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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은 대단합니다 (누가복음 12장 49-53절)

by 【고동엽】 2022. 12. 29.

하나님의 사랑은 대단합니다 (누가복음 12장 49-53절) < 세례 받은 성도의 삶 >

 사람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사람들은 인터넷 댓글 등을 통해 남을 쉽게 비판하지만 자기 죄와 허물에 생각이 미치면 그런 비판을 조심합니다. 유명한 목회자의 추문을 들으면 사람의 연약성을 새삼 깨달으면서 “어떻게 그분이 그럴까?”라고 하지만 그것이 사람의 모습이고 자신의 모습이기에 누구나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믿고 교회 다녀도 똑같다.”고 말합니다. 그래도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사람은 죄 공장입니다. 사소한 약속 시간을 어기는 것도 거짓말의 죄를 짓는 것이고 도로에서 제한 속도를 넘어 운전하는 것도 크게 보면 범죄입니다. 사람이 평생 크고 작은 죄를 백만 번 정도 짓는다면 교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기에 그보다 조금 적게 죄를 지을 수는 있어도 전혀 죄를 짓지 않는 의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주에 한 친구가 말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교회를 다녀서 이 정도이지 교회를 다니지 않았다면 얼마나 더 죄를 졌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교인은 죄 문제로 고민하며 자신의 연약성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추구하는 사람이지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게 연약함과 부족함을 자인해도 “교인이 왜 그래?”라고 비판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사람은 다 죄인입니다. 누구도 자기 인생을 자신할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부족한 사람을 위해 가장 위대한 선물이신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가장 위대한 선물입니까? 사람을 구원할 구세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됩니다. 그처럼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믿음의 증표로 세례를 받지만 믿음생활은 세례로 끝나지 말고 세례 후에는 세례 받은 성도답게 살아야 합니다. 본문은 세례 받은 성도에게 어떤 삶을 권면합니까?

1. 거룩한 불을 일으키십시오

 본문 49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이 구절에서 ‘불’은 ‘심판의 불’ 혹은 ‘성령의 불’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불을 일으키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령의 불을 일으키려면 성결함과 더불어 자신의 위대성에 대한 깨달음도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로 소중히 여기고 복사판 상품 인생이 아닌 원판 작품 인생으로 사십시오.

 하나님이 설계하신 자기 길이 아닌 남들이 가는 길을 따라 가는 복사판 인생으로 살면 인생의 공허함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요새 남의 사진 하나도 잘못 쓰면 저작권 침해로 몇 백 만원 벌금을 뭅니다. 남의 설교를 그대로 베껴 쓴 사실이 밝혀지면 큰 수치를 당하고 설교 포털 사이트에서 남의 설교를 모아 유료로 회원 제도를 운영하면 번 돈의 이상을 토해내야 합니다. 남의 설교를 부분적으로 인용은 해도 되지만 계산적으로 이용을 하면 안 됩니다. 세상조차도 복사본 인생이 아닌 원본 인생을 요구하는데 성도는 더욱 원본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요새 왜 교회와 교인에 대한 인식이 안 좋습니까? 세상 원리를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교회에 대한 나쁜 편견도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가 기득권자의 편인 줄 알지만 소외된 자 편에 훨씬 더 많이 섰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는 우측에 치우쳤다고 비판하지만 좌측 편에 섰던 교회들도 많습니다. 교회와 교인을 비판하면 의식 있게 보이는 줄 알지만 바르게 판단하고 비판하지 않으면 자신의 편협함을 나타낼 뿐입니다.

 때로는 교인이 교인을 부조리하게 더 비판합니다. 교인이 교인을 덜 비판해도 안 되지만 더 비판해도 안 됩니다. 사려 깊게 비판을 잘하는 것이나 사람을 잘 분별해 사귀는 것도 능력입니다. <월새기(월간새벽기도)> 직원들은 친절하게 전화를 잘 받는데 그것도 능력입니다. 바른 분별력을 바탕으로 거룩한 불을 끄기보다 일으키는 사람이 되고 영혼 구원과 영혼 변화에 힘쓰며 남을 행복하게 해주려고 하십시오.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거룩한 선교 비전을 이루려고 열심히 일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복된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월새기>는 영혼 구원과 영혼 변화를 향한 열정의 산물입니다. 제가 많은 시간을 들여 성경강해를 할 때 그 강해에 가장 은혜를 받은 그룹이 목회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영혼 구원과 영혼 변화의 지경이 확대되다가 은혜 받은 은밀한 심령이 복음의 열정에 호응해 <월새기> 사역이 시작되고 지속될 수 있었습니다. 그 사역이 <월새기 영어판>을 통해 세계선교의 비전으로 지경이 확대되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저는 요새 매일 기도합니다. “하나님! <월새기 영어판>이 속히 나와 ‘복음 한류’의 선봉 도구가 되게 하소서.”

 인생을 살면서 수시로 자문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이 땅에 보내셨는가?” 뚜렷한 사명이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으면 현재 자리에 충실해서 미래에 사명이 구체화되었을 때 잘 쓰임 받도록 준비하십시오. 지경과 영역을 넓히고 자기만의 콘텐츠를 개발하십시오. 잠은 충분히 자더라도 정신적인 잠은 줄여서 정신을 똑바로 차려 창조성을 발휘해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고 자신만 할 수 있는 영역을 구축해서 스릴 넘치는 삶을 사십시오.

 최상의 투자는 사람에 대한 투자입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자로 여기고 자신에게도 지혜롭게 투자하십시오. 현재 모습에 안주하지 말고 더 나은 자신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비전을 가지고 땀을 흘리십시오. 자기가 좋아하는 창조적인 일을 해서 건강도 얻고 힘 있는 자신을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거룩한 불을 일으키며 하나님 나라 확장에 일조하면 거룩한 명예도 얻고 거듭난 인생의 행복과 보람도 넘칠 것입니다.

2. 십자가를 지고 죽으십시오

 본문 50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이 구절에서 예수님이 받을 세례는 ‘십자가의 죽음’을 뜻합니다.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란 표현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선한 섭리 하에 이뤄진 일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선한 섭리로 이뤄졌지만 십자가를 지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기에 십자가를 앞두고 예수님도 답답함을 느끼시고 고뇌하셨습니다.

 세례는 “이제부터 십자가를 지며 살겠습니다.”라고 다짐하는 공적인 의식과도 같습니다. 십자가를 지면 부담되고 두려울 것 같지만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십자가를 지고 “죽으면 죽으리라.”고 나서면 오히려 신기하게 사는 길이 열립니다. 기독교 역사는 죽는 길을 통해 사는 길이 열리는 역사입니다. 죽기를 각오하면 오히려 죽지 않습니다. 혹시 육신적으로는 죽어도 천국 보상은 더욱 찬란하게 됩니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 던져졌지만 사자가 범접하지 못했습니다. 너무 태평한 다니엘을 보고 아마 사자들도 무서웠을 것입니다. 왜 다니엘 그토록 태연했을까요? 그 상황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상황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사탄에게 행동하십시오. 사탄의 졸개들인 귀신은 겁이 많고 야비한 존재입니다. 귀신은 약한 자에게는 강하고 강한 자에게는 약한 야비한 속성을 가졌습니다. 그처럼 야비한 귀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죽으면 죽으리라!”고 하면서 십자가의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는 성도입니다.

 왜 요새 교회에 인물 가능성을 가진 후대들이 줄어듭니까?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십자가를 지는 교육의 부실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3대가 어울리는 가족 관계를 이루지 못하고 너무 커져서 아이들이나 학생들이나 청년들끼리만 모이면 재미는 있어도 의미는 잘 배우지 못합니다. 찬양과 재밌는 프로그램으로 자녀들을 일시적으로는 붙잡을 수 있어도 봉사와 헌신을 배우지 못하면 인물 가능성은 크게 줄어듭니다.

 매주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교회청소를 하고 어른들의 식탁 봉사를 하면 얼마나 많이 배우겠습니까? 교회가 너무 커져서 같은 또래의 학생들끼리만 어울려 지내면 그런 전인적인 교육 가능성이 줄어듭니다. 무엇이든지 받는 것만 좋아하면 감사와 감동이 줄어듭니다. 드리고 나누고 베푸는 ‘드나베의 삶’이 있어야 삶에 감사와 감동도 넘치게 됩니다. 십자가가 없는 삶은 결코 복된 삶이 아닙니다. 때로는 믿음과 소중한 가치관과 거룩한 비전을 위해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십자가의 삶이 결국 최종적인 승리를 가져다줍니다.

3. 하나님 편에 서십시오

 본문 51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화평을 주시는 것이지만 최종 화평으로 가는 길에는 분쟁과 갈등 과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신앙 문제나 진리 문제에서의 갈등은 쉽게 해소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가정에서도 그런 갈등이 생길 수 있습니다(52-53절).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 상황을 잘 이겨내십시오.

 비본질적인 문제에서는 차이를 인정하고 최대한 양보하십시오. 비본질적인 문제로 논쟁하다가 교회가 깨진 경우도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교회는 건축 후 커튼 색깔 문제로 싸우다가 교회가 깨졌습니다. 한 미국교회에서는 한국으로 파송된 선교사가 현지 문화에 적응하는 삶의 고통과 중요성을 역설하려고 한국에서 보신탕 먹은 얘기를 했다가 그런 선교사를 후원해야 하는지에 관한 논쟁이 벌어져 교회가 깨졌습니다.

 비본질적인 문제로 서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뚜렷한 정답이 없는 문제로 갈등과 논쟁으로 쉽게 빠져드는 언행과 성격이 있다면 그것이 더 문제입니다. 그런 비본질적인 문제로 갈등이 생기면 믿음이 강한 성도가 양보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진리 문제에서는 갈등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갈등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 편과 진리 편에 서십시오.

 살면서 소외된 사람과 함께 해주고 돕는 것은 필요하지만 무조건 소외된 사람 편만 들어도 안 됩니다. ‘소외된 사람과 함께 하는 것’과 ‘소외된 사람 편을 드는 것’은 약간 뉘앙스 차이가 있습니다. 소외된 사람과 함께 하되 소외된 사람도 불의한 모습을 보일 수 있기에 소외된 사람 편에 무조건 서기보다는 하나님 편과 진리 편에 서십시오. 사회적 갈등이 심하면 먼저 진리 편에 서고 그 다음에 소외된 자를 힘써 도우십시오.

< 하나님의 사랑은 대단합니다 >

 사람은 차이가 있기에 싸움과 갈등은 언제나 있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슨 문제로 갈등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비본질적인 면에서는 달라도 늘 일치하는 마음을 가지되 본질적 진리 문제에서는 늘 하나님 편과 진리의 편에 서기 위해 갈등도 감수하십시오. 왜 갈등도 감수하며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먼저 십자가의 희생을 감수하며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없다면 부족한 죄인인 사람이 어떻게 한 시도 살 수 있겠습니까? 의인인척 하는 사람은 있어도 의인은 없습니다. 영웅도 없습니다.

 모세의 인도로 기적적으로 홍해를 건넌 후 이스라엘은 구원을 찬양하며 모세를 높였습니다. 바로 그 다음에 3일 동안 광야에서 물을 얻지 못하자 바로 모세를 향해 불평했습니다. 모세는 3일 만에 히어로(hero)에서 제로(zero)가 된 것입니다. 그처럼 감사와 감격이 3일도 가지 못하는 모습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인간 영웅은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살지 못합니다. 왜 하나님은 죄 공장인 인간을 사랑하시고 때가 되어 교회로 부르시고 거룩한 사명을 맡기셨습니까? 그 이유를 알 길이 없습니다.

 예전에 TV에서 사회자가 “부모님이 왜 자녀를 사랑할까요?”라고 묻자 한 초등학생에 “그러게 말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사랑하실까요? 그렇게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죄와 허물이 하나님께 찾아 나오십시오. 어린 자녀들이 아무런 공로가 없어도 “아빠!”라고 하며 당당하게 아빠를 찾듯이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은혜와 축복을 달라고 당당하게 기도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음을 잊지 마십시오.

 우주가 수많은 신비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신비한 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주 너머에 계시지 않고 우리 곁에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만 생각해도 우리는 은혜와 축복을 거의 다 받은 셈이고 이미 기적의 주인공인 셈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만큼 큰 기적은 없습니다. 그 사랑이 있기에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은혜가 대학 기숙사에 처음 갔을 때 같이 기숙사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때 배불러서 먹기 힘들었고 제 스타일의 음식도 아니었지만 은혜 앞에서 “아! 맛있다!”고 하면서 먹었습니다. 나중에 아내가 말했습니다. “당신 그런 음식을 좋아했어요?” 제가 말했습니다. “은혜가 기숙사 음식을 좋게 여기고 맛있게 잘 먹으라는 뜻에서 은혜 앞에서 그랬어요.” 아내가 말했습니다. “당신의 딸 사랑은 정말 대단해요.”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그처럼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서라면 하나님은 늘 최상의 것을 주시려는 마음을 가지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정말 대단합니다. 그런 사랑의 하나님을 위해 무슨 일인들 주저하겠습니까? 늘 하나님 편에 서려고 하십시오. 때로는 손해와 갈등과 죽음이 있어도 하나님 편과 진리 편에 서면 반드시 더 나은 세상과 역사가 펼쳐질 것입니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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