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을 선으로 갚으십시오 (신명기 19장 15-21절)
< 위증으로 모함하지 마십시오 >
정치란 ‘바르게 다스리는 것’을 뜻합니다. 정치에서 상대에 대한 심한 증오감을 표출하면 대립의 악순환이 펼쳐집니다. 그런 대립구도를 깨고 상생구도를 이루면 흐린 날 한 뼘의 푸른 하늘을 발견하는 기쁨을 일반인들이 얻습니다. 상생구도를 이루려면 ‘윈윈전략’이 필요합니다. 윈윈전략이란 나도 살고 너도 사는 생명의 원리입니다. 여당과 야당은 링에 올라가 상대를 어떻게든지 때려 눕혀 이겨야 하는 권투 선수가 아닙니다. 바른 정치는 여야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의식과 공의를 바탕으로 이뤄집니다.
바른 정치와 공의의 실현을 위해 특히 위증 문제를 잘 처리해야 합니다. 고대 유대 사회에서 증인은 보고 들은 사실을 증언하는 역할도 했지만 죄를 고발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그때 한 명의 증언으로 판결을 내리면 불의한 판결을 내릴 가능성도 컸기에 2명 이상의 증인을 통해 사건을 확정하라고 했습니다(15절). 그것은 위증이 없도록 하려는 최소한의 장치였습니다. 위증은 없는 일을 꾸며내어 모함하거나 남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거짓 증언을 하는 것입니다. 유대 사회에서는 거짓말보다 거짓 증언을 훨씬 큰 죄로 여겼습니다.
만약 위증하는 자가 어떤 사람이 악을 행했다고 말하면 그 논쟁하는 쌍방이 같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당시 제사장과 재판장 앞에 서라고 했습니다(16-17절). 즉 거짓 증언을 통해 쌍방 간에 논쟁이 벌어지면 중앙 성소의 재판정에서 그 사건을 다루게 했습니다. 위증죄나 무고죄는 쌍방의 치열한 법정 다툼으로 지방 법정에서 판결을 내리기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재판장은 자세히 조사해 증인이 거짓 증거를 통해 형제를 거짓으로 모함한 것이 판명되면 그가 그의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그대로 행해서 공동체에서 악을 제거하라고 했습니다(18-19절). 즉 거짓 증언으로 무고하거나 모함하면 당시 헌법인 십계명의 9계명을 어긴 죄로서 상대를 해하려고 의도한 대로 자신이 해를 받는 동해보복률이 엄격히 적용되어 처벌받았습니다. 그렇게 엄격히 처벌한 것은 악행에 대한 두려운 마음을 가지게 해서 범죄를 막으려는 범죄 예방 효과를 위해서였습니다(20절).
< 악을 선으로 갚으십시오 >
동해보복률은 무엇입니까? 남에게 상해를 입히면 그대로 상해를 받아야 한다는 율법입니다. 본문 21절 말씀을 보십시오.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라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이니라.” 형법이 발달되지 못한 고대 국가에서는 사회질서 유지를 위해 동해보복률이 인정되었지만 사회가 발달하면서 신체적 보복 대신 금전적 보상으로 대체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왜 모세 율법은 동해보복률을 인정했습니까? 개인적인 악감으로 죗값 이상으로 갚아서 끊임없이 지속될 보복의 악순환을 막으려는 뜻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율법을 승화시켜서 예수님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악을 선으로 갚으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 5:38-48). 즉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동해보복률이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는 원수 사랑의 법으로 승화된 것입니다.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은 기독교의 근본정신입니다.
두 종류의 반응이 있습니다. ‘반사적인 반응(reaction)’과 ‘수용적인 반응(response)’입니다. 반사적인 반응은 눈에는 눈으로 반응하고 이에는 이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수용적인 반응은 연못(pond)이 물을 수용한 후 다시 물을 흘려보내는 식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수용적으로 반응할 때는 연못의 크기가 클수록 악을 선으로 승화시키는 승화 지수가 높아집니다. 바다는 거대한 연못과 같습니다. 성도는 반사적으로 반응하지 말고 바다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수용적으로 반응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바다와 같은 수용적인 삶의 기초 과목 중의 하나가 악을 선으로 갚는 용서 과목입니다. 그 과목의 이수가 쉽지 않습니다. 용서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용서가 어렵지 않게 느껴져도 용서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용서가 매우 어렵습니다. 용서가 쉽지는 않지만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크신 용서를 깨닫고 진심으로 감사하면 용서의 능력이 커집니다. 용서는 남을 자유롭게 해서 은혜를 주려고 하다가 오히려 자신이 자유롭게 되는 은혜를 받게 합니다.
‘눈에는 눈으로’라는 동해보복율의 구약적인 삶이 지금도 통용되면 눈이 성한 상태로 남아남을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게 될 것입니다. 마음의 연못을 마음의 바다처럼 키워 악을 선으로 갚으십시오. 힘들고 억울해도 기도하며 자기 사명에 집중할 때 하나님은 가장 공의롭게 모든 상황을 처리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손길을 믿고 한과 증오의 고리를 끊어냄으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차원 높은 새로운 은혜를 맛보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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