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 판단하고 더 행동하십시오 (로마서 2장 1-8절) < 판단과 관련된 원리 >
본문에는 판단과 관련된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판단과 관련된 말씀은 시험에 든 성도가 있을 때는 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더 시험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평안할 때를 택해서 이 말씀을 전하면 은혜롭게 수용될 수 있습니다. 성도는 판단과 관련해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요?
1. 쉽게 판단하지 마십시오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사람은 다 비슷한 죄인이기에 남을 판단하는 것은 자기를 정죄하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판단, 핑계, 정죄와 같은 단어들은 사람을 원래보다 형편없게 만드는 단어들입니다.
하나님은 형편없는 사람도 쓰시려고 하는데 사람은 멀쩡한 사람마저 형편없게 만들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도 다 비판할 것이 있었고 때로는 형편없는 사람도 쓰임 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자기 기준과 잣대로 남을 쉽게 판단하지 마십시오. 남을 판단하는 눈으로 늘 자신부터 먼저 살피고 말할 때는 듣는 사람에게 덕이 되고 좋게 말하는 습관을 들이십시오.
어떤 사모님은 이름이 약간 촌스럽습니다. 그래도 사모님을 좋아하는 성도는 그 이름이 순박하게 느껴져 부를수록 좋다고 합니다. 늘 좋은 면을 보고 좋게 말하려고 하십시오. 왜 교회가 어려워집니까? 대개 말 때문입니다. 특히 조심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자랑하는 말이나 판단하는 말입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하나님께서 “맞아! 네가 훌륭하구나! 네가 교회를 많이 위하는구나!”라고 칭찬하시기보다 오히려 심판하실 것입니다(2-3절).
쉽게 판단하는 것은 회개할 줄 모르고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와 용서와 인내를 멸시하는 행위입니다(4절). 결국 판단하는 말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것입니다(5절). 쉽게 판단하는 사람은 좋지 않은 말을 퍼뜨리면서 문제와 고난을 증폭시킵니다. 공동체 생활에서 문제가 느껴질 때 가장 좋은 해결 방법은 자신부터 바뀌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변화와 헌신이 없이 말로만 수군대면 그것은 판단하는 말이 되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쌓게 됩니다. 자기 생각만으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쉽게 판단하지 마십시오.
2. 바른 판단력을 구하십시오
“쉽게 판단하지 말라!”는 말은 “전혀 판단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명백한 잘못은 잘못했다고 해야 합니다. 사실에 입각한 정당한 판단까지 “너는 완벽하냐? 쉽게 판단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사랑이 많은 태도 같지만 자기 의가 삐죽이 드러난 태도입니다. 쉽게 판단하지 말라는 명령은 함부로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명령이지 정당하고 바른 판단까지 막으라는 명령은 아닙니다. “쉽게 판단하지 말라!”는 말을 쉽게 하는 것도 조심하십시오.
바르고 정당한 판단은 필요합니다. 이단이 잘못된 길로 영혼을 오도하면 잘못했다고 판단해야 합니다. 이단의 잘못을 언급하는데 “목사님! 쉽게 판단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그렇게 판단하나요? 우리 할 일만 해요.”라고 한다면 의와 사랑이 많은 말 같지만 그것은 의와 사랑이 아닙니다. 이단은 이단이라고 판단하고 사람들을 주의시켜야 합니다. 영혼을 도둑질하면서 정상적인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을 깨뜨리고 인력과 물질을 빼앗기 때문입니다.
이단을 단순히 교리가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이단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핵심 진리에서 벗어난 것이 아닌 지엽적인 교리 차이로 쉽게 판단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이단에 대한 판단은 단순히 교리 차이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단은 중요한 교리에서 이탈할 뿐만 아니라 성경에 없는 주장을 하고 기적을 보여준다면서 기존 교회에서 영혼을 빼앗고 결국 물질을 빼앗습니다. 그 빼앗는 수단으로 대개 거짓말과 거짓 행동을 사용해서 이단으로 판단하는 것이지 쉽게 이단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단들은 영혼을 탈취하려고 온갖 거짓말을 다 동원합니다. 눈앞에서 순식간에 옷이 바뀌는 마술 등에는 다 트릭이 있습니다. 그런 트릭보다 훨씬 난이도가 떨어지는 트릭으로 ‘성령 수술’이란 명목으로 치유를 가장해 많은 병자들의 육신과 정신을 죽이고 수많은 거짓들로 영혼들을 미혹하면 당연히 이단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그때 “왜 병을 치유해주려고 애쓰는데 쉽게 판단해!”라고 하면서 교주의 거짓을 덮어주는 것을 사랑인 줄로 아는 것이 문제입니다.
종교 자유는 보장되어야 하지만 거짓 술수로 사람을 미혹해 이단 왕국을 키우는 것까지 그냥 방치하면 안 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검찰수사를 하면 공권력 남용으로 종교자유를 침해할 수 있기에 피해자의 고발이 중요합니다. 피해자나 피해자 가족이 이단 교주의 거짓 약속과 거짓 예언과 거짓 기적에 속아 피해를 입었다면 용기 있게 신고하고 그런 신고가 복수의 증언으로 타당성이 인정되면 엄정한 검찰수사에 나서야 합니다.
자기 그룹에 들어와야 천국의 144000명에 선택된다는 주장 등은 명백한 종교사기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 주장이 종교 사기임은 평소에 행하는 그들의 거짓말과 거짓 행동이 대개 증명합니다. 자기 정체를 속이고 기존 교회에 침투하는 것 자체가 거짓 행동입니다. 어떤 하나님과 어떤 참 신이 거짓말과 거짓 행동으로 전도하라고 하겠습니까? 거짓을 행하면서 내세우는 주장은 진리일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이단 종교에 빠지면 거짓말과 거짓 행동도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하지 못하고 무조건 교주를 옹호한다는 것입니다.
이단에 대해 바른 판단력을 가지게 하는 것을 “너만 옳으냐? 쉽게 판단하지 말라!”고 감싸는 것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쉽게 판단하지 말라!”는 말을 거짓도 덮어주라는 변명의 근거로 삼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넘치는 행위가 아니라 사랑을 왜곡하는 행위입니다. 요한복음 7장 24절에서 예수님은 절대 판단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고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고 하셨습니다. 판단할 때는 바르게 판단할 수 있도록 최대한 힘쓰십시오.
3. 진리를 따라 판단하십시오
하나님의 심판은 진리대로 됩니다(2절). 진리는 말씀, 진실, 사실, 정직, 정도, 정당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기에 진리를 따라 판단하라는 말씀은 말씀과 사실에 입각해서 정정당당하게 자기 이름을 걸고 판단하라는 말씀입니다. 인터넷을 보면 유명인에 대해 인신공격과 중상모략과 심지어는 인격살인에 가까운 비방 댓글을 익명으로 집요하게 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정당당하게 나서지 않고 숨어서 찌르는 모습은 아주 비겁한 모습입니다. 물론 익명으로 어느 정도의 정당한 비판은 할 수 있지만 집요하게 인신공격성 댓글을 다는 것은 죄입니다.
‘국거박’이란 닉네임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국민 거품 박병호’라는 약자인데 야구선수 박병호를 거의 저주에 가까운 정도로 집요하게 비방하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스토커처럼 기사마다 악성댓글로 달며 비방하는지 인터넷 백과사전에 그 닉네임이 등재될 정도입니다. 옆에서 지켜보는 독자들조차도 분노로 인해 정신적인 피해를 호소할 정도인데 피해 당사자는 얼마나 정신적인 고통이 크겠습니까?
단순한 악성댓글이 아니고 한 개인을 인격적으로 집요하게 스토커처럼 악성댓글로 공격하는 것은 영혼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그 고통을 유명인이 감당해야 할 숙명이라고 하며 지켜보지만 말고 법과 공권력이 제지하거나 막아주어야 합니다. 일종의 영혼 폭력이기 때문입니다. 유명인이니까 그런 폭력을 감수하라는 태도는 ‘사회적 지성’을 마비시킵니다. 사회적 지성이 마비되면 그 사회가 치러야 할 부정적인 대가가 큽니다. 악성 댓글 문제는 자정작업으로 푸는 것이 좋지만 국거박의 경우는 자정작업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자기 정체를 밝히지 않고 익명으로 유명인에게 인신공격과 인신비하를 스토커처럼 집요하게 하는 것은 심각한 정신적인 폭력입니다. 그것이 피해자의 가족이나 동료나 팬에게 주는 고통도 심합니다. 익명의 비방 스토커에게 무서운 인신비방을 해도 좋다는 백지위임을 사회가 해준 것이 아니고 해주어도 안 됩니다. 익명으로 뒤에서 끊임없이 비방의 총질을 하는 것은 불의한 것입니다. 그것을 그냥 방치하는 것은 기울어진 경기장 사회를 그냥 놔두는 셈입니다.
집요한 스토킹 폭력에 대해 법과 공권력이 막아주어야 사회적 지성이 작동합니다. 때리는 사람은 익명으로 즐기면서 계속 때리고 맞는 사람은 고통 중에 계속 맞기만 하는 것을 그냥 지켜보는 것은 정의가 아닙니다. 스토커 방지법은 사이버 공간에도 상식 수준에서 엄격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법 이전에 상대는 광장에 놔두고 자신은 숨어서 무차별 공격을 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비인격적이고 비겁한 일입니까?
철천지원수에게 복수할 때도 그런 비겁함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숨어서 비겁하게 집요하게 공격하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진리와 진실을 따라 판단하고 비판해야 합니다. “사회가 어차피 엉망진창인데 그냥 놔두지.”라고 방관하면 안 됩니다. “어차피 죄인들이 모인 사회니까...” 라고 하면서 선한 공동체와 선한 사회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포기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더 개선하려고 힘쓰는 것은 하나님과 역사를 두려워하는 사람의 당연한 태도입니다.
4. 행동을 통해 판단하십시오
본문 말씀을 보면 ‘행한다’란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행함이 중요한 판단기준이라는 암시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잘 판단하느냐?”를 보시지 않고 “얼마나 잘 행하느냐?”를 보시고 복을 내리거나 심판을 내리십니다(6-8절). 행동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좋은 일을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복된 삶이 아닙니다. 봉사 문제와 관련해서 “목사님! 앞으로 봉사 많이 하게 기도해주세요.”라고 하기보다 먼저 봉사에 나서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목사님! 이 봉사하는 마음이 식지 않게 기도해주세요.”
교회생활에서의 참된 기쁨과 행복을 얻어 누리려면 최소한 한 가지 이상의 봉사로 행동하는 믿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생각만 하지 말고 행동하면서 생각하고 기도만 하지 말고 행동하면서 기도하십시오.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은 부모가 없는 고아나 찢어지게 가난한 걸인만이 아닙니다. ‘선을 알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도 매우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소유와 능력과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 선한 일을 많이 하십시오.
선을 행할 때는 조용히 하십시오. 선행이 자랑이 되면 하나님의 축복은 사라집니다. 바리새인의 잘못은 선행을 한 것에 있지 않고 선행을 자랑한 것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오래 지속시키려면 자랑하지 마십시오. 암탉이 알을 낳고 가만히 있으면 알을 뺏기지 않지만 “꼬끼오! 알을 낳았어요!” 하고 자랑하고 다니면 주인이 와서 알을 가져갑니다. 그처럼 선행을 하고 “꼬끼오! 제가 이런 일 했어요!” 하고 은근히 과시하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도로 가져가실 것입니다.
알아주기를 바라고 봉사하고 선행을 하고 특별 헌금을 하면 그 봉사와 선행과 헌신 자체는 좋은 일이지만 하나님의 축복을 예비하는 모습은 아닙니다. 사람의 인정을 받음으로 이미 보상을 받은 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랑하고 드러내는 모습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선한 일을 한다고 하지만 그 선한 일의 목적이 자기 유익에 있으면 복된 모습이 아닙니다. 선행은 은밀하게 하십시오. 소리 없는 은근한 진실로 선행을 하는 성도가 복된 성도입니다.
진 웹스터가 지은 <키다리 아저씨>란 소설이 있습니다. 그 소설을 통해 ‘키다리 아저씨’란 ‘정체를 알 수 없는 은밀한 후원자’를 뜻하는 관용어가 되었습니다. <월새기(월간 새벽기도)> 문서선교 사역은 ‘키다리 아저씨’가 없다면 지속될 수 없습니다. 지금 <월새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와 도전을 주면서 “나도 누군가를 위한 키다리 아저씨가 되리라!”는 꿈을 품게 만듭니다. 그처럼 아름다운 선행 및 영적 선순환의 역사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소리도 없이 이뤄지기에 더욱 내적인 기쁨과 보람과 가치가 크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 덜 판단하고 더 행동하십시오 >
영성이 깊다고 자부하는 어떤 사람은 교회에 새로 등록하자마자 자기 기준으로 교회를 판단합니다. 그리고 기존 교인들까지 하나씩 판단하며 말합니다. “아무개는 기도에 진심이 없다. 아무개는 신앙이 어리다.” 그 말은 한 마디로 자기 영성이 최고라는 말입니다. 그처럼 자기를 높이는 말이 공동체에 돌아다니면 사람들 사이에 반드시 생기는 것이 ‘나뉨’입니다. 성도가 가장 추구해야 할 것은 ‘행복한 나눔’이고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불행한 나뉨’입니다.
판단하는 마음이나 자기 체험만 진리로 여기는 독단주의(dogmatism)를 버리십시오. 자기 믿음 스타일로 남을 아래로 보고 판단하면 하나님이 결코 기뻐하지 않습니다. 집사가 주일에 빠지면 “집사님! 지난 주일에 보고 싶었어요!”라고 하되 “집사님! 주일에 빠지면 됩니까?”라고 가시 돋친 말이나 은근히 자기를 높이는 말로 상처를 주지 마십시오. 늘 마음과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남을 세워주고 격려하는 말은 듣는 사람에게 큰 힘이 됩니다. 더 나아가 위로와 격려를 행동으로 보여주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판단은 최대한 줄이고 행동은 최대한 늘리십시오. 덜 판단하고 더 행동하십시오. 인생을 위대하게 만들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특성은 바로 ‘판단하는 자세’이고 인생을 위대하게 만드는 가장 큰 특성은 ‘행동하는 자세’입니다. 늘 하나님 앞에 겸허하게 서서 남을 판단하기보다 자신부터 성찰하고 힘써 사랑하고 격려하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함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내일의 축복을 예비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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