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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른 이해편◑/Comprehensive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 받은 삶(에베소서2:10).

by 【고동엽】 2026. 2. 11.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 받은 삶(에베소서2:10).

에베소서 2장 10절은 구원의 노래가 마지막 화음을 길게 끌며, 은혜의 빛이 우리의 일상 속으로 내려앉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흔히 8–9절에서 숨을 고릅니다. “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그 구절들은 복음의 철문을 활짝 여는 열쇠이며, 사람의 공로를 영원히 바깥에 세워 두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문을 열어 놓고서 우리를 텅 빈 광장에 세워 두지 않으십니다. 10절은, 은혜로 구원받은 자가 걸어갈 길이 실제로 존재함을, 그리고 그 길이 우연이 아니라 창조와 구속의 설계 속에 놓였음을, 조용하지만 결정적으로 증언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이 한 문장 속에는 창세기의 숨결이 담겨 있고, 십자가의 피가 스며 있으며, 새 하늘과 새 땅의 향기가 미리 새어 나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쳐 쓰신’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만드신” 것입니다. 죄로 깨지고 일그러진 존재를, 단순히 흠집만 덮는 수준으로 끝내지 않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의 손길로 빚어 내십니다. 여기서 믿음은 공로가 아니라 빈손입니다. 믿음은 자랑할 수 없는 수용이며,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숨을 들이마시는 통로입니다. 그리고 그 숨을 들이마신 자는, 살아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살아 있는 자는 반드시 움직입니다. 움직임이 없으면 생명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10절은 행위를 구원의 뿌리로 삼지 않으면서도, 선한 일을 구원의 열매로 굳게 세웁니다. 복음은 인간을 게으름으로 풀어 주지 않습니다. 복음은 인간을 사랑으로 달리게 합니다.

첫째,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 받은 삶은 “정체성의 기적”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하려고 스스로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결심을 모아 선함의 사람으로 진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주어는 하나님이십니다. 동사는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과 새 삶은 하나님의 조형(造形)입니다. 성도는 자기 의지를 재료 삼아 하나님께 바치는 작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빚어 세상 가운데 두시는 작품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은 자기 안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이 정체성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울타리 안에서 더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막연히 새 사람으로 만들어 놓으시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으셨습니다. 이 말은 연합의 언어입니다. 칼빈이 즐겨 말한 그 연합, 개혁신학이 심장처럼 붙들어 온 연합—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이 여기에서 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공유합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되고,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의 옛 사람을 심판하며,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의 새 생명을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선한 일은 “나의 선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이 흘러나오는 열매입니다. 우리는 열매를 통해 뿌리를 증명할 수는 있지만, 열매로 뿌리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은혜는 뿌리이고, 선행은 열매입니다. 믿음은 뿌리에 붙어 있는 가지이고, 선행은 가지에 달리는 향기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섬세한 질서를 배웁니다. 행위는 구원을 사지 못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행위를 낳습니다. 행위가 복음의 문을 여는 열쇠는 아니지만, 복음의 문을 통과한 사람의 발걸음은 행위로 드러납니다. 그러니 성도의 선한 일은 불안한 자기증명의 몸부림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사랑에 대한 감사의 호흡이며, 성령께서 빚으시는 순종의 자연스러운 리듬입니다.

둘째,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 받은 삶은 “준비된 길을 걷는 순례”입니다. 본문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가 선명합니다. 하나님은 목적 없이 사람을 구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내일을 흰 종이로 남겨 두고 “이제 네가 알아서 의미를 써라”라고 맡기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길을 예비하십니다. ‘선한 일’ 자체를 예비하셨고, 우리가 ‘그 가운데서 행하도록’ 예비하셨습니다. 이 말은 성도의 삶이 우연의 연속이 아니라, 은혜의 설계 속에 놓여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섭리는 성도를 로봇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셨다는 말은 인간의 인격을 지우는 폭력이 아니라, 인간을 진정한 인간으로 회복시키는 사랑입니다. 죄는 우리를 본래 인간이 되지 못하게 했습니다. 죄는 사랑할 능력을 빼앗고, 선을 기뻐할 감각을 마비시키고, 하나님을 향한 방향감각을 잃게 합니다. 하나님은 그 망가진 나침반을 고치시고, 심장을 새로 뛰게 하시고, ‘걸을 수 없는 자’에게 걷는 다리를 주십니다. 그러니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은 강요가 아니라 생명입니다. 살아난 자는 걷습니다. 새 창조는 움직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게으름의 뿌리를 뽑아내고, 사랑의 근육을 길러 내십니다.

그리고 이 길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길”입니다. 구속사적으로 보면, 선한 일의 절정은 한 분의 완전한 순종—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순종—에서 이미 성취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께 온전히 기뻐하시는 선을 이루셨고, 율법의 의를 다 이루셨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한 일은 구원을 완성하려는 추가 공사(補工)가 아닙니다. 이미 완성된 구원의 빛 아래에서, 그 빛에 합당하게 걷는 삶입니다. 마치 해가 이미 떠올라 세상을 밝히는데, 우리는 그 빛을 만들기 위해 촛불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 빛을 따라 눈을 뜨고 길을 분별하며 살아갑니다. 성도의 선행은 해를 만드는 촛불이 아니라, 해를 받은 창문입니다. 창문이 빛을 만들지는 못하지만, 빛이 비칠 때 창문은 빛의 통로가 됩니다.

셋째,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 받은 삶은 “사랑의 형태로 드러나는 구원”입니다. ‘선한 일’은 단지 윤리적 단정함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향기이며, 십자가 사랑의 모양이며, 이웃을 살리는 자비의 실재입니다. 복음은 추상적 관념으로만 남지 않습니다. 복음은 피와 눈물과 시간과 손길로 번역됩니다. 은혜는 마음속에서만 반짝이는 감정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실제로 움직이는 능력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선한 일을 말할 때, 우리는 쉽게 비교의 덫에 걸립니다. 누가 더 많이 했는가, 누가 더 크게 했는가, 누가 더 드러나게 했는가. 하지만 하나님이 준비하신 선한 일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모양이 아닙니다. 어떤 이에게는 말 한 마디의 진실이 선한 일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오래 참는 인내가 선한 일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용서가 선한 일이고, 어떤 이에게는 정직한 노동이 선한 일이며, 어떤 이에게는 숨은 자리에서 기도하는 신실함이 선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대’를 예비하실 때도 있지만, 더 자주 ‘골방’을 예비하십니다. 하나님은 큰 이름을 만드는 일을 예비하시기도 하지만, 흔히는 작은 사랑을 쌓아 올리는 일을 예비하십니다. 천국의 위대함은 세상의 스포트라이트와 다른 방식으로 기록됩니다. 하늘의 역사책은 사람의 박수보다 하나님의 눈물을 더 귀히 여깁니다.

예화를 하나 들겠습니다. 어느 작은 교회에, 늘 뒤편에서 조용히 앉아 예배드리는 노년의 성도가 있었습니다. 누구도 그의 이름을 크게 알지 못했고, 교회 행사에서 앞에 서는 법도 거의 없었습니다. 어느 날 새로 전입한 청년이 교회 문턱에서 발을 돌리려 했습니다. 낯설고, 어색하고, 마음이 얼어붙어 있던 그 청년에게, 그 노년 성도는 아무 말도 길게 하지 않고 단지 “오늘 오셔서 참 반갑습니다”라는 한 마디와 함께, 준비해 온 작은 빵 하나를 건넸습니다. 그 청년은 나중에 고백했습니다. “그날 저는 하나님이 나를 잊지 않으셨다는 느낌을 처음 받았습니다.” 그 성도는 설교를 잘한 것도 아니고, 큰 헌금을 한 것도 아니며, 조직을 이끈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비하신 선한 일이 그날 그 빵 한 조각과 따뜻한 인사 속에 있었습니다. 우리의 눈에는 작아 보이지만, 하나님은 그 작은 사랑을 통해 한 영혼의 방향을 바꾸십니다. 복음은 그렇게 ‘작은 선’으로 세상을 흔듭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선한 일을 통해 하나님께 인정받으려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선한 일은 두려움이 아니라 자유입니다. 정죄가 아니라 기쁨입니다. 부담이 아니라 특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는 내 사랑을 받기 위해 일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너는 내 사랑을 받았으니 사랑으로 행하라”고 하십니다. 복음은 짐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짐을 지는 방식 자체를 바꿉니다. 율법주의는 짐을 짊어지고 하나님께 올라가려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오셨음을 선포합니다. 내려오신 하나님이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고, 이제 그분의 사랑을 등에 업고 걷게 하십니다.

이 지점에서 개혁주의적 복음주의는 선명한 균형을 지킵니다. 우리는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지 않습니다(칭의). 그러나 의롭다 함을 얻은 자는 반드시 거룩함으로 빚어져 갑니다(성화). 칭의는 단번의 선언이고, 성화는 평생의 빚어짐입니다. 칭의는 하늘 법정에서의 판결이고, 성화는 가정과 직장과 교회와 거리에서의 걸음입니다. 그 걸음은 때로 비틀거리지만, 방향은 바뀌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가능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날은 우리의 선한 일이 너무 작아 보일 것입니다. 어떤 날은 넘어져서 눈물로 회개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드신 바”라는 정체성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신” 길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목적은 포기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두 가지 절벽을 피해야 합니다. 하나는 율법주의의 절벽입니다. 선한 일을 구원의 조건으로 바꾸어, 결국 은혜를 빚으로 만들고 복음을 거래로 만들려는 유혹입니다. 다른 하나는 방종의 절벽입니다. 은혜를 핑계 삼아 순종을 가볍게 여기고, 선한 일을 ‘선택사항’으로 밀어내는 무감각입니다. 복음은 이 둘을 동시에 무너뜨립니다. 복음은 “너는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라고 말하며 율법주의를 무너뜨리고, 동시에 “너는 구원받았으니 새 길을 걷는다”라고 말하며 방종을 무너뜨립니다. 은혜는 값싸지 않습니다. 값이 없어서 값싼 것이 아니라, 값이 너무 커서 우리가 지불할 수 없기에 값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값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그러니 그 피로 산 삶이 어찌 무의미할 수 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당신을 구원하신 것은, 단지 당신이 천국에 들어가도록 티켓을 발급하기 위함만이 아닙니다. 물론 그 소망은 놀랍고 확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을 지금 여기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새로 지으셨습니다. 당신의 하루가 우연이 아니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당신의 손과 발이 헛되이 움직이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당신의 말이 바람에 흩어지는 소음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씨앗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당신의 눈물이 낭비되지 않고, 누군가의 위로로 바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당신의 상처가 다른 이의 상처를 이해하는 통로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당신의 기도가 공동체의 숨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혹시 오늘 “나는 선한 일을 할 자격이 없다”고 느끼는 분이 있습니까? 죄책감으로, 실패로, 무너짐으로, 스스로를 ‘부적합’이라고 판정한 분이 있습니까? 에베소서 2장 10절은 당신의 자격을 묻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작품은 스스로 자격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작품은 작가의 손을 증언합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빚으신 사람입니다. 그러니 오늘 다시 시작하십시오. 아주 작은 선으로 시작하십시오. 작은 순종으로 시작하십시오. 작은 회개로 시작하십시오. 작은 기도로 시작하십시오. 하나님은 큰 돌을 요구하시기 전에 작은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 작은 믿음은 결국 큰 사랑으로 자라납니다. 성령께서 자라게 하십니다.

또 혹시 오늘 “나는 선한 일을 해야 한다는 말에 숨이 막힌다”고 느끼는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기억하십시오. 성경은 우리에게 “선한 일을 해서 구원을 얻어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받은 너는 선한 일을 하도록 지음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숨이 막힐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숨을 쉬십시오. 은혜의 공기를 들이마시십시오. 그 공기를 들이마시면, 선한 일은 억지로 밀어 올리는 돌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샘이 됩니다. 샘은 스스로의 힘으로 솟지 않습니다. 땅속 깊은 곳에서 공급이 있기 때문에 솟습니다. 그 공급이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십시오. 말씀에 거하십시오. 기도에 거하십시오. 교회의 교제에 거하십시오. 그러면 선한 일은 ‘해야 하는 것’이기 전에 ‘맺히는 것’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씀은 우리를 세상으로 내보냅니다. 교회는 선한 일을 대체하는 기관이 아니라, 선한 일을 낳는 공동체입니다. 예배는 선한 일을 잠시 멈추는 시간이 아니라, 선한 일을 위해 다시 불을 받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예배당에서 은혜를 받고, 거리에서 은혜를 살아냅니다. 우리는 강단에서 복음을 듣고, 가정에서 직장에서 복음을 번역합니다. 우리는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받고, 삶에서 우리의 몸을 드립니다. 그 몸은 희생이 아니라 산 제사이며, 그 제사는 공로가 아니라 감사이며, 그 감사는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신 이유는 단순히 세상이 조금 더 나아지기 위함만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깊은 이유는, 그 선한 일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이 드러나기 위함입니다. 성도의 선행은 하나님을 보이게 하는 창문입니다. 세상은 그 창문을 통해 하나님을 엿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한 일을 하되,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하나님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하되, 자신을 높이지 않고 그리스도를 높입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하되, 사람의 칭찬을 굶주리지 않고 하나님의 기쁨을 사모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당신을 작품으로 세워 두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당신이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십니다. 그러니 걸으십시오. 넘어지면 회개로 일어나십시오. 지치면 은혜로 숨 쉬십시오. 흔들리면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중심을 잡으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작은 선이 하늘에서 큰 의미로 기록될 것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헛되이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우연히 구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셨습니다.


요약

  • 에베소서 2:10은 은혜로 구원받은 자의 삶이 선한 일을 향해 목적 있게 빚어졌음을 선포한다.
  • 선한 일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열매이며, 근원은 “그가 만드신 바”라는 하나님의 주권적 창조/새창조에 있다.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성도의 선행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열매임을 보여 준다.
  • 하나님은 선한 일을 “전에 예비”하셨고, 성도는 그 길을 “행하도록” 부르심 받았다(섭리와 책임의 조화).
  • 율법주의(행위로 칭의)와 방종(은혜를 핑계 삼아 순종 경시)을 동시에 배격하며, 개혁주의적 구원 질서(칭의-성화)를 지킨다.

묵상 포인트

  • 나는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정체성을 어디에서 흔들리고 있는가?
  • 오늘 하나님이 예비하신 “작은 선” 하나는 무엇일까(말 한 마디, 인내, 용서, 섬김, 기도)?
  • 나의 선행은 자기증명인가, 감사의 열매인가?
  • 넘어짐 이후에도 “행하게 하려 하심”을 믿고 다시 걸을 수 있는가?
  • 교회 예배와 일상의 선행이 하나로 이어지는가?

강해

  •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구원받은 성도의 존재는 하나님의 주권적 “제작/창조”의 결과이며, 새 창조의 선언이다.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행은 도덕적 자기개선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흘러나오는 생명 현상이다.
  • “선한 일을 위하여”: 목적론적 구원—하나님은 구원을 무목적 상태로 두지 않으시고, 사랑의 실재로 번역되게 하신다.
  •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섭리—선한 일의 자리, 만남, 기회, 책임의 장이 준비되어 있다.
  •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화의 역동—성령의 내적 역사로 실제 ‘걷는 삶’이 나타난다.

주석

  • 본문은 2:8–9(은혜로 말미암은 구원, 행위 배제)과 모순되지 않는다.
    • 8–9절: 행위는 칭의의 근거가 될 수 없음.
    • 10절: 그러나 구원은 선행을 낳는 새 창조를 포함함.
  • “선한 일”은 단순 윤리규범 준수만이 아니라, 복음의 사랑이 삶에서 구체화되는 모든 형태(자비, 정의, 정직, 섬김, 인내, 용서 등)를 포함한다.
  • “예비”는 우연이 아닌 섭리적 배치(사람, 사건, 필요, 기회)를 암시하며, 성도는 그 섭리 속에서 책임 있게 ‘행한다’.

(헬라어-신약) 원어 주석

  • ποίημα (poiēma): “작품, 만들어진 것.” 성도는 자기공로의 성취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품으로 규정된다.
  • κτισθέντες (ktisthentes)(κτίζω에서): “창조되다.” 구원은 단지 수선이 아니라 새 창조의 성격을 가진다.
  • 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 (en Christō Iēsou):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연합의 영역—선행의 근원은 ‘나’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다.
  • ἐπὶ ἔργοις ἀγαθοῖς (epi ergois agathois): “선한 일들을 위하여/향하여.” 방향성과 목적을 나타내어, 구원의 결과가 삶으로 확장됨을 강조한다.
  • προητοίμασεν (proētoimasen)(προετοιμάζω): “미리 준비하다.” 하나님의 선행 준비는 섭리와 계획을 담는다.
  • περιπατήσωμεν (peripatēsōmen)(περιπατέω): “행하다/걷다.” 신앙은 관념이 아니라 걸음이며 지속적 삶의 양식이다.

금언

  • “은혜는 공로를 제거하고, 사랑을 움직인다.”
  • “선행은 구원의 뿌리가 아니라, 구원의 향기다.”
  • “하나님의 작품은 자기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을 증언한다.”
  •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은 선을 ‘해야’ 하는 부담이 아니라 선이 ‘맺히는’ 기쁨이다.”
  • “하나님이 예비하신 길은 크기보다 순종으로 빛난다.”

신학적 정리

  • 칭의: 오직 은혜, 오직 믿음으로(행위 배제).
  • 성화: 칭의의 필연적 열매로서 선행이 나타남(그러나 공로가 아님).
  • 연합: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선행의 실제적 원천은 성령께서 적용하시는 그리스도의 생명.
  • 섭리: “전에 예비”하심—하나님 주권 아래 성도의 책임 있는 순종이 자리한다.
  • 구속사: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이 선의 절정이며, 성도의 선행은 그 완성에 덧붙이는 공사가 아니라 그 완성의 열매다.

주제별 정리

  • 정체성: 하나님의 작품(존재의 근거).
  • 목적: 선한 일(삶의 방향).
  • 동력: 그리스도 안에서(연합, 성령).
  • 방식: 걷는 삶(일상의 지속성).
  • 균형: 율법주의와 방종 배격(복음의 중도).

목회적 정리

  • 낙심한 성도에게: “자격”이 아니라 “창조”를 보게 하라—하나님이 만드셨다.
  • 열심 속 불안한 성도에게: 선행의 동기를 자기증명에서 감사로 옮기게 하라.
  • 방종에 기울어진 성도에게: 은혜는 게으름의 면허가 아니라 새 길의 능력임을 보게 하라.
  • 공동체에게: 예배는 선행을 멈추는 곳이 아니라 선행을 위해 다시 불을 받는 자리임을 새기게 하라.

성도들의 결단 및 적용

  • 오늘 하루, 하나님이 예비하신 선한 일 하나를 “작게라도” 실행하겠습니다(인사, 섬김, 용서, 정직, 기도).
  • 선한 일을 하되,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다.
  • 넘어질 때마다 은혜로 돌아와 회개로 다시 걷겠습니다.
  • 나의 선행을 비교하지 않고,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길을 신실하게 걷겠습니다.
  •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 위해 말씀과 기도와 교회의 교제에 더 깊이 붙겠습니다.

𝓕𝓾𝓵𝓵 𝓢𝓸𝓾𝓻𝓬𝓮 : 𝓐𝓻𝓽𝓲𝓯𝓲𝓬𝓲𝓪𝓵 𝓘𝓷𝓽𝓮𝓵𝓵𝓲𝓰𝓮𝓷𝓬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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