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축복관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 예레미야 5장 19-31절

by 【고동엽】 2022. 12. 8.

< 유다의 심판이 주는 영적인 교훈 > 오늘 본문도 계속해서 유다의 죄악을 하나님이 질책하시는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주는 영적인 교훈을 몇 가지 한번 살펴볼까요? 1. 이방신을 추구하면 이방인의 종이 됩니다. 본문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들이 만일 이르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느뇨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너희 땅에서 이방신들을 섬겼은 즉 이와 같이 너희 것이 아닌 땅에서 이방인들을 섬기리라 하라.” 우리가 무엇인가를 신처럼 생각하고 추구하면 그것이 우리에게 축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노예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돈을 신으로 삼아 섬기면 돈의 노예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돈을 벌기 위해서 땀 흘리고 노력하는 것을 그만두라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벌려는 노력이 너무 지나치면 문제가 일어날 수는 있지만 그것 자체가 돈을 신으로 삼아 섬기는 자세는 아닙니다. 그러면 돈을 신으로 삼아 섬긴다는 말은 무엇을 말합니까? 보통 사람은 신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존재’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돈을 신으로 삼아 섬긴다는 말은 “돈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돈을 신으로 삼아 섬기면 돈이 우리를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노예로 만듭니다. 돈 위에 서서(떳떳하게 허리를 펴고) 돈을 벌면 축복이지만 돈 아래에 서서(돈에 굽실거리면서) 돈을 벌면 축복이 아닙니다. 우리는 큰 꿈을 가지고 인생을 책임 있게 살아야 합니다. 나만을 위해서 살아도 안 되고, 오늘만은 위해서 살아서도 안 됩니다. 복 받는 자로 끝나지 말고 복의 근원이 되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복을 주기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특히 신앙인들은 사치를 부려서는 안 됩니다. 나를 위해서는 적게 사용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는 인색해서는 안 됩니다. 회갑 잔치를 위해서 천만 원을 사용하는 것을 줄여서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그 일부를 믿음의 정도에 따라 사용해야 합니다. 자녀 교육을 할 때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목적과 바른 가치관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그런 가치관을 심어주지 못하면 자녀는 인색하고 쫀쫀한 자녀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는 큰 인물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큰 가슴을 가진 자녀로 키워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우리가 헌신하는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자녀들은 그런 부모의 헌신을 보고 큰 가슴과 큰 꿈을 가진 자녀로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언젠가 강남의 한 초등학교에서는 한 반에 두 명의 아이만 국산품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고 합니다. 운동화는 우리나라 제품이 세계 최고의 제품인데 아이들의 기를 살려 준다고 두 명의 부모가 자녀들에게 외제를 사주니까 다른 아이들도 따라서 산 것입니다. 그때는 아이들 붙잡고 말해야 합니다. “얘야, 국산품이 더 좋아! 사치스런 마음을 가지고 외제를 사는 것은 잘못이야!” 그렇게 이해를 구하면 아이는 더 잘 자라게 될 것입니다. 성도는 항상 성실하고 진실한 자세를 가지고 살기를 힘써야 합니다. 과장하는 자세와 생색내는 자세는 사람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불성실하게 보이게 만듭니다. 과장이 심하면 내실이 없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내실이 있는 사람은 구태여 과장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진짜 부자는 오히려 검소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축복에 대한 관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인간의 영혼의 가치가 어떤 축복보다 가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없는 축복은 결코 인간에 축복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영혼도 중생해야 하지만 행복관, 축복관, 가치관도 중생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전인적 중생의 역사가 없으면 진정한 행복을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2. 허물과 죄가 하나님의 축복을 막습니다. 본문 24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 여기서 ‘이른 비와 늦은 비’는 축복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그 축복을 하나님께서는 때를 따라 주신다고 했습니다. 축복을 생각할 때 꼭 시간과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시간과 함께 생각하면 현재 무엇을 받고 성공했다고 해서 교만에 빠지거나 나태해지지 않고, 반대로 현재 무엇을 잃고 실패에 빠졌다고 해서 좌절에 빠지거나 실망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수능시험의 결과로 인생의 성패를 속단해서는 안 됩니다. 수능시험도 중요하지만, 10년 후도 내다볼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 합니다. 바둑에 있어서도 수를 멀리 보아야 고수가 되어 승리합니다. 마찬가지로 시간도 멀리 보아야 승리하는 인생이 됩니다. 우리 예수님 믿는 사람은 죽은 다음의 시간까지 헤아리고 삽니다. 이처럼 영원을 생각하며 오늘날 살 때 비교적 넉넉히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정으로 우리를 축복하시기를 원하시지만 아무 때나 주는 것이 아니라 때를 따라 주십니다. 그런데 때를 따라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가장 심각하게 막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본문 25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무엇이 하나님의 축복을 막습니까? 허물과 죄가 막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합니까? 진정한 회개가 필요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제일 비결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진정한 회개가 많지 않습니다. 회개를 하는 것 같으면서 그 회개에 변명이 많고, 구실이 많고, 설명이 뒤따릅니다. 그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가 두려워 뉘우치는 것도 회개가 아닙니다. 가룟 유다도 주님을 배반한 후에 뉘우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자살로 끝난 그의 삶에 뉘우침은 있었지만 회개는 없었습니다. 베드로도 동일하게 주님을 배반한 후에 뉘우쳤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주님을 위한 선한 삶을 결단했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자세까지 있어야 그 회개가 진정한 회개가 됩니다. 사람들의 회개하는 기도는 가끔 이렇습니다. “하나님! 왜 제가 항상 이런 죄를 짓는지 모르겠습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끝나면 안 됩니다. 선한 삶을 결단하고 실천하려는 모습까지 있어야 진정한 회개입니다. 참된 회개는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을 이끌어내는 가장 확실한 통로입니다. 3. 종교적 타락은 도덕적 타락을 낳습니다. 본문 26-31절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그리고 본문 31절 말씀을 보십시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이것은 종교적 타락을 의미합니다. 또한 종교적 타락은 26-28절까지의 도덕적 타락을 야기하고, 결국 29절에 나오는 대로 하나님의 진노를 낳게 됩니다. 결국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바로 종교적 타락입니다. 그런데 종교적 타락은 왜 생기게 됩니까? 대개 보면 믿음과 실천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종교적 타락은 생기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실천하는 삶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무엇일까?” 하고 고민합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의 뜻은 단순합니다. 알기 어렵지 않습니다. 자기의 뜻으로 하나님의 뜻을 변형시키니까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사실상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고민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하면 실천하며 살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시어머니 때문에 고민합니다. 인내에 한계에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목사님을 찾아 하소연하면서 “이래도 참아야 합니까? 무엇이 하나님의 뜻입니까?”하고 묻습니다. 목사님은 그 고민을 들어줄 수는 있지만 사실 그 답은 뻔합니다. 그 답은 바로 십자가를 지라는 것입니다. 그 뻔한 답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왜 우리가 하루의 첫 시간을 말씀과 기도로 시작합니까? 하루의 첫 시간을 드리는 삶은 믿음과 실천의 거리를 좁히며 살려고 하는 우리의 최소한의 몸부림입니다. 그런 몸부림을 통해 믿음과 실천의 거리를 더욱 좁혀 감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는 마지막 때의‘의인 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이한규 http://www.john316.or.kr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