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영혼의 강자 (누가복음 22장 14-20절) < 초심이 변하지 않게 하라 >
시작이 중요한 것처럼 마지막도 중요하다. 시작이 잘못되면 훌륭한 작품이 나올 수 없고 시작과 과정이 좋아도 마지막이 나쁘면 허무하다. 요새 교회 세습에 대한 비판이 심해지고 있다. 교회 세습은 지난날의 자기 설교를 전면 부인하는 것이란 비판도 있다. 지난날에 “십자가를 지고 헌신하라. 돈과 자리에 대한 욕심을 버리라.”고 얼마나 많이 설교했겠는가?
그 설교를 듣고 교인들은 힘써 자기 것을 드렸는데 나중에 목회자가 그 바친 것을 자기 것처럼 여기고 교회를 아들 목사에게 물려주면 그 동안 바치라고 했던 설교가 결과적으로 “내게 바치라.”는 말처럼 된 셈이다. 예전에 한 교인이 흥분하며 말했다. “그렇게 세습하면 개신교 교황 가계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교회생활에 회의가 생깁니다.” 사람됨과 성도됨은 떠날 준비를 잘하고 잘 떠나는가를 보면 대략 알 수 있다.
개인 재산이나 기업을 정당하게 자녀나 충성스런 후계자에게 물려주면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거대 기업도 상속세를 잘 내고 회장 자리를 물려받으면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다. 의로운 후대 회장은 엄청난 상속세 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자신이 남다른 부모 찬스를 받았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 부모 찬스의 절반 정도를 사회에 환원한 후 자기 땀으로 다시 기업을 키우면 사회에도 큰 보탬이 되고 자신에게도 보람이 넘치니까 얼마나 복된 일인가?
다만 거대 기업의 계승자가 엄청난 상속세를 주식으로 내면 회사 지분이 크게 줄어 경영권이 위협받으니까 정부가 상속세로 받은 주식은 일정 기간 계승자의 우호 지분으로 삼아주어서 경영권이 위협받지 않게 보장해주면 의로운 계승자는 상속세를 기쁘게 낼 것이고 그러면 절대 사회주의 사상에 젖은 사람들 외에는 대부분 그 경영권 계승을 기쁘게 축하해줄 것이다. 반면에 교회는 개인 기업이 아니기에 원칙적으로 담임목사 자리는 세습되면 안 된다.
물론 예외는 있다. 교회 세습에 대한 비난은 대부분 누릴 것이 많은 대도시의 중대형 교회 담임목사 자리의 세습과 관련해서 은퇴하는 담임목사인 부모 찬스를 너무 크게 누리는 불공정에 대한 비난이다. 반면에 지방의 작은 소도시에 있는 교인이 줄어드는 작은 교회에서 은퇴하는 목회자 자녀가 훌륭한 목회자로 잘 준비된 상태에서 교인들의 환영과 기쁨 가운데 담임목사가 되면 세습에 대한 비난은 별로 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 사례비도 주기 힘든 작은 시골 교회에서 은퇴하는 목사가 잘 준비된 자녀 목사에게 “얘야, 이곳에는 준비된 목회자가 잘 오려고 하지 않는구나. 네가 와서 헌신해줄 수 있겠니?”라고 할 때 자녀 목사가 깊은 고심 끝에 헌신을 작정하고 그곳 담임목사로 부임하면 세습했다고 비난하기보다 오히려 칭찬할 것이다. 그 자녀 목사가 부모 찬스를 업고 좋은 자리를 차지한 것이 아니라 교회와 부모를 위해 자기 찬스를 희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모 찬스를 차지한 세습과 자기 찬스를 희생한 사역 계승은 엄연히 구분해야 한다.
1970년대에 건국대 축산학과를 졸업한 한 청년이 선진국의 낙농 비전을 가지고 선대의 땅이 있는 지리산 인근에 내려가 젖소를 키웠다. 그러자 당시 대통령도 치하하고 신문에도 대서특필되었다. 원래 시골에서 자란 것도 아니고 서울에서 자란 명문학과 출신의 대졸자가 자기 찬스를 희생한 것이 좋게 보였기 때문이다. 후대가 사명과 대의를 따라 자기 찬스를 희생하고 선대의 유업을 계승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칭찬할 일이다.
한 선교 사역자가 있었다. 그의 선교 사역은 큰 희생을 해야 지속될 수 있었고 필요한 분야에 준비된 사람, 특히 세계선교를 위해 영어가 준비된 사람이 필요했다. 그러나 월급이 적어서 준비된 헌신적인 사람을 찾기 힘들어 결국 대학생 딸에게 말했다. “얘야, 네가 졸업한 후 아빠 선교 사역을 도와줄 수 있겠니? 이 사역이 오래 지속되려면 돈보다 사명을 따라 헌신할 사람이 필요하구나.” 결국 그 딸이 오랜 기도와 고심 끝에 자기 찬스를 희생하고 아빠 사역에 동참했다. 그런 사명과 사역 계승은 오히려 칭찬해줄 일이다.
옛날에 한 분야의 위대한 장인은 후대가 자기를 희생해 선대의 가업을 계승받아서 배출된 경우가 많았다. 특히 돈벌이가 안 되어 사람들이 찾지 않는 기능이나 문화 분야에서 장인이 나오려면 후대의 희생이 꼭 필요했다. 그런 희생적인 자리에서 선대의 숭고한 뜻을 이어받으려고 자녀가 자기 찬스를 희생해 가업을 물려받으면 세습한다고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룻처럼 칭찬해줄 것이다.
젊은 과부 룻은 자기 찬스를 희생하고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에 와서 시어머니를 극진히 섬겼기에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결국 그녀에게 마음이 열린 보아스의 아내가 되고 다윗 왕의 증조할머니가 되었다. 사람들이 부모 찬스의 혜택을 업는 것은 불공정하게 보지만 자기 찬스를 희생해 뜻있는 일을 하는 것은 칭찬해준다. 왜 거대 기업도 정당하게 상속세를 낸 후 물려받으면 불공정하게 여기지 않는가? 부모 찬스의 절반 정도를 사회에 환원해 자기 찬스의 절반을 희생하고 물려받는 상속은 충분히 용납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반면에 교회는 개인 것이 아니기에 부모 찬스를 등에 업고 초대형 교회 담임목사직을 물려받으면 누구나 불공정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그것은 교회를 개척할 때의 초심을 잃은 모습으로 여기기에 사회도 비난하지만 교계와 교단도 비판하고 심지어는 교회 내에서도 반대 세력이 생긴다. 그처럼 초심이 변하면 사람들이 배반감을 느낀다. 교회가 커지면서 어느 정도 리더십 스타일의 변화는 필요하지만 그래도 초심만은 최대한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예수님은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초심과 사랑이 변하지 않았다(요 13:1).
< 성찬에 담겨 있는 의미 >
사람을 대하다 보면 실망될 때가 많다. 하나님은 얼마나 실망될 일이 많으시겠는가? 그래도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본문에 나오는 최후의 만찬 장면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만찬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예수님이 주신 최후의 실물교육이기에 그만큼 중요한 교훈과 의미가 그 안에 담겨 있다. 성찬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가?
첫째,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의미가 담겨 있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을 유월절 식사 때 거행하셨다(15절). 유월절은 유대인들이 양의 피로 애굽에서 구원받은 날을 기념하는 절기다. 성찬식도 예수님의 피로 죄에서 구원받은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의식이다. 그때 예수님은 떡과 포도주를 나눠주시기 전에 먼저 감사기도를 하셨다(19-20절). 그것은 감사의 중요성과 우선성을 말해준다. 감사는 축복 받은 후에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감사해야 참된 축복이 주어진다.
둘째, 주님께 충성하는 서약의 의미가 담겨 있다(20절). 성찬식은 하나님께 새롭게 충성을 다짐하는 충성 서약 의식과도 같기에 성찬식 때마다 이렇게 다짐하라. “하나님! 늘 십자가를 지고 교회를 사랑하고 선교하며 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만담처럼 재밌게 설교하면 즐거워하고 축복을 강조하면 눈을 반짝이고 위로하는 말씀을 들으면 힘을 얻지만 십자가와 헌신을 설교하면 “부담된다.”고 한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그때까지 십자가의 헌신 말씀을 많이 들었어도 또 감동을 느끼고 헌신하고 싶은 반응을 보인다. 하나님은 헌신의 부담을 가진 마음을 기뻐하신다.
셋째, 성도간의 아름다운 교제의 의미가 담겨 있다. 예수님은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고 하셨다(17절). 성찬은 주님 안에서 한 몸이 된 성도끼리 사랑의 교제를 하고 서로의 필요를 나누라는 의미도 있다. 그래서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어떻게 하면 형제에게 더 사랑을 베풀까? 어떻게 내가 속한 교회에 힘을 보태고 평화롭게 지내기를 힘쓸까?”를 생각하고 교회의 좋은 성도가 되기를 다짐하는 계기로 삼으라. 성도의 최대 축복은 천국 평화를 얻는 것에 있다. 어떻게 그 평화를 얻는가?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되기를 힘써야 한다.
< 진정한 영혼의 강자 >
요새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돈을 잘 벌까?”에 관심이 많지만 성도는 “어떻게 남을 잘 섬길까?”에 더 관심을 두어야 한다. 겸손히 남을 섬겨줄 때 하나님은 축복의 3권, 즉 영권(靈權, 영적인 권세)과 인권(人權, 인적인 권세)과 물권(物權, 물적인 권세)을 주신다. 기억 집회나 위대한 주의 종으로부터 권세를 얻겠다고 하다가 미혹되지 말고 나의 범사에 감사하는 삶과 겸손히 섬기는 삶이 기적과 권세의 원천임을 잊지 말라.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 직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다. 예수님은 지극히 큰일에서도 위대하셨고 지극히 작은 일에서도 위대하셨다. 그때 베드로는 자기 발만은 씻겨주지 말라고 했다. 너무 황송해서 그랬을 것이다. 아마 발이 너무 더러워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겨주시는 장면을 깊이 묵상하면 이제까지 내가 얼마나 잘못 살아왔는지를 새롭게 깨닫는다. 교만한 자리에서 영광을 느끼지 말고 겸손한 자리에서 영광을 느끼라.
누가 저주 받고 누가 축복 받는가? 그것은 관상쟁이나 점쟁이가 결정하지 않고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남을 짓밟으면 역풍이 불어 저주 받고 남을 섬겨주면 순풍이 불어 축복 받는다. 19세기에 다윈은 ‘적자생존’을 주장하며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고 했다. 그 말이 맞으면 산에는 온통 사자와 호랑이와 이리떼만 있어야 하지만 실제로 산에는 온통 다람쥐와 토끼들만 있다. 무슨 말인가? 남을 잡아먹으면 결국 저주 받아 사라지고 남을 섬겨주면 결국 축복 받아 살아남는다는 뜻이다. 주어진 힘을 나만을 위해 사용하면 점차 멸망하지만 남과 나누면 점차 풍성해진다.
중요한 것은 힘을 많이 가지는 것보다 가진 힘을 잘 사용하는 것이다. 아무리 힘이 없어도 그 힘을 남을 위해 사용하면 그가 진짜 영혼의 강자다. 세상에서도 강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영혼의 강자가 되라. 성도가 ‘영적 지게꾼’이 되어 남의 짐을 져주면 신기하게도 내 인생의 짐이 훨씬 가벼워진다. 믿음의 성숙을 위한 교육적이고 전략적인 일정 기간의 침묵도 때로는 필요하지만 기본적으로 나의 따뜻한 마음과 따뜻한 말 한 마디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다가가 그를 품어주라. 그때 하나님이 나를 품어주실 것이다.
기적을 추구하는 인생보다 연약한 자를 찾아 수고의 손길을 베푸는 인생이 더 기적적인 은혜의 주인공이 된다. 신앙생활에서 주일성수는 믿음의 기본이지만 그 기본 단계에서 머물지 말고 “내가 줄 것이 없나?”를 생각하며 교회와 남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더욱 시간과 물질을 내려고 하라. 그리고 줄 수 있는 능력과 실력을 갖추기에 힘쓰라. 혹시 주머니가 비어서 줄 것이 없으면 따뜻한 말 한 마디를 건네주거나 따뜻한 미소 하나라도 보여주라. 그것이 위대한 선교사이셨던 예수님을 따르는 작은 선교사들의 중요한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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