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앞에서 완전하십시오 (신명기 18장 9-14절) <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는 일 >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이방민족의 가증한 미신 행위를 본받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9절). 또한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 점쟁이, 길흉을 말하는 자, 요술하는 자, 무당, 진언자, 신접자, 박수, 초혼자를 용납하지 말라고 했습니다(10-11절). 당시 요술하는 자는 사람을 즐겁게 하려고 요술을 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미혹하는 도구로 나쁜 종교인들이 악용했습니다. 진언자는 무당처럼 주문을 외우면서 마법을 걸어 사람을 미혹하는 자를 뜻합니다.
신접자는 죽은 사람과 대화하게 해주거나 죽은 사람의 뜻을 전한다면서 영혼을 미혹하는 영매를 뜻합니다. 박수는 남자 무당 혹은 남자 마법사를 뜻하고 초혼자는 죽은 사람의 영을 불러내는 점치는 사람으로서 진언자와 유사한 사람입니다. 종교인이라고 해서 꼭 신비한 모습을 보여주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비한 은혜를 가질수록 더 신비한 색채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모습이 참된 영성입니다.
하나님은 신비함을 드러내는 모습이나 가장하는 모습을 가증하게 여기십니다(12절). 이 구절에서 ‘가증히’란 말의 히브리어 원어인 ‘타아브’는 ‘심히 혐오하는 상태’를 나타내는 단어로서 단순히 싫은 것이나 미운 것보다 훨씬 강하게 싫어하고 미워한다는 뜻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detestable 혹은 abominable로 표현합니다.
detestable은 <네트영어>의 원리를 따라 어원의 의미를 살려 뜻풀이하면 ‘테스트할 대상으로 삼지 않을 정도로 내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성도가 잘못된 길로 가면 고난의 테스트(test)를 통해서라도 그를 바른 길로 이끄시지만 아주 잘못된 길로 가면 아예 테스트도 하지 않고 내칩니다. 그런 의미를 가진 단어가 detest입니다. 사실상 성도에게 일시적으로 주어진 고난의 시험은 여전히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abominable은 <네트영어>의 원리를 따라 어원의 의미를 살려 뜻풀이하면 ‘심한 구토가 나오게 만드는 것’을 뜻합니다. 언어에서 소리는 뜻을 규정하는 핵심 요소입니다. 소리가 강해지면 대개 뜻도 강해집니다. f보다 p가 소리가 강하기에 대개 뜻도 강합니다. 선풍기 팬처럼 부드러운 판은 영어로 fan이라고 하고 프라이팬처럼 딱딱한 판은 영어로 pan이라고 합니다. 그처럼 v보다 b가 소리가 강하기에 뜻도 강하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토하는 것을 vomit이라고 하면 심하게 토하는 것을 bomit라고 조어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영문 글을 쓰면서 심하게 구토하는 것을 표현하고 싶어 영어에 없는 bomit이란 단어를 만들어 썼는데 그 표현을 따라서 쓰는 사람이 많아지면 몇십 년 후에는 bomit이란 단어가 영어사전에 정식으로 등재될 수 있습니다. 언어는 살아있는 생물처럼 그렇게 변하는 것입니다. abominable은 vomitous보다 훨씬 강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적인 신비주의 행위를 심하게 구토가 날 정도로 혐오하십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나 신비를 가장해 미혹하는 행위를 심히 구토하실 정도로 가증히 여기시기에 그런 행위에 물든 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하라고 하셨습니다. 가나안 족속 진멸 계명은 우상숭배와 신비주의를 하나님께서 매우 싫어하심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계명입니다. 가나안 족속의 진멸은 이스라엘을 특별히 사랑해서 있게 하신 사건이 아니라 가나안 족속의 가증한 죄로 인해 이스라엘이란 도구를 통해 진멸된 사건입니다. 그 사실은 이스라엘도 나중에 가증한 우상숭배에 빠지면서 결국 진멸된 역사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십시오 >
성도의 완전함이 무엇입니까? 본문 13-14절을 앞뒤 문맥과 함께 보면 기독교의 완전함이 무엇인지를 깨닫습니다. 기독교의 완전함이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완전함’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의 완전함’을 뜻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완전함’이 내포한 의미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 받아주시는 존재가 되는 완전함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것의 가장 반대되는 것은 우상숭배와 신비주의적인 종교 행위입니다.
믿는다면서 신비주의에 빠지는 것을 왜 하나님이 특별히 가증하게 여기십니까? 그 행위가 사람 앞에서 보여주려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행위는 신비주의적인 종교 행위가 아니라 진실로 온전히 의지하는 삶입니다. 어떤 이단 신자는 자신의 단체에서 나타나는 신비는 진짜 신비라고 주장합니다. 진짜 신비라도 신비를 드러내고 나타내려는 것 자체가 지극히 위험한 마음 상태의 표시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일을 용납조차 하지 않겠다고 강력하게 말씀하십니다.
신비적인 행위로 믿음과 영성을 나타내는 모습은 이단이 영혼을 미혹하기 위한 수단으로 많이 활용합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신비주의를 경계하십시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것은 고차원의 일이 아니라 단순한 일입니다. 단순하고 순수하게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시고 축복의 문도 활짝 열어주시고 고난 중에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해서 온전한 하나남의 사랑과 축복을 얻어 누리를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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