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성도의 매력 포인트 (창세기 29장 1-15절)

by 【고동엽】 2023. 1. 3.

성도의 매력 포인트 (창세기 29장 1-15절) < 섬겨주는 삶의 축복 >

 분당에서 교회를 개척할 때 처음 몇 년 동안은 매일 새벽 4시쯤 아무도 모르게 교회 청소를 하며 새벽기도회를 준비했다. 저의 사무실과 책상은 잘 정리하지 못했어도 매일 새벽에 기도하려고 찾아오는 성도들에게는 쾌적한 기도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때 너무 행복했고 하나님의 축복이 쑥쑥 임하는 느낌이었다. 교회 청소도 기도만큼 중요하다. 교회 청소를 하면서 기도하면 그 기도가 얼마나 복된 기도가 되겠는가?

 당시에 목회자의 청소 장면을 보면 성도들이 미안하게 여길 수 있고 겸손의 과시로도 여길 수 있기에 성도들이 볼 때는 억지로 안 했다. 대신 성도들 안 볼 때 열심히 청소해서 축복을 내 것으로 만들어갔다. 그리고 누군가가 이 축복을 같이 나누어 가졌으면 해서 어느 날부터 청소를 한동안 쉬어 봤다. 그때 한 나이 든 집사님이 제가 청소하는 것을 눈치 채고 저 대신 대걸레를 들었다. 그때 마음속에 깊은 감동이 있었다.

 복 받는 길은 어렵지 않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생각보다 하나님께 감동을 드릴 생각을 앞세우면 된다. 교회생활을 잘하는 길도 어렵지 않다. 교회로부터 무엇을 얻을 생각보다 교회를 감동시킬 생각을 하면 된다. 요새 많은 교인들이 큰 교회만 찾아 등록한다고 하지만 작은 교회에 등록하는 사람도 여전히 있다. 왜 그런가? 순수해서 그렇거나 아니면 교회로부터 인맥, 위신, 혜택, 존재감 등을 얻을 생각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영안이란 은밀한 장면이나 환상을 볼 수 있는 눈만이 아니다. 교회의 필요를 볼 수 있는 눈도 영안이다. 교회 구석구석의 쓰레기나 거미줄이나 결손 부분은 목회자가 제일 잘 보는 편이다. 제일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 부분들이 보여 조용히 봉사의 손길을 펼쳐서 교회를 깨끗하게 한다면 그 장면을 사람은 보지 않아도 하나님은 다 보신다. 환상을 보는 영안보다 교회의 청소할 부분이 보이는 영안이 더 복된 영안이다. 잘 믿는 것을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으로 나타내는 삶처럼 건강하고 든든한 믿음은 없다.

 어떤 사람은 구역장을 시키면 성경을 잘 몰라서 못하겠다고 하지만 리더십에 순종하며 교우를 섬길 줄만 알아도 구역장 자격은 충분하다. 신비한 기적이 일어난다고 알려진 곳보다 묵묵히 섬김과 봉사의 손길을 펼치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더 임한다. 사람은 삶의 모델을 통해 배울 때가 많기에 잘 섬겨주는 것이 사실상 잘 가르치는 것이다. 굳건한 믿음과 예배를 바탕으로 봉사의 손길까지 구체적으로 펼쳐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사람에게도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매력적인 성도가 될 수 있다.

< 성도의 매력 포인트 >
 
 본문에는 야곱과 라헬이 처음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야곱은 에서처럼 용사는 아니었지만 사람을 잡아끄는 묘한 매력이 있었고 라헬도 그에 못지않은 매력이 있었다. 그래서 처음 만날 때부터 서로에게 끌렸다. 사랑은 우연보다 필연인 경우가 많다. 매력적인 캐릭터를 가진 사람이 대개 사람의 사랑도 받고 하나님의 사랑도 받는다.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사랑 받는 매력적인 성도가 되라. 성도가 행동을 잘하면 교회도 칭찬을 받고 하나님도 영광을 받으신다. 성도를 매력적이게 만드는 매력 포인트는 무엇인가?

1. 친절성

 도피 중에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 용기를 얻은 야곱이 다시 길을 떠나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렀다(1절). 그곳에 도착해보니까 들에 있는 우물곁에 양 세 떼가 누워 있었다. 그 우물 아귀는 평소에는 큰 돌로 덮여 있었는데 목자들은 양떼가 모이면 그 돌을 옮겨 각각의 양떼에게 공평하게 물을 먹였다(2-3절). 그때 야곱이 목자들에게 “내 형제여 어디서 왔습니까?”라고 묻자 그들이 하란에서 왔다고 대답했다(4절). 그때 언어 소통이 된 것은 야곱이 하란 출신의 어머니인 리브가로부터 갈대아어를 배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언어 소통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소통이다. 야곱은 그들에게 ‘내 형제’라고 공손하고 친절하게 호칭해서 그들의 마음 문을 열었고 좋은 첫 인상을 남겨 그들의 적극적인 반응을 유도했다. 하란에서 왔다는 말을 듣고 야곱이 “당신들은 나홀의 손자 라반을 아십니까?”라고 묻자 그들이 안다고 대답했다(5절). 야곱이 또 “라반이 평안하십니까?”라고 묻자 그들은 평안하다고 대답하면서 라반의 딸 라헬이 지금 양을 몰고 온다는 말까지 해주었다(6절). 야곱의 친절한 언행이 그들의 마음을 활짝 열리게 한 것이다.

 요새 기업마다 친절 교육을 많이 한다. 그런데 진리를 가르치는 종교에서 친절의 중요성을 얘기하면 영성이 없게 보인다. 그러나 진리는 삶과 괴리된 것이 아니다. 특히 복음의 진리는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것이다. 친절은 이웃 사랑의 중요한 내용이고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함께 진리의 2대 핵심 요소다. 친절한 마음이 없다면 천 번의 고백과 천 시간의 기도와 천 권의 독서가 무슨 자랑거리가 되겠는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사람을 차별 없이 친절하게 대하라.”는 도전을 준다. 그만큼 친절도 중요하다.

2. 성실성
 
 야곱이 라반의 딸이 오고 있다는 말을 듣고 목자들에게 아직 해가 높아서 가축 모일 때가 아니니까 양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풀을 뜯게 하라고 했다(7절). 왜 그 말을 했는가? 라헬과 단 둘이 만나고 싶은 의도도 있었겠지만 주어진 시간과 기회를 살려 성실하게 목양하라는 권고의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본문을 통해 유추하면 야곱은 땀을 흘릴 줄 아는 책임감과 성실성이 몸에 배인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런 대화가 오고갈 때 라헬이 그녀가 돌보는 아버지의 양과 함께 왔다(9절).

 본문 다음에 있는 17-18절을 보면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워서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했다는 표현이 나온다. 그 구절만 보면 야곱이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한 것이 외모 때문이라고 여기기 쉽지만 라헬은 외모는 물론 삶의 태도도 매력적이었다. 즉 그녀가 아들이 없는 가정에서 아버지의 양을 치는 모습은 그녀의 근면성과 성실성과 적극성과 책임감을 잘 보여준다. 얼굴도 예쁜데 게으르지 않고 성실하기까지 하니까 야곱이 그녀를 죽을 때까지 깊이 사랑했던 것이 잘 이해된다. 사람은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에게 끌린다.

 가끔 하겠다고 말한 후 하기 싫고 가겠다고 말한 후 가기 싫을 때가 있다. 그래도 했던 말은 힘써 지키라. 기분과 감정을 넘어선 의지적인 믿음이 그때도 필요하다. 십자가의 믿음이란 의지적인 믿음을 뜻한다. 큰 십자가도 잘 져야 하지만 작은 십자가도 잘 져야 한다.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기면 어쩔 수 없지만 한번 한 약속은 귀찮음을 이겨내고 힘써 지키라. 사소한 시간 약속도 잘 지키라. 약속을 지키려는 삶은 큰 의미에서 땀을 흘리려는 삶이다. 성실한 땀은 결코 배반이 없고 땀을 앞세우는 사람은 결코 소외도 없다.

3. 순수성

 야곱은 라헬을 만나자마자 그녀의 양떼에게 물을 먹여준 후 곧 그녀에게 입 맞추고 소리 내어 울었다(11절). 고대에 브엘세바에서 하란까지의 먼 길을 혼자 올 정도라면 야곱은 나약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래도 외사촌 여동생 앞에서 눈물 흘리는 장면을 보면 그의 순수성이 읽혀진다. 하나님은 순수한 사람을 기뻐하신다. 외적인 화려함을 추구하면 성공해도 후유증으로 인한 고통과 불행까지는 면제되지 않는다.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외모보다 중심을 보고 순수하게 어떤 길을 선택하면 겉으로는 손해되는 것 같지만 그 결과는 대개 축복으로 귀결된다.

 어떤 사람은 부끄러운 자기 모습 때문에 남이 듣는 대표기도를 못하겠다고 한다. 충분히 이해된다. 기도는 사람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들으시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들릴수록 하나님께는 더 안 들릴 수 있다. 어떤 목회자는 회의 때 혼자 다 아는 것처럼 발언도 많고 싸우는 발언도 최고로 잘하면서 한편으로는 기도도 청산유수로 잘한다. 뭔가 진실함과 순수함이 결여된 느낌이다. 그런 모순과 위선을 보면서 기도를 잘할수록 못한다는 느낌을 가지고 사람이 듣는 기도를 가급적이면 줄이거나 피하려는 마음이 이해된다.

 어떤 사람은 큰소리로 기도할수록 그 소리가 자기의 부족함을 일깨우고 남의 귀에도 들린다고 생각하면서 기도의 진실성과 순수성을 잃는 것 같기에 남에게 안 들리게 기도한다. 남이 내 기도를 듣는다고 생각하면 자기도 모르게 기도로 남을 감동시키거나 가르치거나 도전하려고 하고 심지어는 입신시키려고 할 수도 있다. 그런 기도의 변질에 거부감을 느끼며 “하나님! 제 기도 소리는 오직 하나님만 듣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면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더욱 기억해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순수함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4. 헌신성

 라헬이 야곱이 온 소식을 자기 아버지에게 알리자 라반이 그 소식을 듣고 달려와 그를 영접하여 안고 입 맞추며 자기 집으로 인도해 들였고 야곱도 모든 사연을 말했다(13절). 라반은 야곱에게 처음에는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다(14절).”라고 했지만 그런 혈육적인 사랑은 오래 가지 못했다. 결국 재회의 감격과 기쁨이 사라지면서 한 달쯤 같이 거주했을 때 라반이 야곱에게 말했다. “야곱아! 네가 비록 내 생질이나 어찌 그저 내 일을 하겠느냐 네 품삯을 어떻게 할지 내게 말하라.” 마치 고용인을 대하는 어투다.

 한 달간 있으면서 야곱의 성실성과 탁월성을 알아본 라반은 야곱을 자기 곁에 두고 싶어서 고용 계약을 제시했다. 겉으로는 조카를 공짜로 부려먹지 않으려는 친절 같지만 내면의 약삭빠른 계산이 친절을 가장해 표현된 것이다. 그때 라반은 야곱이 자신의 딸 라헬을 사랑했기에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으리라는 계산도 했을 것이다. 계산적인 라반은 라헬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계산을 초월한 헌신적인 야곱을 더 곁에 두고 싶었을 것이다.

 자세히 보면 계산적인 사람도 계산적인 사람보다 헌신적인 사람을 좋아한다. 하나님도 계산이 없는 헌신적인 성도를 좋아하신다. 믿음이 부족해서 봉사를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믿음이 있는 척 하면서도 부담이 된다고 좁은 길을 멀리하고 봉사를 멀리하는 계산적인 모습은 복된 모습이 아니다. 부담을 지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적절한 부담은 피하지 말아야 축복도 나를 피해가지 않는다. 왜 요새 교회 성장이 정체되는가? 헌신하는 마음을 잃은 계산적인 태도가 큰 원인이다.

< 기쁘게 십자가를 지라 >

 우리나라 초대 교회 때는 천국을 얻었으니 이 땅에서는 희생하며 헌신적으로 살겠다는 사람이 많았다. 그렇게 희생해야 했기에 1970년대에는 목사의 인기도가 이발사 다음이었다. 그런데 1990년대부터 중대형 교회 목사의 인기가 판검사를 능가하게 되었다. 옛날에는 신학과의 정원이 미달일 때가 많았다. 고생해야 되니까 뚜렷한 소명이 없으면 신학교에 오지 않았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는 어떤 신학대학원에 입학하기 위해 3, 4수를 하기도 했다. 그런 현상에는 희생의 냄새보다는 출세의 냄새가 강하게 풍긴다.

 옛날에는 장로와 안수집사를 서로 안 하려고 했다. 부담과 희생이 컸고 교회의 부족한 것은 다 채워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은 그 직분이 희생하는 직분보다 대접받는 직분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요새 중대형 교회의 장로는 상당한 권력을 누린다. 많은 사람을 다스리고 1년에 수십억, 수백억의 재정을 몇 명의 장로가 좌지우지 한다. 그래서 장로 선거에 돈이 동원되고 교단 총 회장 선거에도 돈 봉투가 왔다 갔다 한다. 교회를 출세와 성공의 통로로 삼거나 복음과는 상관없는 모습이 교회 안에 많아진다면 얼마나 큰 불행인가?

 교회생활에서 계산적인 마음을 버리고 늘 기쁘게 십자가를 지려고 하라. 십자가를 피하게 하는 길과 십자가를 지게 하는 길이 앞에 있을 때 십자가를 지는 길을 선택하면 그 길은 대개 옳은 길이고 하나님께서 그 길을 축복하신다. 지금도 사탄은 끊임없이 부담 없이 편안하게 사는 길로 영혼을 미혹하려고 한다. 그러나 편안과 평안은 다르다. 십자가를 회피하면 편안할 수는 있어도 평안은 얻지 못한다. 십자가를 기꺼이 지려고 해야 참된 평안이 주어진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는 말씀을 했을 때 베드로가 “주님! 십자가를 지지 마세요.”라고 하자 그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계산으로 생각한다.”고 하셨다(마 16:23). 선택의 순간에 수시로 내면의 잘못된 베드로가 속삭인다. “어떻게 그 십자가를 지려고 해?” 그때 “나를 넘어지게 하지 말라. 나는 사람의 계산으로 생각하지 않으리라.”고 스스로 자신을 꾸짖고 인기 없는 좁은 길을 선택하면 그 길이 결국 당대와 후대가 복 받는 천국 대로로 변할 것이다.

 예수님을 바로 믿고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하면 잠깐은 고생도 하고 손해도 보고 돈도 많이 벌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서 죽도록 고생만 하고 열매 없이 끝나는 일은 없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십자가를 진 것 이상의 넘치는 복을 허락하신다. 심은 대로 거두는 당연한 원리를 늘 기억하고 좁은 길의 선택을 두려워하지 말라. 봉사할 때도 믿음과 더불어 친절성, 성실성, 순수성, 헌신성이란 매력적인 캐릭터를 앞세워 봉사함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받는 일이 우연이 아닌 필연임을 증명해내는 복된 심령들이 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