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사람도 축복하라 (창세기 31장 51-55절) < 서로의 경계를 넘지 말라 >
본문에는 야곱과 라반이 언약을 체결할 후 헤어지는 장면이 나온다. 라반은 그곳에 세운 돌 무더기 기둥을 증거와 경계로 삼아 서로 넘어가서 해치지 말자고 제의했다(51-52절). 언약은 서로를 인정해주려고 할 때 온전해진다. 서로의 경계를 넘지 말고 서로의 영역을 인정해주라. 서로 해치려고 하지 말라. 하나님이 증인으로서 모든 상황을 다 보신다고 믿으면 원수조차 스스로 해치려고 하지 말라. 인간적으로 서로 해치려고 하면 다 망한다. 원수 갚는 일은 의로우신 하나님의 손길에 맡기라.
좋은 관계에서도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말라.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면 서로 상처를 주게 되고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면 서로를 성숙시키게 된다. 과거에 우리나라 문화에서 제일 부족했던 것이 서로 존중해주고 세워주는 삶이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은 그런 문화가 잘 반영된 속담이다. 성도는 새로운 기독교 문화를 확산시키는 일원으로서 자신과 유사한 반열이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잘 되는 모습을 보아도 배 아파하지 말고 그때 오히려 소화가 잘되는 훈련을 하라.
남이 많이 벌어 많이 헌신할 때 "하나님! 그를 축복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도 그렇게 되게 하소서!“라고 축복 기도를 해주면 얼마나 복된 모습인가? 비슷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정당하게 성공할 때 격려와 도전이 받는 품성을 기르라. 그런 품성과 인간관계를 누가 제일 시기하고 방해하는가? 사탄이다. 그런 사탄의 영적인 공격을 막아내고 자기 영혼과 삶을 지키려면 남의 경계를 침범하지 않도록 하라.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깨질 때도 있다. 어떤 때는 마땅하고 뚜렷한 이유가 없이 관계가 깨지기도 한다. 그러면 그것도 대개 사탄의 역사 때문인 경우가 많다. 내가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고 한 말이 상대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히도록 누가 만드는가? 바로 사탄이다. 사탄은 에덴동산 때부터 지금까지 가정과 교회와 거룩한 공동체와 인간관계를 그렇게 파괴해왔다. 인간관계에서 그런 상황이 있을 수 있음을 늘 기억하고 말씀과 기도로 무장해서 서로를 더욱 이해하고 존중하려고 하라.
< 떠나는 사람도 축복하라 >
야곱이 산에서 제사를 드리고 형제들을 불러 떡을 먹이자 그들이 떡을 먹고 산에서 밤을 지내고 라반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 맞추며 축복한 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다(54-55절). 장인과 사위 간에 극적인 화해가 이뤄지고 축복 가운데 아름답게 이별한 것이다. 라반도 자기 딸과 사위가 자기를 버리고 황급히 도망치듯이 떠난 모습이 한편으로 섭섭한 생각이 들기도 했겠지만 결국 그들을 축복하며 떠나보냈다. 그처럼 누군가 내 곁을 떠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나를 섭섭하게 하고 떠나도 축복하며 떠나보내라.
때로는 내 곁을 떠나는 사람이 불행으로 가는 것이 너무 분명한 것 같아서 그 상황을 막고 싶고 지혜롭게 막아보기도 한다. 그래도 떠나겠다면 그때는 떠나게 놔주라. 때로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을 뚜렷한 이유도 없이 떠나보내기도 한다. 그때는 편한 마음으로 떠나보내는 것이 필요하다. 떠나야 할 사람이 떠나기로 된 상황을 사람은 막지 못한다. 그때는 밉게 행동한 사람도 축복하며 편하게 떠나보내고 사랑하는 사람도 축복하며 편하게 떠나보내라.
사랑하는 자녀가 부모 품을 떠날 때는 정말로 마음이 아프다. 그런 일이 생기면 그 상황도 있어야 할 상황으로 여기라.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가 자기 몫을 요구하고 떠날 때 아버지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는가? 받는 것도 없이 거의 주면서 사랑하는 자식을 키웠는데도 마치 채권자가 된 것처럼 자기 몫을 요구하고 집을 떠나는 탕자를 보면서 아버지가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아들의 불행을 알고 느끼면서도 재산을 나눠주고 떠나는 것까지 허락하는 탕자의 아버지는 위대한 아버지였다.
마침내 자기 몫을 받고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떠났다. 그리고 곧 재산을 다 잃고 비참해졌다. 그것은 거의 예고된 삶이었다. 그것을 다양한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아버지는 그래도 자유를 주었다. 미성숙한 아들이 성숙한 아들이 되려면 떠남을 통해 쓴맛을 보는 경험도 필요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별이나 떠남도 겪어봐야 성숙해진다. 고독을 느낀 사람이 동행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그런 이별 체험을 굳이 막지 말라. 예고된 불행이 가슴 아프지만 불행 후의 행복까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이별의 아픔을 감수하라.
요즘 사람들은 이별을 너무 무서워한다. 이별을 소외의 전주곡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불행한 이별도 소외의 전주곡이 아닌 성숙의 전주곡으로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성숙을 위해 꼭 필요한 이별조차 두려워하면 인생은 더 어려워진다. 떠나지 않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때로는 떠나는 것이 사랑이 될 때도 많다. 사랑을 오해하지 말라. 편안한 터에 두는 것을 사랑이라고 오해하지 말라. 편한 터에 두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진리의 터에서 땀 흘리며 살도록 하는 것이 사랑이다. 떠남을 잘 승화시키면 더 좋은 것을 들일 수 있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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