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셨을 때, 그 말씀은 인간의 의지를 과장하여 마치 마음만 세게 먹으면 무엇이든 이루어진다는 주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한마디는, 불가능의 벽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인간을 향해 “너의 시선이 어디에 고정되어 있느냐”를 물으시는 거룩한 부르심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늘 “할 수 있거든”이라는 말로 가득합니다. 조건을 달고, 가능성을 따지고, 확률을 세고, 손익을 계산합니다. 믿음마저도 종종 그 언어에 포획되어 “주님, 가능하면 해주십시오”라는 조심스러운 청원이 되곤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를 조건의 언어에서 건져 올려, 하나님 자신을 바라보는 언어로 옮겨 세웁니다. 믿음이란, 내 마음의 힘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은혜의 방향 전환입니다.
마가복음 9장의 현장은 그 사실을 눈물로 증언합니다. 산 위에서는 주님의 영광이 드러났고, 산 아래에서는 사람의 무력함이 드러났습니다. 제자들은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했습니다. 무리들은 소란스러웠고, 서기관들은 논쟁을 벌였습니다. 한 가정은 절망으로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 걸음마다 얼마나 많은 밤을 새웠겠습니까. 아이는 어릴 때부터 영을 앓았고, 그 영은 그를 땅에 넘어뜨리고, 거품을 흘리게 하고, 이를 갈게 하고, 파리하게 만들었습니다. 병의 길이는 세월이었고, 고통의 깊이는 가정의 역사였습니다. “어릴 때부터”라는 말 속에는, 수많은 기도와 수많은 실망과 수많은 상처가 차곡차곡 쌓여 있습니다. 오래된 고통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도의 혀끝을 마르게도 만듭니다. 처음에는 확신으로 부르짖다가, 시간이 지나면 “혹시”로 기도하고, 더 지나면 “할 수 있거든”으로 기도합니다. 그 아버지의 마음이 바로 그 지점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은 그 아버지를 꾸짖어 내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그의 말 속에 숨어 있는 두려움을 드러내시되, 그 두려움을 짓밟지 않으시고, 믿음의 문으로 초대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이는 차갑게 면박 주는 말이 아니라, 믿음의 가닥을 붙잡아 일으켜 세우는 사랑의 책망입니다. 마치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자에게 “그렇게 중얼거릴 시간이 있느냐, 이쪽을 보아라, 여기 길이 있다”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가능성’이 아니라 ‘주권’을 말씀하십니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말은, 믿음 자체가 기적을 생산한다는 뜻이 아니라, 믿음이 붙드는 대상이신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선언입니다. 믿음은 원인이 아니라 통로이며, 능력의 근원은 우리 안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은 자기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 확신입니다. 자기 믿음의 크기를 재는 것이 아니라, 크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기서 우리는 기적을 다시 정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기적을 “일상에서 벗어난 특별한 사건”으로만 생각합니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연의 질서 위에 서서 특별한 역사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일을 증언합니다.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면, 성경이 말하는 기적은 단지 ‘현상’이 아니라 ‘주권’의 빛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다스리신다는 사실이 한 사람의 삶 속에 드러나고 체험되는 것, 그것이 기적의 심장입니다. 그러므로 “기적이 일상이 되는 믿음”은 매일 초자연적 사건을 소비하듯 경험하는 삶이 아니라, 매일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함으로 평범한 날들 속에서 하나님의 비범하심을 발견하는 삶입니다. 같은 밥상, 같은 길, 같은 일터, 같은 가정이라도, 하나님을 주로 모시는 순간 그 일상은 은혜의 무대가 됩니다. 기적은 종종 갑작스럽게 하늘에서 떨어지기도 하지만, 더 자주 하나님이 이미 주신 은혜를 ‘보게 되는 눈’으로 시작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일하심을 ‘가능’이라고 추측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다스리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는 주님의 말씀 앞에서 마침내 숨겨 두었던 진짜 고백을 쏟아냅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이 고백이야말로 복음이 빚어내는 믿음의 정직함입니다.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 감정 상태가 아닙니다. 믿음은 흔들리면서도 주님께 매달리는 생명의 손입니다. 이 고백에는 두 가지가 함께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믿나이다”라는 방향성이고, 다른 하나는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는 의존성입니다. 방향이 하나님께로 향했고, 의존이 하나님께로 내려앉았습니다. 여기에 기적의 문이 열립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교만한 자기완성의 신앙을 기뻐하시지 않으시나, 자신을 비우고 주님께 매달리는 믿음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이 말하듯, 우리의 구원도, 우리의 성화도, 우리의 견인도,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믿음조차도 성령께서 우리 안에 일으키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약할수록 절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약한 믿음은 더 빨리 은혜의 자리로 이끕니다. 강한 척하는 믿음은 자주 자기 의를 쌓지만, 떨리는 믿음은 주님의 손을 더 꽉 잡습니다.
주님께서 이 아이를 고치시는 과정은 우리에게 중요한 진리를 남깁니다. 첫째로, 주님의 능력은 우리의 실패를 핑계로 멈추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실패했지만, 주님은 실패한 현장 한복판에서 주권을 드러내십니다. 교회가 연약해 보이고, 성도가 넘어지고, 우리의 기도가 충분치 못해 보일 때에도, 주님의 왕권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둘째로, 주님은 고통의 뿌리를 정확히 다루십니다. 겉으로는 발작이지만, 그 안에는 악한 영의 결박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단지 증상을 잠재우는 분이 아니라, 억눌린 영혼을 해방시키는 구원자이십니다. 셋째로, 주님의 역사에는 때로 ‘더 악화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 있습니다. 귀신이 아이를 심히 경련시키고 나가니,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합니다. 은혜가 임할 때, 어둠은 마지막 발악을 합니다. 회복이 시작될 때, 옛 습관과 옛 죄성이 더 크게 소리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가 끝이 아니라, 끝이 가까운 신호일 수 있습니다. 넷째로, 주님은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촉감입니다. 주님은 말씀으로 명령하시고, 손으로 붙드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선언이면서 동시에 붙드심입니다. 주님의 견인하시는 은혜가 성도를 일으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제 “기적이 일상이 되는 믿음”을 우리 삶에 어떻게 심어야 하겠습니까. 먼저 우리는 믿음을 ‘결심의 불꽃’으로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결심은 필요하지만, 결심은 쉽게 꺼집니다. 믿음은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점화하시는 하늘의 불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일상이 되려면, 말씀의 일상이 먼저 세워져야 합니다. 말씀을 멀리하면서 믿음이 자라기를 바라는 것은, 뿌리를 끊어 놓고 열매를 기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할 수 있거든”이라는 우리의 언어를 “주님, 주님이 주님 되심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그 변화는 말씀을 통하여, 성령의 내적 역사로 이루어집니다.
또한 우리는 기적을 “내가 원하는 결과”로만 축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무시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보다 더 크신 뜻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설득하여 내 뜻을 이루는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께 설득되어 그분의 뜻에 나를 맡기는 순종입니다. 그래서 어떤 날에는 기도가 원하는 방향으로 응답되고, 어떤 날에는 다른 방향으로 응답됩니다. 그러나 어떤 방향이든, 그 응답이 우리를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이끈다면, 그 자체가 기적입니다. 병이 낫는 것도 기적이지만, 병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더 귀해지는 것도 기적입니다.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기적이지만, 문제가 남아 있어도 마음에 평강이 임하는 것도 기적입니다. 길이 열리는 것도 기적이지만, 닫힌 문 앞에서 주님을 더 깊이 아는 것도 기적입니다. 복음의 기적은 단지 상황의 변화가 아니라, 사람의 변화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형상으로 새겨지는 변화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예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어느 교회에 오랫동안 가정의 문제로 신음하던 한 성도님이 계셨습니다. 자녀는 방황했고, 부부의 대화는 얼어붙었고, 경제는 기울어졌습니다. 그분은 매주 기도회에 나와 눈물로 부르짖었지만, 상황은 쉽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그분이 이렇게 고백하셨습니다. “목사님, 이제는 기도할 힘도 없고, 믿음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할 수 있거든’이라는 말만 자꾸 나옵니다.” 그때 지도자가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그 말이 나오는 자리에서 멈추지 마시고, 그 다음 말을 주님께 드리십시오. ‘할 수 있거든’이 나오면 곧바로 ‘주님, 제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로 옮겨가십시오. 그리고 오늘 하루만, ‘주님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작은 순종 하나를 해보십시오. 원망 대신 감사 한 줄, 두려움 대신 말씀 한 절, 체념 대신 중보 한 사람.” 그 성도님은 그날부터 기도의 문장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문제가 있었지만, 하루가 지나고 한 주가 지나면서 그분의 얼굴에 이상한 빛이 깃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은 자녀의 변화가 아닌데도 마음이 무너지지 않았고, 어느 날은 대화가 회복되지 않았는데도 입술에서 축복이 나왔습니다. 몇 달이 지난 후 자녀에게 작은 전환이 일어났고, 부부 사이에도 대화의 실마리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가장 먼저 “기적”이라고 말한 것은, 상황의 변화가 아니라 자기 안에서 일어난 변화였습니다. “목사님, 저는 여전히 약하지만, 주님이 정말로 제 삶을 붙드신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이제는 하루가 무너지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것이 “기적이 일상이 되는 믿음”의 실제입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이 매일 확인될 때, 그 일상은 이미 기적의 자리입니다.
이 믿음은 결코 현실 도피가 아닙니다. 믿음은 현실을 가장 정직하게 마주하는 용기입니다. 그 아버지는 아이의 상태를 숨기지 않았고, 제자들의 실패도 부정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흔들림도 감추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눈을 감는 것이 아니라, 더 크게 뜨는 것입니다. 다만 무엇을 보느냐가 달라집니다. 환경의 파도만 보던 눈이, 파도 위를 걸으시는 주님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일상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아침의 피곤함 속에서도 “오늘도 주님의 자비가 새롭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되고, 반복되는 노동 속에서도 “주께 하듯 하겠습니다”라고 마음을 정돈하게 되며, 사람의 말에 상처받을 때에도 “주님의 칭찬이 나를 살립니다”라고 영혼을 세우게 됩니다. 이 작은 고백들이 쌓여, 성도님의 삶에 ‘하나님 중심의 습관’이 생깁니다. 믿음은 습관이 될 수 있습니다. 죄의 습관이 사람을 묶듯이, 은혜의 습관은 사람을 자유케 합니다. 기도의 습관, 말씀의 습관, 감사의 습관, 회개의 습관,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습관, 성도의 교제를 사랑하는 습관이 쌓일 때, 성도님의 일상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변합니다. 그 변화를 성경은 성화라 부릅니다. 그리고 그 성화는 우리가 만들어내는 작품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공로를 우리에게 적용하심으로 빚어 가시는 은혜의 열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9:23의 약속은 십자가 없는 승리를 보장하는 문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약속은, 십자가를 지나 부활로 이끄시는 주님의 길을 신뢰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선언은, 주님이 우리를 고난에서 즉시 꺼내 주신다는 단선적 약속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목적을 이루시며 끝내 선으로 이끄신다는 구원의 확신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의 원함을 들어주시고, 때로 우리의 원함을 깨뜨리시며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더 좋은 것은 대부분 ‘그리스도’입니다. 더 깊은 위로, 더 큰 순종, 더 순전한 사랑, 더 부드러운 마음, 더 낮아진 자아, 더 뜨거운 예배, 더 견고한 소망,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즐거워하는 마음입니다. 이것들이 우리 안에 자리 잡는다면, 그 삶은 이미 기적입니다. 겉모양의 요란함이 없어도, 속사람이 새로워지는 은혜는 날마다 기적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주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도 그 아버지처럼 고백합시다. “주님, 제가 믿습니다. 그러나 제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옵소서.” 그 고백은 패배의 선언이 아니라, 은혜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주님은 완벽한 믿음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라, 주님께 나오는 믿음을 받으시는 분입니다. 주님께서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작은 믿음을 붙드셔서 큰 순종으로 이끄십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의 손을 잡아 일으키십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그 일어섬이 하루의 방향을 바꾸고, 그 방향이 습관을 만들며, 그 습관이 인생을 빚어, 마침내 “기적이 일상이 되는 믿음”이라는 향기를 남기게 하십니다. 기적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주님이 가까이 계십니다. 주님이 다스리십니다. 주님이 붙드십니다. 그러니 오늘도 조건의 말 “할 수 있거든”에서 벗어나, 은혜의 고백 “주님이 하실 수 있습니다”로 걸음을 옮기십시오. 그 고백 위에, 주님이 성도님의 일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채우실 것입니다.
요약
마가복음 9:23은 믿음의 크기 자체를 강조하는 말씀이 아니라, 믿음이 붙드는 대상이신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선포합니다. “할 수 있거든”이라는 조건의 언어를 주님은 믿음의 언어로 전환시키시며, 아버지의 정직한 고백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를 통해 은혜의 통로를 여십니다. 기적은 단지 특별한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이 일상 속에서 확인되고 체험되는 은혜의 역사입니다.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믿음조차 성령의 선물이며,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해 은혜로 자라며 은혜로 견인됩니다.
묵상 포인트
- 제 마음의 기도 언어는 “할 수 있거든”에 머물러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 제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로 옮겨가고 있습니까.
- 제가 기대하는 기적은 상황의 변화에만 묶여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께서 제 ‘내면의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기적을 보고 있습니까.
- 제 일상에서 반복되는 자리에,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는 습관(말씀, 기도, 감사, 회개, 순종)이 심어져 있습니까.
- “더 악화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 저는 무엇을 결론으로 삼습니까. 사람의 판단(“죽었다”)입니까, 주님의 붙드심(“손을 잡아 일으키심”)입니까.
강해
본문은 산 아래의 혼란, 제자들의 무력, 아버지의 절망, 그리고 주님의 주권이 교차하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는 믿음의 방향을 바로잡는 말씀으로, 인간의 가능성을 계산하는 태도를 하나님 중심의 신뢰로 전환시키는 책망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문장은 믿음이 기적을 ‘생산’한다는 뜻이 아니라, 믿음이 붙드는 하나님께 불가능이 없다는 선언입니다. 아버지의 “내가 믿나이다…도와주소서”는 신앙의 정직함을 드러내며, 자기 의의 확신이 아니라 은혜에 대한 의존이 기적의 통로임을 보여줍니다. 치유 과정에서 나타나는 격렬한 경련과 “죽은 것 같음”은 어둠의 마지막 발악이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하며, 주님이 손을 잡아 일으키시는 장면은 구원의 인격적 붙드심과 견인의 은혜를 상징합니다.
주석
- “할 수 있거든”: 아버지의 말에 담긴 조건부 신뢰와 오랜 고통의 피로가 드러납니다. 이는 불신앙의 냉소라기보다, 지친 영혼의 흔들림에 가깝습니다.
- “믿는 자에게는”: 주님의 초점은 ‘믿음의 감정 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 향하는 신뢰의 방향’입니다.
-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전능을 드러내는 표현으로, 하나님의 뜻과 주권 안에서 불가능이 없음을 뜻합니다. 이 말은 성도를 자기 욕망의 전능자로 만들지 않고, 하나님을 참된 전능자로 높입니다.
- “내가 믿나이다…도와주소서”: 믿음과 불신이 한 사람의 마음에 동시에 흔들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고백이며, 동시에 그 해결을 ‘자기 훈련’이 아니라 ‘주님의 도움’에 둡니다. 이는 은혜 중심 신앙의 정수입니다.
원어 주석(핵심 어휘 중심)
- “믿다”(헬라어 pisteuō 계열):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라, 의탁·신뢰·맡김의 의미를 포함합니다.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자기 확신의 양’이 아니라 ‘주님께 맡김’입니다.
- “할 수 있다/능력”(헬라어 dynasthai, dynamis 계열 개념): 본문에서 능력은 인간의 잠재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에 근거합니다. 믿음은 그 능력을 ‘소유’하지 않고 ‘의지’합니다.
- “도와주소서”(헬라어 boētheō 계열의 도움/구원 호소 뉘앙스): 외부에서 붙들어 주지 않으면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절박한 의존을 담습니다. 구원론적으로 이는 은혜의 필요를 인정하는 자리입니다.
금언
- “믿음은 내 마음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께 향한 마음의 방향입니다.”
- “기적은 삶의 바깥에서 터지는 사건만이 아니라, 삶의 안쪽에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이 확증되는 은혜입니다.”
- “약한 믿음은 절망의 이유가 아니라, 주님의 손을 더 가까이 붙드는 이유입니다.”
- “하나님은 우리의 ‘가능’이 아니라, 당신의 ‘주권’으로 일하십니다.”
신학적 정리(개혁주의/복음 중심)
- 믿음의 본질: 믿음은 공로가 아니라 수단이며, 근원은 인간이 아니라 성령의 은혜입니다.
- 하나님의 전능과 뜻: “불가능이 없다”는 선언은 인간 욕망의 무제한 보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주권 아래 역사하시는 전능의 확신입니다.
- 성화와 기적: 성화는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은혜의 과정이며, 매일의 순종과 회개와 말씀 안에서 기적처럼 진행됩니다.
- 견인의 은혜: 주님이 손을 잡아 일으키시는 장면은 성도가 끝까지 서게 하시는 하나님의 견인을 상징합니다.
주제별 정리(믿음/기도/일상/고난)
- 믿음: 흔들리지 않음이 아니라, 흔들리면서도 주님께 매달림입니다.
- 기도: 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이는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께 붙들리는 통로입니다.
- 일상: 반복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습관이 쌓일 때, 일상은 은혜의 무대가 됩니다.
- 고난: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목적이 진행되며, 때로 어둠의 마지막 발악 뒤에 회복의 손길이 나타납니다.
목회적 정리(위로/권면/인도)
- 오래된 고통을 겪는 성도에게: “주님은 지친 기도를 멸시하지 않으시고, ‘할 수 있거든’의 혀끝을 ‘도와주소서’의 은혜로 바꾸어 주십니다.”
- 실패를 경험한 교회와 사역자에게: “제자의 실패가 주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못합니다. 주님은 실패의 현장 한복판에서 주권을 드러내십니다.”
- 즉각적 응답이 없을 때: “하나님은 더디게 응답하시는 것처럼 보여도, 우리를 그리스도께 더 깊이 결속시키는 방식으로 반드시 선을 이루십니다.”
성도들의 결단 및 적용(구체적 실천)
- 오늘부터 “할 수 있거든”이 입술에 맺히는 순간마다 즉시 기도를 바꾸겠습니다. “주님, 제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 하루 한 절이라도 말씀을 ‘정보’가 아니라 ‘의탁’으로 받겠습니다. 읽은 말씀을 한 문장 기도로 되돌려 드리겠습니다.
- 기적의 기준을 바꾸겠습니다. 상황의 변화만이 아니라, 제 마음의 변화(평강, 순종, 감사, 사랑)를 주님의 기적으로 기록하겠습니다.
- 반복되는 일상 한 가지를 “주께 하듯” 드리는 예배로 바꾸겠습니다. 작은 친절, 한 번의 용서, 한 줄의 감사, 한 번의 중보를 실천하겠습니다.
- “죽었다”는 사람의 결론이 들릴 때, 주님의 붙드심을 붙잡겠습니다. 흔들려도 교회 공동체와 예배의 자리에서 떨어지지 않겠습니다.
Full Source : Artificial Intellig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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