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는 윈윈의 바탕입니다 (신명기 19장 14절) < 공의는 윈윈의 바탕입니다 >
여당과 야당의 관계는 동양철학의 음양 관계와 같습니다. 동양철학의 음양 관계는 서로 반대되는 모순관계가 아닙니다. 음양 관계는 서로의 차이를 인식해도 서로를 배척하지는 않습니다. 음은 양의 존립기반이고 양은 음의 존립기반입니다. 건전한 음양 관계는 서로를 예속화시키는 대립관계가 아니고 서로를 인정하며 조화롭게 맞물린 관계입니다. 서로 예속화하려는 굴절된 정치문화가 나라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상대의 파멸 위에서 진정한 발전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두 마리 붕어가 한 작은 연못에 살았습니다. 그곳을 독점하고 싶어 강한 붕어가 약한 붕어를 죽였습니다. 얼마 후 죽은 붕어가 썩어 물이 독기로 가득 차 결국 강한 붕어도 죽었습니다. 남을 죽이려고 하면 내가 죽을 때가 많습니다. 사람은 ‘공존하는 존재’이면서 ‘동역하는 존재’입니다. 공존과 동역의 원리가 같이 추구될 때 공동체에 희망이 넘치게 됩니다. 공존의 원리는 삶의 기초와 같고 동역의 원리는 삶의 기둥과 같습니다.
정치란 상대를 비난하는 게임이 아닙니다. 상대에게 비난의 화살을 쏘면 그 화살은 상대의 가슴을 아프게 만듭니다. 그때 순간적인 승리감은 있어도 결국 그것이 공동체 전체를 멍들게 하고 결국 자기도 멍들게 합니다. 공동체는 공존과 동역의 윈윈전략으로 난제들을 같이 헤쳐 나가야 합니다. 어려울 때 전체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 살겠다는 전략은 바람직한 전략이 아닙니다. 서로 물고 뜯는 전략으로 모두를 피투성이로 만드는 대립의 정치가 아닌 윈윈전략으로 모두를 승리자로 만드는 공의의 정치가 필요합니다.
의와 정의와 공의는 개념이 유사한 개념이지만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의는 ‘바른 것’을 뜻하는 일반적인 개념이고, 정의는 의를 강조한 개념으로서 ‘똑바른 것’을 뜻하고, 공의는 의의 공적인 개념으로서 ‘모두에게 바른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이고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바른 일이 되기를 원하시면서 동시에 그 일이 모두에게도 유익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인생에서 전혀 승패가 없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승패를 요하지 않는 상황이 정의로운 상황은 아닙니다. 그런 상황은 이 땅에서는 없습니다. 심지어는 천국에서도 없습니다. “천국에서도 상급 차이가 있다.”는 개념은 천국에서도 승패가 있다는 말입니다. 정정당당하게 승패를 갈랐다면 승리한 사람도 이긴 것이고 패배한 사람도 이긴 것입니다. “부당한 승리보다 정당한 패배가 낫다.”는 말은 “정당한 패배도 승리한 것이다.”라는 개념을 이미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승패가 갈려야 하는 상황에서 승자와 패자가 생길 때도 너도 이기도 나도 이기는 윈윈의 길은 가능합니다. 언제 가능합니까? 공의가 이뤄질 때입니다. 공의가 실종되면 모두가 패자가 되고 공의가 이뤄지면 모두가 승자가 됩니다. 결국 윈윈의 역사는 공의가 이뤄지는 곳에서 생깁니다. 하나님은 누군가 불의한 피해를 입지 않고 인간사회에 공의가 이뤄져서 모두가 윈윈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 경계표를 옮기지 마십시오 >
하나님은 사회에 공의가 실종되지 않도록 여러 가지 구체적인 규례를 주셨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시한 규례 중의 하나가 땅의 소유와 관련된 규례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소유하시게 한 자기 기업의 땅에서 조상이 정한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경계표란 토지 등기 제도와 땅의 측량 지식이 취약했던 고대에 전답의 소유나 행정 구역을 구분하는 표시를 하고 세워놓은 돌을 뜻합니다. 경계표를 옮기는 것은 남의 땅을 불의하게 빼앗아 십계명의 8계명과 10계명을 어기는 파렴치한 범죄로 여겨졌습니다.
많은 죄악이 땅을 많이 차지하려는 본능에서 나옵니다. 땅은 생명을 품고 길러내는 기반입니다. 땅의 주인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라고 여길 때 죄악을 극복하는 능력이 커집니다. 땅을 많이 소유하려고 하지 말고 땅을 기반으로 잠시 살다가 떠나려고 해야 합니다. 또한 땅을 많이 소유하려고 하지 말고 많이 아름답게 가꾸려고 해야 합니다. 패배적인 사람은 자신이 머물다 간 땅을 더럽히고 파괴하는 사람이고 성공적인 사람은 자신이 머물다 간 땅을 아름답게 가꾸는 사람입니다.
생산적인 목적을 가지고 땅을 소유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계산적인 목적을 가지고 땅을 많이 차지하려는 것은 욕망에 휘둘리는 삶이 되기 쉽습니다. 투기하는 마음을 가지고 땅을 많은 차지하려는 것은 고대에 경계표를 옮기는 것과 같은 죄악이 될 수 있습니다. 물질문명이 발달할수록 성도에게 가장 요구되는 덕목 중의 하나가 절제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땅을 너무 깊이 파헤쳐서 착취하려고 하기보다 땅에 선한 발자취를 남기는 정도의 삶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땅보다 땀을 추구하려는 모습이 것이 바른 성도의 모습입니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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