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름에 합당한 3대 삶 (에베소서 4장 1-3절) < 부름에 합당한 3대 삶 >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이 말씀에서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했는데 부름에 합당한 삶은 어떤 삶일까요?
1. 목적이 있는 삶
길을 가다 보면 가끔 아스팔트길을 뚫고 나온 들풀이 보입니다. 연약한 풀잎이 딱딱한 아스팔트길을 뚫고 나온 것을 보면 얼마나 신기합니까? 그것이 생명의 힘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이 세상에 하찮은 존재나 하찮은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풀잎 하나도 하찮은 것이 아닙니다. 하물며 구원받은 성도의 생명은 얼마나 소중합니까? 더 나아가서 그 성도가 창조주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은 얼마나 더욱 소중합니까?
어떤 사람도 하찮게 여기지 마십시오. 특히 성도의 예배와 기도는 결코 하찮은 일이 아닙니다. 또한 말씀에 순종하고 선하게 살려는 삶도 결코 하찮은 삶이 아닙니다. 때로는 실패조차 하찮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면 하나님은 실패조차 멋있게 사용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성공 재료로 삼습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에서는 구원받은 성도를 하나님의 걸작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없이 꾸미는 사람의 계획보다 훨씬 더 훌륭한 계획을 꾸미고 계십니다. ‘걸작’이란 말은 헬라어 ‘포이에마(poiema)’라는 단어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 단어에서 영어의 ‘포임(poem,시)’이란 단어가 생겨났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시와 걸작으로서 선한 목적을 위해 지음 받았습니다.
사람은 선행으로 구원받지는 않았지만 선행을 실천하라고 구원받았습니다. 즉 선행이 구원의 이유는 될 수 없지만 구원의 결과로 선행은 있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면 자신을 통해 좋은 일이 많이 이뤄지도록 자신을 드리겠다는 목표를 가지십시오. 예수님은 요한복음 4장 34절에서 말씀했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이루는 것은 영혼의 식량과 같아서 좋은 일을 많이 할수록 영혼과 육신은 살아납니다.
2. 서로 용납하는 삶
본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서로 용납하는 삶을 위해 4가지가 필요함을 언급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1) 겸손
겸손하라는 말씀은 능력과 실력을 갖추지 말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능력과 실력을 갖추되 마음은 최대한 낮추라는 말씀입니다. 겸손은 자기의 죄와 허물과 부족을 깨닫는 것입니다. 남을 욕하고 깔보는 마음이 들 때마다 먼저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내게도 죄와 허물이 많지.” 물은 낮은 데로 흐르고 이슬은 골짜기에 내리듯이 하나님의 은혜도 겸손한 마음에 임합니다. 겸손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도 주어지지만 그 전에 마음이 평안합니다. 믿음은 최고의 것을 얻게 하고 사랑은 최선의 것을 이루게 하고 겸손은 최대의 것을 보존하게 합니다.
2) 온유
겸손의 뿌리에서 온유의 싹이 나옵니다. 온유와 온순은 다릅니다. 온순은 천성이지만 온유는 성령의 감동으로 변화된 성품입니다. 온순하지만 마음이 높은 불신자도 많습니다. 반면에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사람과 화목하고 자신을 잘 용납합니다. 실수하고 실패했어도 너무 자신을 책망하지 마십시오. 사람은 본질적으로 약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용서한 것처럼 자신도 자신을 용서하십시오. 자신을 용서하는 온유한 믿음이 있을 때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평화의 초석이 될 수 있습니다.
3) 오래 참음
오래 참을 때 특히 말을 잘 참아야 말썽이 없습니다. 사랑은 성내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버럭 성을 낸 후 말합니다. “저는 뒤끝이 없어서 금방 풀어요.” 분노의 폭탄을 터뜨리거나 언행의 돌팔매질로 남을 뒤끝이 있게 만들어놓고 자기는 뒤끝이 없어서 금방 풀었다는 말이 얼마나 이기적인 말입니까? 그래서 머리가 비상한 현대인들은 뒤끝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즉시 ‘편협한 이기주의자’를 연상합니다. 자기는 금방 푼다고 하면서 쉽게 성내는 것은 상대에게는 큰 상처를 남기기에 오래 참음을 힘써 훈련해야 합니다.
4) 사랑
사랑은 함께 해주고 맞춰주는 것입니다. 어떤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잘 맞춰주고 함께 한 밥상에서 늘 기쁘게 밥을 먹습니다. 위대한 며느리입니다. 어떤 자녀는 힘도 없고 기억력도 떨어진 부모 곁에 늘 함께 있어줍니다. 하늘의 사람입니다. 누군가 마음이 상했을 때 그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왜 상처를 입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나 적절한 충고가 아닙니다. 정말 필요한 것은 함께 해주고 맞춰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좋은 소식(복음)’을 주셨지 ‘좋은 충고’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남에게 ‘좋은 충고’를 주기보다 ‘좋은 자신’을 주면서 함께 해주십시오.
3. 하나가 되려는 삶
본문 3절 말씀을 보십시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이 말씀은 ‘성령충만’과 ‘하나 됨’을 같은 개념이란 말씀입니다. 성령충만하면 생각이 다르고 교파가 달라도 서로 정죄하거나 싸우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고독한 종교가 아닙니다. 성도가 고독하게 사는 것은 모순적인 삶입니다. 참된 제자도는 교회란 믿음의 공동체 안에 있어야 발휘됩니다. 교회 밖에서 잘하기 전에 교회 안에서 잘하십시오.
교회를 조금 더 이해하고 사랑하고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 힘쓰십시오. 하나님은 교회를 무엇보다 사랑하십니다. 성경은 교회를 ‘예수님의 신부’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말은 예수님이 교회를 매우 사랑하고 아끼신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긴 위대한 꿈의 산물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영원히 지속시킬 것이고 어느 누구도 교회를 파괴하지 못합니다. 성도는 교회의 아름다움을 보존할 막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사소한 문제로 싸워 교회의 아름다움을 훼손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어떤 교회에서 새 오르간이 생기자 교인들이 강단의 어느 쪽에 오르간을 놓을지에 관해 큰 논쟁이 생겼습니다. 결국 그 교회가 깨지고 작은 지역에 교회가 두 개 생겼습니다. 강단 오른쪽에 오르간을 놓은 교회와 강단 왼쪽에 오르간을 놓은 교회입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교회의 내적인 갈등은 외적인 핍박보다 훨씬 무서운 것입니다.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서는 3가지 이해가 필요합니다. 첫째, “차이와 갈등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십시오. 교회에 의견이 다른 차이는 있어도 교회를 무력화시키는 갈등이 있으면 안 됩니다. 둘째, “해결과 해소는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십시오. 문제가 속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용서와 화해의 정신을 가지면 ‘해소’될 수는 있습니다. 셋째, “평화롭게 사는 것과 평화를 만들며 사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십시오. 수동적으로 평화롭게 살지만 말고 능동적으로 평화를 만들어가면서 사십시오.
< 공존하고 동역하려고 하십시오 >
1953년에 한국의 장로교가 <예수교 장로회>와 <기독교 장로회>로 갈라진 것은 성경에 대한 시각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 한쪽에서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성경은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반면에 다른 쪽에서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성경 문자는 틀릴 수 있다. 성경에 있는 구원의 말씀이 틀림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깊이 생각하면 서로 용납할 수 있는 부분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사람들은 당시의 분열이 학자들 때문이라고 합니다. 학자들은 대개 어떤 분야의 전문가들로서 하나를 깊이 연구하기에 속 좁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지만 결국 모든 성도의 책임입니다. 성도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믿음의 원리에 바로 섰다면 한국 교회가 지금처럼 수많은 교파로 분열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군자는 뜻이 달라도 늘 화합하고 소인은 뜻이 같아도 늘 싸웁니다. 인물은 작은 것으로 싸우지 않습니다.
어디든지 보수파도 있고 진보파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보수파와 진보파가 거의 절반씩 있습니다. 그래서 신학교에서 목회자의 기초 소양으로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목회자만은 정치적인 편향성을 보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정치적인 편향성은 절반의 교인에게는 내면의 시험거리가 되고 언젠가는 그것이 외면으로 표출됩니다. 결국 정치적으로 치우친 목회자와 교회는 언젠가는 반드시 무너집니다. 목회자의 기초소양을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한쪽으로 치우치면 언젠가 한쪽으로 치워집니다. 정권은 언제라도 바뀔 수 있고 세상은 언제라도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섬길 때는 치우침이 없는 발걸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물론 목회자도 옛 친구들을 만났을 때는 정치적인 의사를 표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최대한 정치적인 의사표현을 삼가고 반대편도 껴안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성도들도 반대편을 껴안을 줄 아는 성도로 커갑니다. 그렇게 해서 용서와 화해의 맑은 물을 사회에 흘려보내면 사회의 아픔 해소에 얼마나 도움이 됩니까?
사상과 생각에 차이가 있어도 교회에서는 영혼을 미혹해 재산을 털어가려는 이단과 사이비만 아니라면 다양성도 일치의 한 표현으로 보고 다른 의견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에 대해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내가 못하는 일을 그가 해주어서 고맙다.” 그런 하나 됨의 원리를 외면한 채 조금만 안 맞아도 배척하는 모습은 바른 믿음의 산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을 이어주려고 왔습니다. 예수님처럼 큰 마음과 큰 생각을 가지고 비본질적인 문제로 자기와 조금만 달라도 쉽게 정죄하거나 판단하지 마십시오.
옛날에 감리교 출신의 이용도 목사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주의 사랑에 삼킨바 되고/ 주는 나의 신앙에 삼킨바 되는 이 합일의 원리여!/ 오 나의 눈아! 주를 일심으로 바라보라.” 그런 표현들을 보면 신비주의적인 모습이 엿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배움이 짧았던 한국 교회 초기에 신비주의의 신학적 위험성과 부작용에 대한 깊은 생각이 없었을 것이고 또한 교회를 잘 다니는 기존 교인들의 마음을 훔쳐서 자기 왕국을 따로 세우려는 불순한 의도가 없었던 것을 보면 그를 용납했어야 했다는 의견들도 많습니다.
아쉽게도 이용도 목사는 신비주의 이단으로 정죄되어 해주에서 교인들이 던진 돌에 맞아 신음하다가 폐병이 겹쳐 33세에 죽었습니다. 그 후 반세기 이상 지나면서 그가 교인들에게 많은 은혜를 준다는 시기심에서 이단 규정이 되었다는 말이 돌면서 감리교 후대 목사들을 중심으로 그를 재평가하자는 기류도 생겨났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성도에게도 어느 순간에는 그런 유사한 상황에 처할 수 있습니다. 그때 그 아픈 배를 어떻게 고쳐야 합니까? 잘되는 사촌을 끌어내림으로 고치기보다 자신을 끌어올림으로 고치려고 하십시오. 부와 권력을 양지에서 남용하지 않고 음지에서 선용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래서 월새기(월간 새벽기도) 문서선교 사역도 아름답게 지속될 수 있는 것입니다. 소리 없는 선행자의 비전을 가지십시오.
깊은 산 연못에 두 마리 고기가 살았습니다. 그 연못을 독차지하려고 센 고기가 약한 고기를 죽였습니다. 얼마 후 그 죽은 고기가 썩어 물이 오염되면서 센 고기도 죽었습니다. 남을 죽이려고 하면 자신도 죽게 되고 남을 살리려고 하면 자신도 살게 됩니다. 사람은 공존하는 존재 겸 동역하는 존재입니다. 공존의 원리가 삶의 기초와 같다면 동역의 원리는 삶의 기둥과 같습니다. 공존하고 동역하려고 해야 교회가 교회답게 되고 교인이 교인답게 됩니다.
신령한 삶이란 구별하려고 안달하는 삶이 아닙니다. 신령함을 드러내려는 사람은 구별하는 언행이 많아서 “이것은 안 된다! 저것은 안 된다!”가 많습니다. 반면에 진짜로 신령한 사람은 땅을 품에 안고 하늘을 지향합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을 구별하지 않고 땅에 오셔서 땅을 하늘로 끌어가심으로 하늘과 땅을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그처럼 누군가를 판단하기보다 그와 함께 있어주면서 그를 예수님께로 이끌고 가는 것이 성령 충만한 모습입니다.
남편이 방탕할 때 신령함을 오해한 아내는 말합니다. “사탄의 역사네. 마귀야 물러가라!” 그러니까 남편도 참지 못하고 손찌검을 합니다. 반면에 진짜로 신령한 아내는 참고 묵묵히 사랑을 실천하고 말할 때 지혜롭고 겸손하게 해서 결국 남편을 하나님께로 이끕니다. 하나님이란 호칭은 하나님의 핵심 속성과 뜻이 ‘하나임’과 ‘하나 됨임’을 잘 알려줍니다. 그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서로를 존중하며 하나 되기를 힘쓰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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