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가정 (룻기 1장 6-10절) < 섬겨주는 믿음을 추구하십시오 >
한 신실한 어머니가 아들이 입대할 때 말했습니다. “아들아, 군대에 가면 힘들 때가 많다. 그때마다 기도해라.” 그 아들이 전역 후 선원이 되어 먼 바다로 출항할 때 말했습니다. “아들아, 군대보다 바다에서 더 힘들 때가 많을 것이다. 매일 기도해라.” 그 아들이 나중에 결혼할 때 말했습니다. “아들아, 결혼하면 군대나 바다에서보다 더 힘들 때가 많을 것이다. 늘 기도를 앞세워 살아라.”
가정은 세심하게 돌봐져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한계가 있기에 하나님이 지켜주셔야 합니다. 성도에게 가정과 교회 중에 어느 곳이 소중한 곳일까요? 어려운 질문 같지만 어렵지 않습니다. 가정이 더 소중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도의 가정은 일차로 섬겨야 할 ‘작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소홀히 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교회는 ‘큰 가정’입니다. 가정을 행복한 가정으로 만들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섬김입니다.
저는 두 딸의 행복한 결혼을 위해 미리 틈틈이 교육합니다. “얘야, 엄마의 식사 준비를 도우면서 틈틈이 요리도 배워라. 남편을 위해 맛있는 요리를 할 줄도 알아야지. 남편에게 가급적이면 설거지 시키지 말고 네가 하도록 해라.” 그러면 어떤 사람은 오해합니다. “목사님은 가부장적인 남성 중심적인 사고를 가진 것 같다. 남녀평등 시대에 딸 입장도 생각해주시지.”
언뜻 보면 남의 딸을 매우 생각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작 저의 두 딸은 그런 말에 대해 가부장적인 아빠가 구시대적인 사고를 가졌다고 전혀 반발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딸들이 비판의식이 없고 순종적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아빠의 그 말이 “남편을 잘 섬겨주라는 말이구나.”라고 여기고 자신의 행복을 위해 믿음교육, 인성교육, 가정교육을 하는 것인 줄로 알고 기쁘게 웃으면서 받아들입니다. 남을 생각해주는 것도 잘 생각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통전적인 사고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제가 딸에게 남편을 섬기도록 교육하는 것은 가부장적인 사고가 아니라 가족을 섬겨주라는 성경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한 교육입니다. 만약 제게 이들이 있었다면 당연히 이렇게 교육했을 것입니다. “얘야, 너는 네 아내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존중해주어야 한다. 아내가 힘들어하면 네가 요리나 설거지도 하면서 힘써 도와주어라. 무엇이든지 아내가 힘들어하면 적극 나서서 아내를 힘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섬겨주어라.”
왜 그렇게 딸이든, 아들이든 상관없이 성경적인 믿음 교육과 섬김 교육을 합니까? 무조건 희생해야 된다는 희생 콤플렉스를 조장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이 행복의 핵심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상대에게 희생과 섬김을 강요하면 가정이 불행해지지만 내가 희생과 섬김을 작정하면 가정이 행복해집니다. 왜 나오미 가정이 남자들이 연쇄적으로 죽는 줄초상의 비극을 극복하고 후일에 다윗을 배출하는 왕가의 뿌리가 될 수 있었습니까? 그녀의 가정 저변에 흐르고 있던 ‘섬겨주는 믿음’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가정 >
본문에는 모압 땅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길에 있었던 나오미 가정의 얘기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 얘기에는 감동적인 장면이 많고 하나님이 어떤 가정을 축복하는지 여러 교훈도 줍니다. 하나님은 어떤 가정을 축복하실까요?
1. 사랑으로 함께 하는 가정
본문에는 유난히 ‘함께’란 말이 많이 나옵니다. 나오미는 모압 지방에서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고 했습니다(6절). 두 며느리도 나오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출발했습니다(7절). 그때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각자 친정으로 돌아가 새로운 남편을 얻으라고 한 후 하나님의 축복까지 빌어주며 두 며느리에게 입을 맞추었습니다(8-9절).
두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사랑과 배려에 감격해서 큰 소리로 울면서 말했습니다. “안 됩니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습니다(10절).” 그 장면을 보면 서로에 대한 깊은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모압 출신 며느리들이 베들레헴에 가면 이방인으로 온갖 멸시를 당할 가능성이 컸지만 그래도 시어머니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딸도 아닌 이방인 며느리가 자기 남편들이 죽은 상황에서 돈이 한 푼도 없는 늙은 시어머니와 함께 하겠다고 결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복이 없겠습니까?
어떤 분야든지 크게 쓰임 받는 인물들은 대개 가족 사랑이 많습니다. 가족 사랑이 없는 사람은 큰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에서도 훌륭한 인물을 배출하려면 최소한 싸움만은 없도록 해야 합니다. 생명체는 다 사랑이 있습니다. 식물도 암술과 수술의 사랑이 있고 벌레의 울음소리도 사랑을 부르는 소리입니다. 물고기는 물에서, 새는 하늘에서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그런 사랑이 있기에 번성의 축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랑 없이 열매 맺는 생명은 없습니다. 가정도 번성하는 복 받는 가정이 되려면 늘 사랑으로 함께 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2. 서로를 배려하는 가정
나오미는 두 며느리까지 자기 곁을 떠나면 의지할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되지만 두 며느리가 그들의 고향 집으로 돌아가서 새롭게 좋은 남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기를 원했습니다. 힘들 때 서로 함께 하면서 힘을 모으면 자기는 좋지만 시어머니는 며느리들을 생각해서 그들에게 자유를 주었고 며느리들은 그런 시어머니의 배려에 감격해 울었습니다. 그처럼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을 가졌기에 불행은 곧 끝나고 행복의 길이 펼쳐진 것입니다. 배려하는 마음을 받을 때 삶은 감동이 되고 인생은 행복해집니다.
저는 목회 초창기에는 사모가 새벽기도에 한번이라도 빠지면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속으로는 화를 냈습니다. 그러나 점차 그런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새벽기도를 빠지면 아내가 먼저 스스로 미안해하면서 최선을 다하는데 속으로라도 화를 낼 이유가 없었습니다. 또한 그때를 아내를 배려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여줄 좋은 기회로도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내도 고맙게 생각하면서 더 최선을 다하면서 저에 대한 대접도 좋아집니다. 그 날에는 식사도 더 잘 차려줍니다. 무조건 인상만 쓸 일이 아닙니다. 배려하면 감동해서 더 잘하려고 합니다.
저는 결혼하고 아내가 식사를 잘 차려주는 것이 늘 고마웠습니다. 거의 똑같이 반복되는 그 일을 저는 못할 것 같은데 아내는 잘합니다. 그래서 늘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 가끔 며칠 동안 계속 같은 반찬만 해줘도 좋다고 합니다. 진짜 좋아서가 아니라 아내가 수고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런 배려하는 마음을 받고 아내가 “그래, 남편 요구대로 같은 반찬을 계속 해주자.”라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오히려 더 잘해줍니다. 배려하는 마음을 받으면 배려하는 마음을 돌려줍니다.
도로에서 정신을 놓고 전화하면서 너무 천천히 운전하는 것도 배려가 없는 태도입니다. 그러면 경적을 눌러 주의를 줍니다. 그러나 <초보운전> 딱지를 붙인 차가 나타나면 많은 차들이 배려 모드로 들어가서 그 차를 왕처럼 대접하고 경적도 안 울립니다. 갓난아이에게 왜 빨리 걷지 않느냐고 호통 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배려가 없는 것은 악해서가 아니라 대개 교양의 부족 때문입니다. 가정과 교회에서 말씀을 통해 잘 배우고 실천해야 할 삶이 배려하는 삶입니다. 최고의 배움 중의 하나가 배려입니다. 서로 배려할 때 공동체에 축복도 넘치게 됩니다.
3. 서로 축복해주는 가정
나오미는 며느리들을 배려해서 그들의 고향 집으로 돌아가도록 했을 뿐 아니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하면서 두 며느리에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을 빌어주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오미 가정을 쓰셨을까요? 극심한 고난 중에도 서로를 원망하지 않고 서로 아껴주고 축복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남 잘 되기를 빌어주면 자신이 더 축복받습니다. 사촌이 땅을 살 때 배가 아프면 결코 축복받지 못합니다. 남이 부당하게 잘살면 안타깝게 생각하고 정당하게 잘살면 인정하고 존중해주십시오. 가족과 교우와 친구가 잘 되면 배가 아프게 되지 않고 오히려 소화가 잘되는 마음을 훈련하십시오. 많은 사람을 축복하되 가족은 더욱 축복하십시오. 서로 축복해주는 가정에 하나님이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축복의 말 한 마디가 중요합니다. 교인을 교회에 잘 정착하게 하는 것은 정교한 프로그램이 아니고 믿음과 칭찬과 축복의 말입니다.
교우에게 기회가 될 때마다 꿈을 심어주고 열심히 칭찬해주십시오. 교회와 교우를 자랑하고 교우의 단점을 변호해주십시오. 초신자나 교회 정착을 고려하는 성도가 “저가 왜 저래요?”라고 하면 “나도 잘 몰라요. 꼴 보기 싫지요?”라고 동조하면 마음이 통해 잘 정착할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는 잘 정착하지 못합니다. 그런 말이 들리면 이렇게 변호하십시오. “그분 스타일이 조금 달라서 그래요. 그분에게 다른 좋은 장점도 많은데 한번 사귀어보세요.” 그러면 듣는 사람도 이해심이 커지고 교회도 잘 정착합니다. 말 한 마디로 사람이 그토록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은 예언을 좋아해서 예언자를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자기가 일종의 예언자이고 자기 말이 일종의 예언입니다. 성경은 “네 말한 대로 된다.”고 곳곳에서 말씀한 것은 자기 말이 ‘예언 자체’보다 더욱 능력 있는 ‘예언 성취’의 동력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늘 믿음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말하면서 패배자의 언어가 아닌 승리자의 언어를 가지십시오. 그러면 생각과 기분이 달라지고 마음과 태도도 바뀌고 결국 미래도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사람의 말에는 부분적인 창조적 능력이 있습니다.
< 축복의 말을 많이 해주십시오 >
예전에 한 여성이 심신이 너무 병든 상태에서 침대에서 일어날 수조차 없었습니다. 말할 수도 없었고 걸을 수도 없었습니다. 곧 죽을 날만 기다리며 병원에서 집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녀의 오빠가 목회자였습니다. 그가 여동생의 소식을 듣고 그녀의 집으로 가서 그녀가 누운 어두운 침실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그에게 어떤 깨달음이 생기면서 갑자기 창으로 가서 커튼을 열어젖히고 말했습니다. “빛이신 하나님! 이 방에 임재하소서!”
곧 그가 동생에게 가까이 가서 손을 내밀어 강하게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습니다. “메리! 일어나 걸어라!” 그 말이 메리의 내면에 잠재해있던 믿음을 촉발시켰습니다. 그때 여동생이 정말로 벌떡 일어나 걸었습니다. 기적적으로 그 다음부터 그 여동생은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해졌습니다.
나중에 그가 신기해서 물었습니다. “메리! 어떻게 그렇게 벌떡 침대에서 일어나게 되었니?” 그녀가 말했습니다. “그때 일어나 걸으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어요.” 그가 말했습니다. “아냐! 메리!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말했어.” 그녀가 말했습니다. “아녜요. 내게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렸어요.” 그가 또 말했습니다. “아냐! 정말로 내가 말했어.” 그녀가 또 말했습니다. “절대 아녜요. 하나님이 말씀하셨어요.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다리와 몸에 힘이 생겼고 기력과 정신도 돌아오면서 보고 걸을 수 있었어요,”
성도의 입은 하나님의 음성을 전하는 통로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축복과 격려의 말을 해주면 그 말이 상대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 “집사님! 힘내세요.”라고 하면 그 한 마디가 단순히 위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믿음과 비전의 불씨를 새롭게 점화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평범한 말도 하나님의 음성이 섞여 들려지면 그 말이 기적적인 능력을 일으키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기 말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를 아십시오. 부모가 자녀에게 해줄 가장 위대한 것은 축복의 말입니다. “너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너는 할 수 있다. 더 나은 미래가 네게 준비되고 있다. 네가 너무 사랑스럽구나. 사랑한다.”라고 해주십시오. 그런 말을 가족과 교우에게 해주면 그 말에 하나님의 음성이 섞이면서 말한 대로 되고 치유가 일어나고 나쁜 집착이 끊어지고 위대한 미래가 펼쳐질 수 있습니다. 가정과 교회에서 가족과 교우가 해야 할 가장 큰 의무와 책임은 그런 믿음의 말을 많이 해주는 것입니다.
가정과 교회에서 한 가족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의 원대한 섭리 하에 이뤄진 만남입니다. 서로에 대해 자랑스럽다고 말해주십시오. 약점보다 장점을 많이 생각하고 많이 말해주십시오. 상대는 그런 말에 많이 굶주려 있는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축복의 말을 많이 해주십시오. 가족은 하나님께서 내게 보내주신 가장 위대한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선교사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 첫 번째 선교지는 바로 가정입니다. 교회와 가정에서 축복의 말을 많이 해주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공동체를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살다보면 가정에 어려운 일이 얼마든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때 절망에 빠지지 말고 그런 상황에서도 희망을 말하고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서로 사랑하고 협력하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부모나 교회 리더가 그런 모습을 보여주면 자녀와 교인에게 오래 좋은 기억으로 남는 가장 훌륭한 교육이 될 것입니다. 그런 신앙 교육이 있을 때 우리 자녀와 교우 중에도 다윗과 같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위대한 인물이 나올 것입니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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