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의 잔치 (눅 9:10-17)
본문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광야의 잔치』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벳새다라고 하는 동네에서 좀 떨어진 빈 들 즉 광야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이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영육간에 큰 만족을 얻었습니다. 우리도 잔치를 많이 베풀기도 하고 또 참석하기도 하는데 첫째로는 그 잔치를 누가 베풀었는가가 상당히 중요합니다. 잔치에는 아버지가 베푼 것이 있는가 하면 도둑이 베푼 것도 있고, 또 임금이 베푼 것도 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그 잔치는 예수님께서 베푸셨다는 데서 먼저 은혜가 됩니다.
둘째로는 잔치의 내용이 중요합니다. 생일에는 생일 잔치를 하고 결혼할 때는 혼인 잔치를 하고 또 그런가 하면 어떤 일에 성공이나 승리를 했다고 축하잔치를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여러 종류의 잔치가 있을 수 있는데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 잔치를 베풀었다고 하는 사실에서 역시 은혜가 됩니다. 본문을 통해서 광야의 잔치를 상고해 보겠습니다.
I. 복음의 잔치(10-11절)
첫째, 영접하는 복음(10-11 상반절)
본문을 보면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의 모든 행한 것을 예수께 고한대 데리시고 따로 벳새다라는 고을로 떠나 가셨으나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영접하사" 라고 하셨는데 예수님이 영접하셨다고 하는 자체가 복음입니다. 복음이란 말은 '유앙겔리온' 인데 복된 소식이란 뜻입니다. 본문이 가르치는 복된 소식이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을 예수님은 차별 없이 영접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번은 제자들을 둘씩 짝을 지어 전도하러 보냈습니다. 그런데 둘씩 짝을 지어 전도하러 나갔던 제자들이 나가서 성공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또 그동안 많이 수고했고 피로했으므로 좀 쉬기로 하고 벳새다라 하는 곳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이때에 무리들이 예수님께서 벳새다로 가셨다는 것을 알고 따라 왔습니다. 예수님이 어디 계신지 알고 따라 왔다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을 알고 따르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귀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모르고 따르면 헛된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이 도대체 누군지, 나와 어떤 관계가 되는지 또 예수님은 어디에 계신지 이것을 알고 따르는 것이 믿음 생활에 상당히 귀한 요소라 하겠습니다. 이렇게 따라온 무리들 중에는 아마 부자도 있었을 것이고, 가난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있었고, 무식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벼슬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전혀 벼슬과는 거리가 먼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각계 각층의 사람이 다 모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것에 전혀 차별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얼마나 차별합니까? 가진 사람이 못 가진 사람을, 배운 사람이 못 배운 사람을, 그리고 자리가 높고 낮음을 구별하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전혀 구별을 하지 아니하시고 자기에게 오는 사람은 누구나 영접하였다는 사실이 복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이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은 교회라고 하는 곳에는 각계 각층의 사람이 다 모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광성교회에 부자만 모인다면 교회는 교회 구실을 못합니다. 부자만 모인다면 가난한 사람이 어떻게 오겠습니까? 또 배운 사람만 모인다면 못 배운 사람은 어디 설 자기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다 모여야 하는 것이 교회요, 그래야 교회가 제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전혀 그것을 구별하지 않으시고 영접하셨다고 하는 사실이 우리들에게는 큰복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누구를 막론하고 교회에 나오신 분들은 주님이 다 기꺼이 환영하며 영접해 주시는 줄 믿고 늘 즐거운 가운데 기쁨으로 믿고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천국의 복음(11절)
본문을 보면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영접하셨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셨는가 하면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 하셨다는 내용입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게 되면 그 많은 사람들이 왔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교양강좌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교회는 교양 강좌 하는 곳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교양강좌 들으려면 따분하게 교회에 나와 앉아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교양강좌 하는 곳은 따로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많은 사람들이 사는 시대는 유대나라가 로마의 식민지로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독립이 될까 하는 데에 관심이 많았을 때입니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는 시사를 논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부활하시고 감람산에서 하늘나라로 막 승천해 가려고 하실 때 제자들이 "주여! 우리나라가 언제 독립하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까지도 제자들은 독립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것이니 너희 알 바가 아니고 그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실 것이니 너희는 성령이 임하면 복음만 전하라" 고 대답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따라온 많은 무리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고 또 하나님 나라를 전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는 곳이요,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광야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들으며 은혜를 받은 것처럼,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는 자리요,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는 자리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자리요, 즉 천국의 복음의 잔치자리로 아시고 항상 천국의 복음으로 만족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신유의 복음(11절)
본문 말씀을 보면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 고 하셨는데 이 말은 건강한 사람은 고칠 것이 없으므로 병든 사람을 고쳤다는 뜻이요, 또 병든 사람을 고치는 중에서도 "병 고칠 자들은 고친다" 는 뜻은 병자들을 다 고쳤다는 말이 아니라 믿는 사람만을 고쳤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자기에게 오는 사람마다 "네 믿음대로 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복 받게 믿는 사람은 그 믿음대로 틀림없이 복 받습니다. 또 망하게 믿는 사람에게 네 믿음대로 되라고 하면 예수 믿고 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예수 믿고 하나도 되는 것이 없다고 하는데 그 사람은 되는 것이 없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 믿음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은 병 낫게 믿는 사람은 고쳐 주시더라는 뜻입니다. 본문에 병자들을 고쳐 주었다는 것은 병자에게는 '신유와 복음' 인 것입니다.
여러분! 병들어 보십시오. 죽느냐 사느냐 할 때에 하나님께서 병을 고쳐주어 이렇게 기회를 주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병 고침을 받았다는 그 자체가 자신에게는 얼마나 큰복입니까? 병든 자에게 하나님께서 고쳐 주시는 것이 병자에게는 큰 복음이라면, 병 안든 자들에게는 복음이 아닐런지 모르지만 병 안든 그 자체가 큰복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광야의 잔치는 복음의 잔치였는데 영접하시는 복음, 하늘 나라의 복음, 하나님께서 고쳐 주시는 신유의 복음입니다.
II. 믿음의 잔치(12-15절)
첫째, 고백하는 믿음(12-13절)
본문 말씀을 보면 "날이 저물어 가매 열 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 있는 여기가 빈 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는 할 수 없삽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자기들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본문에서는 이 말이 별로 은혜스럽지 못한 말 같아도 믿음은 여기서부터 출발했음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말씀 증거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습니다. 그들은 하루 종일 굶고 해는 넘어가 저물어 가게 됩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배고픈 줄도 모르고 그들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집회가 끝난 후 날은 어두워 가고 "먹을 것이 없다" 는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럴 때에 제자들이 주님께 말합니다. "주님 이 곳은 빈들입니다. 그래서 이 많은 사람이 먹을 것을 해결할 수 없으니 각자 촌과 마을로 보내 거기 유하며 각자가 먹을 것을 해결하도록 하시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선생님 여기에는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라고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없으나 마태, 마가, 요한 복음에는 "이백 데나리온 어치 떡을 사도 할 수 없겠습니다" 라고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인데 이백 데나리온이면 200명분의 품삯인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어른 5,000명을 먹여야 하는데 돈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는 대단히 큰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첫째로 돈이 없어 못하겠고, 둘째로는 돈이 있어도 못하겠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빈들이었고 얼마쯤 가야만 벳새다라는 고을이 있는데 그곳은 조그만 동네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사람 수를 헤아리는 방법은 특이한데 20세부터 60세까지의 남자만 셉니다. 남자 장정들만 5,000명이니 나머지 사람들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줄잡아 만 오천 명은 될 터인데 어디서 일시에 먹을 것을 구해올 수 있겠습니까?
우리 천호동만 해도 큰 도시인데도 만 오천 명이 한꺼번에 먹을 것을 마련하려고 한다면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벳새다라는 조그만 시골 동네에서 어떻게 해결할 수 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혹 돈이 있다고 해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최선을 다해도 안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바로 "나는 있어도 못하겠고, 없어도 못하겠습니다. 나는 무능합니다. 최선을 다해 보았지만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못하겠습니다." 라고 고백할 때에 비로소 주님은 일하기를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고백한 후 예수님께서 해결해 주지 않으셨습니까? 바로 이런 고백이 나에게서부터 먼저 나와야 하겠습니다. 사랑할 때에는 반드시 고백을 하게 돼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말로 고백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수줍어서 말을 못할 때에는 행동으로 고백을 합니다.
예를 들면 선물을 사다 주기도 하고 쑥스러워 지나가다 얼굴이 새 빨개지기도 합니다. 얼굴이 새빨개지는 것도 일종의 고백입니다. 또 지나가다가 얼굴을 돌리는 것도 고백입니다. 다른 남자가 지나가면 상관없이 그냥 지나가면서 유독 그 남자가 올 때에만 고개를 돌린다는 것은 관심이 있다는 사랑의 반대 표현입니다. 여러분! 사랑에는 반드시 고백이나 표현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이와 마찬가지고 믿음에도 표현이 필요하며 그 첫 단계가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난 못하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반드시 고백할 때에 시작이 되고, 고백할 때에 성장하고 열매 맺는다는 뜻입니다.
둘째, 질서를 지키는 믿음(14절)
본문을 보면 "이는 남자가 한 오천 명 됨이러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 하시니" 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손에는 보리떡 다섯 개 또 한 손에는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신 채 50명씩 앉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축복해서 나누어준다 할지라도 한꺼번에 만 오천 명이 달려들어 그것을 나누어 먹는다고 한다면 얼마나 혼란스럽겠습니까? 잔치는 고사하고 밤새도록 싸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50명씩 꼭 질서 정연하게 앉힌 후 제자들로 하여금 나누어주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질서 정연합니까?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반드시 질서를 지켜야 하며 질서 있는 곳에 믿음이 성장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혼돈이 있는 곳에서는 믿음이 되지 않습니다. 윗사람을 섬길 때에도 윗사람을 알고 섬겨야 하지 않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에도 하나님을 바로 알고 섬겨야 바로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에서 질서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창세기 1장 2절에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땅이 혼돈하지만 혼돈에서 질서를 창조 즉 무질서에서 질서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질서가 있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무질서할 때 우리의 모양을 좋게 보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에는 반드시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질서를 지킬 줄 아는 신앙이 자리가 잡히고 뿌리가 내려 열매 맺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셋째, 순종하는 믿음(15절)
본문에 "제자들이 이렇게 하여 다 앉힌 후" 라고 하셨는데 참 은혜를 많이 받는 말씀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만 오천 명의 사람에게 산더미처럼 먹을 것을 쌓아놓은 다음에 "먹을 것을 이렇게 쌓아 놓았으니 이제 50명씩 앉으라"고 하셨다면 아마 앉지 않을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손에는 물고기 두 마리와 한 손에는 떡 다섯 개를 드신 채 이것을 나누어 먹을테니 앉으라는 것입니다. 기가 막힌 소리가 아닙니까? 그런데도 백성들이 볼 때에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나누어 먹겠다고 앉는 것을 보면 그들의 믿음은 참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것을 믿었기 때문에 앉은 것입니다. 이 말은 바꾸어 말하면 순종은 반드시 믿음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데 믿음 없이는 순종할 수 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순종하고 보니 믿는 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순종하면 이루어집니다. 그들이 축복이 넘쳤을 때에 순종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항상 순종하면 그대로 되고 받아도 크게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종합하면 고백하는 신앙, 질서 있는 신앙, 순종하는 신앙이 꼭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III. 축복의 잔치(16-17절)
첫째, 하늘의 축복(16절)
본문에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라고 하셨는데 축사란 감사한다는 뜻입니다. 축사란 말은 '유로기아' 인데 '유' 라는 말은 '좋다' 란 뜻이고, '로기아' 는 '로고스' 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우리말로 '말씀' 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좋은 말씀이라는 뜻인데 좋은 말씀이란 감사를 뜻합니다. 이것을 본문에서는 축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축사란 말은 감사했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음식 먹기 전에 감사했습니다. 풍성하게 넘치는 음식을 놓고 감사했습니까? 아닙니다. 혼자 먹어도 모자라는 것을 놓고 감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를 하고 나니까 엄청난 축복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더 주신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느 수필집을 읽고 참 감명을 받은 문구가 있어서 소개를 합니다. 첫째, "종은 울릴 때까지 종이 아니다." 종은 쳐야만 울리는 것인데 울리지 않으면 10년을 놔두어도 종이 아니고 쇳덩어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은 울릴 때까지 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노래는 부를 때까지 노래가 아니다." 라고 했는데 아무리 좋은 가사에 좋은 곡이 있어도 부르지 않으면 그것은 노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사랑은 사랑할 때까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나타날 때 사랑이지 마음으로만 사랑하고 끙끙 앓고 있으면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축복은 감사할 때까지 축복이 아니다." 이것은 너무도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혼자 먹어도 모자라는 것을 감사하셨더니 5,000명이 먹고도 남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늘을 우러러 감사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내려 주실 때는 모자람이 없다는 뜻이며 또 모자라도 감사하면 넘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축복인 것입니다.
둘째, 해결의 축복(16하반절-17상반절)
본문에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 앞에 놓게 하시니 먹고 다 배불렀더라" 고 하였는데 여기서 배불렀다는 말은 어른이나 아이나, 조금 먹는 사람이나 많이 먹는 사람이나 요한복음에 보면 원하는 대로 다 주었다는 것입니다. 모두 다 만족했고 해결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누구에게는 해결이 되고 누구에게는 해결이 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전체가 골고루 해결이 되었다는 것이며 또한 넘치게 해결되었고 또한 가장 절실한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가정에서 아버지, 어머니에게는 아주 만족한 일이 자녀들에게는 불만스럽게 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해결이 아닙니다. 또 남편은 만족하지만 아내가 불만스러워 하면 이것도 해결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가족이 모두 다 만족할 때 에야만 완전한 해결이 아닙니까? 그러기에 본문에서는 그 많은 사람들이 다 만족했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즉 다 배불렀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해결이 사람들의 노력으로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주님의 방법과 주님의 축복으로 되어진 해결입니다.
셋째, 봉사의 축복(17절)
본문에 "그 남은 조각 열 두 바구니를 거두니라" 고 하셨는데 큰 은혜가 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어림잡아 만 오천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을 50명씩 앉혀 놓은 후 예수님이 축복하여 직접 주시지 않고 제자들로 하여금 무리 앞에 놓게 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께로부터 받아 나누어 준 것입니다. 한 사람이 열 명씩만 나누어주었어도 함께 먹었을 것입니다. 잠깐이면 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먹고 있는데 열두 명이 만 오천 명에게 나누어주었으니 한 사람 앞에 천 명 이상이 아닙니까? 그것을 전부 받아 남들은 먹고 있는데 봉사만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만 오천 명이 먹고 배부른 후에 남은 것이 열두 광주리였습니다. 열두 제자들이 한 바구니씩 받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봉사하고 받은 축복입니다. 여러분! 반드시 축복을 계산하고 봉사하지 마십시오. 봉사를 위한 봉사를 한 후에 축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봉사를 시키지 않고 열 두 제자에게만 봉사를 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일거리를 주어 봉사를 시킨다는 그 자체가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복이 되어 자신에게 한 바구니씩 돌아왔습니다. 누구에게나 일을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을 시키시고 주님이 일을 시키실 때는 그 봉사 자체를 복으로 알고 충성할 때에 여러분들에게 남는 축복이 있는 줄 믿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벳새다 광야에서 예수님이 베푸신 잔치는 복음의 잔치요, 믿음의 잔치였으며 축복의 잔치였습니다. 예수님이 베푸신 오늘 이 잔치가 곧 벳새다의 잔치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김창인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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