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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의 눈물을 닦아주십시오

by 【고동엽】 2022. 12. 6.

우리 주위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워하는 이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양심적으로 순결하고 싶어도 제약이 많고, 한없이 자유하고 싶어도 제약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정말로 산다는 것이 상처받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일에만 너무 신경을 쓴다면 그들의 상처는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저의 목회 초기에 한 가장이 오른 집세를 마련하지 못하고 비관 끝에 연탄불을 피우고 가족 3명과 함께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 가장은 이렇게 절규하면 죽어갔습니다. "아버지 때부터 시작된 가난이 나에게 물려지고, 기적이 없는 한 자식들에게도 물려질 것이다. 빈익빈 부익부는 언제까지 지속되어야 하는가? 폭등하는 부동산 가격에 내 집 마련의 꿈은 고사하고 오르는 집세도 충당할 수 없는 서민의 비애를 자식들에게는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 집 문제 하나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한 가장은 죽어야지..." 삶이 어렵다고 죽음을 선택한 이 가장은 선택은 분명히 잘못된 선택입니다. 사실상 삶은 그렇게 비관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내가 마음만 굳게 먹으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기회와 가능성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비극적인 상황의 일차적인 책임은 그 가장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이차적인 책임은 있습니다. 즉 우리들은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위해 희망의 씨앗을 뿌려줌으로 그들에게 삶은 그렇게 비관적인 것이 아님을 알려줄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이 책임을 외면하면 여호와의 날에 하나님께서는 그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특히 가난의 마수는 어린이들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줍니다. 어른들이야 가난에 어느 정도 저항해 싸울 수 있다지만 어린이들에게 가난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나 큰 고통을 줍니다. 얼마 전 자료 스크랩을 정리하다가 1990년 3월에 있었던 5살 된 혜영과 4살 된 용철 남매의 죽음에 관한 기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아이들은 회사 경비원인 아빠와 파출부인 엄마가 일하러 가면서 방문을 잠근 단칸 지하 셋방에서 놀다가 불이 나서 질식해 숨졌습니다. 그 당시 엄마가 방문을 나설 때 아이들은 항상 고사리 손으로 싹싹 빌며 방문을 잠그지 말아달라고 절규했었습니다. "엄마! 잘못했어요! 이제는 칼 가지고 놀지 않을게요. 불장난하지 않을게요. 문을 잠그고 가지 마세요." 이들 남매는 가난한 집에 태어난 죄 아닌 죄로 마음대로 뛰놀지도 못하고 지하 단칸방에 갇혀 지내다가 심심해서 시작한 불장난으로 인해서 어이없이 죽게 된 것입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난 아이들은 생명마저 가난해야 합니까? 가난의 마수는 이와 같이 죽음의 형태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경제적인 가난은 사회적, 정신적, 심리적 영역까지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심지어는 영적인 문제에까지 어려움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므로 부유한 사람들은 가난한 일부분의 사람들에게서 보여지는 약간 젠틀(gentle)하지 못한 면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서 끝나서는 안될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가 실천해야 할 중요한 삶의 태도는 근검절약 정신을 실천하는 태도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감정이 움직이는 대로 마음껏 쓰는 태도는 가난한 사람들의 상처에 불을 붙이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사치와 낭비는 가난한 자에게 가하는 폭력행위가 될 수 있다는 점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소극적인 근검절약 정신에서 끝나서도 안될 것입니다. 이제는 적극적으로 힘들고 어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팔을 걷고 호주머니를 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어려운 이웃의 눈물을 닦아줄 때 주어지는 기쁨이 넘치는 삶에 사치와 낭비를 과시하며 살 때 주어지는 기분 좋은 삶을 어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웃의 눈물을 닦아주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의인의 눈물 병에 담아주실 것입니다. ⓒ 이한규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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