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가 피할 것과 추구할 것
요한복음 5장 1-9절
< 두려움이 문제입니다 >
2차 세계대전 후, 전쟁이 끝났지만 여전히 남태평양의 산과 정글에는 수천 명의 일본군 다이 하드(die hard, 고집쟁이)들이 항복하지 않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평소에 미군에 항복하면 즉시 죽거나 잔인한 고문을 당한다고 교육받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일본 정부는 그 군인들을 안심시키려고 천황의 연설을 녹음해 큰 스피커로 섬 전역에 계속 틀었고, 라디오로 계속 방송했습니다. 결국 몇 달 만에 극소수만 제외하고 다 숨은 곳에서 나왔고, 몇 년 후에는 정글에 남은 일본군인은 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1974년 3월에 한 일본 군인이 전쟁이 끝나고 29년 만에 정글에서 나왔습니다.
기자가 그 60대 병사에게 왜 그토록 오래 숨어 있었느냐고 묻자 그는 두려워서 그랬다고 했습니다. 미국 군인이나 잔인한 독재자에 사로잡힌 것도 아닌데 내부의 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29년의 세월을 낭비한 것입니다. 그처럼 내부의 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혀 정신적인 노예생활을 하는 현대인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정신적인 노예생활에서 벗어나 대 자유인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 성도가 피해야 할 것 >
본문에는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던 38년 된 병자가 낫는 기적이 나와 있습니다. 이 장면은 마음과 육신의 고질병을 치유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피할 것 3가지와 추구할 것 3가지를 가르쳐줍니다. 먼저 무엇을 피해야 할까요?
1. 미신적인 삶
본문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어느 날, 예수님이 유대 명절을 지키려고 성전 제사에 쓰일 양이 수송되는 양문(Sheep Gate)을 통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양문 곁에 베데스다라는 못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베데스다 못에는 천사가 가끔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할 때 가장 먼저 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치유된다는 전설 때문에 수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 미신에 희망을 걸고 정작 낫지도 못한 채 수년, 수십 년 동안 그곳에 있는 병자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정말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본문의 베데스다 연못은 오늘날의 미신적인 교회를 상징합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치유를 준다! 천사가 나타났다!”고 하는 베데스다 교회로 몰려들지만 주님은 결코 그런 삶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본문 8절에서 예수님이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신 것은 “이제 미신의 대상인 베데스다를 떠나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때 그에게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결국 그를 치유한 것은 베데스다 물이 아니라 행동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가끔 보면 누가 치유를 주고, 누가 기도해준 물을 먹으면 치유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런 미신에 절대 현혹되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베데스다 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도 주님을 믿는 믿음보다 더 앞세우지 마십시오. 주님이 가장 기뻐하는 것은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행동하는 것’이고 주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주님 외의 다른 것을 믿는 믿음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미신적인 요소를 버리지 않으면 고질병과 문제와 시험은 계속됩니다. 절대 점을 가까이 하지 마시고,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빌려 하는 점은 더 멀리 하십시오. 또한 성도는 미신과 함께 기복주의도 철저히 버려야 합니다.
가끔 보면 어떤 간증은 상당히 비성경적입니다. 간증은 성공과 치유를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열심히 기도하니까 가진 땅에 온천이 터져 땅값이 급상승해서 축복받았다고 간증합니다. 반면에 어떤 분은 열심히 기도했지만 가진 땅 주변에 흔히 말하는 혐오시설이 들어와 땅값이 폭락했습니다. 외적인 성공은 축복의 바로미터가 아닙니다. 그 축복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얼마나 잘 사용하느냐가 바로 축복의 바로미터입니다.
기도해서 재벌이 되었다면 실제로 재벌 중에 불신자가 더 많은 사실은 어떻게 설명합니까? 물질축복을 받으면 조용히 하나님께 감사하며 드나베의 삶, 즉 ‘드리고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면 됩니다. 외적인 축복을 간증한다고 돌아다니면 그것은 자기 자랑이 될 수 있고, 듣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기복주의 신앙을 조장해 많은 영혼을 병들게 할 수 있습니다. 미신과 기복주의를 버릴 때 영혼과 육신이 건강하게 됩니다.
2. 포기하는 삶
본문 6절 말씀을 보면 주님이 38년 된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낫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데 왜 주님은 그런 이상한 질문을 하셨을까요? 그러나 주님의 질문은 이상한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병자의 마음속에 새로운 의지와 소망을 불러일으키려고 그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처음에 병들면 다 낫겠다고 의지와 소망을 가지다가 병이 길어지면 점점 “이제 안 돼!”라고 포기합니다. 가족들도 처음에는 병문안을 자주 다니며 치유를 소망하지만 병 수발이 길어지면 마음속 깊은 곳에 “차라리 가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긴 병에는 장사가 없이 대부분 포기합니다. 그런 포기와 체념을 극복해야 치유 받을 수 있기에 주님은 “네가 낫고자 하느냐?”는 질문으로 병자의 의지를 일깨운 것입니다.
또한 본문의 병자는 병이 나으면 더 이상 동냥을 하지 못하고 스스로 자기 인생을 책임지고 땀 흘리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싫어서 치유를 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치유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자신의 질병과 장애를 이용해 사랑과 관심과 물질과 다른 어떤 이익을 얻으려는 경우도 꽤 많습니다.
어떤 청년은 군대에 안 가려고 질병이 낫지 않기를 바라고 오히려 만듭니다. 미국의 한 청년은 베트남 전쟁 때 군대에 안 가려고 이빨을 다 뽑은 사례도 있었습니다. 그런 작은 이익에 사로잡혀 더 나은 세계를 추구하지 않으면 변화와 치유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사실상 변화와 치유가 일어나지 않는 중요한 이유는 간절한 의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내게는 항상 더 나은 세계가 준비되어 있음을 알고 그 세계로 나가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병들었을 때 낫기를 정말 원해야 치유도 일어납니다. 특히 정신적으로 병든 경우에는 자기가 자신을 이미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마음을 극복하고 항상 밝게 생각하고, 밝게 웃고, 밝은 부분을 봐야 합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은 땀 흘리고, 헌신하려는 의욕이 없습니다. 심지어는 몸을 가꾸는 기본적인 일도 귀찮게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울증을 극복하려면 먼저 외모부터 잘 가꾸려고 해야 합니다. 옷을 멋지게 입고, 머리 손질도 잘하고, 외출할 때 최대한 화장하는 단순한 행동들이 삶의 의욕을 키워줍니다.
자기가 자기를 포기하면 점점 자기가 더 싫어지고 병의 극복은 힘들어집니다. 이제 낫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과 의욕을 가지십시오. 축복의 손잡이와 응답의 열쇠는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냥 무조건 은혜를 부어주실 수도 있지만 먼저 행동하는 믿음이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 믿음이 치유의 은혜를 증폭시킵니다.
3. 변명하는 삶
본문 7절 말씀을 보십시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이 구절을 보면 병자는 “네가 낫고자 하느냐?”는 주님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고 자기 처지를 불평하며 “남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습니다.”라고 변명합니다. 그런 지나친 피해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피해의식을 가지면 자기가 받은 피해만 뚜렷이 기억하고, 남을 잘 용서하지 못하고, 남을 잘 신뢰하지 못하기에 항상 인간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또한 피해의식을 가진 사람은 끊임없이 불평하며 “그게 내 잘못입니까?”라고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배우자나 부모나 사회, 그리고 자기 외에 다른 사람에게 그 책임을 돌립니다. 그런 변명이 없어야 변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약속에 늦으면 대개 이런 변명을 합니다. “너무 길이 막혀서 늦었습니다. 오려고 하는데 전화가 막 왔습니다. 집에 갑자기 일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약속에 상습적으로 늦는 사람의 진짜 문제는 자기 인생을 책임적으로 경영할 능력이 부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약속에 늦을 때 변명하려면 이렇게 변명해야 합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저의 인생을 책임적으로 경영하는 능력이 부족해서 이런 모습을 보였습니다.”
지난 화요일 성문 고등학교 교장 연임 문제로 이사회에 참석할 때 평소보다 20분 일찍 출발을 했습니다. 그날 판교 신도시를 통과하는 고가도로 건설로 차선을 다 막고 한 차선만 통과하게 만들어서 길이 엄청나게 막혔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약속보다 늦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때 내가 운전대 잡고 다짐했습니다. “교통 때문에 막혔다는 얘기는 늦는 사람이 단골메뉴로 하는 얘기니까 차라리 그 얘기를 하지 말자!”
변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음에 잘하면 됩니다. 말로 신뢰를 얻으려고 하지 말고 행동으로 신뢰를 얻으려고 해야 합니다. 잘못했거든 변명하지 말고 그 잘못을 인정하십시오. 변명하는 습성을 깨뜨리지 않으면 결코 변화와 치유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죄와 잘못과 부족함을 인정하고 진정으로 회개할 때 변화와 치유는 나타날 것입니다.
< 성도가 추구해야 할 것 >
치유를 위해 피해야 할 삶으로 미신적인 삶, 포기하는 삶, 변명하는 삶의 3가지를 들었는데 반대로 치유를 위해 추구해야 할 삶은 어떤 삶일까요?
1. 감사하는 삶
본문 8절 말씀에서 왜 주님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공중도덕을 잘 지켜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은혜 받은 자리를 항상 기억하면서 감사하며 살라는 뜻도 그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성도는 감사를 체질화시켜야 합니다. 사람들은 은혜를 너무 쉽게 잃어버리고 어려움이 생기면 금방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불평과 원망과 미움은 병드는 지름길이지만 감사와 용서는 치유 받는 지름길입니다. 하나님이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신 것은 결국 우리의 건강을 위해 주신 명령입니다. 이제 내 주위에서 감사할 것을 계속 찾아보십시오. 그러면 의외로 감사할 것이 많습니다.
서울에 딸만 셋 낳은 한 부인이 있었습니다. 시어머니는 시골에서 올라오기만 하면 가문의 대가 끊겼다고 눈을 흘기고 말로 상처를 주면서 며느리를 구박했습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에는 기미가 벗겨질 날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안양 교도소로 교도소 전도를 갔다가 큰 감사거리를 발견했습니다. 교도소에 가보니까 여자는 없고 다 남자였습니다. 그때 속으로 감사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에게 딸만 주셔서 이런 곳에 올 가능성을 낮춰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때부터 밉게만 보이던 딸들이 누구보다 예쁘게 보이면서 얼굴의 기미도 사라졌다고 합니다.
불평거리가 자세히 뜯어보면 감사의 제목입니다. 감사는 감격을 부르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얻겠다고 신령하다는 곳을 찾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감사하기 힘들 때도 감사하면 성령의 감동이 주어집니다.
2. 순종하는 삶
본문 8-9절 말씀을 보면 38년 된 병자는 주님 말씀대로 순종해서 병이 나은 것을 봅니다. 순종은 치유의 징조이고 성숙함의 씨앗입니다. 저는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도록 아이들의 순종훈련을 위해 아이들에게 일을 시킬 때 “네!”라고만 하지 말고 “네! 엄마!” 혹은 “네 아빠!” 혹은 “네! 알았어요!”라고 뒷말을 붙여서 말하라고 충고해줍니다. 내게 “예! 알겠습니다!”라는 순종의 영성이 충만하다면 치유의 역사는 곧 문 앞에 도달했다고 보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불순종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원래 사람은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원죄가 왜 생겼습니까? 원죄는 희대의 살인마가 지은 죄가 아니라 단순한 죄입니다. 즉 선악과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질서를 깨뜨렸기 때문에 죽음과 병이 생긴 것입니다.
병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고장 난 것입니다. 영어로 ‘고장 났다’는 것을 ‘out of order(질서가 나간 상태)’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사람의 영혼이 ‘in order(질서 안에 있는 상태)’로 돌아와 병에서 회복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면 됩니다. 무한한 지식을 가지신 하나님 앞에서 제한된 지식을 가진 우리가 순종하는 것은 가장 지혜로운 모습입니다.
물론 순종하라고 해서 세상 지식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 지식을 갖추되 중요한 판단은 말씀을 따라 해야 합니다.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취임할 때 프랑스 드골 대통령이 권면했습니다. “당신은 이제 세계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수많은 석학과 지식인들이 당신을 보필하겠지만 최종 결정은 하나님 뜻을 하라 스스로 하십시오.” 그처럼 세상 지식은 참고하되 최종 판단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할 때 가장 건강하고 복된 영혼이 될 것입니다.
3. 거룩한 삶
주님은 38년 된 병자가 나은 후에 뭐라고 말합니까? 본문을 조금 지나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결국 그의 38년 된 고질병은 죄 때문에 생긴 병이었습니다. 사실상 모든 질병과 불안의 원인은 죄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삶을 살수록 치유의 능력은 현저하게 커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거룩한 삶’을 이상하게 행동하는 삶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옛날 부흥회 때는 이런 설교가 많았습니다. “어느 날 산에 가서 기도하는데 갑자기 나무뿌리가 뽑히면서 무언가 뜨거운 불이 가슴에 꽂히며 성령을 받았다.” 그 말을 듣고 저도 신령한 산들을 꽤 많이 찾아다녔습니다. 그리고 바위 위에서 철야기도도 하고, 나무를 붙잡고 기도하기도 했지만 거룩한 삶은 거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성결한 삶을 위해서는 “누가 어떤 체험을 했느냐?”보다 “성경이 어떻게 가르치느냐?”가 중요합니다. 때로 사람의 의식구조 속에는 괴상한 삶을 살아야 신령하다고 생각하려는 심리가 있는데, 그런 심리가 문제입니다. 사단이 그 심리를 이용해서 얼마나 많은 순수한 성도들이 베데스다 교회로 찾아가는지 모릅니다.
어떤 목사는 설교합니다. “저는 첫 아들을 낳고 성령의 감동을 따라 주님을 위해 고자가 되었습니다.” 그 설교를 듣고 성도들은 감격합니다. 주님의 종이 되려고 부부생활도 희생한 그 목사님을 정말 신령한 목사님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님이 그렇게 신령하다니까 전도도 잘되고, 여자 전도사가 아무리 가까이 붙어 다녀도 성도들은 절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저도 그 목사님 말을 듣고 처음에는 정말 크게 감동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가 그 목사와 둘이 함께 사우나에 가서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그 목사는 고자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분에게 “왜 그 동안 고자도 아니면서 고자라고 했습니까?”라고 따져 묻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그때부터 말없이 그분을 멀리했습니다.
부부생활의 즐거움을 위해 정관수술을 하고는 주님을 위해 고자가 되었다고 하는 세상입니다. 왜 그런 일이 생깁니까? 성도들이 고자가 신령하다고 생각하고 몰려들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 목사 교회는 몇 번의 건축 끝에 5천 명이 넘는 대교회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그 목사도 고자 얘기를 안 합니다.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인이 천 명이 넘고, 백억이 넘는 교회가 건축되어 있으면 사람들은 저절로 몰려오기 때문입니다.
너무 신령한 것 좋아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사단에게 영혼이 농락당하는 지름길입니다. 어떤 목사는 계룡산을 갔다 온 후 말세의 종이라는 모 목사를 통해 하늘의 비밀과 계시를 전수받았다면서 교회에 돌아와 밤낮 금식을 했습니다.
어느 날 그 목사에게 계시가 들려왔습니다. “네 아내와 살지 말라!” 성경은 기본적으로 이혼을 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부정하는 음성을 따로 주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기부정’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런 음성은 금방 잘못된 음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잘못된 음성을 듣고 별거한 후 40일 금식기도를 하다가 39일째 세상을 떠났습니다. 성경은 그런 영적 영웅심을 전혀 지지하지 않습니다.
신령하다는 것은 신기하거나 괴상한 것이 아닙니다. 신령한 것이란 한 마디로 말하면 주님 닮은 것입니다. 천로역정을 보면 ‘진실과 충성’이란 뜻을 가진 진충 씨가 여행을 거의 마치고 말했습니다. “저는 저의 상처와 흔적을 주님을 사랑한 증거로서 제게 상급주실 그분께 가져가겠습니다.” 실생활에서 예수님의 흔적을 가지고 지극히 정상적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 신령한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7절 말씀에서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저의 언어 속에 예수님의 향기가 느껴지게 하시고, 저의 눈동자가 예수님처럼 따뜻한 눈동자가 되게 하소서! 하나님! 제게도 주님의 흔적이 있게 하소서. 그래서 항상 주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하게 하소서!”
어느 날, 성 프랜시스가 산에서 성경을 읽을 때 주님의 사랑에 너무 감격해 고백했습니다. “주님! 제게도 주님의 흔적이 있기를 원합니다.” 바로 그때, 주님의 형상이 저 멀리 지평선에 보이며 온몸에 십자가의 강렬한 아픔이 느껴졌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십자가의 삶을 겸손하게 실천하면서 점차 성자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성자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하게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보통 성도가 바로 성자입니다.
< 중요한 것은 내 믿음입니다 >
결론적으로 치유를 위해 성도가 피해야 할 3가지 삶과 추구해야 할 3가지 삶을 보면 치유가 ‘나의 신앙적인 삶’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믿음입니다. 남이 나를 도울 수도 있지만 사실상 남의 도움보다 내 도움이 더 중요합니다. 이제 스스로를 돕고, 본문의 병자처럼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라고 변명하지 마십시오.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내게 간절한 소원과 믿음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엄청난 약속의 말씀입니다. 성도에게는 놀라운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소한 일로 좌절하지 말고 자신의 약점과 장애에 지나치게 신경 쓰지 마십시오.
지난번 여승훈 선교사님이 프랑스 비자를 받지 못해 많이 힘들었습니다. 당연히 비자가 나올 줄 알고 짐이 가는데 1달 반이 걸리니까 배편으로 먼저 짐을 보냈는데 비자가 나오지 않아서 다시 짐을 배편으로 돌아오게 하느라고 마음고생도 심했고 물질적인 손해도 컸습니다. 우리가 프랑스 이주비용으로 모금해드린 4백만 원 가까운 선교헌금도 다 날렸습니다. 너무 낙심되었지만 그 얘기를 헌금에 동참한 분들에게 꺼낼 수도 없었습니다.
지난 4개월은 선교사님에게 너무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얼마 전 제가 선교사님에게 말했습니다. “선교사님! 이번 일로 소중한 후원금이 허무하게 날아갔지만 선교를 하다 보면 그런 일이 많아요. 그 사실을 후원자들에게 솔직히 알리고 다시 기도부탁을 하세요. 후원한 분들은 대부분 마음이 따뜻해서 틀림없이 이해해줄 거예요.”
다행히 비전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 끝에 캐나다의 프랑스 문화권인 퀘벡으로 가는 길이 열렸고 지난주 금요일에 드디어 비자를 받았습니다. 이제 퀘벡에서 2년간 선교사 훈련과정을 마치고 프랑스로 들어가 북 아프리카 이민자 선교를 하게 됩니다. 큰 불찰로 지난번의 후원금을 뜻있게 쓰지 못했지만 그 아픔을 이해해주시고 다시 한 번 이주비용으로 새로 필요한 400만원과 매달 최저생활비 150만원의 부족한 부분이 채워지게 기도해주십시오.
여러분들의 따뜻한 이해와 사랑을 힘입는다면 선교사님이 당한 이번 시련은 앞으로의 성공적 선교사역을 위한 큰 양약이 될 것입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그런 시련을 만나게 되지만 결코 비틀거리거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누가 위대하게 됩니까? 어떤 장애물에도 좌절하지 않는 사람이 위대하게 됩니다. 삶에서 가장 위대한 일은 그 동안 여러 번 실패해서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장애물을 극복하는 일입니다.
성도는 누구나 지금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제 “나는 나이가 많다. 지금 경제가 어렵다. 물질과 배경이 없다.”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나이가 많은 것은 삶의 지혜와 경험과 노하우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이가 많다!”라는 말을 바꾸어 “나는 지금이 절정기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위대한 사람이란 허물과 약점 중에도 최선을 다해 자신의 꿈과 비전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입니다.
이제 미신과 기복주의를 버리고 주님만 믿는 온전한 믿음으로 사십시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무엇보다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믿음이 부족하면 심하게 “너희가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책망하셨지만 믿음이 굳건하면 크게 칭찬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온전한 믿음을 원합니다. 항상 주님을 믿는 굳건한 믿음으로 변화와 치유의 주인공이 되기를 바랍니다.
ⓒ 이한규목사(분당 샛별교회)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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