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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곳에 선 가증한 것(마태복음 24장 15~28절)

by 【고동엽】 2023. 2. 5.
목차

거룩한 곳에 선 가증한 것(마태복음 241528)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자는 깨달을찐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찌어다 그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찌니라.

 

 

성경을 별명으로 율법이라고 하고 예언이라고도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향하신 뜻을 말해 주는 글이기도 하며 또한 하나님의 뜻을 설명해 주는 예언서이기도 합니다. "예언"이라고 해서 꼭 미래에 있을 이야기만을 기록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예언이란 말의 원어가 보여 주는 뜻은 "말한다" "선언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말씀해 주실 때 그것이 곧 예언이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대한 하나님의 뜻, 현재에 나타난 하나님의 경륜 동시에 미래로 향한 하나님의 뜻을 말해 줄 때 이를 예언이라 하고 이를 말해주는 자를 예언자(선지자)라고 하며 그 예언을 기록해 줄 때 이것을 예언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그 시작과 근원에 대하여서 설명하기도 하며 또한 끝(終末)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 결과와 끝을 미리 말함으로서 오늘의 뜻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성경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희망적인 미래를 말하기도 합니다만 이러한 희망적인 장래를 말하기에 앞서서 대체로 어두운 미래를 먼저 말하고 있는 것을 성경 전체의 문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빛 이전에 어두움, 영광 이전에 수치, 생명 이전에 죽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큰 멸망만을 예언해 주기도 합니다. 어떤 심판이든지 어떤 멸망이든지 반드시 그 환난과 멸망이 먼저 예고되었고 예언되었었습니다. 생각건대 이것이 하나님의 큰사랑이라고 봅니다. 멸망되는데 무슨 사전 지식이 필요하며 준비가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이 예언들은 곧 멸망을 피하라는 뜻이 그 속에 있는 것인 줄 압니다.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니느웨성, 바벨론 포로 때의 유대나라 등에 언제나 미리 예언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종말에 대한 예언입니다. 15절 말씀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끝이 온 줄로 알라고 하신 것은 다니엘서의 인용이었습니다.

다니엘의 예언은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을 침공하고 그들의 우상인 쥬피타의 신상을 성전 안에 세워 놓고 돼지를 잡아서 제사를 드렸다고 하는 역사 안에서 응하였다고 봅니다. 문자 그대로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성경을 인용하여 예언하신 것은 로마로 인하여 유대 나라가 망할 것을 직접적으로 예언하시는 데 뜻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로마제국 군대의 상징인 독수리 상을 성전 안에 세워 놓고 제사들인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예언은 이것만 생각하고 말씀하신 것은 아닌 것으로 봅니다. 역사의 종말을 말씀하시며 도시에 어느 시대에나 있을 수 있는 원리를 말씀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멸망의 가증한 것"이 무엇입니까? 가증한 것이란 원문대로의 뜻을 살피면 밉살스러운 것 또는 아주 참을 수 없이 싫은 것을 말합니다. 즉 꼭 망해야 할 자가 흥하고 마땅히 천한 대우를 받아야 할 자가 영광을 얻고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할 자가 복을 누리고 있어서는 아니 될 자가 있어지는 것, 또는 있어서는 안될 위치에 있는 자들을 뜻합니다. 목불인견(目不忍見)이며, 차마 볼 수 없는 꼴불견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거룩한 곳"이란 직접으로는 하나님의 성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뜻으로서는 하나님의 위치 즉 신적(神的)인 위치와 신적인 예배, 경배를 받는 위치를 뜻합니다.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종말이 온줄로 알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것이 종말의 예표이며 표징이라는 말씀입니다.

역사 가운데에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많습니다.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도 신적인 대우를 받다가 망했습니다. 특히 "쿼바디스"란 영화나 소설을 보면 네로 황제라는 어이없는 폭군이 나옵니다. 그는 자기가 세계 제일의 시인이요, 음악가라고 자처하며 친히 시를 읊고 또 곡을 붙여서 손수 악기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불렀고 굉장한 시상을 위해서 로마성을 불을 지른 변태적인 성격의 왕이며 자기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졸았다고 해서 신하를 열 일곱 명이나 죽였다는 어이없는 폭군인데 이 속물(俗物)이 자기는 신()이다, 죽지 아니한다고 하며 자기를 살아 있는 신으로 섬기라고 강요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망했으며 대로마제국의 망국사도 끝내는 황제 숭배의 종교의식이 강요되며 이를 거부한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죽이면서 속물들이 신의 대우를 받으려고 했던 것을 역사에서 밝혀 볼 수 있습니다.

히틀러도 일본의 천황도 하나의 속된 인간이거늘 그들이 권력을 가질 때 인간의 모든 영광을 다 누리면서도 이것이 부족하여 신의 영광을 받아 보려고 하다가 결국 패망한 것을 역력히 볼 수 있습니다.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면 끝이 온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다시 이 말씀을 우리의 생활과 우리 네 사회 구조와 그리고 인격 안에서 소화해야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알며 어리석은 자가 지혜 있는 체하고 없고도 있는 체 죄인이면서 의인인 체 이것들도 가증한 것이요 볼 수 없는 것이며 꼴불견입니다. 특히 혼란 속에서 어쩌다 돈은 벌어서 인격은 갖추지 못한 채 돈만 가진 벼락부자! 이것은 정말 목불인견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돈이면 다인 줄로 알고 허세를 부리며 안하무인격으로 자기를 높혀 놓고 가정부이건 자가용 운전사이건 아직도 옛날에 종을 부리듯 하는 꼴이야 차마 볼 수 없는 가증한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문제되는 것은 거룩한 곳의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 모순과 부조리는 있는 것이 사실이고 거짓도 부정도 엄연히 존재한다고 봅니다. 최선이란 이름의 거짓, 합리적인 이론을 바침하고 있는 정당화한 부정, 가치 현실화의 지지를 받고 있는 상황적인 불가피한 죄악 같은 것들이 우리 주위에서 분명히 판을 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용납하시고 때로는 침묵하시고 길이 참아 주시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거짓은 용납된다해도 위선(僞善)은 안되며 위성(僞聖)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물건을 도적한 자는 살았으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죽었습니다. 죄인이 살 수도 있고, 잘 살 수도 있으며 권력을 가지고 호령하며 명예를 얻고 영광을 누리기도 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성자(聖者)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적인 대우를 받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부정한 자가 권력을 가질 수는 있으나 거룩한 자의 위치에 오를 수는 없고 거짓된 자가 잘 살 수는 있을지 모르나 성자의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속물(俗物)이 부자가 되고 권력자도 되겠지만은 거룩한 자의 위치에 오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김일성이란 사람이 혁명가의 대우를 받는 것까지는 좋고 불의한 자가 권력을 손에 쥐고 폭력을 내두르며 호령하는 것까지는 있을 수 있으나 이제 인간의 선을 넘어서 종교적인 대상이 되고 신적인 존경과 경배를 받고 있으니 이 또한 끝이 온 것을 말해 줍니다.

가증한 것이 언제든지 거룩한 곳에 세워지면 곧 끝이 온다는 진리입니다. 깊이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사회 안에 혹이나 가증한 것이 정당한 자의 위치에 엄연히 있을 뿐더러 나아가서는 신적인 경배를 받고 있지 않으며, 스스로를 절대화하여 가증한 꼴을 노출하고 있지는 않는가? 언제나 그 징조를 밝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은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의 거룩한 곳 즉 성전입니다. 돈은 힘이 있어서 권력도 지식도 때로는 인격까지 지배하며 또 사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돈이 종교적 경배의 위치에 오르면 망하는 것입니다. 돈이건 지위이건 지식이건 인격이건 무엇이던지 신적인 위치에 오르고 섬기는 위치에 오르며 예배의 대상이 되면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돈은 지배해야 하는 것이지 돈을 섬기고 경배하면 곧 망합니다. 그 무엇이든지, 그 누구든지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게 되면 곧 망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살아 계신 증거입니다. 우리의 거룩한 마음 성전 안에 그 어떠한 가증한 것도 세워져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대우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하나님으로 섬기고 경배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루터는 "Let God be God"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 하라고 외쳤습니다. 모르드개는 이 뜻을 따르다가 죽을 뻔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만을 경배하라는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의 쓰는 돈 안에 "In God We Trust"라고 쓰여 있는 것을 봅니다. "돈은 쓰되 돈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하나님만 의지합니다."라는 신앙 고백을 볼 때마다 그들 조상들의 귀한 신앙을 엿 볼 수 있습니다.

끝의 징조를 보고 끝을 알았으면 이제는 뒤로 돌이키지 말라고 하십니다. 롯의 아내를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영원한 생명만 의지하며 믿음만을 위하여 전심전력하라 하십니다. 환난과 핍박과 유혹이 심하게 되리라고 예언하십니다. 그러나 13절에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밝은 소망을 보여 주십니다.

끝까지 하나님만 경배하며 믿음을 지키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거룩한 곳에 선 가증한 것(마태복음 241528)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자는 깨달을찐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찌어다 그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찌니라.

 

 

성경을 별명으로 율법이라고 하고 예언이라고도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향하신 뜻을 말해 주는 글이기도 하며 또한 하나님의 뜻을 설명해 주는 예언서이기도 합니다. "예언"이라고 해서 꼭 미래에 있을 이야기만을 기록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예언이란 말의 원어가 보여 주는 뜻은 "말한다" "선언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말씀해 주실 때 그것이 곧 예언이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대한 하나님의 뜻, 현재에 나타난 하나님의 경륜 동시에 미래로 향한 하나님의 뜻을 말해 줄 때 이를 예언이라 하고 이를 말해주는 자를 예언자(선지자)라고 하며 그 예언을 기록해 줄 때 이것을 예언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그 시작과 근원에 대하여서 설명하기도 하며 또한 끝(終末)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 결과와 끝을 미리 말함으로서 오늘의 뜻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성경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희망적인 미래를 말하기도 합니다만 이러한 희망적인 장래를 말하기에 앞서서 대체로 어두운 미래를 먼저 말하고 있는 것을 성경 전체의 문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빛 이전에 어두움, 영광 이전에 수치, 생명 이전에 죽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큰 멸망만을 예언해 주기도 합니다. 어떤 심판이든지 어떤 멸망이든지 반드시 그 환난과 멸망이 먼저 예고되었고 예언되었었습니다. 생각건대 이것이 하나님의 큰사랑이라고 봅니다. 멸망되는데 무슨 사전 지식이 필요하며 준비가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이 예언들은 곧 멸망을 피하라는 뜻이 그 속에 있는 것인 줄 압니다.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니느웨성, 바벨론 포로 때의 유대나라 등에 언제나 미리 예언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종말에 대한 예언입니다. 15절 말씀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끝이 온 줄로 알라고 하신 것은 다니엘서의 인용이었습니다.

다니엘의 예언은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을 침공하고 그들의 우상인 쥬피타의 신상을 성전 안에 세워 놓고 돼지를 잡아서 제사를 드렸다고 하는 역사 안에서 응하였다고 봅니다. 문자 그대로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성경을 인용하여 예언하신 것은 로마로 인하여 유대 나라가 망할 것을 직접적으로 예언하시는 데 뜻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로마제국 군대의 상징인 독수리 상을 성전 안에 세워 놓고 제사들인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예언은 이것만 생각하고 말씀하신 것은 아닌 것으로 봅니다. 역사의 종말을 말씀하시며 도시에 어느 시대에나 있을 수 있는 원리를 말씀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멸망의 가증한 것"이 무엇입니까? 가증한 것이란 원문대로의 뜻을 살피면 밉살스러운 것 또는 아주 참을 수 없이 싫은 것을 말합니다. 즉 꼭 망해야 할 자가 흥하고 마땅히 천한 대우를 받아야 할 자가 영광을 얻고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할 자가 복을 누리고 있어서는 아니 될 자가 있어지는 것, 또는 있어서는 안될 위치에 있는 자들을 뜻합니다. 목불인견(目不忍見)이며, 차마 볼 수 없는 꼴불견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거룩한 곳"이란 직접으로는 하나님의 성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뜻으로서는 하나님의 위치 즉 신적(神的)인 위치와 신적인 예배, 경배를 받는 위치를 뜻합니다.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종말이 온줄로 알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것이 종말의 예표이며 표징이라는 말씀입니다.

역사 가운데에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많습니다.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도 신적인 대우를 받다가 망했습니다. 특히 "쿼바디스"란 영화나 소설을 보면 네로 황제라는 어이없는 폭군이 나옵니다. 그는 자기가 세계 제일의 시인이요, 음악가라고 자처하며 친히 시를 읊고 또 곡을 붙여서 손수 악기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불렀고 굉장한 시상을 위해서 로마성을 불을 지른 변태적인 성격의 왕이며 자기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졸았다고 해서 신하를 열 일곱 명이나 죽였다는 어이없는 폭군인데 이 속물(俗物)이 자기는 신()이다, 죽지 아니한다고 하며 자기를 살아 있는 신으로 섬기라고 강요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망했으며 대로마제국의 망국사도 끝내는 황제 숭배의 종교의식이 강요되며 이를 거부한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죽이면서 속물들이 신의 대우를 받으려고 했던 것을 역사에서 밝혀 볼 수 있습니다.

히틀러도 일본의 천황도 하나의 속된 인간이거늘 그들이 권력을 가질 때 인간의 모든 영광을 다 누리면서도 이것이 부족하여 신의 영광을 받아 보려고 하다가 결국 패망한 것을 역력히 볼 수 있습니다.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면 끝이 온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다시 이 말씀을 우리의 생활과 우리 네 사회 구조와 그리고 인격 안에서 소화해야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알며 어리석은 자가 지혜 있는 체하고 없고도 있는 체 죄인이면서 의인인 체 이것들도 가증한 것이요 볼 수 없는 것이며 꼴불견입니다. 특히 혼란 속에서 어쩌다 돈은 벌어서 인격은 갖추지 못한 채 돈만 가진 벼락부자! 이것은 정말 목불인견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돈이면 다인 줄로 알고 허세를 부리며 안하무인격으로 자기를 높혀 놓고 가정부이건 자가용 운전사이건 아직도 옛날에 종을 부리듯 하는 꼴이야 차마 볼 수 없는 가증한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문제되는 것은 거룩한 곳의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 모순과 부조리는 있는 것이 사실이고 거짓도 부정도 엄연히 존재한다고 봅니다. 최선이란 이름의 거짓, 합리적인 이론을 바침하고 있는 정당화한 부정, 가치 현실화의 지지를 받고 있는 상황적인 불가피한 죄악 같은 것들이 우리 주위에서 분명히 판을 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용납하시고 때로는 침묵하시고 길이 참아 주시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거짓은 용납된다해도 위선(僞善)은 안되며 위성(僞聖)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물건을 도적한 자는 살았으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죽었습니다. 죄인이 살 수도 있고, 잘 살 수도 있으며 권력을 가지고 호령하며 명예를 얻고 영광을 누리기도 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성자(聖者)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적인 대우를 받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부정한 자가 권력을 가질 수는 있으나 거룩한 자의 위치에 오를 수는 없고 거짓된 자가 잘 살 수는 있을지 모르나 성자의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속물(俗物)이 부자가 되고 권력자도 되겠지만은 거룩한 자의 위치에 오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김일성이란 사람이 혁명가의 대우를 받는 것까지는 좋고 불의한 자가 권력을 손에 쥐고 폭력을 내두르며 호령하는 것까지는 있을 수 있으나 이제 인간의 선을 넘어서 종교적인 대상이 되고 신적인 존경과 경배를 받고 있으니 이 또한 끝이 온 것을 말해 줍니다.

가증한 것이 언제든지 거룩한 곳에 세워지면 곧 끝이 온다는 진리입니다. 깊이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사회 안에 혹이나 가증한 것이 정당한 자의 위치에 엄연히 있을 뿐더러 나아가서는 신적인 경배를 받고 있지 않으며, 스스로를 절대화하여 가증한 꼴을 노출하고 있지는 않는가? 언제나 그 징조를 밝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은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의 거룩한 곳 즉 성전입니다. 돈은 힘이 있어서 권력도 지식도 때로는 인격까지 지배하며 또 사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돈이 종교적 경배의 위치에 오르면 망하는 것입니다. 돈이건 지위이건 지식이건 인격이건 무엇이던지 신적인 위치에 오르고 섬기는 위치에 오르며 예배의 대상이 되면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돈은 지배해야 하는 것이지 돈을 섬기고 경배하면 곧 망합니다. 그 무엇이든지, 그 누구든지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게 되면 곧 망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살아 계신 증거입니다. 우리의 거룩한 마음 성전 안에 그 어떠한 가증한 것도 세워져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대우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하나님으로 섬기고 경배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루터는 "Let God be God"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 하라고 외쳤습니다. 모르드개는 이 뜻을 따르다가 죽을 뻔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만을 경배하라는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의 쓰는 돈 안에 "In God We Trust"라고 쓰여 있는 것을 봅니다. "돈은 쓰되 돈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하나님만 의지합니다."라는 신앙 고백을 볼 때마다 그들 조상들의 귀한 신앙을 엿 볼 수 있습니다.

끝의 징조를 보고 끝을 알았으면 이제는 뒤로 돌이키지 말라고 하십니다. 롯의 아내를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영원한 생명만 의지하며 믿음만을 위하여 전심전력하라 하십니다. 환난과 핍박과 유혹이 심하게 되리라고 예언하십니다. 그러나 13절에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밝은 소망을 보여 주십니다.

끝까지 하나님만 경배하며 믿음을 지키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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