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론적 태도를 버리십시오 (신명기 6장 1-4절) < 이원론적 태도를 버리십시오 >
이 세상에 하나님과 대립할 수 있는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영혼은 하나님이 만들고, 육신은 사탄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이원론 사상에 물든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영혼은 선하고 육신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혼도 만드셨고 육신도 만드셨습니다. 사람은 부활할 때 영혼만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도 부활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영으로 부활한 것이 아니라 육신으로 부활했다는 사실이 그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의 본능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과시와 자랑을 좋아하기에 이원론 사상을 선호합니다. 성은 속과 확실히 구분되어야 더 성스럽게 느낍니다. 그런 인간의 본능을 바탕으로 고대로부터 내려온 이원론 사상을 가장 확실하게 정립해 이론화시킨 사람이 바로 플라톤입니다. 플라톤은 그 이원론 사상으로 당시 그리스 젊은이들을 열광시켰지만 참된 성도는 결코 이원론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일원론의 종교이고 유일신교입니다. 하나님이 육체도 만드시고 성(性)도 만드셨습니다. 그런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진실한 성도는 성과 속을 너무 구분하지 말고, 세속까지 품으면서 세속 안에서 빛을 비추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과 속을 너무 구분하면 가장 신앙적인 것 같지만 가장 비 신앙적인 태도가 될 수 있습니다.
일전에 이단 시비에 걸린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목사님들을 세미나에 모아놓고 말했습니다. “목사들이 하루에 7시간 이상 기도하지 않으면 그게 목사입니까?” 전체적으로는 기도하라는 말이니까 맞는 말이고 은혜도 됩니다. 그러나 그런 논리가 지나치면 대개 이원론으로 흘러 기독교의 근본진리를 망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는 하루에 예배당에서 7시간 꼭 앉아 기도해야 영성도 깊어지고 교회도 부흥된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시간의 양이나 교회의 크기가 영성의 크기와 비례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또한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만은 아닙니다. 성경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은 “예배당에 24시간 동안 앉아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말씀의 더욱 깊은 의미는 “모든 일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일정 기간 하나님께 집중하는 마음으로 금식기도도 하고 하루에 7시간이나 17시간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1년 내내 매일 그렇게 기도만 하는 것은 자칫 영적인 과시와 사치가 될 수 있습니다. 매일 기도시간은 대략 2시간이면 충분합니다. 나머지 하루 중에 15시간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준비하고 자기의 맡은 사역을 해내고 때로는 휴식도 취해야 하나님 앞에 쓸모 있는 인생이 됩니다.
한 신혼부부가 있었습니다. 신랑은 신부를 지극히 사랑해서 신부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했고, 특별히 이불 안에서 신부와 도란도란 대화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신부도 처음에는 그런 신랑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신랑이 몇 달이 지나도 전혀 일은 하지 않고 매일 이불 안에 있으면서 신부가 이불 속으로 임재해주기만을 바라면 신부의 눈에는 신랑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고 한심하게 보일 것입니다.
나중에는 참다못해서 신부가 이불을 걷어차고 소리칠 것입니다. “아이고! 내가 못살아! 이 무책임한 신랑아! 사랑이고 뭐고 필요 없으니 일 좀 해!” 신랑이 자기 인생과 가정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고 맨 날 이불 안에 있으면서 아내가 이불 속으로 임재해주기만을 바라는 이원론적 생활태도를 가지면 그런 모습을 보고 살아야 하는 아내는 한숨만 나올 것입니다. 그러면 이불 속에 몸은 같이 있어도 마음은 한참 멀어지게 됩니다.
반대로 책임적인 신랑은 어떻게 합니까? 아침에는 이불을 걷고 나가서 일을 하고 힘써 재화를 창출해 가정을 돌보려고 할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신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때 몸은 일터에 있어서 신랑과 신부가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더욱 가까워집니다. 하나님은 그런 일원론적 생활태도를 가진 성도를 원하십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기도하겠다고 맨 날 기도 굴에 있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기도에 몰입하려고 일정 기간 동안 그렇게 하는 것은 좋지만 1년 내내 기도 굴에서만 지낸다면 하나님도 속이 많이 상하셔서 “너 언제 일하러 이곳을 떠날래!”라고 하실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이원론적 태도를 버리십시오. 이원론적 신앙은 가장 신앙적인 모습 같지만 가장 비 신앙적인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누가복음 13장 18-21절) (0) | 2022.12.23 |
---|---|
말씀 중심적인 신앙 (신명기 6장 5-9절) (0) | 2022.12.23 |
신명기(31) 하나님께 맞설 것은 없습니다 (신명기 6장 1-4절) (0) | 2022.12.23 |
큰 믿음을 가지십시오 (마태복음 14장 28-36절) (0) | 2022.12.23 |
결코 치우치지 마십시오 (신명기 5장 30-33절) (0) | 2022.12.2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