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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을 쌓아두지 마십시오 (이사야 23장 13-18절)

by 【고동엽】 2022. 12. 30.

이익을 쌓아두지 마십시오 (이사야 23장 13-18절) <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십시오 >

 인간관계를 할 때도 줄 생각이 넘치면 실망도 줄어듭니다. 심지어는 배신하고 떠나도 실망하지 않습니다. 뭔가를 한 아름 안겨주고 싶은데 그것을 안겨줄 기회를 차버리고 떠난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어떤 목회자는 성도들에게 실망하지 않습니다. 성도들로부터 얻으려는 생각이 없고 주려는 생각만 있기 때문입니다. 즉 기도해주고 축복해주고 어떻게 하면 길을 열어줄까 하는 생각만 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얻겠다는 생각이 없이 주겠다는 생각만 하면 실망이 줄어듭니다.

 목회자가 아이들에게 수시로 말합니다. “얘들아! 큰 꿈과 비전을 가지고 하나님이 쓰실만한 인물이 되어라. 나중에 너희들 덕 좀 보자.” 그 목회자가 정말 아이들 덕을 보려고 그렇게 말할까요? 남의 덕을 보려는 사람은 공개적으로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이들의 덕을 보고 싶기 때문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덕을 보게 해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너희들 덕 좀 보자.”라는 말은 “너희들에게 덕 좀 줄게.”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주려는 마음을 가지고 아이들의 믿음과 덕성을 꾸준히 지켜보는 것입니다.

 제가 가끔 두 딸에게 말합니다. “예들아, 나중에 결혼하면 수입의 10분의 1은 하나님께 드리고, 키워준 것에 대한 감사하는 ‘효도 십일조’로 10분의 1은 부모님께 드리고 10분의 1은 시부모님께 드려라.” 그러자 얼마 전에 첫째 딸이 걱정하며 말했습니다. “10분의 3은 너무 많은데 10분의 7로 어떻게 살지. 돈 많이 벌어야 하겠다.”

 아이들에게 효도 십일조 얘기를 한 것은 정말 그 십일조를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겉으로 그렇게 달라고 말하는 것은 “너희들을 사랑한다. 내가 다 주겠다.”라는 뜻을 달리 표현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달라.”고 한 말은 “내가 당신을 위해 힘써 주겠다.”라는 말을 달리 표현한 것입니다. 그 진실이 통하면 “드리라.”는 말을 통해 시험에 들지 않고 오히려 깊은 사랑을 읽습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태워 먹거나 그 태운 냄새를 맡아 기분 좋게 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말씀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 내가 가진 것을 내게 주고 싶다.”라는 하나님의 마음을 달리 표현한 말씀입니다. 그 진심을 읽고 거룩한 일에 헌신하면 하나님은 그 모습을 기쁘게 여기시고 축복의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내 것은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기에 어떤 경우에도 자기를 자랑하거나 높은 마음을 가지지 마십시오.

< 두로의 패망이 주는 교훈 >  

 본문은 앞에 나오는 1-12절에 이어 두로의 심판에 관한 말씀이 계속되는 본문으로서 자랑의 위험성을 교훈하는 말씀입니다. 무엇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까?

1. 건물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다윗 왕 말기에 두로 왕 히람이 성전 건축 재료를 공급할 정도로 두로는 물자가 풍부했습니다. 그래서 두로의 궁전은 견고함과 화려함을 자랑했지만 바벨론이 공성 망대를 세워 공격해서 결국 폐허가 되었습니다(13절). 사람은 자기 성취를 화려한 건축물로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건축물이 자랑의 대상이나 높임의 대상이 되면 무의식적인 우상처럼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업적을 자랑하려는 통치자가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의 건축에 열을 내면 건축 후에 나라가 내리막에 들어서고 결국 패망할 때가 많습니다. 회사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교회도 한때 건축으로 교회가 크게 성장했지만 지금은 건축으로 성장하는 시대가 지났습니다. 적절한 건축은 필요하지만 교회성장이나 과시를 위한 건축은 오히려 교회와 교인을 어렵게 할 때가 많습니다. 요새 건축으로 빚더미에 허덕이고 이자도 잘 못 내는 교회가 많습니다. 기존 교회 건물도 점차 비어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건물을 키우는 대신 사람을 키우고 건물을 남기는 대신 거룩한 내용물과 영향력을 남기려고 해야 합니다.

 교회는 초대형 건축물이 필요 없도록 적절한 때에 스스로 분립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선한 분립이 없으면 조만간 분열되고 심해지면 파멸됩니다. 또한 건물이 지나치게 커지면 사람도 지나치게 커지면서 ‘내려놓기’가 힘들어지고 하나님도 떠나십니다. 분립을 외면하고 건물과 교회를 계속 키우려고 하면 선한 영향력은 오히려 떨어집니다. 보이는 선보다 보이지 않는 선을 더 중시하고 그것을 위해 때로는 보이는 것을 희생하려고 하십시오.

2. 지식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고대에 두로는 지중해 해상무역의 요충지로 엄청난 풍요를 자랑했고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풍부한 문화와 지식을 자랑한 도시국가였습니다. 경이로운 그리스 철학과 문화도 패망한 두로 거민들이 그리스로 대거 이주하면서 꽃핀 것입니다. 그런 두로 사람이 패망 70년 후에는 과거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우매한 백성이 되었습니다(14-16절). 인간의 지식이 때로는 얼마나 허무하게 느껴집니까? 지식을 자랑하는 것은 무식한 것입니다.

 참된 지식인은 옅은 지식으로 남을 쉽게 판단하지 않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식하면 비판에 용감하고 유식하면 비판이 두렵습니다. 무식이란 ‘무엇을 모르는지를 잘 모르는 것’이고 지혜란 ‘무엇을 모르는지를 잘 아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했습니다. “자랑하는 지식은 참된 지식은 아니다. 참된 지식은 자기 무지를 깨닫게 하고 사랑으로 인도한다. 나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 밖에 아는 것이 없다. 너 자신을 알라.”

 헛된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지만 참된 지식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지식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솔로몬은 지식을 자랑하다가 자기 영혼도 망치고 나라도 망쳤습니다.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고 하면서 짧은 구약 지식으로 예수님에 대한 추측성 매도를 해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할 뻔 했습니다. 지식이 부족한 줄 알아야 참된 지식이 생기고 그런 겸손한 사람들이 많아야 공동체도 살아납니다.

3. 영성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주전 586년 남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함락되자 두로 사람들은 인근의 무역 경쟁국이 사라졌다고 처음에는 좋아했습니다. 또한 “여호와의 선택된 백성이라더니 꼴좋다.”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의와 영성을 더 낫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듬해 결국 두로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멸망당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외양과 풍요와 지식 자랑도 주의해야 하지만 성도가 무엇보다 주의해야 할 것은 영성 자랑입니다.

 자기 의와 영성이 남보다 낫다고 자랑하지 마십시오. 신실하게 믿음생활을 해도 “아직도 많이 부족합니다.”라고 자신을 감추고 최고의 봉사를 해도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라고 자신을 낮추십시오. 자신감은 가지되 그것이 교만처럼 비춰지지 않게 하십시오. 하나님은 “저만한 사람 있나요?”라고 하면서 스스로 높이면 떨어뜨리시고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면서 스스로 낮추면 높여주십니다.

 일전에 대 배우에게 누군가 물었습니다. “많은 영화를 찍었는데 여전히 관객을 만나기 전엔 떨리나요?” 그가 대답했습니다. “부족한 건 부끄럽지 않지만 오만한 건 부끄럽기에 혹시 이번에는 내가 오만했을까봐 매번 떨려요.” 오만한 존재가 되지 않도록 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신을 가다듬으면 인물의 가능성은 커집니다. 영성이 깊은 것은 자랑스럽지만 그런 자랑조차 없는 겸손한 영성이 참된 영성입니다.

<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  >

 자랑과 교만으로 결국 두로는 패망하지만 하나님은 바로 이어서 70년의 시련 후 다시 두로를 일으키실 것이란 회복의 말씀을 주셨습니다(17-18절). 이 말씀을 보면서 저는 북한 해방을 떠올립니다. 2018년은 북한 공산정권 수립일인 1948년 9월 9일로부터 만 70년이 되는 때입니다. 북한도 속히 회복되어 통일 한국이 세계선교에 크게 쓰임 받게 될 것을 믿습니다. 성도는 어떤 성취에도 마음이 높아지면 안 되지만 반대로 어떤 시련에도 마음이 무너지면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역전 인생과 회복의 은혜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신실했던 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많은 친구들이 그의 신실한 삶에 감동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믿지 않는 친구들도 그의 신실함을 인정했습니다. 삶뿐만이 아니라 기도생활도 존경스러웠고 기도도 학생답지 않게 너무나 잘했습니다. 그의 기도를 들으면 가식이 없는 진실성이 담긴 그의 수려한 기도만 듣고도 너무 감격해서 어떤 친구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고 어떤 친구들은 감탄했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기도를 잘할 수 있는가?”

 신앙은 물론 다른 면에서도 뛰어났습니다. 가정환경도 좋았습니다. 부모가 유력한 사람이었고 재산도 많았습니다. 외모도 여성에게 큰 호감을 줄 정도로 잘 생겼습니다. 공부도 잘해서 명문대 법대에 진학해서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학 때부터 알던 탁월한 외모를 가진 여자 친구와 몇 년간 사귀다가 결혼했습니다. 성품도 남을 배려하는 성품이었기에 다른 친구들로부터 그 친구는 늘 가까이하고 싶은 연모의 대상이었습니다.

 어느 날, 30대에 들어선 다른 친구들에게 그 친구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 친구가 간통죄로 구속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지금은 성인의 사적인 애정 문제를 법이 강제할 수 없다고 해서 간통죄가 폐지되었지만 예전에는 간통죄가 있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다른 친구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그 신실했던 친구가 최고의 미인인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다가 간통죄로 구속되었을까?”

 그 소식이 충격은 주었지만 친구들은 아무도 “그 친구 교회에 잘 다니더니 이중인격자였어. 사람이 달라졌나봐.”라는 비난조의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자기 성찰의 얘기들만 했습니다. “아마 말 못할 사정이 있을 거야. 사람의 연약성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 중에 한 목회자 친구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도 어느 순간에 나락에 떨어질지 모릅니다. 늘 겸손하게 하시고 남을 함부로 비판하지 않게 하소서.”

 남의 가정사에 대해 쉽게 비판하지 마십시오. 가정 내에 생길 수 있는 수많은 갈등 변수를 이해하는 겸손한 심령을 가져야 합니다. “왜 사랑으로 품지 못할까?”라고 쉽게 말하지도 마십시오. 누가 사랑으로 품고 싶지 않겠습니까? 사랑도 공의를 수반하지 않으면 헛된 것입니다. 남의 불행한 상황을 보면 겸손하게 지켜보며 그의 삶과 가정에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있게 해달라고만 기도하십시오. 친구들의 그런 기도가 응답되어 구속되었던 친구는 곧 풀려났고 예전처럼 소중한 친구로 회복되었습니다.

 사람 편에서만 준비되면 하나님은 늘 회복의 기회를 주십니다. 세상 방법을 찾아 우왕좌왕하면 회복의 때가 오히려 늦어지지만 믿음 안에서 자기 사명의 자리를 굳게 지키면 조만간 회복의 때는 반드시 찾아옵니다. 혹시 이 땅에서 회복의 때가 오지 않아도 궁극적인 회복의 장소인 천국에서는 누구보다 화려한 영광체로 회복될 것입니다. 최후의 승리는 머리가 좋은 사람보다는 엉덩이가 무거워 작은 일로 쉽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얻습니다.

< 이익을 쌓아두지 마십시오 >

 왜 하나님께서 회복의 은혜를 주십니까? 회복된 두로는 여러 나라와 무역해서 얻은 것과 이익을 거룩히 하나님께 돌리고 창고에만 간직하거나 쌓아두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필요를 채워줄 것이라고 했습니다(17-18절). 정당한 경제활동으로 얻는 것과 이익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것은 그것을 창고에 간직하고 쌓아두기만 하는 것입니다. 돈을 쌓아두지 말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따라 영혼 구원과 영혼 변화를 위해 쓰려고 하십시오.

 자기 능력과 소유를 가치 있게 잘 쓰는 안목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 그런 안목이 있었기에 데오빌로는 누가를 후원해 위대한 문서선교의 조력자가 되었고 루디아는 바울을 후원해 위대한 개척선교의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돈을 가졌다는 것은 일종의 책임입니다. 돈을 가진 것은 죄가 아니지만 돈을 잘 쓰는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죄가 됩니다. 반대로 가난한 것도 죄는 아니지만 가난 때문에 당당하게 살지 못하면 죄가 됩니다. 가난해도 당당하게 살면 그때부터 가난이 청빈으로 변합니다.

 물질의 축복을 굳이 외면하지 말고 물질의 축복도 구하십시오. 가난 자체를 미덕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비롯해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살았던 삶처럼 ‘부요한 자로서 가난하게 되는 삶’을 진짜 미덕으로 여기십시오. 너무 돈을 꽉 쥐려고만 하지 말고 좋은 일에 헌신할 줄 알고 대가를 치를 줄 아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어떤 인간관계를 하든지, 어떤 공동체에서 몸담고 있든지 기쁘게 자발적으로 낼 줄 알면 공동체에 힘을 줄 수 있고 자신도 웬만한 일에는 시험에 잘 들지 않는 등의 여러 유익을 얻습니다.

 목회자 연구 과정(MSP) 지원자가 학비 문제로 어려움을 호소하면 총회에 적립된 기금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지만 마음 아파도 공짜의식을 가지지 않도록 이렇게 말합니다. “지원자님! 단순 노동을 해서라도 학비를 스스로 벌어 내려고 해보세요.” 그 말대로 묵묵히 따르면 좋은 품성을 인정받아 나중에 더 많은 보조와 지원이 따릅니다. 대가를 치를 줄 아는 신학생이 나중에 드리고 나누고 베푸는 목회자가 됩니다. 대가를 치를 줄 몰라서 싸움과 갈등과 시험이 잦고 소리만 큰 목회자를 배출하면 한국 교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대가를 치를 줄 모르면 나중에 목회에 성공해도 문제입니다. 내려올 때가 되어도 자리에서 내려오려고 하지 않으면서 점점 추해지다가 결국 추락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많은 문제들이 공짜 점심을 바라기에 생깁니다. 공짜 점심은 없는 줄 알고 당당하게 대가를 치르고 더 나아가 드리고 나누고 베푸는 일에 앞장서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실망과 갈등과 실패도 줄여주시고 혹시 실패의 순간을 허락해도 속히 회복의 은혜를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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