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하게 누리며 사는 삶
2001-12-31 13:03:51 read : 480
디모데전서 6장 11-12절
< 잘 비우는 것이 잘 채우는 방법입니다 >
오늘은 금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 때는 비울 것을 잘 비워야 하는 시기입니다.
살면서 좋은 것을 채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못된 것을 잘 비우는 것도 중요합니다.
위대한 인물들은 잘하는 것도 있었지만 필요 없는 것을 잘 비우는 능력도 있었습니다.
그처럼 불쾌한 기억이나 편견, 그리고 자랑과 허영심들을 빨리빨리 비워야 합니다.
그런 것들을 비워내지 않으면 더 소중한 것이 들어올 여백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많은 잘못된 것을 비우고 예수 중심적인 삶과 정신을 채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버리라는 것은 우리의 본성 상 버리고 싶지 않은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그 버리고 싶지 않은 마음을 이기지 않고는 깊은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컴퓨터를 보면 쓸데없어진 파일들을 버리는 휴지통이 있습니다.
그런데 간혹 그 휴지통을 비우지 않으면 컴퓨터의 일 처리 속도가 느려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삶의 발걸음을 자꾸 지체하게 만드는 것들을 과감히 청산해야 합니다.
그처럼 불필요한 것들을 과감히 버릴 줄 알아야 인생 승리 가능성은 높아집니다.
오늘날 인터넷 시대에서 성공의 요건 중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기동성입니다.
징기스칸이 전 세계를 점령했던 가장 큰 무기도 다름 아닌 기동성이었습니다.
군사 1인당 7마리의 말을 몰고 다니면서 1시간 동안 말을 탄 후 한 말이 지치면
다른 말을 타고 계속 진격해서 순식간에 적을 치니 도저히 당할 군대가 없었습니다.
그 기동성으로 총 인구 200만에 군사 10만 명으로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내가 버릴 것을 다 버리고 나를 극복하자 나는 징키스칸이 되었다."
우리는 우리를 얽어매는 잘못된 것들을 다 털어 버리고 영적 기동성을 갖춰야 합니다.
회개란 무엇입니까? 마음속의 이기주의와 교만, 그리고 욕망을 비우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처럼 버릴 것을 버리면 화끈하게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고 축복의 가능성은 커집니다.
< 진리가 아닌 이단적 교훈을 피하십시오 >
오늘날 우리가 축복된 삶을 살기 위해서 꼭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먼저 본문 11절 전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여기서 '이것들'은 무엇을 말합니까? 3-10절 말씀을 보면 두 가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다른 교훈'을 피하고, 또 하나는 '돈을 사랑하는 것'을 피하라는 말입니다.
먼저 첫 번째로 피해야 할 것을 무엇입니까? 본문 앞의 3절 말씀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여기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다른 교훈'을 하는 사람을 피하라고 권고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성경과 다른 말을 하거나 이단적인 사람을 피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쉽게 이단으로 몰아서도 안되지만 진짜 이단이라면 피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 심리가 묘해서, 본인도 이상하다고 느끼면서도 이단 주장에 넘어갑니다.
예를 들어, 의사가 11년 이상 공부하고, 몇 번의 시험을 거쳐 정식 의사가 된 후에도
수천 명의 환자를 돌본 경험을 가지고 "이 병은 이렇게 치료해야 됩니다"라고 하면
그 의사의 말을 믿어야 하는데 이웃집 아주머니의 말을 더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의사들 아무 것도 몰라! OOO가 기도원 가서 깨와 호박을 섞은 밀가루 반죽으로
상처에 발랐더니 암도 떨어졌고, 디스크도 나았어! 그러니까 그렇게 한번 해봐!"
그런 말에 솔깃해서 의사의 말보다 그 말을 더 믿으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런데 교회에서도 그런 경우가 가끔 생깁니다.
목회자가 수많은 배움과 경험과 기도를 토대로 "이것은 이런 말입니다"라고 말하면
어떤 분은 그런 평범한 말보다도 이제까지 안 들어본 다른 교훈에 더 솔깃해집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자기가 더 많이 안다는 혼돈에 빠집니다.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성경은 이단과 이단성이 있는 사람은 교만하고 변론과 논쟁을 좋아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세히 보면 성경을 조금 안다는 분이 이단에 자꾸 쏠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요? 교회와 목사가 잘못 가르치기 때문일까요?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성경은 가장 큰 이유가 그 사람이 교만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결국 그런 분들이 막 휘젓고 다니면서 다툼과 갈등이 생기는 교회가 얼마나 많습니까?
< 항상 겸허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
며칠 전 성남에 있는 S교회를 담임하는 Y 목사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주일학교 선생님으로 봉사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그때는 교육전도사가 없어 선생님들이 번갈아 설교하는데 그분이 주로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17 년 동안 학생들에게 설교를 하면서 37살의 나이에 장로까지 되었습니다.
또한 그분이 유년부를 맡으면 유년부가 부흥하고, 초등부를 맡으면 초등부가 부흥하고,
중등부를 맡으면 중등부가 부흥하고, 고등부를 맡으면 고등부가 부흥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신이 설교를 굉장히 잘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전도회에서도 가끔 "장로님! 헌신 예배 때 설교 좀 해주세요"라고 부탁해서
1년에 두세 번 설교할 기회가 있었는데 설교 후 강단에서 내려오면 교인들이 말했습니다.
"장로님! 장로님 설교가 우리 목사님설교보다 훨씬 더 은혜롭습니다."
그 말이 수고했다는 인사인 줄 모르고 진짜 자기 설교가 최고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자기가 얼마나 교만했는지 그때를 생각할수록 부끄럽다고 합니다.
그 후에 그분은 장로로 성이 안 차 한국을 설교로 뒤집겠다고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신학교에 처음 들어가서 구약성경 시간에 구약을 배우는데 M 교수님께서
"모세5경은 모세가 직접 다 쓴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는데 그분은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가 장로로 있을 때에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성경 공부를 많이 한다고 했고,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 다섯 권이 모세5경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학대학 교수라는 사람이 "모세5경은 모세가 쓴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니까
의분이 생겨서 "교수님! 그러면 왜 모세 5경이라고 합니까?"라고 따지듯 질문했습니다.
"학생 언제 신학교에 들어왔어요?" "금년에 들어왔는데요."
"그러면 졸업반이 되어 가지고도 이해 안되거든 그때 가서 질문하세요"라고 말하면서
신명기 34장을 읽어보라고 하는데, 나중에 신명기 34장을 읽어보고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곳을 보면 "모세가 모압땅 느보산에서 120세에 죽었다"고 기록되었으니까
적어도 그 부분 이후는 모세의 기록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때서야 처음 알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얼마나 성경을 수박 겉핥기로 알았는지 깨닫고 회개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런 태도를 가진 분들에게 '다른 교훈'이 잘 먹혀들어 갑니다.
"오병이어 사건도 알고, 가나 혼인잔치 얘기도 알고, 심지어는 성막도 꽤 아는 편인데
오늘은 오병이어 사건으로 설교하는구나! 나도 그 말씀을 속속들이 다 잘 아는데...."
이런 식으로 목사님 설교를 지루하게 여기다가 누가 이상한 말을 하면 솔깃해집니다.
왜 솔깃해집니까? 그런 말은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다른 교훈'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른 교훈을 듣고 솔깃해서 "그분은 성경을 기가 막히게 잘 쪼갠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성경은 쪼개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공부의 제일 기초는 성경은 통전적이고 유기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이상하게 잘 쪼개려고 하는 것은 진짜 성경을 쪼개는(파괴하는) 행위가 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성경을 잘 쪼갠다고 하는 분을 뒤따르면 정상적 생활이 쪼개지고,
가정과 상식이 쪼개지고, 그런 분들 때문에 교회도 쪼개지는 경우가 많이 생깁니다.
그리고 성경을 잘 쪼갠다는 분들은 신학을 싫어하고 인간적 학문이라고 무시합니다.
왜 신학을 싫어할까요? 신학이 자기 멋대로 성경을 쪼개지 못하게 막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결코 자기 생각대로 일부분만 쪼개고 갖다 붙이고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는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마 마틴 루터는 이 말씀을 수 십 번 읽어보았을 것이고, 많이 공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많이 본 말씀이 어느 날 갑자기 루터 자신에게 깊은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결국 그 성경 한 절 말씀이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이런 것이기에 같은 말씀을 들어도 항상 말씀 앞에 겸허해야 합니다.
그런데 큰 교회에서 자기가 맡은 부서를 부흥시키고, 무슨 책을 조금 보고 안다고 해서,
또한 일년에 몇 번 했던 설교를 칭찬 받았다고 목사님 설교를 우습게 알면 되겠습니까?
Y 목사님은 그런 자신의 옛날 태도가 목회 햇수가 늘어가면서 더 부끄러웠다고 합니다.
여러분! 어떤 설교에서 혹시 자신이 아는 말씀을 들을 때에도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이 말씀이 주는 좀더 깊은 부분을 깨닫게 하시고, 오늘도 은혜를 주십시오."
이런 태도를 가지고 말씀을 듣는 것이 말씀을 대하는 바른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분은 "목사님 설교 시시해! 차라리 내가 QT하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성경을 그냥 읽기보다 QT를 하면서 성경의 의미를 알려는 태도는 좋습니다.
목회자가 설교를 준비하는 데에도 QT하는 것은 아주 필수적이고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더 알려는 젊은 지성인들이 모여 QT를 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QT를 한다고 "우리 목사님 설교 들을게 없어! 내가 QT하는 게 나!"라고 하면
마음이 부패하게 되고, 진리를 잃어버리고, 자기로 다툼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5절).
그러므로 다른 교훈을 따르거나 높은 마음을 가지는 태도는 꼭 피해야 할 것입니다.
< 돈을 사랑하는 태도를 피하십시오 >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이 피해야 할 중요한 것 또 하나는 돈을 사랑하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돈에 대한 그릇된 욕심을 내다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간디는 "내게는 소유가 범죄처럼 생각된다."고 말했는데 정신은 올바른 정신입니다.
그러나 그 말은 물질을 싫어하고 물질을 아주 외면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물질을 쓸 줄 모르는 사람의 손으로 물질이 다 들어가 더 나빠지게 됩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벌어야 합니다. 그러나 번 것을 붙들고 나만 위해 쓰면 안됩니다.
프로테스탄트 정신을 따르는 기독교는 소유하는 것 자체를 축복으로 보지 않고,
소유한 것을 나누는 것까지 해야 그 사람을 진정한 축복 받은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므로 소유하는 것조차 외면하고 나눌 것도 없는 사람은 복된 삶이 아닙니다.
나눔이 진정한 축복이기 때문에 나눌 수 있기 위해 돈을 힘써 벌 필요는 있습니다.
그러나 돈을 힘써 벌고 소유한 후에는 수시로 나의 것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소유와 행복은 꼭 비례하지 않지만 나눔과 행복은 반드시 비례합니다.
왜냐하면 물질을 나눌 때 하나님의 마음을 얻고, 함께 살 이웃을 얻기 때문입니다.
또한 욕심 없이 나누게 되면 자신의 신앙에도 큰 유익이 됩니다. 6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지족하는 마음이 무엇일까요? 소유는 줄이고, 가진 것을 많이 누리는 마음입니다.
그렇게 살면 훨씬 여유가 생기고 우리의 영혼은 더욱 맑고 밝은 영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계속해서 누리는 삶을 권면합니다. 본문 8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누릴 것은 다 누리고, 남의 몫까지 뺏는 사람이 "너 만족해!" 하면 그것은 코미디지만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한 바울이 만족하며 살라고 하니까 얼마나 소중한 충고입니까?
얼마 전에 벤처기업에 투자하여 떼돈을 번 사람이 한 명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직장 생활을 그만두고 퇴직을 했는데 처음에는 할 일이 없어 막막했습니다.
돈이 점점 없어지면서 아이를 미술학원에 보낼 6만원이 없을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벤처기업에 투자하여 짧은 시일에 무려 100억 원을 벌었습니다.
100억 원을 벌어서 좋은 집과 차를 사고 행복할 줄 알았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옛날에는 퇴근하면 아내가 꿀물을 타주고 안마도 해줬는데 그것이 없어졌습니다.
조금 늦게 오면 "어디에 갔다 왔느냐?"고 따지면서 부부간에 불화가 생겼습니다.
형제들과 친척들이 돈을 벌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꾸 돈을 빌려 달라고 했습니다.
어느 누구만 빌려줄 수 없어서 다 빌려주지 않으니까 다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그 돈의 투자로 고민하다 불면증에 걸려 지금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고 합니다.
사실 돈은 벌려고 하면 할수록 안 벌리고 만족하면서 열심히 일하다 보면 벌립니다.
그러므로 억지로 돈을 벌려고 하기보다는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있음을 감사하고,
조그만 것을 가지고 누리면서 살다 보면 물질은 나를 사모하며 좇아 올 것입니다.
그처럼 돈을 벌려고 집착하는 것보다 자기 일을 누리며 사는 삶이 행복한 삶입니다.
< 편안한 마음으로 내 것을 누리며 사십시오 >
그러므로 우리는 누리며 사는 은혜를 추구해야 합니다.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성도에게는 두 가지 은혜가 있는데 하나는 '받는 은혜'이고 또 하나는 '누리는 은혜'입니다.
병 고침을 받고, 대학에 합격하고, 사업에 성공했다는 것은 '받는 은혜'입니다.
반면에 이미 받은 은혜를 가지고 잘 사용하여 즐기는 것은 '누리는 은혜'입니다.
받는 은혜도 귀한 것이지만 누리는 은혜는 훨씬 더 귀하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받는 은혜는 있지만 누리는 은혜를 받지 못하면 이것은 엄청난 불행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누리며 살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떤 분은 평소에는 점잖고 참 친절한데 막상 테니스를 치면 사람이 갑자기 변합니다.
공 하나만 놓쳐도 성질을 내고, 옆에 있는 사람이 실수만 하면 막 짜증을 냅니다.
그리고 공이 그물에 닿지도 안았는데 닿았다고 소리를 지르고 정말 이상하게 변합니다.
그런데 테니스가 끝나면 또 친절한 사람이 됩니다. 그것은 운동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 운동은 운동 자체에 가치가 있고 동료와의 교제가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꼭 이겨야 하겠다고 운동을 하면 오히려 그 운동이 건강에 해가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평소에는 감사하며 살다가 돈 문제만 걸리면 얼굴이 변하는 분이 있습니다.
평소에 믿음 생활 잘 하다가도 사업만 잘 안되기 시작하면 그만 믿음의 뿌리가 흔들립니다.
우리는 소유한 것을 누리고, 사업을 누리고 살아야지 소유에 너무 집착하면 안됩니다.
기독교의 정신이 소유했다가 나눠주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최선을 다하면서 살되
혹시 하나님께서 소유의 기회를 많이 주지 않으셔서 소유의 즐거움은 가지지 못해도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서 이미 많은 것을 모르는 사람에게 나눠주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지금 저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게시한 말씀들의 총 접속 건수가 100만 건이 넘었습니다.
저의 개인적 추정에 의하면 오래 전에 게시한 말씀들도 매주 꾸준히 접속되는 것을 볼 때
총 말씀 접속 건수의 60% 이상이 목사님과 전도사님 및 교회사역자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 분들을 통해 다시 말씀이 또 다른 사람에게 흘러 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할 때
비록 저에게 금전적인 소유의 즐거움은 없지만 얼마나 나눔의 기쁨이 큰지 모릅니다.
여러분! 부 자체가 인생의 목표가 아니기에 적게 번다고 얼굴 색깔 변하지 마십시오.
사업이 잘 안 된다고 인상쓰지 마시고, 더 부자가 빨리 못된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부에 집착하지 말고, 일 자체를 누리고, 현재 가진 것으로 더 누리며 사십시오.
더 즐겁게, 더 감사하게, 더 효과적으로, 더 열심히, 더 지혜롭게 일할 생각을 하면서
항상 지족하는 마음을 가지고 넉넉한 모습으로 더 많이 누리며 살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처럼 누리는 은혜를 받으려면 무엇보다 자신의 현재 상황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결혼한 후 남의 떡을 크게 보지 말고 미우나 고우나 내 남편이 최고인 줄 알아야 합니다.
고부간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현재의 처지에서 누리면 해결이 됩니다.
시어머니는 "하나님이 내 아들에게 아내를 주시고 며느리를 주시니 감사합니다"고 하면서
정말로 며느리에게 깊이 감사한 마음을 가지면 며느리의 허물을 덮고 누리며 살 수 있으며
며느리는 "하나님이 또 한 분의 어머니를 주셔서 감사합니다"고 하면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교회생활에서도 "집사가 뭐 저래?"라고 하지 말고 만약 그 사람이 집사가 되지 않았더라면
교회를 더 힘들게 했을 텐데 집사가 되어 조금이라도 나아졌으니 감사하다고 여겨야 합니다.
여러분! 엉뚱한 곳에 가서 행복 찾지 말고 내게 주어진 현재의 처지를 귀하게 여기십시오.
이 세상의 누구보다 내 아내, 내 남편, 내 교회, 내 자녀를 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혹시 지금 "우리 목사님은 왜 저렇게 보잘것없을까?"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까?
그런 생각이 들어도 "우리 목사님이 최고야!"라고 높이고 존경하면 내가 은혜가 됩니다.
항상 받는 은혜보다 누리는 은혜가 더 귀한 줄 알고, 나의 환경에서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 세대는 과거에 못 먹고 못 살았기에 잘 사는 것이 한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구호는 "잘 살아보세!"였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잘 사는 것입니까?
평생 모으기만 했다가 죽을 때 장례식에서 거창하게 잘 쓰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요?
그런 식으로 평생 내 집 마련에 매달려 살다가 가족간의 대화 한 번 못하고 지나갑니다.
그러다가 막상 기다리던 내 집을 마련할 때쯤이면 아이들은 다 커서 곁을 떠나버립니다.
큰집도 필요 없게 되고, 아이들이 그렇게 원하던 외식을 시켜주고 싶어도 곁에 없습니다.
영화 감상, 연주회 한 번 가지 않고, 좋은 일도 하나도 하지 못하고 돈만 모았습니다.
그렇게 모은 재산은 죽자마자 사정없이 나를 버리는데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쓰는 것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돈을 모을 때에는 올바르게 모아야 하고 또한 그 재물을 올바른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이제는 물질의 다소가 아닌 그 물질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은총의 본질을 파악하고
물질의 노예가 되는 삶을 피하고, 더욱 주님만 바라보며 사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 성의 유혹을 피하십시오 >
그리고 본문에는 없지만 정말 우리가 피해야 할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의 유혹입니다. 이 문제를 가볍게 여기면 하나님이 축복을 받기 힘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보다 깨끗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기를 원하십니다.
식당에서 밥이 나왔는데 밥에 고춧가루가 하나만 붙어있어도 안 먹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에도 그렇게 보실 것이기에 깨끗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물론 그 문제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복된 존재가 되려면 포기하면 안됩니다.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고 하지 말고 그 문제를 위해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수시로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약한 것을 하나님도 이해하시겠지'라고 변명하면서
성의 유혹과 죄의 자리를 차고 나오지 못하면 우리는 축복된 삶을 살기가 힘듭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밤에 잠에 자지 않고 밤새우는 일이 많다고 합니다.
밤 문화를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밤 문화가 발달하면서 잘된 문화는 없습니다.
로마시대를 보십시오. 밤 문화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모릅니다.
로마의 여인들은 밤에 남자들과 잘 노는 것이 여권신장이라고 여기며 좋아했지만
로마의 귀족들은 놀며 즐길 때는 로마의 여인들을 선택하지만 실상 결혼할 때는
가장 순결한 처녀로 소문난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 처녀만을 택해 결혼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많은 귀족들의 부인은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로마의 기독교인이 7%밖에 되지 않았을 때에도
로마 전체가 기독교를 국교로 정할 정도로 기독교의 영향력이 엄청나게 컸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세대는 우리에게 순결한 삶을 요구하기보다 오히려 순결하지 않기를 원하지만
우리는 최후의 승리와 축복이 순결한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꼭 피해야 할 세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단과 교만한 맘을 피하고, 돈을 사랑하는 자세를 피하고, 성의 유혹을 피하고 극복해서
2002년도에는 더욱 믿는 사람답게, 그리고 더욱 인간답게 올바른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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