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음성 (신명기 20장 10-20절) < 과목을 찍어내지 마십시오 >
진멸을 명한 가나안 7족속 이외의 어떤 성읍을 치려고 할 때는 먼저 화평을 선언하라고 했습니다(10절). 가나안 7족속과 전쟁할 때는 모든 것을 진멸했지만 그 외의 족속과 전쟁해서 이기면 육축과 은금 패물과 옷 등을 전리품으로 취하고 포로 여자들과 아이들은 노예로 삼고 때로는 포로 여자를 아내로 취할 수도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전쟁을 벌여야 하면 많은 희생을 치르기 때문에 전리품은 약탈품으로 여기지 않고 정당한 재산으로 인정해주었는데 그렇게 되는 기본 조건은 먼저 화평을 선언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특히 성읍을 점령할 때는 도끼로 나무를 찍어내지 말라고 했습니다(19절). 성읍을 점령할 때 지나치게 파괴하지 말라는 규례입니다. 도끼로 나무를 찍어내면 이스라엘에게도 손해가 되는 무분별한 파괴 행위였습니다. 다만 과목이 아닌 수목은 찍어내어 성읍을 치는 기구를 만들어 그 성읍을 함락시킬 때까지 쓰라고 했습니다(20절).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와 사랑이 배인 규례로서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 결국 인간을 보호하는 것이라는 암시입니다.
1960년대 우리나라의 많은 산들이 민둥산들이었습니다. 무분별하게 나무를 잘라 식용이나 난방용 땔감으로 썼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사람들의 의식이 깨어 나뭇가지 하나도 함부로 잘라내지 않습니다. 울창한 삼림은 자연 사랑 및 순화된 정서의 표식으로서 사람들에게 푸근한 그늘을 제공하고 내일의 희망을 느끼게 합니다. 자연으로부터 들려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을 통해 세상은 조금 더 따뜻해집니다.
파란 하늘, 밤하늘의 별, 등산로의 들꽃, 아스팔트를 뚫고 나온 들풀, 새 소리와 시냇물 소리 등을 깊이 묵상하면 희미하나마 하나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 숨결과 음성을 접할 때 마음이 맑아지고 얼굴이 밝아집니다. 자연은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직접 은혜를 내려주시기도 하지만 자연을 통해 은혜를 내려주실 때도 많습니다. 자연을 아끼는 것은 결국 자신을 아끼는 것입니다.
<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음성 >
1992년부터 저는 약 5년간 여러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신학생들은 대개 어렵게 사는 편입니다. 저 자신도 어렵게 신학 공부를 했기에 어렵게 사는 신학생들을 보면 늘 안쓰러운 마음이 있습니다. 때로는 돈이 없어 ‘자발적인 금식’이 아닌 ‘강제적인 굶식’을 하는 신학생도 종종 목격합니다. 그때는 마음이 찢어지는 것과 같은 아픔이 밀려옵니다.
1995년 봄 어느 날, 한 남학생이 오전 수업을 마치고 점심 때 식당에서 식사하지 않고 벤치에 혼자 앉아 창백한 얼굴로 들풀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가 ‘굶식하는 학생’임을 직감했지만 그에게 한 끼 식사를 사주는 것보다 그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모른 척 했습니다. 대신 강의 시간에 그에게 힘과 용기와 위로를 줄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오후 강의 시간에 저는 그의 얼굴은 거의 쳐다보지 않고 희망과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말씀을 많이 했습니다. 언뜻 그의 얼굴을 쳐다보자 그의 얼굴에 혈색이 돌고 그의 눈빛에 생기가 도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때 ‘자연 속에 깃들인 하나님의 손길’과 ‘이름 없는 들풀에 깃들인 위대한 생명력’을 언급하며 아무리 힘들어도 낙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때의 강의는 강의가 아닌 희망을 토하는 소리였습니다.
그런 얘기를 한 후 학생들과 함께 찬송가 <참 아름다워라>을 불렀습니다. 신학교 강의 시간에 때 아닌 우렁찬 찬송소리가 들렸습니다. 다른 강의에 방해되는 것은 알았지만 5분 동안만 미안한 일을 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때 학생들과 마음을 쏟아 붓는 찬송을 했습니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솔로몬의 옷보다 더 고운 백합화/ 주 찬송하는 듯 저 맑은 새소리/ 내 아버지의 지으신 그 솜씨 깊도다.”
그 찬송가 3절을 부를 때 교직원이 무슨 일인가 하고 강의실로 달려와 강의실 문을 열고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았습니다. 저는 아무 일도 아니라고 표시한 후 처음부터 한 번 더 그 찬송을 힘차게 불렀습니다. 그때 그 학생을 비롯한 몇몇 여학생이 눈물을 훔치고 있었습니다. 생명이 소생하는 듯한 느낌을 받은 아름다운 시간이었습니다.
자연을 찬찬히 살펴보면 신기하고 아름답고 하나님의 손길을 느낍니다. 들풀 하나만 봐도 꿋꿋하게 사는 모습이 힘과 감동을 줍니다. 울적한 마음으로 들풀을 쳐다보면 들풀이 이런 음성을 전해주는 것 같습니다. “저도 이렇게 꿋꿋이 살고 있으니 당신도 힘내세요.” 자연을 보면서 삶의 소중함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왜 에델바이스가 소중하게 여겨집니까? 고산지의 추위에서도 하얀빛을 뿌리며 살기 때문입니다. 귀를 기울여 자연이 전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가며 힘들 때도 용기를 내어 사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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