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이 주시는 4가지 권능// 20010603
2001-12-08 17:25:24 read : 361
주일 낮예배// 사도행전 1장 4-8절
이번 달은 호국의 달입니다. 이번 주간에는 현충일이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다시 한번 새롭게 가져야 하겠습니다.
나라 잃은 설움, 나라 약한 설움, 나라 가난한 설움은 보통 설움이 아닙니다.
러시아 여인들이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몸을 팔고 설움을 겪는 것을 보십시오.
이제 우리는 우리 나라를 위해서 더욱 기도하고 힘쓰고 애써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보다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할 나라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온통 하나님 나라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행 1:3).
그것도 모르고 제자들은 주님에게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의 때를 물었습니다(6절).
그때 주님께서는 때와 기한보다 더욱 중요한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성령을 받고 증인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8절).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돈 버는 일, 먹고사는 일, 자식 키우는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먼저 하나님 나라에 공헌하면 우리 가정과 교회와 나라도 지켜주신다는 말입니다.
진실로 우리 가운데 하나님 나라에 크게 공헌하는 인물이 나오기를 희망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공기로 숨을 쉬지만 우리의 정신은 희망으로 숨을 쉬는 것처럼
저는 우리 가운데 인물이 나올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마음이 들뜨는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가 세계적인 교회는 되지 못해도 세계적인 인물은 반드시 키워야 합니다.
그래서 각 분야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쓰임 받는 사람을 배출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크게 쓰임 받는 분들이 되십시오.
그런 인물이 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 인내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
4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주님은 기다리면서 어떻게 하기를 원하셨을까요? 기도하기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다림의 기간은 무엇보다도 기도로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기다릴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참을 수 있습니다.
인내의 기도가 희망인 줄 알아야 합니다. 결국 기도가 우리를 살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가정을 살리고 우리 교회를 살리고 우리 나라를 살릴 것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너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하는 나라는 결코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려울수록 더 기도하면 됩니다.
우리 나라에 어느 나라보다 많은 기도자들이 있는 한 미래는 우리의 것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캐나다에 갔을 때에는 찬란한 아침 햇살을 맛보며 잠을 깼습니다.
일본에 갔을 때에는 출근하는 자동차 소리를 듣고 잠을 깼습니다.
그러나 한국에 갔을 때에는 교회의 새벽 종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세계의 미래는 한국 사람들의 어깨에 달려 있다고 말입니다."
기도하는 민족도 어려움을 당하지만 기도하는 민족이 결코 망하는 법은 없습니다.
눈물의 자녀도 잠시 방황하기는 하지만 눈물의 자녀는 결코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상황이 조금 어렵다고 해서 너무 염려할 필요도 없고, 조급해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인내하며 기도하면 됩니다. 인내의 기도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달고 풍성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했던 신학교 창시자인 심슨(A. B. Simpson) 목사님의 말입니다.
“폭풍우 치는 밤에 이슬이 맺히지 않듯이
하나님의 은혜의 이슬도 요동하는 영혼에게는 내리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가 있기 위해서는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삶의 자세는 서두르지 않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하나됨을 지키기 위해서도 우리는 기다림의 자세에 능숙해야 합니다.
기다림이 없으면 교회생활, 가정생활에서 결코 성공적인 작품이 나올 수 없습니다.
부부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렇게 수년 수십 년 동안 하나로 살 수 있었습니까?
사랑했기 때문이고, 그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참고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사랑에 대해 정의하면서 제일 먼저
"사랑은 오래 참고"라고 정의합니다. 참고 기다림이 없는 사랑은 없다는 말입니다.
정말 사랑하십니까? 나를 위해 이용한 것이 아니고 정말 그분을 사랑한 것입니까?
그렇다면 오래 참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진정 사랑한다면 가정에서도 참고 기다려야 하고, 교회에서도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참고 기다림이 없으면서 사랑을 말하는 것은 사랑이란 단어를 훼손하는 것입니다.
물론 참고 기다리는 데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참아야 합니다.
정말 참기 힘들어 못 견디겠습니까? 그러나 나를 하나님이 참고 인내하고 계십니다.
1만 달란트 이상의 하나님의 인내를 두고, 백 데나리온의 인내도 하지 못하는 모습!
하나님이 그런 모습을 보고 어찌 축복을 내려주시겠습니까?
참고 기다리지 않으면 인생의 작품이 나올 수도 없고 내일의 축복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내하고 기다림으로 성령 충만도 받고 축복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분은 기도하지 않고 기다리지도 않고 싸우는 것을 좋아하는 분이 있습니다.
악의 영과 싸우라고 해서 진짜 생활에서도 싸움과 투쟁을 좋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죄를 저질렀던 십자군 전쟁입니다.
성지를 탈환한다는 명목은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죄악을 낳았고, 증오를 낳았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악의 영과 싸우는 것을 잘못 적용해 진짜 싸우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악의 영입니다.
악의 영과 싸우라는 말은 불평을 감사로 받고, 불화를 화해로 받으라는 말이지
천사의 명분을 가지고 다가와 사람들을 싸움터로 몰아넣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악과 싸운다고 하면서 똑같은 악을 저지르는 것은 결코 해결방법이 아닙니다.
오늘날 부정과 싸운다고 하면서 또 다른 부정과 미움을 낳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바른 말만 잘하고 싸우기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이런 허물을 많이 만들어냅니다.
방에 있는 어두움을 물리치려면 어둠과 싸우기보다 빛을 비춰야 하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기도하며 기다리며 성령의 권능을 받고 사랑의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 성령의 권능이 필요합니다 >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성령의 권능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성령을 물량적으로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성령은 물량이 아니라 인격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 받으면 소매상하다가 도매상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성령 충만하면 가장 먼저 생기는 변화가 성령의 권능에 의한 인격의 변화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령 충만할 때 생기는 성령의 권능이 무엇입니까?
1. 첫째, 겸손한 마음이 권능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을 3년 동안 따라다니며 말씀을 배우고 기적을 봤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겸손을 가르쳤지만 그들은 높은 자리를 생각했고,
십자가를 배웠지만 그들은 주님 따라 다니면서 영광을 얻을 것만 생각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에도 "누가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을 것인가?"로 싸워서
예수님의 마음을 무겁게 하더니 승천하실 때에도 그런 욕망을 보입니다(행 1:6).
본문 6절을 보면 나라의 회복과 그때에 한 자리 하고 싶다는 욕망을 느낍니다.
그 엄숙한 순간에서조차 현세적인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러나 오순절 다락방 사건에서 성령 충만을 받은 이후에 그들은 변했습니다.
3년 동안 그들을 철저히 따라다니던 욕망이 거룩한 소망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그들은 철저히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소리 없이 충성하게 됩니다.
좌의정, 우의정이 웬 말입니까?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라면 청소부도 좋다는 생각!
그래서 성령은 겸손을 낳고, 겸손한 마음은 반드시 충성스런 삶을 낳게 됩니다.
근세의 선각자 도산 안창호 선생은 애국자요, 참 교육자요, 위대한 성도였습니다.
어느 날 그분은 시간 당 1달러를 받기로 하고 미국인 집에 청소부로 취직했습니다.
청소하는데 그는 최선을 다합니다. 누가 보지 않아도 최선으로 충성을 다했습니다.
사람의 손에 미치지 않는 구석까지 특별 청소도구를 만들어 청소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던 주인이 일이 끝나자 약속한 것보다 사례를 50센트씩 더 주면서
"당신은 청소부가 아니라 이 시대의 진정한 잰틀맨입니다."라고 말하더랍니다.
소리 없이 충성하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고 그런 분이 진정한 잰틀맨입니다.
이처럼 모두 다 성령 충만하여 잰틀맨이 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분도 있습니다.
요한 3서 9절을 보면 사랑의 사도 요한마저 한 사람을 찍어서 말합니다.
디오드레베를 말하면서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되면 안됩니다.
교회 공동체는 겸손하게 자기를 죽이고 하나님과 교회를 높이는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으뜸 되기를 좋아하면 튀는 행동을 하게 되고, 자신을 높이게 되고,
자기 의견을 절대화하고 남의 의견을 무시할 때 공동체의 평화가 위협받게 됩니다.
성경은 그런 사람들을 경계하라고 말합니다. 누구보다 자신이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까?
항상 교회적인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상대화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진정 내가 어떤 모습인가를 항상 살펴가면서
성령께서 주시는 겸손한 마음과 온유한 마음으로 자기를 단장해야 합니다.
그처럼 우리를 낮추는 겸손함이 있을 때 그곳에서 아름다운 교제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2. 온유한 마음이 권능입니다.
겸손한 마음과 가장 관련된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온유한 마음입니다.
이 온유한 마음은 약한 마음이 아니라 자기를 잘 통제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교회 내에서 리더십을 발휘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온유함입니다.
왜냐하면 쉽게 통제를 잃고 분노를 폭발하면 공동체의 평화가 위협받기 때문입니다.
폭발 후에 수습 능력을 키우지 말고 폭발하지 않도록 미리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스스로의 인격을 말씀하시면서 제일 먼저 말씀하신 것이 이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마 11:29)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닮아 살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는 분인데
성령 충만하여 그리스도를 진정 닮기 원한다면 온유와 겸손을 결코 잃지 말아야 합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은 바로 모세였습니다.
모세를 생각하면 전혀 온유함이 느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힘든 광야에서 이백만의 백성을 인도하면서 그들의 각종 불평을 듣고,
각종 반역을 당하면서도 그가 미치지 않는 것만도 얼마나 훌륭한지 모릅니다.
그처럼 어려운 상황에서 꿋꿋한 정신을 가질 수 있는 힘이 바로 온유함의 힘입니다.
어느 날 광야에서 모세가 실수를 합니다. 아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스 여자를 취합니다.
누가 봐도 분명 잘못한 것입니다. 바로 그때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합니다(민 12:1).
비방했다는 말은 모세의 변화를 진정 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행동했다는 말이 아니라
모세의 리더십을 무너뜨려서 그 반사효과로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행동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누님인 미리암과 형님인 아론이 비방하며 말합니다(민 12:2).
"모세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겠느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말씀하셨다."
그 말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이제까지 쌓은 리더십과 공헌을 무시하고
그 리더를 밟고 공격하는 것을 하나님은 정당한 비판으로 보지 않고 비방으로 보십니다.
오늘날 자세히 보면 앞서 있는 리더의 잘못을 지적할 때
리더의 회개와 자세변화를 진정으로 생각하는 말보다는 리더의 리더십을 무너뜨리면서
자신이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 자신에게 사람을 모으려고 하는 비방이 많은 것 같습니다.
사랑의 비판을 사려 깊게 해서 열매 맺는 비판이 되게 하는 것은 정말 필요하지만
남의 잘못을 지적해서 나를 대신 높이려고 하는 비방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때 비방을 받는 모세의 자세에 대해서 민수기 12장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그런 비방을 묵묵히 듣고 참는 모습을 보고 성경은 오히려 모세의 온유함을 칭찬합니다.
대신에 정당한 비판을 한 것 같았던 아론과 미리암은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받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서 아론과 미리암에게 어떤 말씀을 하십니까?.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민 12:8)
결국 하나님의 징계는 구스 여인을 취한 모세에게 내리지 않고 미리암에게 내립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사랑의 비판과 비방을 구분할 줄 아는 지혜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구분하지 못하면 나의 정당한 것 같은 비판이 오히려 나의 허물과 올무가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을 통해서 항상 온유한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하십시오.
3. 일치하는 마음이 권능입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화해, 평화, 일치를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령님께서 내 삶에 오시면 삶의 형태가 뜨거워지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됩니다.
성령이 오시면 일치하는 마음, 용서하는 마음, 화해하는 마음으로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받은 사람은 남을 탓하는 자세가 없어지고 자신을 먼저 돌아보게 됩니다.
지금 남을 탓하는 문화가 급속도로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펼쳐져 있습니다.
거리에서 운전하는 것만 봐도 그런 문화를 너무 많이 접합니다.
내가 끼어 들면 바쁘니까 어쩔 수 없고, 남이 끼어 들면 얌체라고 손가락질합니다.
내가 남의 차를 받으면 그 사람보고 "왜 급정거했느냐?"고 하고,
남이 내 차를 받으면 그 사람보다 "왜 안전거리 안 지켰느냐?"고 합니다.
어쩌다 내가 단속을 당하면 억세게 재수 없게 생각하고 마음상해 하면서,
남이 단속을 당하면 "잘했어. 저건 단속해야 돼!"라고 하면서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남의 작은 잘못은 철저히 따지고 자신의 큰 허물은 그냥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남들에게는 원칙대로 살 것을 강요하면서 자신은 융통성 있게 봐달라고 합니다.
이것은 인류에게 죄가 생기고 성령이 지배하는 마음이 떠난 결과입니다.
누구나 허물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덮어주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기본적인 자세 속에서 수정과 변화와 창조를 모색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남의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이해를 하고, 화해를 지향하는 모습이 바로 성령 충만입니다.
우리는 남 탓하기를 그만 두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그처럼 성령 충만으로 생기는 일치하는 마음은 인간 성공의 가장 소중한 요소입니다.
4. 모험하는 마음이 권능입니다.
성령이 계시면 환상이 생기고 비전이 생깁니다. 그래서 거룩한 모험을 하게 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새로운 미래를 향해서 모험정신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개척정신을 가지고 모험을 향해 열정을 불태우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 열정이 없이 위대한 일이 이루어진 경우는 하나도 없습니다.
모험하는 인생이 되어야 행복을 느낄 수 있고, 그런 인생이 아름답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 비전과 거룩한 모험을 도전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 하나님의 명령과 비전에 사로잡힌 사람으로 모험적인 삶을 살아보십시오.
바로 그 순간, 우리의 삶의 가치와 삶의 질을 엄청나게 다르게 부각될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고 공동체가 새로워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참으로 어려운 상황입니다.
정치권 책임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온 국민의 이기심입니다.
그러나 그런 현실에 대해 너무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벌어진 일입니다. 그 일을 가지고 오늘의 엄숙한 삶의 교훈으로 삼으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와 미래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와 결단에 따라 달라집니다.
아무리 봐도 희망을 노래하기에 어려운 상황이라고 여겨져도
우리 그리스도인의 희망을 노래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 이유일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희망을 노래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의무와 책임입니다.
그처럼 희망을 가지고 내일의 힘찬 모험의 발걸음을 내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사람은 절대로 절망하거나 좌절하거나 탄식하지 않습니다.
연약한 인간인지라 어려운 일이 생기면 며칠 정도는 침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 상황을 딛고 일어섭니다. 탄식이 찬송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길을 가면서 쓰레기 줍는 일에서부터 큰 희열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런 모습이 없으면 어찌 우리가 땅 끝까지 증인의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성령께서 함께 하시면 평범한 사람도 반드시 하나님 나라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쉽게 말하면 인류 역사상 최초로 생긴 예루살렘 교회의 창립기념일입니다.
그래서 성령과 교회의 부흥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의 권능이 없는 교회는 분란과 침체와 혼돈 속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권능이 충만한 교회는 반드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하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놀라운 행복감이 느껴집니다.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성장하고 성숙할 때 행복을 느낍니다.
어떻게 우리는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습니까? 무엇보다 성령 충만함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중한 시간을 성령 충만함으로 창조적 시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항상 성령 충만한 삶을 삶으로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준비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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