 자동차를 탈수 있었는데 버스를 타거나 남의 차를 빌려 타곤 했습니다

외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주라는 권유를 물리치고 그 아들을 외국으로 쫓아버렸고,

새까만 후배들이 통일운동을 한다면서 북한을 제집처럼 마음껏 들락날락할 때도

그분은 "고향에 못간 많은 실향민을 두고 나만 어찌 고향에 가겠는가?"고 하며

바보처럼 그분은 한번도 고향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천국 본향으로 가셨습니다.

그분은 웅변도 몰랐고, 쇼맨십도 없었고, 그저 예수님처럼 살려고 노력하셨습니다.

이 바보 같은 목사님의 이름은 바로 한경직 목사님입니다.

 

이 기다림의 계절에 다시 한번 얼마 전 돌아가신 한경직 목사님이 그리워집니다.

그분이 가졌던 마음의 깊은 평화를 우리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한 내면에 깊은 평화를 가져야 인생의 풍랑을 잠재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금년에는 엄청난 테러와 그로 인한 보복전쟁이 있었습니다. 섬뜩하지 않습니까?

무너진 건물의 잔해와 찢긴 시신 사이에서 사단은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을 겁니다

이 전쟁과 폭력을 어떻게 끝낼 수 있을까요? 주님은 원수 사랑이 길이라고 하십니다.

원수 사랑이 무엇입니까? 힘이 있을 때 그 힘을 자제하거나 포기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힘이 있으면 그 힘을 과시하고 싶고 그 힘 앞에 벌벌 떨면 쾌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학벌에 신경 쓰고, 연줄에 신경 쓰고, 힘이 있다는 곳으로 사람들이 몰립니다.

그처럼 힘의 논리로 살아가면 우리 속에 어둠의 힘은 커지고 영혼은 뒤틀리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힘이 있는 곳으로 몰리기보다 힘이 없는 곳을 찾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힘을 얻으면 그 힘으로 다른 사람을 섬겨서 평화를 추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칭송받는 이유는 힘이 있어도 그 힘을 선하게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진정 평화를 원한다면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손해보는 삶을 연습하십시오.

오늘날 대부분의 싸움은 내 욕망을 위해 손해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과 평화롭게 살고 행복하게 살려면 내 욕망을 조금 덜어내십시오.

남을 생각지 않는 이기주의와 독점욕은 우리 속에 어둠을 키우는 평화의 적입니다.

 

지금 빈곤과 질병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은 자기들 몫을 가로채는 사람들을 미워합니다.

그들의 원망과 한숨이 세상을 어둡게 하고 평화를 깨고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게 됩니다.

그런 평화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모시고 평화의 길을 걷기로 작정했습니다.

지금은 길이 없어 보여도 내가 평화의 길을 걷다 보면 반드시 그 길은 생길 것입니다.

그처럼 하늘의 영광이 땅의 평화로 성육신 되는 날이 바로 주님의 성탄절이 아닐까요?

 

< 주님 모실 빈 여백이 있습니까? >

 

이제 곧 성탄절이 됩니다. 벌써 성탄절 분위기가 곳곳에서 느껴지고 있습니다.

캐럴이 들리고 크리스마스 트리가 장식된 것을 보면 참으로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한 해의 마지막을 보내는 이 추운 겨울에 성탄절이 없었으면 얼마나 삭막했을까요?

그런데 이 삭막한 계절에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따뜻한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사랑을 준비하여 카드도 쓰고, 선물도 주고, 사랑의 촛불을 켜시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준비를 하지 않으면 성탄절이 되어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실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주님을 기다렸지만 정작 주님 오셨을 때 방조차 내드리지 못해서

예수님은 할 수 없이 말구유에 그분의 최초의 거처를 정하셔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들뜨기만 하고 정작 주님과 이웃을 위한 삶을 준비하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리 강력한 기도를 한다고 할지라도 주님은 우리 안에 오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중심에 주님을 모실 수 있다면 우리에게 절망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말구유에 계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인가 큰 희망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우리는 너무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뜻이 아닐 것입니다.

너무 힘을 추구하지도 마십시오. 주님은 강한 힘을 가진 해결사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실 때 연약한 모습을 가지고 희망을 창조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런 평화의 주님을 모실 마음의 빈방이 여러분들의 삶에 지금 마련되어 있습니까?

마음의 빈방이 마련되어 예수님을 모실 수 있다면 우리는 비틀거리지 않을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우리의 영혼은 깊은 평화와 풍요로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 성탄절에 그런 마음의 평화와 풍요로움을 찾기 위해서 더욱 애쓰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는 주님의 풍요로움을 예비했던 한 아름다운 부부의 모습이 나옵니다.

주님의 탄생을 위해 누구보다 지대한 공헌을 했던 바로 요셉과 마리아 부부입니다.

주님은 너무 중요한 주인공이시기에 가끔 요셉과 마리아를 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탄을 있게 한 요셉과 마리아의 헌신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생일잔치를 하면 가끔 "이 생일 잔치의 주인공이 누구인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생일 잔치의 주인공은 생일을 맞은 본인이지만 정작 본인은 수고한 일이 없습니다.

정말 수고한 분은 부모님, 그 중에서도 생명을 낳기 위해 생명을 건 어머님입니다.

 

그러므로 생일에 부모님께 감사카드를 보내야 합니다. "절 낳아주셔서 감사드려요."

그런 이치를 가지고 우리는 주님의 탄생을 기뻐하면서 요셉과 마리아에게도

"주님의 탄생을 위해 수고하셨습니다"라고 마음의 깊은 감사를 품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탄생을 예비한 요셉과 마리아의 신앙을 본문을 통해서 한번 살펴볼까요?

 

< 천사의 소식을 전하며 사십시오 >

 

먼저 본문은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장면부터 시작됩니다.

지금도 이 가브리엘 천사가 필요할 때마다 좋은 소식을 전해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그런 것만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더 가치 있는 삶을 원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서로가 좋은 소식을 전해주는 가브리엘 천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원하시는 것은 '좋은 일을 바라는 것'보다 '좋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선택하실 때 마리아는 어디에 살고 있었습니까?

본문 26절을 보면 하나님은 갈릴리 나사렛의 평범한 시골 처녀 마리아를 택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선택을 보면 확실히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생각과 다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높다고 하는 자는 반드시 낮추시고, 낮다고 하는 자는 반드시 높여주십니다.

그 원리를 깊이 깨달을 수 있어야 주님의 성탄이 주는 의미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힘에 대한 환상을 버릴 때 바로 아기 예수 사건이 진정 복음임을 알 것입니다.

 

어떤 큰 교회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가끔 그분에게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그분에게 조금 더 관심을 가져주세요. 그 사람이 일하면 큰 일 할 분입니다."

세상에서 남보다 높은 위치에 있고 가진 것이 많으니까 특별관심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목회의 철이 들지 않았을 때에는 그런 분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져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 말에 의하면 한번도 그 특별한 관심이 열매맺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주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결국 겸손해야 큰 일을 합니다.

나사렛 시골 처녀 마리아가 성모 마리아가 되었다는 점이 그 사실을 잘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때 마리아의 신분은 어떤 신분이었습니까? 27절을 보십시오.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그때 당시 마리아는 이미 요셉이라고 하는 사람과 정혼한 상태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결혼관습에 의하면 먼저 약혼하고, 정혼하고, 그 후에 결혼하게 됩니다.

그래서 약혼하면 파혼할 수 있지만 정혼하면 이미 법적으로 결혼한 상태와 같습니다.

 

이런 관습 아래에서 주님의 탄생을 위해 수고한 마리아의 헌신도 잊지 말아야 하지만

우리는 정혼자 요셉이 겪었던 마음의 수고, 특히 요셉의 용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요셉이 정혼한 아내 마리아의 임신을 용서했기에 주님의 성탄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요셉의 용서가 더욱 빛나는 이유는 오늘날 너무나 부정의 유혹이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 잘 다니는 아내의 부정 확률은 보통 아내의 10분의 1도 안된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부정이 많은 오늘날 이 요셉의 용서와 믿음이 얼마나 소중하게 느껴집니까?

 

요새는 부정이 너무 많아서 까닭 없이 의심하는 경우도 점차 많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신문기사에 의하면 아내가 남편을 의심하는데,

이 남편이 조금이라도 늦게 들어오면 남편의 옷에 현미경을 대고 면밀히 살펴봅니다.

그러다가 머리카락이 나오지 않으면 "오늘은 대머리하고 잤구나"라고 의심하더랍니다.

 

이런 현실에서 요셉의 용서하고 용납하는 마음이 얼마나 위대하게 느껴집니까?

이 연말에 우리가 진정으로 회복시켜야 할 마음은 바로 이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가짐이 있어야 진정으로 우리 마음의 구유에 주님께서 강림하실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간직한 채 우리에게 행복해지는 길은 절대로 없습니다.

 

< 주님처럼 살려면 용서는 필수입니다 >

 

우리는 항상 넉넉한 모습으로 다른 사람을 용납하고 사랑으로 감싸주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를 용납해주시고 우리를 품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치명적인 실수를 많이 했습니까?

그래도 용서받은 우리가 타인의 실수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바른 일이겠습니까?

 

어떤 부인이 화장실에 비누를 사다 두는 것을 잊었습니다.

남편이 그냥 "여보! 비누 없는데..." 하면 될 것을 어떻게 하나 두고 보자고 하다가

일주일만에 화를 벌컥 냈습니다. "어떻게 일주일 동안 비누도 갖다 놓지 않아!"

부인이 말합니다. "그러면 비누 없다고, 비누 좀 사 달라고 말하면 되지 않아요."

그러다가 싸움이 일어나고 7개월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이처럼 비누 한 장 때문에 원수가 되고 이혼하는 부부들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고 연약한 자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상대방을 연약한 자로 알고 먼저 용서할 때 자기 자신부터 치유 받게 됩니다.

그때 축복의 문도 열리고,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존재로 성숙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습니까?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나에게 가한 일을 하나님이 허락하셨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인정하면 그 순간부터 진정한 용서가 시작됩니다.

 

형제들에 의해 애굽에 팔렸다가 총리가 된 요셉이 나중에 뭐라고 고백합니까?

"하나님이 가족 전체를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를 애굽으로 먼저 보내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용서하면서 모든 것을 용납하며 살려면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를 이곳에 보내주셨습니다."

 

어떤 부인은 매일 이렇게 한탄합니다. "내가 이 놈의 집구석에 왜 시집을 왔나?"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 가정에 보내셨습니다."

교회에 대해서도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저를 이 교회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면 나의 아내, 나의 남편, 나의 자녀, 나의 교우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렇게 될 때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싹트게 되고, 축복의 문이 활짝 열릴 것입니다.

 

많은 인간관계의 갈등을 보면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다"는 고백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많은 공동체에서의 실패도 "하나님이 이곳에 보내셨다"는 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고백이 없으면 내가 심겨진 곳에 뿌리내리고 또한 축복과 번영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고백을 하고 나가면 나의 삶의 현장은 얼마든지 복의 터전이 될 수 있습니다.

 

때로 어려움이 있어도 "나를 이 곳으로 보내신 하나님은 실수가 없습니다"라고 믿고

기다리고 인내하면서 한 걸음씩 걸어가게 될 때에 모든 사건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그 사건들이 나의 삶의 아름다운 재료가 되고 우리 인생은 더 아름답게 변할 것입니다.

요셉이 마리아를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의 꿈을 가지십시오 >

 

이처럼 주님의 탄생에는 요셉의 용서하는 마음가짐도 큰 역할을 했지만

무엇보다 우리는 마리아의 죽도록 헌신했던 마음가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와서 뭐라고 말합니까? 본문 28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은혜 중의 최고의 은혜는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의 꿈을 마음에 품는 것입니다.

28절에서 천사가 마리아에게 "은혜를 받은 자"라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은혜입니까?

본문 31절 말씀을 보면 처녀로서 잉태하는 것이 은혜라고 합니다.

왜 처녀가 임신한 것이 은혜입니까? 하나님의 꿈이신 예수님을 임신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거룩한 꿈이 잉태되고 꽃피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꿈을 품고 그 꿈이 구체화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먹고 잘살아도 이 하나님의 꿈이 없으면 은혜를 모르는 것입니다.

성탄절은 예수님의 나심을 축하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꿈을 품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마리아처럼 우리를 통해서도 그 하나님의 꿈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꿈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절망한 자에게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이틀 전, 안양에서 외국인 근로자 40여명을 교육하며 선교하는 한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분과 얘기하면서 "우리가 외국 근로자들에게 너무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대개 3D, 더럽고(dirty), 어렵고(difficult), 위험한(dangerous) 직종에 근무하는데,

곳곳에 위험이 있는데 말은 잘 안 통하니 주인들도 답답해서 주먹부터 나가지 않습니까?

그래서 매맞고 어디 한 군데 하소연할 곳이 없어 한이 맺힌 근로자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들도 자기 나라에서는 대학을 졸업하고 나름대로 인텔리로 대접받던 사람들이었지만

우리 나라에 와서 힘들게 일하다가 매까지 맞으니 얼마나 마음의 상처가 크겠습니까?

그런 그들의 아픔을 보듬어주지 않고서야 우리 민족이 어찌 축복이 있기를 바라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곳곳에서 "이방인과 나그네를 잘 대접하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대로 이제 우리는 외국 근로자들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주려고 힘써야 합니다.

 

지금 그 목사님은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희망을 되고자 무료로 컴퓨터를 가르치고 있고.

최근에는 음악을 좋아하는 그들의 취향을 살려 '가스펠 찬양팀'을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오디오 시스템과 악기를 구입하는데 동참해달라고 후원을 요청해왔기에

우리 교회와 요삼일육 선교회에서 최선을 다해서 돕도록 해보겠다고 약속을 드렸는데

여러분 중에서 "내가 악기 하나를 맡아보겠다"고 자원하는 분이 나올 수 있길 바랍니다.

절망한 자에게 희망을 주려는 일에 동참한다면 이번 성탄이 얼마나 뜻깊게 되겠습니까?

< 이 일에 동참하길 원하시는 분은 연락주세요. 이한규목사(017-705-4347) >

< 요삼일육(3:16)선교회를 후원하실 분 안내/ 국민은행 284-21-0264-873 >

 

< 헌신적인 삶이 주는 축복 >

 

그처럼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하나님의 꿈을 듣고 마리아가 어떻게 반응을 했습니까?

처음에 마리아는 하나님의 꿈을 이해할 수 없어서 묻습니다.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처녀가 잉태하는 일이 있을 수도 없고, 잉태한다고 해도 그것이 어찌 은혜냐는 말입니다.

당시 정혼한 처녀가 임신하면 집에서 쫓겨나든지 돌에 맞아 죽든지 온갖 수모를 당하고

평생 손가락질 받으면서 불행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이것이 어떻게 은혜가 됩니까?

 

그러나 결국 마리아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38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하며 맞아죽을 각오를 합니다.

맞아죽지 않아도 평생 비난받으면서 가슴에 한을 가진 채 살아갈 각오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리아를 복되게 하셨고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이름으로 만드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은혜 받으면 죽음을 각오하고 어려운 일, 위험한 일에 헌신하게 됩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얼마나 놀라운 순종의 고백입니까?

내 마음에 드는 일만 골라서 순종하지 않고 말씀대로 순종하겠다는 고백을 해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상상할 수 없는 무수한 축복으로 그를 높여주실 것입니다.

 

주의 계집종! 얼마나 겸손하고 순종적인 표현입니까?

마리아는 주님의 계집종으로 산다는 것이 어려운 일인지 알지만 그 길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전체가 아니라 작은 부분도 내놓기를 주저합니다.

그처럼 헌신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오늘도 주님의 꿈이 이 땅에서 성육신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를 온전히 비울 수 있는 또 다른 마리아를 찾고 계신 것은 아닐까요?

 

오늘날 왜 사람들이 불안해할까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57절에서는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고 권고합니다.

왜 사람들이 자존심 상한다는 말을 자주 할까요? 그것 역시 맡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용없는 재산은 자존심인데 자존심 지키느라고 너무 애를 씁니다.

그러나 가장 소용없는 재산인 자존심을 지키다가 망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물론 적당한 자존심은 인간관계를 화면서 자신의 품위를 지키는데 도움이 되지만

지나친 자존심은 오히려 자신을 소외시키고, 삶의 패배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존심도 상대를 알고, 상황을 잘 파악한 뒤 적절히 내세워야 할 것이고,

누군가 자존심을 상하게 하면 자신을 돌아보고 유머로 넘길 줄 아는 태도도 필요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신뢰와 헌신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 인생의 황금기에 하나님께 헌신하십시오 >

 

여러분! 마리아처럼 여러분의 모든 것을 내어놓는 헌신의 고백을 해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분은 너무 할 일이 많고, 시간이 없어서 하고 싶어도 못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한가하게 되어야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될까요?

우리는 바빠도 "주의 종이니 말씀대로 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으면 손발이 떨리고, 사고력이 떨어지고 눈도 어두워질 것입니다.

그때는 내가 한가해지고 싶어도 틀림없이 한가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을까요? 물론 그때도 할 수 있지만 얼마나 아쉬운 일입니까?

우리는 바쁘고 할 일이 많은 인생의 황금기에 하나님의 일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인생의 황금기에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게 된 기회를 잡은 것이 최고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할 때 비로소 인생의 가치를 알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시간이 없는 사람은 인생의 가치를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지금'을 허비하고 하나님이 축복해주실 '내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는 우리에게 지극히 제한된 시간만을 허락하셨습니다.

그 시간을 잘 활용해서 하나님 일을 하는 것이 삶의 최대의 성공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을 위해 시간을 쓸 줄 아는 사람은 돈을 벌지 못해도 인생을 버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무엇인가를 드릴 때 소중한 것을 드려야지 남은 것을 드리면 될까요?

인생을 드릴 때에도 황금기를 드리겠다고 해야지 노년기를 드리겠다고 하면 됩니까?

병들고 일터가 없고 힘이 없을 때 주님을 위해 살겠다는 생각은 얼마나 처량합니까?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마음가짐이 은혜 받는 마음가짐이 될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이 소중한 것을 드리고자 하는 값진 헌신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정혼의 때라는 인생 황금기에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바쳤습니다.

그 헌신이 열매맺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고, 본인은 큰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마리아와 같은 순종하고 헌신하는 사람을 오늘도 우리 가운데 찾고 계십니다.

천주교가 마리아를 지나치게 높이고 숭배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지만

개신교가 마리아를 지나치게 격하하는 것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는 마리아를 생각하면서 또 다른 오늘날의 마리아가 되기를 다짐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대로 주님의 삶을 드러내며 산다는 것만큼 복된 일은 없습니다.

이 기다림의 계절에 요셉의 용서와 마리아의 헌신을 다시 찾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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