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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구걸하지 말라 (신명기 18장 1-8절)

by 【고동엽】 2023. 1. 3.

사람에게 구걸하지 말라 (신명기 18장 1-8절)

 

<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 >

 A 선교사는 신실하고 순수하고 열정적으로 사역해서 선교지 현지인의 사랑도 많이 받았다. 그가 4년 전에 배가 아파 귀국해 종합검진을 받았다. 그때 위암 판정을 받았다. 그 사실을 그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병원에도 입원하지 않고 평소처럼 조용히 선교지로 떠났다. 활동에 어려움이 없었기에 암이 믿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뒤로도 변함없이 선교지에서 힘써 사역하면서 자신도 병을 잊고 살았다.

 며칠 전, 그가 너무 몸이 아파 급히 귀국했다. 평소에는 숙소로 직접 버스를 타고 왔는데 이번에는 몸이 아프다고 공항 픽업을 부탁했다. 위암 판정을 받고도 씩씩하게 선교지로 보낼 물건을 몇 보따리 들고 가면서도 한 번도 픽업 부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특별히 그런 부탁을 해서 “정말 많이 아프구나.” 하고 생각했다. 선교지에서 몇 달째 식사를 잘 못하고 너무 아파하니까 선교지 성도들이 “선교사님! 한국에 가서 치료받으세요.”라고 사정하다시피 해서 귀국한 것이었다. 몸무게는 평소보다 20킬로그램 이상 빠진 상태였다.

 도착 다음 날 다른 병원에서 검진을 받았다. 위암이 췌장까지 전이되어 위에서 그 아래로 음식물은 전혀 내려가지 못했고 물도 거의 내려가지 못했다. 며칠 전 의사가 검진 결과를 설명하면서 이전 병원의 진료 기록도 보고 말했다. “4년 전에 암 판정을 받았네요. 지금까지 산 것이 기적입니다. 빨리 수술하세요.” A 선교사는 그 얘기를 하면서 마치 처음 그 사실을 안 것처럼 말했다. “목사님! 제가 4년 전에 이미 암 판정이 났었다고 하네요.”

 그때 내가 물었다. “선교사님! 암 판정받은 사실도 모르셨어요?” 그가 대답했다. “그런 얘기를 들은 것 같기는 한데 그냥 잊고 살았어요. 그때도 수술해야 된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기는 해요.” 암 판정을 받고도 크게 아프지 않으니까 그냥 선교지로 떠난 것이었다. 아마 최후까지 선교지에서 영혼을 구하다가 조용히 천국에 가려는 마음도 있었고 주위 사람들에게 염려를 끼치지 않고 하나님과 단 둘이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이번에도 편하게 말했다. “다른 데는 다 좋아요. 그런데 배가 아파서 잠시 한국에 쉬러 온 거예요.” 여전히 씩씩했다. 처음에는 계속 수술도 거부했다. 교만한 마음으로 “내가 믿음으로 고치리라.”고 하면서 수술을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대화해보니까 실제적인 이유는 수술비용 때문인 것 같았다. 그는 오랫동안 한국에서 살지 않아서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었고 종합검진 비용도 공제 없이 제 값을 다 내야 했다.

 이번에 선교지 성도들이 한국에서 치료받으라고 상당히 많은 병원비 헌금을 했다. 그것이 쉽지 않다. 선교사가 선교지 주민들을 위해 헌금하는 경우는 많아도 선교지 주민들이 선교사를 위해 헌금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자기들을 위해 희생한 선교사가 병든 것을 알고 그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병원비 헌금을 했는데 그 헌금이 상당히 많아서 선교사님이 선교지 성도들을 사랑으로 잘 목양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문제는 그 헌금도 의료보험이 없어 수술비용에 많이 모자란 것이다. 그래서 수술을 안 받겠다는 것을 간신히 설득해 곧 수술 받게 되었다. 비용 문제를 생각하면 동료 목회자들에게 사실을 알려야 하지만 선교사님은 부담을 준다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래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그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마음에 감동해 더 은밀히 기도할 것이고 하나님도 감동하셔서 수술비도 채워주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뤄주실 것이다.

 A 선교사의 알리지 말아달라는 부탁은 당연히 수용해야 하기에 그가 누구인지를 추정할 수 있는 사연과 정보는 다 감췄다. 수술이 잘 되고 치유되면 적절한 때에 이름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언뜻 “그런 기도제목은 널리 알려서 기도를 부탁해야지 왜 감추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 단 둘이서 그 문제를 직접 해결하고 싶어 하는데 옆에서 “그 기도제목을 많이 알리세요.”라고 할 수는 없다.

 전쟁에서 장수가 죽으면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한다. 병사의 사기가 떨어질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그처럼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 내 병을 알리지 말라.”는 신실한 사역자의 부탁은 그대로 따라주어야 한다.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대면을 통해 병 문제를 조용히 해결하려는 태도는 좋은 결과를 낳을 때가 많다.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이다. 그 만남은 대개 다른 사람이 다리를 놓기보다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일대일 만남을 통해 이뤄진다. 영적인 리더에게는 그런 만남이 더욱 필요하다.

< 레위인에 대한 규례 >

 제사장이란 헬라어 ‘폰티넥스’는 ‘다리를 놓는 사람’이란 뜻이다. 제사장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잘 놓으려면 먼저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헌신해야 한다. 그러나 헌신적인 사람도 일단 먹고는 살아야 하기에 하나님은 제사장의 먹고사는 문제도 세심하게 배려하셨다. 그래서 레위인 제사장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성별된 존재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인간적인 필요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백성들이 제사장에 대한 잘못된 생각과 편견을 가지지 않도록 레위인에 대한 규례를 세우셨다. 어떤 규례인가?

1. 분깃과 기업이 없었다

 레위인 제사장과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 중 분깃과 기업이 없어서 여호와의 화제물과 그 기업을 먹으라고 했다(1절). 그들이 기업을 가지지 않은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시기 때문이다(2절).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면 하나님께서 생계를 책임져주신다는 뜻이다. 특권이 있을 때 더 겸손해지고 자기의 정당한 몫도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필요를 채워주신다. 반면에 특권이 있다고 특권의식을 가지고 위세를 부리면 더 소중한 것을 잃는다.

 요새 기무사 개혁 얘기가 나온다. 무엇이 가장 큰 문제로 꼽히는가? 특권의식이다. 제가 군에 있을 때 다른 군인들은 매일 극한 훈련을 할 때 보안부대 사병들은 머리를 길게 기르고 심지어는 가르마까지 한 채 부대 내에서 남들이 다 보는 곳에서 버젓이 일과 시간에 족구를 했다. 나라를 손에 거머쥔 사람의 직속 부하라고 사병들도 안하무인이었다. 일반 사병에게 중대장은 하늘처럼 높이 보였지만 중대장이나 심지어는 대대장도 일과 시간에 부대 내에서 남들이 보는 상황에서 버젓이 족구를 못했다.

 당시 40세도 안 된 보안사 영관급 장교가 친구 공무원에게 “내가 승진시켜 줄게. 좋은 자리로 보내줄게.”라고 하면 정말 그대로 되었다. “그때는 재벌들이 내 앞에서 벌벌 떨었다.”라고 무용담처럼 말하는 보안사 장교들도 많다. 간첩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특별 수사권을 가졌으면 보안사령관은 자기 이미지를 위해서라도 보안사 요원에게 이렇게 명령해야 했다. “ 특권을 가졌기에 더 겸손히 국민을 섬기라. 본 업무에 충실하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지 말라.” 그런 정신교육만 잘 했다면 사람들의 평판도 달라졌을 것이다.

 그때는 보안사 영관급 장교만 해도 지금 돈으로 100억 원대 재산을 못 모으면 바보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그런 의미에서 기무사 개혁은 예고된 것이었다. 특권이 있으면 특권의식을 더 내려놓아야 추락도 없다. 레위인에게는 제사장이란 특권이 주어졌기에 특권의식을 버리라는 뜻으로 분깃과 기업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살아갈 길은 마련해주셨다. 욕심을 내려놓게 하시고 은혜로 채워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2. 받을 몫을 지정해주었다

 제상장이 받을 몫은 제물의 소나 양이나 그 앞다리와 두 볼과 위다(3절). 또한 처음 거둔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처음 깎은 양털도 제사장에게 주라고 했다(4절). 처음 깎은 양털은 제사장의 의복을 위해 드리게 했다. 민수기 18장에는 제사장 몫이 자세히 규정되어 있다. 그렇게 제사장 몫을 자세히 규정한 것은 불평과 논란 없이 정당한 몫을 제사장들에게 돌리고 반대로 제사장이 정당한 몫 이상을 요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 규례는 실제로 잘 시행되지 않았다. 그 규례를 어겨 사회적 지탄은 받아도 특별한 제재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일반 레위인이 많았다. 하나님이 레위인에게 일정 몫을 떼어준 것은 그들이 늘 여호와의 이름으로 서서 섬기라는 뜻이었다(5절). 또한 그렇게 해서 레위인이 일하지 않고 놀고먹는다는 오해와 불평이 없게 하셨다. 하나님은 레위인이 얻는 몫이 공짜 특권이 아닌 하나님의 일을 한 대가로 인식시켜 그 일에 더 충실하게 했다.

 당시 어떤 일반인은 이런 생각을 하며 십일조를 등한시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뼈 빠지게 일하는데 레위인은 일도 별로 안 하고 일주일에 안식일 하루와 일 년 중 절기 때만 바쁜 것 같은데 우리처럼 누리며 살면 되겠는가?” 그러나 성전을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백성을 잘 인도하려고 기도하고 묵상하고 준비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가끔 불순종하는 백성을 만나면 심한 내상을 입는다. 레위인의 일이 때로는 일반인의 일보다 더 뼈 빠지는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 “일도 안 하고...”라는 말은 틀린 말이다.

 어떤 성도는 생각한다. “목회자가 전체 교인을 위한 설교는 주일에 한번 하는 데 왜 그렇게 사례비를 많이 받는가?” 그러나 목회자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일주일 내내 지키는 것도 주일의 설교만큼 중요하다. 목회자가 교회를 비우면 이상하게 교회에 문제도 많이 생긴다. 그때마다 목회자가 교회를 지키는 것 자체도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시야가 열릴 때 성도도 목회자가 받을 몫에 기쁘게 관심을 기울일 것이고 그런 사랑과 배려가 교회와 교인의 축복으로 나타날 것이다.

3. 거주 이전의 자유를 주었다

 지방에 거주하는 레위인은 이스라엘 전역에 있는 6개의 도피성을 포함한 48개 성읍에 흩어져 살면서 종교와 교육 업무를 수행했다. 그들이 중앙 성소에서 봉사하고 싶은 소원이 간절하면 그 소원대로 중앙 성소로 오게 해서 중앙 성소의 인맥 독점화로 인한 부작용을 막았다(6-7절). 그때 지방에서 올라온 레위인도 중앙 성소에서 봉사하는 레위인처럼 대우해주라고 했다(8절). 하나님의 일꾼은 기본적으로 똑같이 대해야 한다는 뜻이다.

 오늘날의 의미로 말하면 목회자는 사역지를 얼마든지 바꿀 수 있고, 도시 목회, 시골 목회, 한국 목회, 이민 목회, 선교지 목회, 찬양 목회, 특수 목회 등 얼마든지 자기 소원대로 사역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소원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대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넓고 화려한 문으로만 들어가려고 하면 안 된다. 문제는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가장 기초적인 두 말씀은 마태복음 6장 33절에 나오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과 누가복음 13장 24절에 나오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씀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은 “좁은 문 안에서만 살라.”는 말이 아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면 신기하게도 앞날에 넓은 삶이 펼쳐지지만 넓은 문만 찾으면 앞날에 좁은 삶이 펼쳐진다. 결국 ‘좁은 문’이 ‘좋은 문’이다.

4. 개인 재산 소유가 가능했다

 지방에 있던 레위인이 중앙 성소에 올라가 봉사하려고 소유한 집이나 물건을 팔고 얻은 돈은 개인적인 소유가 가능했다(8절). 레위인은 땅은 기업으로 받지 못했어도 거주할 성은 받았고 그 성 안에 있는 자기 집이나 가재도구는 남에게 팔 수 있었다. 그렇게 생긴 돈은 중앙 성소에서 봉사하고 받는 몫과 상관없이 자기 소유로 삼을 수 있었다. 하나님은 제사장의 소유를 정죄하지 않으셨다. 문제는 제사장이 돈과 소유를 불의하고 집요하게 추구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2장에서 왜 예수님은 분노하며 성전 청소를 하셨는가? 제사를 이용해 돈을 추구하고 형식적으로 헌신한 위선 때문이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예루살렘에 올 때 양이나 비둘기 같은 죄 사함의 제물을 가져와야 했지만 멀리서 제물을 가지고 오기가 귀찮으니까 성전 앞에서 급히 제물을 사서 형식적으로 바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상황을 이용해 장사꾼들이 성전 앞에서 제물을 팔고 환전상들이 환전을 해주며 폭리를 취했다. 그때 제사장들은 뒷돈을 받고 그 행위를 눈감아 주었기에 예수님이 분노하신 것이다.

 헌금은 하나님의 큰 은혜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구체적인 증거로 나타낸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고 감사를 잊으면 형식적인 제사와 헌금이 된다. 그런 타락의 일차 책임은 제사장에게 있었다. 요새도 물질 문제로 시험 드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사역자의 부실한 물질생활 때문이다. 사역자는 물질에 초연해야 한다. 사역 동기가 안정된 삶이나 명예가 되면 안 된다. 사역 동기가 부패해지면 교회도 부패해진다. 돈은 필요한 것이지만 목적으로 삼을 것은 아니다. 돈이 목적이 되면 인생길을 잃는다.

 아무리 힘들어도 사람에게 구걸하지 말고 하나님께 구하라. 없어도 당당하게 사는 모습이 보는 사람에게 깊은 안정감을 주고 결국 그의 필요를 채워주고 싶은 감동을 낳는다. 그때 하나님도 감동하셔서 그 필요를 넉넉하게 채워주신다. <월새기(월간새벽기도)> 사역도 매월 재정적인 마이너스가 크지만 늘 당당했기에 하나님의 신비한 손길로 필요가 채워져 지금까지 발행될 수 있었다. 늘 하나님만 바라보고 왕 같은 제사장의 길을 당당하게 가는 복된 심령들이 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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