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만 바라보라 (요한복음 9장 35-41절) < 사람을 믿지 말라 >
필자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공부하라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또한 둘 다 대학 졸업 때까지 성적 이상의 차원 높은 가치관을 가지게 할 교육 목적으로 학교 성적표를 한 번도 보지 않았다.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대신 “책을 많이 읽으라. 욕심을 버리라. 잘 준비된 인물이 되어 힘써 선교하고 구제하라.”는 얘기는 가끔 했다.
첫째 딸이 장애로 따돌림 당하는 친구와 사귈 때는 “네가 좋은 성품을 가졌구나.” 하고 격려해주었다. 둘째 딸이 필자가 소속된 미국 교단(C&MA) 대학에 들어가 처음에 흑인과 룸메이트가 되었을 때는 “하나님이 네게 좋은 섬김의 기회를 주셨구나.” 하고 같이 기뻐해주었다. 믿음이 부족하고 철없는 딸들이지만 마이너 그룹 사람을 섬기는 마음을 가지면 힘써 격려했다. 그런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는 교훈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두 딸에게 선교 비전을 심어주면서 예전부터 어렴풋이 첫째 딸은 자기가 잘하는 일을 통해 사업해서 선교할 것 같고 둘째 딸은 필자의 문서선교 사역을 도와 선교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둘째 딸은 그 예감대로 문서선교를 위해 스스로도 준비하고 환경적으로도 준비되면서 지금 <월간새벽기도> 사역을 돕고 있다. 그러면서 가끔 언니에게 웃으며 말한다. “아빠와 나는 돈 버는 일을 하지 않고 선교하니까 언니가 돈을 벌어 후원해야 돼.”
아직 첫째 딸은 뚜렷한 자기 길을 못 찾아서 필자가 가끔 말했다. “얘야, 너는 너만의 특별한 달란트가 있어서 사업해도 될 것 같다.” 그런데 정작 딸은 직장생활을 한번 해보고 싶다고 했다. 당연히 그러라고 했다. 그래서 첫째 딸이 취직했을 때 몇 가지 당부를 했다. “시간을 잘 지켜라. 보수를 생각하지 말고 네 능력을 살려 회사에 유익과 보탬이 되도록 해라. 사장과 윗사람에게 힘써 순종하고 충성하고 잘 섬겨라.”
사람을 섬기라는 말은 사람을 믿으라는 권고는 아니었다. 사람을 어떻게 믿는가? 믿고 싶고 믿음을 주고 싶어도 뜻대로 안 될 때도 많다. 사람은 다 한계가 있기에 믿을 대상이 아니라 오직 믿어줄 대상이다. 교회 리더도 믿지 말라. 큰 줄기에서 생각과 비전이 달라 리더십에 기쁘게 순종하기 힘들면 기쁘게 순종하고 즐겁게 섬기는 새로운 길을 찾아도 된다. 사람을 믿지 말고 하나님만 믿으라.
이단 교주는 “나를 믿으라.”고 하고 이단 교회는 “우리 교회만 특별한 구원과 축복을 주는 교회다.”라고 한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이단성 기복주의 리더는 “나를 통해 믿으라. 내가 능력과 치유와 은사를 준다.”라고 한다. 또한 그들이 단골로 하는 말은 “우리 교회를 떠나면 저주받고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라는 말이다. 그런 말에 절대 겁내지 말라. 그런 말을 하는 곳은 오히려 속히 떠나는 것이 상책이다.
누가 어쩔 수 없이 떠나게 될 때 건강한 교회 리더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를 떠나고 저희 교회를 떠나도 하나님만은 떠나지 말고 교회는 멀리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길이 열릴 것입니다. 새로운 교회에서는 교회 리더십에 기쁘게 순종하고 즐겁게 헌신하십시오.” 누가 떠난다고 해서 한 맺히지 말라. 나를 부족하게 여겨서 굳이 떠나겠다는 것을 내가 하나님 자리에 앉아 심판까지 언급하며 억지로 막을 필요가 없다. 의를 잃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상황에서 나를 꼭 떠나겠다면 축복을 빌어주며 떠나보내라.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좋은 사람만 기대하지 말라. 악역도 있어야 소설이 전개되듯이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도 있어야 인생도 전진한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도 있다고 여기고 마음의 준비를 하라. 사람을 너무 믿지만 않으면 된다. 정직한 사람이 실수하는 것은 남도 자기처럼 정직한 줄 알고 사람을 너무 믿는 것이다. 그가 뒤에서 딴 소리 하는 것을 모른다. 사람은 믿을 대상이 아니라 믿어줄 대상일 뿐이다. 오직 하나님만 믿을 대상이다.
< 예수님이 원하는 것 >
본문에는 예수님의 치유를 받고 바리새인들로부터 출교당한 맹인을 예수님이 만나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대화를 통해 예수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1. 믿음
예수님은 예수님에 대한 인격적인 믿음을 원하신다(35-38절). 인격적인 믿음이란 믿음의 대상이 바른 믿음을 뜻한다.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닌 ‘축복의 하나님’이어야 한다. 즉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보다 ‘축복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언뜻 보면 비슷한 믿음 같지만 전혀 다르다. 전자의 믿음은 기복적인 믿음이지만 후자의 믿음은 인격적인 믿음이다. 축복을 노리고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고 따른다고 하면 축복은 오히려 멀어지지만 하나님을 순수하게 믿고 사랑하고 따르면 축복도 따른다.
바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라. 간절한 기도제목이 그대로 응답되지 않아도 “아멘!” 하는 믿음이 바른 믿음이다. 바른 믿음을 가진 부모는 자녀가 원하는 대학이 가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도 입시 이후에 펼쳐질 더욱 소중한 자녀의 전체 인생을 위해서도 통전적으로 기도한다. “하나님! 저의 자녀가 인물로 잘 준비되어 교회와 사회에 꼭 필요한 재목으로서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게 하소서.”
통전적인 기도 없이 눈앞의 입시에만 기도 초점을 맞추면 부모의 마음이 초조해진다. 그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고 자녀도 초조해하면 기대와 능력 이하의 성적을 내기 쉽다. 반면에 ‘주님의 축복’을 믿기보다 ‘축복의 주님’을 믿으면 생각도 깊어지고 마음도 평안해진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라. “하나님! 그가 어떤 일로 일희일비하지 않고 인생 전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따라가게 하소서.” 믿음의 대상을 잘 잡고 바르게 기도하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이뤄진다.
2. 영안
육신의 눈보다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한다(39절). 기능적으로 사람의 눈은 좋은 편이 아니다. 새들은 작은 눈으로 몇백 미터 떨어진 곳의 벌레까지 볼 수 있다. 결국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육안이 아닌 영안이다. 왜 하루의 첫 시간에 말씀을 보고 기도하면 좋은가? 그때 영안이 열리면서 축복의 문도 열리기 때문이다. 늘 이런 고백을 가지고 살라. “하나님! 말씀과 기도가 없으면 영적인 맹인이 될 수밖에 없음을 잘 압니다. 새벽기도를 생활화하게 하소서.”
영안을 신비한 환상을 보는 눈으로 오해하지 말라. 믿음의 눈으로 용기 있게 현실을 극복하는 것이나 찬란한 비전을 가지고 앞날을 잘 준비하는 것도 영안이 열린 것이다. 리더의 비전을 가진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 중의 하나가 영안이다. 리더는 현실적인 것 이상의 가치관과 더 나은 삶을 도전하면서 팔로워를 복된 미래로 이끌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무한한 가치와 가능성을 다 담을 수 있는 일은 사실상 없다. 그 말은 지금보다 더 소중하고 보람된 일은 늘 있다는 말이다. 그것을 찾아 도전하고 격려하는 일이 리더의 일이다. 팔로워가 리더의 삶을 교사나 반면교사로 삼아서 얻어야 할 것도 영안이다. 사람은 실패의 경험을 통해서도 많이 배운다. 사람의 체험은 위대한 책과 같다. 그 체험을 잘 승화시키면 노련한 능력이 자기도 모르게 내면에 차곡차곡 쌓인다. 그런 체험을 통해 잘 배워서 선견지명이 생기는 것도 영안을 가진 것이다.
3. 겸손
자신이 영적인 맹인임을 인정하는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사죄의 은혜를 입는다(41절). 겸손은 하나님의 은혜를 담는 최고 그릇이다. 낮은 곳에 물이 고이듯이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하나님의 은혜가 내 삶에 흘러들게 된다. 가끔 필자의 교회에 전도사가 찾아오면 겸손하게 자기를 낮출 줄 아는지를 면밀히 살펴본다. 전도사가 겸손하고 좋은 목사를 찾고 선택할 자유도 있지만 목사가 겸손하고 좋은 전도사를 찾고 선택할 자유도 있다.
가끔 보면 단기간의 욕심만 챙기고 아랫사람을 이용한 후 후에 내다버리는 나쁜 리더도 있다. 반면에 건강한 리더는 겸손한 팔로워를 선택해 최대한의 것을 주고 최고의 길을 열어주고 싶어 한다. 하물며 사람을 이용할 필요가 절대 없고 이용할 생각도 전혀 없는 하나님은 당연히 겸손한 심령을 선택해 큰 은혜를 내려주실 것이다. 잠언 16장 18절에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했다. 그 말씀을 거꾸로 하면 겸손은 영광의 선봉이란 뜻이다.
성공적인 교회생활을 위해서도 겸손이 중요하다. 어떤 사람은 생각한다. “이 교회에 내가 없으면 안 돼.” 그런 생각은 큰 오해다. 심지어는 목회자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교회를 이끌어 가는 분은 하나님이다. 남을 의존하지 않으려는 독립심은 필요하지만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생각은 금물이다. 오히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없어야 공동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소중하지만 내가 없어도 된다는 현실을 인식하고 겸손하기를 힘써야 하나님의 은혜도 넘치게 된다.
< 하나님만 바라보라 >
어떻게 겸손할 수 있는가?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은 정죄하던 군중들이 다 떠나고 예수님과 일대일로 대면할 때 변화되었다. 그처럼 예수님과의 영적인 일대일 대면이 필요하다. 그래서 기도가 중요하다. 능력을 과시하고 거짓 선포를 남발하는 사람을 의지해 치유 받겠다고 하지 말라. 그것도 일종의 우상숭배로서 비유적인 의미로 하나님께 큰 상처가 된다. 하나님을 직접 찾으라. 하나님과의 기도를 통한 대화가 없으면 나의 능력과 선함은 소용이 없다.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사람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하나님만 바라보면 힘든 현실을 얼마든지 극복해낼 수 있다. 마르틴 루터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 로마 교황도 떨었다. 조나단 에드워드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 미국에 대각성운동이 일어났다. 요한 웨슬레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 세계가 그의 교구가 되었다. 휫필드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 수많은 영혼이 구원받고 변화되었다. 조지 뮬러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 신기한 하늘의 공급으로 수천 명의 고아를 먹일 수 있었다.
지난 5년간의 <월새기(월간새벽기도)> 문서선교 사역은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고 변화시킨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사역이었다. 그러나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한 달이 너무 빨리 돌아왔다. 엊그저께 원고를 탈고한 것 같은데 금방 또 다음 달 원고를 써야 했다. 남의 글을 전혀 베끼지 않는 상태에서 한 달에 한 권 원고를 쓰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재정적인 지출 날짜도 너무 금방 찾아오는 것 같았다.
<월새기> 사역 초기에 총괄 본부장에게 말했다. “나중에 후원자가 늘어 플러스 재정이 되면 그때부터는 저도 주필로서 사례비를 받을게요.” 그러나 아직 그런 때가 오지 않았다. 오히려 재정 문제로 수시로 기도해야 했다. “하나님!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역이라면 이 사역에 하늘의 공급이 끊어지지 않게 하소서.” 그러면 하나님이 막다른 상황에서 신비하게 은혜의 문을 열어주셔서 엄청난 마이너스 상황을 해결해주셨다. 그런 은혜를 통해 매달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시며 세상을 조금씩 바꾸는 문서선교 사역을 지금까지 지속시켜주셨다.
하나님만 바라보며 믿음으로 살라. 그 말씀은 세상과 담을 쌓고 살라는 말씀이 아니다. 믿음의 삶이란 ‘세상과 담을 쌓는 삶’이 아니라 요한복음 3장 16절에 나오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말씀의 깊은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삶’이다. 하나님만 바라보면 조만간 약함은 강함이 되고 실패와 고난과 불행조차 성공과 축복과 행복으로 나아가는 발판이 된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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