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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해야 길이 열립니다 (누가복음 10장 38-42줄)

by 【고동엽】 2022. 12. 16.

순종해야 길이 열립니다 (누가복음 10장 38-42줄)

< 마리아와 마르다 >

 어느 날,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가셨을 때 마르다가 자기 집으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38절). 베다니에는 예수님이 특별히 아끼고 사랑했던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의 3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에 오면 주로 베다니 3남매의 집에서 기거했고 낮에 예루살렘에서 사역하신 후 밤에 주무실 때는 그 집으로 와서 주무셨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즉 베다니 3남매의 집은 예루살렘 사역의 전초기지이자 쉼터였습니다.

 마르다의 영접을 받고 집으로 들어오신 예수님은 곧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때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에 푹 빠져서 사모하는 마음으로 듣고 있었습니다(39절). 반면에 그때 마르다는 예수님께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려고 분주하게 일하고 있었습니다. 한참 분주하게 일하다가 마르다가 예수님이 계신 곳을 보니까 강아지가 주인을 사모하며 바라보듯이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서 고개를 듣고 사모하는 얼굴로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동생의 그런 모습이 한편으로는 이해되었지만 순간적으로 얄미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처럼 얄미운 마음이 있는 상태에서 너무 분주하니까 결국 마르다가 참지 못하고 예수님께 나아가 말했습니다. “예수님! 동생이 저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않나요? 동생한테 저를 도와주라고 명령해주세요.” 그녀의 말에는 ‘마리아에 대한 책망’도 있고 ‘예수님에 대한 불평도 있고 ’자기 봉사에 대한 과시‘도 담겨 있었습니다.

 물론 봉사도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동역자 중에는 물질로 예수님의 일행을 섬긴 은밀한 동역후원자들도 있었고(눅 8:1-3) 안식처 제공 및 식탁 봉사로 섬긴 동역자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동역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도 중시했습니다. 예수님의 공동체는 천국공동체이고 말씀공동체이고 밥상공동체였습니다. 사람들은 밥상공동체라고 하면 밥상에서 같이 먹는 사람만 중시하지만 그 밥상을 누가 차렸습니까? 은밀한 손길들입니다. 그처럼 밥상을 차린 은밀한 봉사의 손길들도 중요한 존재입니다.

 교회에서 봉사할 때는 끝까지 말없이 봉사하는 충성봉사형, 자기 할일을 열심히 찾아서 하는 자발헌신형, 일할 때 즐거움을 주는 기쁨공급형, 봉사자들에게 줄 먹거리를 가져오는 사기진작형. 언제나 앞서서 기쁘게 헌신하는 헌신모델형의 좋은 봉사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봉사를 봉사답게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봉사윤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봉사할 때 불평하거나 비판하거나 생색내는 마음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 선택과 집중이 필요합니다 >

 예수님은 마르다도 마리아 못지않게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마르다가 대접하는 일로 너무 분주했던 나머지 순간적으로 이해심을 잃고 기본적인 봉사윤리를 놓친 것을 아시고 마르다에게 말씀했습니다. 본문 41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예수님이 마르다를 두 번 따뜻하게 호칭한 후 그녀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씀했습니다.

 일은 단순화시키고 집중해서 하는 것이 좋습니다. 즉 선택과 집중이 필요합니다. 본문 42절 말씀을 보십시오.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 구절은 음식을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 해도 괜찮다는 말씀이 아니라 많은 일로 너무 분주하지 말고 몇 가지 중요한 일 혹은 한 가지 중요한 일이라도 집중해서 하는 것이 좋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선순위를 아는 지혜와 우선순위를 따라 사는 결단도 필요합니다.

 인생은 선택입니다. 좋은 선택이 좋은 인생을 만듭니다. 좋은 길과 좋은 일을 선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가진 물질과 시간과 권세와 재능을 좋은 일에 사용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용하면 필요한 것도 풍성하게 채워주시고 필요한 권세와 위치도 예비해주실 것입니다. 반면에 세상 영화에만 관심을 두면 그 인생은 점차 파산하게 될 것입니다.

 1923년 미국 시카고의 에지워터 비치 호텔(Edgewater Beach Hotel)에서 미국을 움직이는 9명이 자신들의 성공을 자축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 9명은 세계 최대의 강철회사 회장 찰스 슈와브, 미국 최대의 전력회사 회장 새뮤얼 인설, 미국 최대의 정유회사 회장 하워드 홉슨, 뉴욕 증권거래소 회장 리처드 휘트니, 국제 결제은행 총재 리언 프레이저, 미국 최대의 곡물거래 왕 아더 커튼, 미국 최대의 독과점 업체 회장 이바 크루거, 하딩 대통령 정부의 내무장관 앨버트 폴, 그리고 월가의 증권 왕 제시 리버모어입니다.

 그로부터 25년 후 한 기자가 그때의 만찬을 기억하고 거기에 모였던 9명이 어떻게 되었는지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의 조사에 의하면 강철회사 회장 슈와브는 파산한 채 죽었고 전력회사 회장인 인설은 돈 한 푼도 없이 죽었습니다. 정유회사 회장 홉슨은 미쳐서 정신병원에서 죽었고 증권거래소 회장인 휘트니는 막 감옥에서 출소했습니다. 결제은행 총재인 프레이저는 자살했고 곡물 왕 커튼은 돈 한 푼 없이 죽었습니다. 독과점 업체 회장 크루거도 자살했고 내무장관이었던 폴은 감옥에서 죽기 직전에 사면 받았습니다.

 그 중에서 월가의 증권 왕 리버모어의 죽음은 가장 비극적이었습니다. 1940년 추수감사절 1주일 후에 그는 뉴욕의 쉐리 네덜란드 호텔(Sherry-Netherland Hotel)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호텔 바에서 술 두 잔을 마시면서 자기 노트북에 뭔가를 휘갈겨 썼습니다. 그리고 곧 화장실로 가서 변기에 앉아 머리에 총을 쏴 자살했습니다. 그때 그는 62세였고 5백만 달러의 재산을 남겼습니다. 그 재산도 당시에는 엄청난 재산이었지만 그 10년 전에 가졌던 1억 달러의 재산과 비교해서는 95%를 잃고 남은 5%의 재산이었습니다.

 그가 그때 호텔에서 마지막으로 휘갈겨 썼던 글은 다음과 같은 글이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니나! 도저히 견딜 수 없소. 상황은 내게 너무나 나쁘게 되었소. 이제 싸우는데 지쳤소. 더 이상 지탱할 수가 없소. 이것이 유일한 출구요. 나는 당신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소. 나는 실패자요. 정말로 미안하오. 그러나 이것이 나로서는 유일한 출구요.”

 현재 최고의 위치에 있어도 끝까지 그 위치에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영원히 보증된 성공은 없습니다. 그런 현실 속에서 돈에 매달려 살면 인생은 도박처럼 됩니다. 경기와 상황에 따라 인생의 부침과 변동이 심하면 정신이 온전히 남아나기 힘듭니다. 모험도 가끔 해야지 매일 모험 속에 살면 반드시 나락에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모험을 끝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선택해서 그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돈을 버는 목표도 바르고 분명해야 합니다. 왜 돈을 벌어야 합니까? 많은 사람을 구원하고 많은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과 도움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물질로 많은 일은 못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중요한 일은 꼭 하십시오. 물질은 언젠가 자기 손을 떠납니다. 어차피 떠나기로 예정된 물질로 ‘물질적인 이익을 위한 투자’에만 사용하지 말고 그 일부라도 ‘거룩한 비전을 위한 투자’에 사용해보십시오. 그러면 손에 쥐어지는 이익은 없어도 이 땅에서는 기쁨과 보람을 얻고 이 땅을 떠나서는 하나님의 칭찬과 보상을 얻을 것입니다.

< 순종해야 길이 열립니다 >

 마르다와 마리아는 자매지만 기질과 성향이 거의 정반대였습니다. 마르다는 동적이고 마리아는 정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둘 다 사랑했습니다. 다만 둘의 당시 행동 중에서는 더 좋은 편을 택하라고 하시면서 마르다처럼 ‘먹을 것을 대접하려고 분주한 삶’보다 마리아처럼 ‘말씀을 사모하며 듣는 삶’이 더 좋은 삶이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봉사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말씀을 듣고 은혜 받는 일을 늘 앞세워야 합니다.

 최고로 복된 성도는 말씀을 사모하며 듣고 더 나아가 실천하며 따르는 성도입니다. 인간관계에서도 주장이 강하면 길을 열어주고 싶지 않고 순종이 강하면 최고의 길을 열어주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리더의 말을 사모해서 듣고 가급적이면 힘써 따라주십시오. 물론 리더의 말에 무조건 순종하면 안 됩니다. 리더가 분명히 잘못된 길로 가면 지적도 하고 막기도 하고 그래도 시정이 안 되면 최후에는 떠남으로 저항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다만 리더가 분명히 잘못된 길이 아닌 여러 길 중에서 한 길로 가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때로는 그 길이 자기 뜻과 성향에 맞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신중하게 선택해 몸담은 곳에서 자기 뜻과 다르다고 바로 뛰쳐나가야 됩니까? 그것은 공동체를 자기 뜻대로 고치겠다는 태도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고치기도 힘들고 부부가 서로를 고치기도 힘든데 단기간에 리더가 고쳐지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그래도 먼저 힘써 시스템에 순종하는 것이 바른 태도이고 공동체의 생활예의에도 맞는 것입니다.

 그렇게 힘써 순종해도 결과가 잘못될 수 있습니다. 그 결과로 인해 리더가 자기가 원했던 모습대로 나중에 변화를 시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했다고 “그때 내가 나서야 했는데...”라고 해야 됩니까? 그러나 그때 나서서 다른 길로 갔어도 그 길이 최적의 길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리더에게 기쁘게 순종해서 실패하면 그것이 자신에게는 대개 실패가 아닙니다. 이미 순종으로 리더를 기쁘게 한 것 자체가 성공이고 그렇게 순종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순종의 체질화도 조금 더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순종의 체질화 후에 따라올 축복을 생각하면 순종이 단기간의 실패를 낳아도 장기적으로는 대개 유익이 됩니다. 순종은 큰 축복의 산실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순종이란 무조건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이의를 제기하면서도 순종할 수 있습니다. 순종이 체질화된 사람이 제기하는 이의는 리더가 어떤 의견보다 더 경청합니다. 순종은 불의한 조치도 무조건 따르기를 강요하는 굴종이 아닙니다. 굴종은 오히려 쉽지만 순종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참된 순종은 복된 삶으로 들어가는 매우 중요한 관문입니다.

 은혜의 넓은 바다에는 아무나 가지 못합니다. 은혜의 넓은 바다로 나아가려면 항복하고 순종하는 훈련을 잘해야 합니다. 사람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대개 썩는 과정을 생략하기 때문입니다. 죽어야 살고 썩어야 싹이 나고 항복해야 이기고 순종해야 길이 열립니다. 순종의 크기가 영성의 크기입니다. 비겁하게 굴종하지 말고 기쁘게 순종하십시오. 계산하면 순종할 수 없지만 믿으면 순종할 수 있습니다. 계산하지 않는 헌신적인 믿음을 보여주면 사람도 감동하지만 하나님도 감동하시면서 결국 막힌 길도 활짝 열리게 됩니다.

< 잘 써야 잘 쓰임 받습니다 >

 처음 본부장 권사님에게 월새기(월간 새벽기도) 사역을 제안할 때 문서선교로서 200페이지가 넘는 책을 한 권에 1000원만 받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권사님이 오랜 사업경험을 바탕으로 잘 계산한 후 “목사님! 아무리 계산해도 월새기 한 권에 3천 원은 받아야 사역이 유지됩니다.”라고 똑똑하게 말씀했다면 특별한 감동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목사님! 책 한 권에 1000원만 받으니까 정말 문서선교가 확실하군요. 저도 동참할게요.”라고 했습니다. 돈을 버니까 동참하겠다고 하지 않고 돈을 벌지 못하니까 오히려 동참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또한 사례비를 얼마만큼 드리겠다고 하니까 동참하겠다고 하지 않고 사례비를 드리기 힘들다고 하니까 오히려 동참하겠다고 했습니다. 당시에 재정적으로 극심한 고난 중에 있으면서도 그런 계산이 없는 믿음을 보여주니까 얼마나 저도 감동이 되었겠습니까? 그런 진실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나님의 축복 시험을 통과하게 됩니다. 계산을 내세워 일하면 부림을 당하는 위치가 되지만 계산을 초월해 헌신하면 누림을 공유하는 동지가 됩니다.

 월새기 사역을 하면서 가끔 재정이 거의 바닥날 때가 있습니다. 월새기 통장을 보면 당장 지출해야 할 인쇄비와 사례비가 모자랍니다. 조만간 나올 곳도 없어 보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권사님! 아무개 선교사님에게 얼마를 보내주세요.”라고 하면 앞뒤를 재지 않고 기쁘게 보냅니다. 그때 정확한 계산에 의거해서 “목사님! 이번 달 사례비도 줘야 하고 인쇄비도 필요하고....”라고 한다면 일반 회사에서는 살림을 잘한다고 하겠지만 제게는 그렇게 계산하지 않고 무조건 기쁘게 보내는 모습이 훨씬 더 감동을 줍니다.

 또한 그 모습은 저를 깊이 존중해주는 모습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면 저도 하나님께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 이 믿음을 보시고 있지요? 이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그때는 달라고 울부짖을 필요도 없이 하나님께서 신기하게 알아서 주시는 체험을 할 때가 많습니다. 인간 리더를 믿어주고 계산보다 믿음을 앞세워서 순종해도 감동이 되는데 하물며 하나님을 믿고 계산보다 믿음을 앞세워서 하나님의 뜻과 조치에 감사하고 순종하며 나간다면 얼마나 하나님께서 감동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너무 계산하지 마십시오. 계산이 심한 것은 자신의 것을 챙기려는 마음이 강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을 다 읽고 계십니다. 받는 일에만 집착하면 더 받지 못합니다. 세상 회사에서도 월급 받는 문제만 생각하고 수익 창출 문제를 등한시하면 결국 도태됩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하는 것은 리더십의 최대 요체입니다. 하나님은 더욱 정확하게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결국 쓸 줄 모르고 낼 줄 모르면 진짜 친구나 후원자를 얻지 못하고 하나님의 마음도 얻지 못합니다. 계산적인 삶은 결코 계산적인 삶이 아닙니다.

 얼라이언스 신대원 교수이신 A 목사님의 둘째 아들인 피터(가명)에게 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어디서든지 남을 위해서는 한 푼도 쓰지 않으려는 절약정신이 투철한 친구였습니다. 그러니까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었던 친구들이 하나둘 떨어져나가면서 26살이 되도록 주변에는 거의 친구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가 외로움을 호소하고 고민할 때 얼마 전에 피터가 그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친구야! 내가 꼭 말해주고 싶었지만 거의 10년 동안 참았던 말을 한 마디만 해주고 싶다. 네게 왜 친구가 없는지 알아? 너무 인색하게 살아서 그래!” 그러자 그 친구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습니다. “친구야! 왜 그런 얘기를 지금에서야 해주었니?” 그로부터 며칠 후 난생 처음으로 그 친구가 피터에게 식사 대접을 했다고 합니다.

 인색하게 살면 참된 친구도 얻지 못하고 참된 성공도 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처세술이 아닙니다. 왜 처세술이 아닙니까? 계산하면서 인색하게 살면 하나님의 마음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절약은 좋은 전략이 아닙니다. 잘 써야 잘 쓰임 받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선택해서 죽으며 죽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헌신하고 따름으로 마리아처럼 주님을 감동시키고 사랑 받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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