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된 이름으로 오시는 이(마태복음 21:9).
예루살렘의 공기는 유월절을 앞두고 유난히 뜨거웠습니다. 먼 지방에서 올라온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골목을 메우고, 보이지 않는 기대가 성 안의 돌담과 기와지붕 위를 지나 떠돌았습니다. 그날, 사람들은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었고, 어떤 이는 겉옷을 길 위에 펼쳤습니다. 그들의 입술은 한 단어를 반복했습니다. “호산나.” 구원의 간청이면서, 동시에 승리의 환호였습니다. 그리고 그 환호의 중심에 한 분이 계셨습니다. “복된 이름으로 오시는 이”(마태복음 21:9). 이 한 문장은 단순한 군중의 구호가 아니라, 하늘의 섭리가 땅의 언어로 울려 퍼진 복음의 종소리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언제나 그렇듯, 찬송의 소리 속에 인간의 착각을 비추는 거울을 숨겨 둡니다. 군중의 열기는 진심 같아 보였고, 그들의 눈빛은 확신 같아 보였습니다. 하지만 며칠 뒤 그 성은 다른 함성을 듣게 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 같은 입술, 같은 도시, 같은 무리.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된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맞이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분은 어떤 방식으로 ‘오시며’,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맞이’합니까? 무엇이 그분을 ‘복된 이’로 증언하게 합니까?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군중의 감정만을 따라가선 안 됩니다. 성경이 우리를 이끌어 가는 자리—하나님의 주권, 그리스도의 왕권, 성령의 역사, 십자가의 필연—그 자리에서 이 장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때, 그분의 발걸음은 우연히 그 성으로 향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때가 찼다”는 하늘의 시계 속에서 움직이십니다. 구속사의 중심이 한 점으로 응축되는 그 순간, 그분은 스스로 예루살렘을 향해 오십니다. 십자가는 사건의 결과가 아니라, 처음부터 정해진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인간의 배반이 십자가를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십자가를 세웠습니다. 그러므로 종려주일의 입성은 단지 예수님의 인기 절정이 아니라, 어린양의 행진입니다. 성문을 통과하는 것은 승리의 퍼레이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제물이 제단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입니다. 왕의 오심이면서, 희생의 오심입니다. 능력의 표지처럼 보이지만, 그 능력은 칼이 아니라 온유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분은 나귀를 타셨습니다. 이것은 가난의 장식이 아니라, 예언의 성취이며 왕권의 선언입니다. 스가랴의 말씀이 그날 길 위에서 살아났습니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스가랴 9:9). 세상 왕들은 말과 병거로 자신을 확증하지만, 그리스도는 겸손으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분의 왕권은 위압으로 세워지지 않고, 은혜로 세워집니다. 그분의 승리는 적을 죽여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복된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우리가 상상해 온 영광의 방식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복’이라 말할 때, 번영과 형통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복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이며, 그 생명의 길은 종종 십자가의 좁은 문을 통과합니다. 그분은 복을 주시기 위해 복의 길을 걸으시는데, 그 길은 철저히 낮아짐의 길입니다.
군중은 “호산나”를 외치며 그분을 맞이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에게 호산나”라는 말은 정치적 기대를 담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후손이 왕으로 세워져 로마의 압제를 꺾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것이라는 열망.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민족의 승리’로 좁히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민족주의의 그릇에 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이며, 그 통치는 우리의 죄를 먼저 정복합니다. 로마보다 더 깊은 폭군은 죄입니다. 외부의 적보다 더 무서운 사슬은 마음의 반역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먼저 무너져야 할 것은 로마의 성벽이 아니라 우리 안의 교만과 자기 의입니다. 그분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 목적은 성전을 정치의 도구로 삼기 위함이 아니라, 죄인을 구속하여 참 성전 되신 자기 안으로 이끄시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칼빈주의적이고 개혁주의적인 복음의 핵심을 더 분명히 보게 됩니다. 인간은 스스로 왕을 올바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군중의 환호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만들어내지 못했고, 군중의 배척이 그리스도의 왕권을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의 지지로 왕이 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하심과 선포로 왕이 되시는 분입니다. 성부께서 성자를 보내셨고, 성자께서 기꺼이 순종하셨으며, 성령께서 그 구원을 적용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원인이 아니라 열매입니다. 우리의 환호는 구원을 일으키는 불씨가 아니라, 구원이 임했을 때 터져 나오는 감사의 연기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오심을 이용하고 있는가, 아니면 예수님의 오심에 의해 새롭게 빚어지고 있는가?” 군중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꿈’에 맞추려 했지만, 참 제자는 자신의 꿈을 부수고 그분의 뜻에 무릎 꿇습니다.
“복된 이름으로 오시는 이”라는 표현은 ‘이름’에 시선을 모으게 합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단지 호칭이 아니라 존재의 계시입니다. 주님의 이름은 주님의 성품이며, 주님의 이름은 주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입니다. 그분이 “주의 이름”으로 오신다는 것은, 그분이 하나님을 대표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임하심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하나님이 먼 곳에서 지켜보시는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죄인의 거리로 들어오시는 사건입니다. 성육신은 위로부터의 사랑이 얼마나 낮아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늘의 증거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입성은 성육신의 사랑이 십자가까지 끝까지 가겠다는 공개 선언입니다. 그분은 오십니다. 도망치지 않고 오십니다. 배신을 모르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배신을 아시면서도 오십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우리의 손이 흔들리고 마음이 흔들려도, 그분의 오심이 흔들리지 않는 것—그것이 복입니다.
첫째, 우리는 그분의 오심이 왕의 오심임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단지 선지자나 위로자가 아니라, 왕으로 오십니다. 그러나 그 왕권은 이 세상의 권력 구조를 복제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왕권은 자기 보존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지만, 그리스도의 왕권은 타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합니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말을 고르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진리를 말하시고, 진리를 위해 죽으십니다. 참된 왕은 백성의 욕망을 수행하는 자가 아니라, 백성을 진리로 인도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왕으로 맞이한다는 것은, 그분을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줄 분”으로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순종해야 할 주”로 모시는 것입니다. 왕의 오심 앞에서 신앙은 감정의 환호를 넘어서 삶의 방향을 바꾸는 회개로 나타납니다. 종려나무 가지는 손에 들기 쉬우나, 십자가는 어깨에 지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왕은 가지로만 맞이되는 분이 아니라, 십자가를 따르는 길에서 참으로 맞이됩니다.
둘째, 우리는 그분의 오심이 제물의 오심임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 이유는 성전을 접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참된 성전이 되어 우리를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마태복음의 흐름을 따라가면, 입성 후 예수님은 성전을 정결케 하십니다. 이는 종교개혁적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을 거래의 대상으로 삼는 모든 시도, 예배를 장사로 바꾸는 모든 탐욕, 경건의 외피로 욕망을 포장하는 모든 위선을 주께서 뒤엎으십니다. 그리고 그 정결의 칼날은 성전 마당에서만 멈추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에까지 들어옵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마음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 제게 복을 주십시오.”라는 말 속에 “주님, 제 계획을 승인해 주십시오.”가 숨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의 욕망을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기쁘게 해주는 왕이기 전에,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는 구주이십니다. 그분이 피 흘리심으로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이 칭의의 은혜는, 동시에 우리를 새 사람으로 빚는 성화의 길을 열어줍니다. 값없이 주어진 은혜는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 그 은혜는 하나님의 아들의 피라는 무한한 대가 위에 서 있습니다.
셋째, 우리는 그분의 오심이 심판과 구원의 갈림길임을 보아야 합니다. 같은 주님, 같은 복음 앞에서 어떤 이는 무릎 꿇고 어떤 이는 돌을 듭니다. 예수님의 임재는 중립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빛이 들어오면 어둠은 숨거나 사라져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오시면, 인간의 자기 의는 무너지거나 더 완강해집니다. 그래서 종려주일은 달콤한 축제이면서도, 동시에 영혼의 진단서입니다. 당신의 “호산나”는 무엇입니까? 당신의 환호는 어떤 왕을 원합니까? 병을 고치고 빵을 늘려주는 왕만을 원합니까, 아니면 죄를 용서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 왕을 원합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찾는 이유가 삶의 편의를 위한 안전장치라면, 우리는 언젠가 그분의 십자가 앞에서 실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찾는 이유가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한 죄인의 절규라면, 우리는 십자가에서 찬란한 복을 발견할 것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기대를 배반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완성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예화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느 작은 마을에 오래된 다리가 있었습니다. 강을 건너야 시장을 갈 수 있는데, 다리가 낡아 사람들이 늘 두려워했습니다. 어느 날, 다리가 무너질 위험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은 마을 회관에 모여 “다리를 지켜줄 영웅”을 원했습니다. 누군가는 힘센 장정이 와서 다리를 붙잡고 지탱해 주길 바랐고, 누군가는 마을을 위협하는 모든 것을 몰아낼 ‘강한 지도자’를 기대했습니다. 그때 한 기술자가 조용히 찾아왔습니다. 그는 연설도 크지 않았고, 옷도 검소했습니다. 사람들은 실망했습니다. “이 사람이 무슨 힘이 있나?” 그런데 그는 밤낮으로 다리 밑을 점검하고, 낡은 기둥을 하나씩 새로 세우고, 보이지 않는 곳을 고치기 시작했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사람들은 참지 못하고 화를 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건 지금 당장 안심할 구호와 보여주는 힘이지, 이런 느린 작업이 아니다!” 그러나 그 기술자는 말했습니다. “다리를 살리려면 겉이 아니라 기초가 바뀌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위로보다, 보이지 않는 안전이 먼저입니다.” 얼마 뒤 큰 폭우가 쏟아졌고, 강물은 사나웠지만 다리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사람들은 알았습니다. 자신들이 원했던 ‘영웅의 포즈’가 아니라, 조용히 기초를 바꾼 그 손길이 진짜 구원이었음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종종 예수님께 ‘영웅의 포즈’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 삶의 겉을 치장하기보다, 죄로 썩어 있는 기초를 새롭게 하시기 위해 오십니다. 그 오심이 때로 느리고, 때로 고통스럽고, 때로 십자가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이 참 구원입니다.
이제 다시 “복된 이름으로 오시는 이”로 돌아가 봅시다. 복되다는 것은, 그분이 복을 ‘가지고’ 오신다는 뜻만이 아니라, 그분 자신이 복이라는 뜻입니다. 복은 어떤 상황이 아니라 어떤 인격입니다.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 복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복입니다. 그리고 이 복은 세상의 계산법으로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패배처럼 보이지만, 그곳에서 죄의 빚문서가 찢어집니다. 무덤은 끝처럼 보이지만, 그곳에서 새 창조의 아침이 터집니다. 예루살렘 입성은 환호로 시작하지만, 그 환호는 십자가로 이어지고, 십자가는 부활로 이어지며, 부활은 성령의 강림과 교회의 탄생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방식으로 자라납니다. 크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참되기 위해서. 빠르게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끝까지 구원하기 위해서.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신앙은 군중의 신앙이 아니라 제자의 신앙이어야 합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우리가 세운 왕’으로 만들려 했고, 제자는 예수님 앞에서 ‘우리가 내려와야 할 왕좌’를 봅니다. 군중은 종려가지를 들고 노래했지만, 제자는 십자가를 지고 침묵 속에서도 따릅니다. 군중은 예수님이 원하는 길을 가면 떠나지만, 제자는 예수님이 원치 않는 길로 가셔도 그분이 주님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 제자의 길은 우리의 결심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개혁주의 복음의 아름다움을 봅니다. 주께서 먼저 우리를 붙드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왕을 알아보게 하십니다. 믿음은 우리의 기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회개는 우리의 자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꺾어놓은 마음의 방향 전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이용하지 않게 하소서. 주님을 맞이한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제 뜻을 관철하려는 마음을 회개하게 하소서. 주님이 왕이시라면, 제 마음의 왕좌에서 제가 내려오게 하소서.”
그렇다면 종려주일은 우리에게 어떤 결단을 요구합니까? 그리스도를 환영한다는 말은 예배당 문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환영한다는 것은 그분이 내 삶의 문턱을 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내 시간, 내 관계, 내 물질, 내 야망, 내 말, 내 숨겨진 습관 속으로 주님이 들어오시도록 문을 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들어오시면, 그분은 반드시 정결케 하십니다. 성전을 뒤엎으신 주님은 우리의 마음의 상을 뒤엎으십니다. 이것이 아프지 않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복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뒤엎으심은 파괴가 아니라 회복이며, 심판이 아니라 치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가짜 평안을 무너뜨려 참 평안을 세우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거짓 자존을 무너뜨려 참 아들 됨의 기쁨을 세우십니다.
마침내 우리는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복된 이름으로 오시는 이.” 그분은 내 기준으로 복된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복되다 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오실 때, 내 계획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구원은 견고해집니다. 그분이 오실 때, 내 체면이 내려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 내 안에 자라납니다. 그분이 오실 때, 내 옛사람이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새 생명이 시작됩니다. 그분의 오심은 나를 편하게 만들기 이전에, 나를 살립니다. 나를 살리기 위해 나를 깨뜨리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깨뜨리심의 끝은 언제나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손은 못 자국 난 손이며, 그 손은 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붙들기 위해 뻗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도 여러분, 오늘의 “호산나”가 내일의 “십자가”로 바뀌지 않도록, 감정의 환호를 믿음의 순종으로 이어가십시오. 예수님을 내 편으로 만들지 말고, 내가 예수님의 편에 서십시오. 그분이 내 뜻을 이루어주는 왕이 아니라, 나를 하나님의 뜻으로 이끄시는 왕이심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이렇게 살아가십시오. 그리스도는 복되신 이름으로 오셨고, 지금도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에게 오시며, 마지막 날 영광 중에 다시 오십니다. 그 오심 앞에서 우리의 삶이 준비되게 하십시오. 종려가지를 드는 손이, 십자가를 붙드는 손이 되게 하십시오. 환호하는 입술이, 기도하는 입술이 되게 하십시오. 그리고 마침내 우리도 참된 의미로 노래하게 하십시오. “복된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제 마음의 왕좌에 앉으소서. 제 안의 성전을 정결케 하소서. 제 삶이 주님의 나라가 되게 하소서.”
요약
- 예루살렘 입성은 인기의 절정이 아니라 어린양이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는 구속사의 행진입니다.
- “복된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군중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정치적 왕이 아니라, 죄를 정복하는 참 왕으로 오십니다.
- 종려주일의 환호는 참 믿음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며칠 뒤 배척으로 바뀔 수 있기에, 환호 → 회개 → 순종의 길이 필요합니다.
- 개혁주의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왕권과 구원은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근거하며, 믿음은 그 은혜의 열매입니다.
묵상 포인트
- 나는 예수님을 “내 문제 해결자”로만 부르며, 그분의 왕권에는 저항하고 있지 않은가?
- 주님이 내 삶의 “성전”에서 뒤엎기 원하시는 상(자리)은 무엇인가?
- “복”을 상황으로만 정의하며, 그리스도 자신을 복으로 누리는 데는 인색하지 않은가?
- 내 “호산나”는 감정의 불꽃인가, 십자가를 따르는 결단인가?
강해
- **본문(마 21:9)**의 핵심은 “호산나”의 열기보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라는 정체성 선언입니다.
- “다윗의 자손”은 메시아적 호칭이지만, 군중은 이를 정치적 해방으로 오해했고, 예수님은 이를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의 해방으로 성취하십니다.
- 예수님의 입성 방식(겸손, 나귀)은 왕권의 부정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왕권이 세상의 방식과 다름을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 이 장면은 십자가를 향한 의도된 진입이며, 구원은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섭리 속에서 성취되는 언약의 완성입니다.
주석
- 군중의 외침은 시편 118편의 메시아적 기대와 연결되며, 성전 순례 찬양의 언어가 예수께 집중되는 장면은 예수의 메시아성을 부각합니다.
- 동시에 마태는 이 환호가 곧 시험대에 오를 것을 암시합니다. 참된 제자도는 대중의 분위기가 아니라 말씀에 대한 지속적 순종으로 증명됩니다.
(헬라어-신약) 원어 주석
- “Ὡσαννά”(호산나): 원래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간구의 뉘앙스를 품고 있으며, 환호이면서 기도입니다.
- “εὐλογημένος”(복된/찬송받을): 단순한 감탄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된 분이라는 신적 승인의 의미를 띱니다.
- “ὁ ἐρχόμενος”(오시는 이): 단회적 방문이 아니라, 약속 속에서 기다려 온 도래하는 메시아의 정체성을 강조합니다.
- “ἐν ὀνόματι Κυρίου”(주의 이름으로): 권위와 대표성의 표현으로, 예수의 오심이 하나님의 뜻과 권위 아래 있는 언약의 성취임을 시사합니다.
금언
- “종려가지는 손에 들기 쉽지만, 십자가는 마음에 지기 어렵습니다.”
- “주님을 내 편으로 만들려는 순간, 나는 왕좌에 앉아 있고 주님은 도구가 됩니다.”
- “복은 사건이 아니라 인격이며, 그 인격은 십자가로 우리를 안으십니다.”
신학적 / 주제별 / 목회적 정리 / 성도들의 결단 및 적용
- 신학적(개혁주의/칼빈주의): 그리스도의 왕권과 구속은 하나님의 주권적 경륜이며, 성도는 성령의 조명과 중생의 은혜로 왕을 알아보고 믿음으로 응답합니다. 구원은 인간의 열심이 아니라 은혜의 선물이며, 참 믿음은 반드시 순종의 열매를 맺습니다.
- 주제별(왕/겸손/십자가/참 복): 예수의 왕되심은 겸손으로 나타나고, 십자가에서 확증됩니다. 참 복은 세상적 번영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과 화목하는 데 있습니다.
- 목회적(회중 적용):
- 예배를 거래로 만들지 말고, 예배를 하나님께 굴복하는 자리로 회복하십시오.
- 신앙을 분위기나 감정에 맡기지 말고, 말씀 앞에서 지속 가능한 순종으로 세우십시오.
- 가정과 교회에서 “내 뜻”을 고집하는 왕좌를 내려놓고, 갈등의 자리마다 “주님이 왕이시다”를 실제로 고백하십시오(말뿐 아니라 양보와 섬김으로).
- 성도들의 결단(기도문 형식):
- “주님, 제 안의 성전을 정결케 하소서. 제 욕망의 상을 뒤엎으소서.”
- “주님, 종려주일의 환호가 십자가의 순종으로 이어지게 하소서.”
- “주님, 복을 구하다 주님을 놓치지 않게 하시고, 주님을 얻는 복을 누리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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