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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주는 4대 마음 (사도행전 1장 4-8절)

by 【고동엽】 2023. 1. 9.

성령이 주는 4대 마음 (사도행전 1장 4-8절)

< 진리 안에서 기뻐하라 >


 이번 주에 <귀신론>을 주장해서 오래 전부터 이단 판정을 받은 K 목사가 교회 재정 횡령으로 실형을 받은 소식과 설교 중에 “내 연봉 5억 원이 뭐가 많은가?”라고 한 동영상이 KBS 뉴스와 네이버와 다음 사이트의 메인 뉴스를 장식했다. 그 일로 그가 이단인 줄도 모르고 사람들이 무섭게 한국 교회를 비판하는 댓글을 달았다. 이단 교주는 개인 영혼도 망치지만 한국 교회도 망치는 사탄의 선봉장과 같다. 결국 K 목사는 성령충만을 내세워 사람을 넘어뜨리고 귀신을 쫓아낸다고 했지만 정작 자신이 귀신덩어리였던 셈이다.

 예전에는 이단 교주가 영혼을 사로잡아 몸과 물질을 빼앗고 자기 왕국을 키워도 종교 자유를 내세워 법적인 제재를 거의 받지 않았다. 요즘은 사람들 의식이 깨어서 이단 교주의 사기는 종교 자유와는 별개 개념이라고 인식하면서 거짓 치유, 거짓 약속, 거짓 위안, 거짓 종말을 내세워 몸을 빼앗거나 물질을 빼앗으면 고소를 통해 이단 교주가 감옥에 가는 일이 많아지면서 이단 교주의 사업과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영혼과 몸과 물질을 빼앗긴 후 고소하기보다 그 전에 말씀으로 나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제가 <월새기(월간새벽기도)> 사역에 힘쓰는 이유는 영혼을 이단 교주로부터 지키려는 목적도 있다. 매달 한 권의 <월새기>를 집필하면서 밤을 새우고 지칠 때가 많다. 이번 <8월호> 집필은 유난히 힘들었다. 그래도 한 달에 한 권씩 순산되어 나오는 것을 보면 기쁘고 행복하다. <월새기>가 수많은 영혼 구원과 영혼 변화의 역사를 이루고 특히 사탄과 이단에 미혹되는 것을 막는 영적인 방파제 역할을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진리 안에 있는 것도 기쁨이지만 진리를 위해 일하는 것도 기쁨이다.

 지금까지 <월새기> 사역이 잘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은 진리를 위해 일하는 기쁨을 가진 동역자들의 은밀한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동역자는 저에게 바울을 후원했던 바나바나 루디아와 같은 존재였고 누가의 문서선교를 후원했던 데오빌로 같은 존재였다. 바나바나 루디아가 없었다면 바울도 없었을 것이고 데오빌로가 없었다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도 없었을 것이다. 왜 그들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음지에서 헌신하는가? 진리 안에서 거룩한 사회성을 세우는데 일조하는 기쁨 때문일 것이다.

< 성령이 주는 4대 마음 >

 예수님이 승천 전에 남긴 최후의 2대 명령은 “성령 세례를 기다리라.”는 명령과 “성령의 권능을 받고 내 증인이 되라.”는 명령이다(8절).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의 권능이다. 그 사실은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문제는 성령충만을 오해하는 것이다. 성령충만을 소매상을 하다가 도매상을 하는 물량적인 축복이나 승진 개념으로 오해하지 말라. 성령충만할 때 가장 먼저 생기는 변화는 물량적인 변화가 아닌 마음의 변화다. 성령충만하면 어떤 마음이 생기는가?

1) 겸손한 마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3년간의 말씀 교육과 생활 교육을 통해 겸손을 가르쳤지만 그들은 높은 자리를 생각했고 십자가를 가르쳤지만 영광 얻을 생각만 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얼마 전에도 “누가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을 것인가?” 문제로 제자들 사이에 갈등이 생갸서 예수님의 마음을 무겁게 하더니 승천하실 때도 그런 욕망을 보였다.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될 때에 관련된 그들의 질문에는 회복된 나라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싶다는 욕망이 묻어난다.

 예수님이 승천하는 엄숙한 순간에도 현세적인 욕망을 보였던 모습이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충만을 받은 후 완전히 사라져서 그들의 집요한 세상 욕망은 거룩한 천국 소망으로 변했다. 그때부터 철저히 하나님 나라를 위해 소리 없이 충성했다. 성령충만하면 높은 자리나 위치에 더 이상 관심이 없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말석에 있어도 좋고 순교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처럼 성령충만은 겸손을 낳고 겸손이 충성을 낳는다.

 소리 없이 충성하는 참되고 겸손한 심령이 되라. 요한삼서 9절에서 사도 요한이 언급한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처럼 살지 말라. 으뜸 되기를 좋아하면 발언과 주장이 많아지고 튀는 행동도 많아지면서 공동체의 평화가 위협받는다. 성경은 그런 사람을 경계하라고 하는데 누구보다 내가 나 자신을 경계해야 한다. 늘 교회 중심적인 자세를 가지고 겸손하게 나를 낮추면서 묵묵히 내 자리를 지키는 삶이 성령충만한 삶이다.

2) 온유한 마음

 온유한 마음은 나를 잘 절제하고 조절하는 마음이다. 리더의 축복을 받으려면 가장 필요한 덕목 중 하나가 온유다. 리더가 쉽게 절제를 잃고 분노하면 점차 영향력을 잃는다. 혈기를 부린 후 미안하다면서 수습 능력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혈기를 부리지 않도록 온유를 훈련하는 것이다. 그때 온유의 개념을 오해하지 말라. 온유는 유약함이나 우유부단이 아니다. 평소에 자녀를 달콤한 사랑으로 끔찍하게 사랑하면서도 징계할 때는 엄하게 징계하는 부모의 모습에 참된 온유의 개념이 들어있다.

 성경에서 모세는 사형을 가장 많이 시킨 사람 중 하나다. 그래서 전혀 온유한 것 같지 않은데 성경은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다고 했다(민 12:3). 세상적인 온유와 성경적인 온유의 개념이 다르다는 암시다. 세상적인 온유의 개념은 겉으로 따듯하고 부드럽고 심지어는 애처로운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적인 온유의 개념은 실제로는 따뜻하고 부드럽지만 영혼과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따뜻함과 부드러움을 감추고 때로는 추상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어느 날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자 누나 미리암과 형 아론이 모세를 비방했다(민 12:1). 하나님은 그들의 말을 정당한 비판이 아닌 부당한 비방으로 보셨다(민 12:8). 결국 하나님의 징계가 구스 여인을 취한 모세 대신 미리암에게 내려 미리암이 나병에 걸렸다(민 12:10). 만약 하나님의 도우심과 함께 모세 자신의 온유함이 없었다면 그는 힘든 광야에서 약 이백만 명의 각종 불평을 듣고 각종 반역을 겪으면서 거의 광인처럼 되었을 것이다. 그처럼 어려운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꿈과 비전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온유한 마음을 가진 것이 진짜 성령충만이다.

3) 일치하는 마음

 기독교인은 화해, 평화, 일치를 위해 부름 받은 사람이다. 성령충만하게 되면 행동형태가 뜨거워지는 어떤 열정도 생기지만 더 나아가 내면에 일치하고 용서하고 화해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래서 성령충만해지면 가장 뚜렷하게 생기는 특징 중 하나가 원망과 불평이 없어지고 남 탓이 사라지는 것이다.

 요새 남 탓 문화가 심해지고 있다. 운전할 때 내가 끼어들면 바쁘니까 괜찮고 남이 끼어들면 얌체라고 손가락질한다. 내가 남의 차를 받으면 “왜 급정거했느냐?”고 남 탓을 하고 남이 내 차를 받으면 “왜 안전거리 안 지켰느냐?”고 남 탓을 한다. 내가 단속되면 “억세게 재수 없네.”라고 하면서 부당하게 여기고 남이 단속되면 “잘했어. 저건 단속해야 돼.” 하고 당연하게 여긴
다. 또한 남의 작은 잘못은 철저히 따지고 나의 큰 허물은 그냥 넘어가려고 하고 남에게는 원칙을 강요하면서 자신은 융통성 있게 봐달라고 한다.

 반면에 성경충만해지면 “네 탓이다.”라고 하지 않고 “제 탓입니다.”라고 하는 성숙한 틀이 생기니까 성령충만한 사람이 가는 곳마다 공동체에 일치와 화해가 이뤄진다. 누구에게나 허물은 있다. 그 허물을 서로 덮어주려는 기본자세를 바탕으로 변화와 창조를 모색하라. 서로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정신을 가지고 남을 이해하고 화해와 일치를 지향하는 모습이 성령충만한 모습이다.

4) 모험하는 마음

 본문 8절에서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할 때 ‘증인’은 헬라어로 ‘마르투레’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마터(martyr, 순교자)란 영어단어가 나왔다. 실제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충만을 받고 대부분 순교했다. 성령충만해지면 찬란한 꿈과 비전이 생기면서 거룩한 모험을 하게 된다.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모험정신과 개척정신이 없이 위대한 일이 이뤄진 경우는 없다. 거룩한 모험이 있어야 참된 행복도 느낄 수 있고 그런 인생이 아름답다.

 하나님의 명령과 비전을 앞세워 모험적인 삶을 살 때 삶의 가치와 질이 크게 달라지고 나를 통해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고 공동체도 새로워진다. 나라가 어려워지면 사람들은 그 책임을 주로 정치권으로 돌리지만 진짜 문제는 국민의 이기심이다. 이기심 때문에 생긴 아픈 현실에 대해 너무 낙심하지 말고 그 현실을 내일을 위한 엄숙한 삶의 교훈으로 삼으라. 중요한 것은 미래다. 미래는 나의 의지와 결단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희망을 노래하기 힘들어도 희망을 노래하는 것이 성도의 존재 이유이고 성도의 의무와 책임이다. 내일의 힘찬 모험의 발걸음을 내딛어 희망의 불씨를 살리라. 성령충만한 사람은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연약한 인간이기에 힘든 일이 생기면 잠깐 침체에 빠질 수 있지만 성도는 반드시 그 상황을 딛고 일어선다. 그때 탄식이 찬송으로 변한다. 그런 창조적인 변화가 있을 때 증인의 삶을 살 수 있다. 그처럼 성령충만해서 나를 통해 공동체가 변화되고 세계선교가 멋지게 이뤄지는 꿈과 비전을 가지라.

 복음 전파와 세계선교의 버전을 가지라. 세계선교의 비전을 가질수록 개인도 복을 받고 나라도 복을 받는다.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 때 선교를 제일 많이 했는데 그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미국도 아이젠하워 대통령 때 세계선교가 가장 활발했는데 그때 미국 한 나라가 세계 경제 총생산의 40%까지 차지하기도 했었다. 세계선교의 비전은 경제적인 축복뿐만 아니라 영적이고 정신적인 수많은 축복도 따르게 만든다. 또한 내 인식과 지경도 세계적으로 확장되면서 내 영혼도 생동감이 넘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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