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석 위에 남는 이름(마태복음 7 : 21 - 29)
마태복음의 이 말씀은 귀에 익숙한 고백과 입술에 붙은 신앙의 언어를 조용히 벗겨내며 시작된다.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소리가 얼마나 경건한지, 그 호칭이 얼마나 오래 교회 안에서 울려 퍼져 왔는지를 우리는 안다. 그 이름은 기도의 문을 열 때 가장 먼저 불리고, 찬송의 고조에서 가장 높이 올려진다. 그러나 주님은 그 소리를 붙잡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 소리 너머를 바라보신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아와 말할 것이다. 예언했고, 귀신을 쫓았고, 능력을 행했다고. 그 말들에는 열심의 흔적이 있고, 종교적 성취의 냄새가 있다.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차갑도록 단순하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이 말은 실패한 사역자에게만 던져진 말이 아니다. 이 말씀은 성공적인 신앙의 외피를 두른 모든 사람에게 향한 질문이다. 나는 과연 누구를 향해 살았는가, 그리고 그 삶의 기초는 어디에 놓여 있었는가.
이 장면에서 우리는 종종 천국 문 앞의 판결 장면만을 떠올린다. 그러나 이 말씀은 미래의 심판보다 현재의 삶을 향해 있다. 주님은 단지 마지막 날의 운명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무엇 위에 삶을 쌓고 있는지를 묻고 계신다. 신앙은 말의 집합이 아니라 삶의 구조이며, 고백은 입술의 장식이 아니라 존재의 방향이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라는 문장은 신앙을 다시 행동의 자리로 돌려놓는다. 뜻은 알았으나 행하지 않았던 시간들, 감동은 있었으나 선택은 바뀌지 않았던 순간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은혜라는 말로 덮어왔다. 그러나 주님은 은혜를 핑계로 삼는 믿음을 인정하지 않으신다. 은혜는 삶을 가볍게 만드는 면죄부가 아니라, 삶을 더 깊이 무겁게 만드는 부르심이다.
주님은 두 종류의 집을 말씀하신다. 반석 위에 세운 집과 모래 위에 세운 집. 이 비유는 놀라울 만큼 단순하다. 둘 다 집이다. 둘 다 집을 지었다. 둘 다 동일한 재료를 사용했을 수도 있다. 지붕도 있었고, 문도 있었고, 창도 있었다. 멀리서 보면 차이를 알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차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기초다. 반석과 모래의 차이는 표면이 아니라 깊이다. 반석은 시간이 필요하고, 땀이 필요하고, 소음과 인내가 필요하다. 모래는 빠르고 쉽다. 삽이 깊이 들어가지 않아도 되고, 지금 당장 형태가 나온다. 그래서 우리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을 선택한다. 빠른 성과, 즉각적인 만족, 눈에 보이는 결과. 그러나 인생은 언제나 맑은 날만 주어지지 않는다. 비가 내리고, 강물이 불어나고, 바람이 불 때, 그때 비로소 집의 정체가 드러난다.
주님은 비를 막아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신다. 바람을 없애주겠다고도 말씀하지 않으신다. 그분의 약속은 폭풍이 오지 않는 삶이 아니라, 폭풍 앞에서 무너지지 않는 삶이다. 이것이 믿음의 본질이다. 믿음은 위험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위험을 견디는 힘이다. 그리고 그 힘은 반석 위에 세워진 삶에서만 나온다. 반석은 말씀이다. 그러나 단지 듣는 말씀이 아니라, 행함으로 내려간 말씀이다. 귀로만 머문 말씀은 지식이 되지만, 발로 옮겨진 말씀은 기초가 된다. 기초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기초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기초는 집을 지탱하는 모든 것이다.
주님은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와 “듣고 행하지 않는 자”를 대비하신다. 둘 다 들었다. 이것이 중요하다. 무지는 변명이 아니다. 이 말씀 앞에서 누구도 “몰랐다”고 말할 수 없다. 문제는 순종이다. 순종은 감정이 아니다. 순종은 선택이다. 순종은 반복되는 작은 결정의 누적이다. 오늘도 말씀을 들었으나 어제와 같은 방식으로 살았는가, 아니면 말씀 때문에 불편해졌고, 그래서 삶의 방향을 조금이라도 바꾸었는가. 믿음은 한 번의 결단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믿음은 매일의 선택으로 굳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나는 무엇을 반석이라 부르며 살아왔는가. 신앙 경력인가, 교회 봉사인가, 직분인가, 혹은 사람들의 인정인가. 이런 것들은 모두 모래가 될 수 있다. 모래는 나쁘지 않다. 문제는 그것이 기초가 될 때다. 모래 위에 세운 집은 평소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오히려 보기에는 더 화려할 수도 있다. 그러나 비가 오는 날, 그 집은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 신앙도 그렇다. 고난의 날, 상실의 날, 설명할 수 없는 아픔의 날에, 내가 붙들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때 드러난다.
예수님은 이 모든 말씀을 마치시고 무리를 향해 서 계신다. 사람들은 놀랐다. 그분의 가르침은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권위는 소리의 크기에서 나오지 않는다. 삶과 말이 하나였기 때문이다. 주님은 자신이 말씀하신 그 반석 위에 자신의 삶을 세우셨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으셨다. 그분의 순종은 말이 아니라 피로 증명되었다. 그리고 그 반석 위에 세워진 한 생명이 무너지지 않았기에, 오늘 우리가 설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 말씀은 우리를 정죄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초대다. 다시 기초로 내려오라는 초대다. 다시 깊이를 선택하라는 부르심이다. 겉모습을 가꾸는 데 익숙해진 신앙에서 벗어나, 보이지 않는 곳을 다루는 믿음으로 돌아오라는 초대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일은 오래 걸린다. 당장 칭찬받지 못한다. 그러나 그 집은 남는다. 비가 지나간 후에도, 바람이 멎은 후에도, 그 자리에 서 있다. 그리고 그 집은 말없이 증언한다. 무엇 위에 세워졌는지를.
주님은 마지막 날에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를 묻지 않으실 것이다. 얼마나 많은 말을 했는지도 묻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이 물으실 것은 하나다. “너는 나의 뜻 위에 너의 삶을 세웠느냐.”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침묵하게 된다. 그러나 그 침묵은 절망이 아니라 은혜의 문턱이다. 아직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아직 기초를 다시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 반석은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말씀을 듣는 것은 은혜다. 그러나 말씀을 행하는 것은 순종이다. 그리고 순종은 집을 세운다. 눈에 띄지 않게, 그러나 확실하게. 오늘도 우리는 집을 짓고 있다. 매일의 선택으로, 매일의 태도로, 매일의 말과 침묵으로. 그 집이 어디 위에 세워지고 있는지, 이 말씀 앞에서 다시 묻는다. 반석 위에 남는 이름이 되기를, 비가 온 뒤에도 서 있는 삶이 되기를, 주님 앞에서 “주여”라는 말이 아니라 “주님의 뜻”으로 기억되기를 소망하며, 오늘도 다시 기초로 내려간다.
폭풍은 예고 없이 찾아오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그 예고를 듣지 않으려 할 뿐이다.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는 반드시 비가 내리고, 강물이 불어나며, 바람이 불어온다. 그것은 신앙이 부족해서 오는 벌도 아니고, 특별히 잘못해서만 겪는 징계도 아니다. 주님께서 이 비유에서 분명히 하신 것은 반석 위에 집을 세운 사람에게도, 모래 위에 집을 세운 사람에게도 동일한 폭풍이 왔다는 사실이다. 신앙은 폭풍을 피하는 보험이 아니라, 폭풍을 통과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어떤 방식으로 고난을 통과하고 있는가.
많은 사람들은 폭풍이 오면 그때서야 기초를 살핀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다. 기초는 평온한 날에 놓아야 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 아무도 보지 않는 날, 칭찬도 평가도 없는 날에 반석을 파 내려가야 한다. 말씀을 듣고도 굳이 순종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순간, 타협해도 괜찮아 보이는 지점, 그때의 선택이 기초를 만든다. 작은 정직, 작은 용서, 작은 절제, 작은 침묵이 모여 반석 위에 집을 세운다. 반대로 작은 거짓, 작은 회피, 작은 자기합리화가 쌓이면 모래는 어느새 두껍게 깔린다.
주님은 “그 집이 무너지지 아니하나니”라고 말씀하신다. 무너지지 않는 집은 흔들리지 않는 집이 아니다. 흔들린다. 삐걱거린다. 때로는 금이 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무너지지 않는다. 이것이 믿음의 실제다. 믿음은 완벽함이 아니라 지속성이다.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 감정이 아니라, 흔들려도 떠나지 않는 선택이다. 반석 위에 세워진 집은 폭풍 속에서도 버틴다. 그 이유는 집이 강해서가 아니라, 기초가 견고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주님의 첫 말씀으로 돌아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이 말씀은 우리의 신앙 언어를 무너뜨린다. 우리는 신앙을 말로 증명하려 한다. 말은 빠르고, 안전하고, 통제 가능하다. 그러나 행함은 위험하다. 삶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뜻을 행한다는 것은 내 뜻을 내려놓는 것이다. 내 계획, 내 자존심, 내 기준을 내려놓고, 말씀이 나를 결정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말로 대신한다. 그러나 말은 집을 세우지 못한다.
주님 앞에서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라는 고백이 반복될수록, 그 말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지를 우리는 보게 된다. 주님의 이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성취를 증명하려 한다. 예언했고, 능력을 행했고, 귀신을 쫓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모든 말에는 한 단어가 빠져 있다. 순종이다. 주님은 능력의 크기를 묻지 않으신다. 방향을 묻는다. 그 능력이 누구를 향해 있었는지를 묻는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지 말아야 한다. 교회 안에서 오래 있었고, 말씀을 많이 들었고, 사역에 참여했어도, 여전히 모래 위에 집을 세울 수 있다. 반석은 정보가 아니라 관계다. 주님은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정보의 부재가 아니다. 관계의 부재다. 주님을 안다고 말했지만, 주님께 알려지지 않은 삶. 말씀을 들었지만, 말씀에 의해 다뤄지지 않은 존재. 이것이 가장 두려운 상태다.
반석 위에 집을 세운다는 것은 말씀을 삶의 최종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감정이 아니라, 여론이 아니라, 편리함이 아니라, 말씀이다. 말씀이 나의 선택을 불편하게 만들 때도, 손해를 보게 할 때도, 오해를 감수하게 할 때도, 그 말씀에 머무는 것이다. 이것이 반석을 파는 일이다. 깊이 내려갈수록 힘들다. 그러나 그 깊이가 집을 살린다.
주님은 이 비유를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시작에 두신다. 산상수훈의 마지막에서 이 말씀을 하셨다. 이것은 요약이자 초청이다. 이제 들었으니, 이제 선택하라는 것이다. 말씀을 감상하는 신앙에서 벗어나, 말씀 위에 서는 삶으로 들어오라는 초청이다. 산 위에서 들은 말씀은 골짜기에서 살아내야 한다. 군중 속에서 들은 말씀은 혼자의 방에서 결정되어야 한다.
우리의 삶에는 반드시 폭풍이 온다. 건강의 폭풍, 관계의 폭풍, 믿음의 폭풍이 온다. 그때 우리는 알게 된다. 무엇이 나를 붙들고 있었는지를. 무엇이 나를 버티게 했는지를. 그 순간, 말은 사라지고, 기초만 남는다. 그래서 지금 이 평온한 시간에, 이 말씀이 들릴 때, 우리는 다시 기초를 선택해야 한다.
반석 위에 집을 세운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다만 들은 것을 미루지 않은 사람이다. 그는 다만 말씀을 오늘의 선택으로 바꾼 사람이다. 그는 다만 작은 순종을 가볍게 여기지 않은 사람이다. 그 집은 화려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남는다. 그리고 남은 집은 조용히 증언한다. 무엇이 진짜 믿음이었는지를.
이 말씀은 우리를 두렵게 하지만, 동시에 살게 한다. 왜냐하면 반석은 여전히 열려 있고, 주님의 뜻은 여전히 선하며, 순종의 길은 여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는 집을 짓는다. 어제보다 조금 더 깊이, 어제보다 조금 더 단단하게. 반석 위에 남는 이름을 향하여.
사람은 위기를 만나기 전까지 자신이 무엇 위에 서 있는지 모른다. 평온한 날에는 모든 길이 반석처럼 느껴진다. 말씀이 없어도 살 수 있을 것 같고, 기도하지 않아도 하루가 흘러간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바람이 방향을 바꾸고, 강물이 집의 벽을 두드리기 시작하면, 그때 우리는 비로소 안다. 내가 의지해 온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그래서 주님은 이 말씀을 폭풍 한가운데서가 아니라, 폭풍이 오기 전에 주신다. 미리 듣게 하심은 미리 살게 하려는 사랑이다.
반석 위에 집을 세운다는 것은 거창한 결단이 아니다. 그것은 일상의 자리에서 말씀을 우선순위로 두는 선택이다. 화가 날 때, 본능이 아니라 말씀이 먼저 떠오르는가. 손해를 볼 것 같을 때, 계산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묻는가. 억울함이 쌓일 때, 복수를 합리화하지 않고 침묵과 인내를 선택할 수 있는가. 이런 선택들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오히려 손해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선택들이 쌓여 기초가 된다. 그리고 그 기초는 폭풍 앞에서 힘을 발휘한다.
어느 마을에 두 형제가 있었다. 둘은 같은 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같은 교회를 다녔으며, 같은 말씀을 들었다. 형은 말이 많았고, 신앙에 대해 늘 자신감이 넘쳤다. 기도할 때도 큰 소리였고, 신앙에 대해 말할 때도 단정적이었다. 동생은 조용했다. 말이 적었고, 신앙을 드러내는 데도 익숙하지 않았다. 어느 해, 마을에 큰 홍수가 났다. 강물이 넘치고 집들이 하나둘 무너지기 시작했다. 형의 집은 보기에도 크고 멋졌지만, 물이 차오르자 순식간에 기울어졌다. 기초가 얕았기 때문이다. 반면 동생의 집은 크지 않았고 눈에 띄지도 않았지만 끝까지 남아 있었다. 사람들이 묻자 동생은 이렇게 말했다. “집을 지을 때, 아무도 보지 않는 기초를 파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그때는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그 시간이 오늘을 살렸습니다.” 이 이야기는 특별한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에 시간을 쏟았는가의 문제였다. 신앙도 같다. 보이는 것을 쌓는 데 시간을 쓰는가, 보이지 않는 것을 다지는 데 시간을 쓰는가.
주님은 그날에 많은 사람이 찾아와 말할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주님은 그 말들에 대답하지 않으신다. 대신 관계를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 이 선언은 차갑지만 공정하다. 주님은 우리의 활동 목록을 보지 않으신다. 우리의 관계의 깊이를 보신다. 말씀을 듣고도 그대로 돌아갔는지, 아니면 말씀 때문에 삶이 조금이라도 달라졌는지를 보신다. 순종은 완벽함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실함을 요구한다. 넘어졌을 때 다시 돌아오는가, 변명으로 머무는가. 그 차이가 기초를 결정한다.
이 말씀의 끝에서 사람들은 놀랐다. 놀람은 감동이 아니라 충격이었다. 지금까지 믿어왔던 기준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종교는 말을 쌓아 올리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삶을 파 내려가게 한다. 종교는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존재 전체를 요구한다. 그래서 이 말씀은 듣기 어렵다. 그러나 바로 그 어려움 때문에 이 말씀은 살린다.
반석은 변하지 않는다. 세상이 바뀌어도, 기준이 흔들려도, 말씀은 그 자리에 있다. 우리는 그 위에 집을 세울 수도 있고, 지나칠 수도 있다. 선택은 매일 새롭게 주어진다. 오늘의 작은 순종이 내일의 큰 평안을 만든다. 오늘의 작은 타협이 내일의 큰 붕괴를 부른다. 그래서 믿음은 미래를 위한 보험이 아니라, 오늘을 위한 결단이다.
이제 이 말씀은 질문으로 남는다. 나는 무엇을 듣고 있는가, 그리고 무엇을 행하고 있는가. 내 집은 어디 위에 세워지고 있는가. 비가 오기 전에는 알 수 없지만, 비가 온 뒤에는 숨길 수 없다. 주님은 우리를 겁주기 위해 이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니다.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 주셨다. 다시 반석으로 돌아오라고, 다시 깊이를 선택하라고, 다시 말씀 앞에 삶을 내려놓으라고 부르신다.
말씀을 듣는 자는 많다. 그러나 말씀 위에 사는 자는 적다. 그 적은 자들이 세상을 지탱한다. 눈에 띄지 않지만, 무너지지 않는 집처럼. 오늘도 우리는 집을 짓는다. 이 하루의 선택으로, 이 한 번의 순종으로. 그리고 그 집이 반석 위에 세워질 때,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그 집은 남는다. 그 남아 있음이 곧 증언이 된다. 말보다 강한 증언, 설명보다 깊은 고백으로.
반석 위에 남는 이름,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마지막 모습이다.
1. 설교 요약
마태복음 7:21–29는 신앙의 진위를 묻는 예수님의 마지막 질문이다. “주여, 주여”라는 고백과 종교적 열심이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가 아님을 선언하며, 오직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삶만이 반석 위에 세워진 삶임을 드러낸다. 예수님은 두 집의 비유를 통해 동일한 말씀을 듣고도 서로 다른 결말에 이르는 이유를 기초에서 찾으신다. 반석은 듣고 행한 말씀이며, 모래는 듣고도 순종하지 않은 자기중심적 신앙이다. 폭풍은 모두에게 오지만, 남는 삶은 기초가 다른 삶이다. 이 말씀은 마지막 심판의 경고이자 오늘의 삶을 다시 세우라는 은혜의 초청이다.
2. 묵상 포인트
- 나는 신앙을 말로 증명하려 하는가, 삶으로 드러내고 있는가
- 내 삶의 선택 기준은 감정·상황·사람의 평가인가, 아니면 말씀인가
- 아직 폭풍이 오지 않았기에 기초를 점검하지 않고 있지는 않은가
- 주님 앞에서 “내가 했다”는 말보다 “주님의 뜻을 따랐다”는 삶이 있는가
- 오늘 내가 선택한 작은 순종 하나는 반석을 더 깊게 파는 일인가
3. 강해 (본문 해설)
이 본문은 산상수훈의 결론부로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지식으로 남길 것인가, 삶으로 옮길 것인가를 결정하도록 촉구한다.
21절은 신앙 고백의 한계를 밝히고, 22–23절은 종교적 성취의 위험성을 드러낸다.
24–27절의 두 집 비유는 행함이 신앙의 조건이 아니라 신앙의 증거임을 분명히 한다.
28–29절에서 무리의 놀람은 예수님의 말씀이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권위 있는 삶의 기준이었음을 증명한다.
4. 주석 (절별 핵심)
- 21절: “주여, 주여”는 친밀한 신앙 언어이나, 순종 없는 고백은 공허함
- 22절: 사역과 능력은 하나님의 뜻과 분리될 수 있음
- 23절: “알지 못한다”는 심판 선언이 아니라 관계 부재의 고백
- 24절: 듣고 행함이 신앙의 완성
- 26절: 듣고도 행하지 않음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자기기만
- 27절: “무너짐이 심함”은 외형이 컸던 만큼 붕괴도 컸음을 의미
5. 원어 주석 (핵심 단어)
- ποιεῖν (포이에인, 행하다)
단회적 행동이 아니라 지속적 삶의 태도 - ἀκούειν (아쿠에인, 듣다)
단순 청취가 아니라 책임을 동반한 들음 - πέτρα (페트라, 반석)
이동 불가능한 고정 기반, 하나님의 말씀과 뜻 - ἄμμος (암모스, 모래)
불안정하고 순간적인 신뢰 대상 - γινώσκω (기노스코, 알다)
정보가 아닌 인격적 관계의 앎
6. 금언 (설교 핵심 문장)
- “말씀을 아는 신앙은 모래 위에 머물고, 말씀을 사는 믿음은 반석 위에 선다.”
- “폭풍은 집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기초가 없는 삶이 스스로 무너진다.”
- “순종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삶의 증거다.”
- “보이지 않는 기초가 보이는 인생의 끝을 결정한다.”
7. 신학적 정리
- 성경신학적: 산상수훈 전체는 율법의 완성이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는 하나님 나라 윤리
- 구원론적: 행함은 공로가 아니라 참된 믿음의 열매
- 기독론적: 예수님 자신이 반석이며, 그 말씀에 붙는 것이 구원
- 종말론적: 마지막 심판은 행위 목록이 아니라 관계의 진실성을 드러냄
8. 주제별 정리
- 신앙과 행함
- 고백과 순종
- 종교성과 제자도
- 폭풍과 견고함
- 삶의 기초와 종말
9. 목회적 정리
- 오래된 신앙일수록 기초 점검이 필요
- 봉사와 직분은 믿음의 대체물이 아님
- 성도들에게 “얼마나 했는가”보다 “어디에 서 있는가”를 묻게 함
- 고난 속 성도에게는 폭풍이 아닌 반석을 가리켜야 함
10. 성도들의 결단과 적용
- 오늘 한 가지 말씀 앞에서 구체적 순종을 선택한다
- 신앙의 외형보다 삶의 깊이를 돌아본다
- 말로 신앙을 설명하기보다 삶으로 증언하기로 결단한다
- 폭풍을 두려워하기보다 기초를 다시 놓는다
- 매일의 작은 선택으로 반석을 파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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