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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18,185편 ◑/자료 16,731편

예언서 녹취 14

by 【고동엽】 2022. 1. 6.
그다음이 오바댜입니다. 오바댜는 구약에 나오는 유일한 한 장짜리 본문입니다. 에돔에 대한 심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에돔이 왜 심판을 받느냐, 남유다가 바벨론에 멸망을 당할 때 에돔이 나쁜 짓을 많이 했습니다. 바벨론의 길잡이 역할을 했습니다. 그 역할을 하면서 남유다가 멸망당하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남유다 백성들이 도망칠 때 이들을 사로 잡아서 그들을 다른 나라에 팔아 넘겼습니다. 아시다시피 이스라엘과 에돔은 원래 한 형제였습니다. 에서와 야곱의 후손들입니다. 형제가 고난받고 있을 때 고난 받는 형제를 도와줘야 되는데 도리어 고난받는 형제의 아픔을 이용해서 자기 이익을 챙기고 형제가 고난 받는 것을 보면서 즐거워 하고 기뻐하고 이런 것에 대해서 그들의 죄를 질타하는 것이 오바댜입니다. 오바댜는 1장 10절이 중요합니다.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악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움을 당하고 영원히 멸절되리라.“ 오늘날 우리의 형제의 고난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자세를 취해야 될 것인지, 특별히 우리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 아닙니까, 우리는 남한에 살고 있습니다. 북한에 있는 북한 사람들은 우리의 형제입니다. 북한의 경제적 위기, 삶의 위기 속에서 우리가 승리했다, 우리가 더 위대하다, 이런 식으로 남한과 북한의 관계를 경쟁의 관계로 볼 것이 아니라 형제의 고난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그들을 도울 수 있을까 고민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 오바댜의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요나입니다. 요나는 참 특이합니다. 왜 특이하냐면 보통 예언서는 그 예언자가 외치는 메시지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요나서는 요나가 외쳤던 메시지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40일이 지나면 니느웨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것 선포가 딱 한번 나옵니다. 요나서는 요나가 어떤 메시지를 선포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요나라고 하는 이 사람의 삶, 요나가 보여주는 삶의 이야기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시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그래서 다른 예언서와 차이가 있습니다. 다른 예언서는 예언자가 어떤 사역을 하고 어떤 말을 선포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요나서는 요나라는 예언자의 모습이 핵심입니다. 요나가 보여주고 있는 반응, 요나가 갖고 있는 신학적인 사고 즉 요나라고 하는 한 사람의 삶이 결국은 그의 백성에게 주고자 하시는 메시지입니다. 요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갖고 있었던 배타적 선민 사상을 책망하는 예언서입니다. 이스라엘의 배타적 선민사상을 책망하는 예언서가 요나서입니다. 그렇다면 많고 많은 예언자들 가운데 왜 하필 요나가 주인공일까일까요? 요나가 누구와 동시대 인물이냐면 아모스와 호세아입니다. 이들이 사역했던 때가 여로보암 2세 때입니다. 북이스라엘이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을 때입니다. 경제적으로 엄청 번영을 누리고 우상 숭배에 몰두하고 사회적, 도덕적, 종교적 타락이 극에 달했을 때입니다. 그것을 책망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를 요청했던 사람이 아모스와 호세아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요나는 회개를 촉구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여로보암 2세 때 북이스라엘 영토가 확장될 것이라고 예언한 사람입니다. 요나는 누구냐면 북이스라엘의 영토 확장을 옹호한 민족주의 예언자입니다. 그게 어디 나옵니까? 열왕기하 14장 25절에 나옵니다. 한 마디로 얘기하자면 백성들이 듣기 원하는 메시지를 선포한 예언자가 요나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타락했는데, 이스라엘 종교는 우상 숭배에 몰두하고 하나님을 떠나 있는데 요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죄를 질타하거나 회개를 경고한 적이 없습니다. 도리어 영토가 확장될 것이라는 민족주의적인 예언을 한 사람이 요나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사랑받은 예언자가 요나입니다. 그 요나를 주인공으로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갖고 있던 잘못된 신학적인 사고를 질타하는 것이 요나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진 잘못된 신학 사고의 대표적인 것이 배타적 선민사상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독점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나서를 보면 니느웨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을 요나가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나만의 하나님, 우리만의 하나님으로 독점하고 싶은 겁니다. 원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만민을 위한 선민으로 부르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먼저 거룩한 백성이 됨으로 말미암아 이방의 모든 나라들을 하나님 앞으로 견인해오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전도하지 않았습니다. 왜 전도하지 않았습니까? 이방인이 구원받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나와 우리만의 하나님으로 독점하고 싶어 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대표하는 인물이 요나입니다.


1장 13절을 보겠습니다. 요나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요나가 탔던 배가 풍랑을 만나서 파선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배에 있던 이방 선원들은 요나를 바다에 던지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어떻게든 요나를 살리려고 애를 씁니다. 1장 13절을 보면, ”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서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라고 말합니다. 요나서를 보시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을 뒤집는 이야기가 두 개 나옵니다. 첫째 요나는 하나님의 백성, 예언자 아닙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뭔가를 지시하고 명령하면 무조건 순종할 것 같죠?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에 요나는 순종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니느웨 사람들은 이방인들입니다. 하나님이 명령하고 경고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이 경청하겠습니까? 무시하겠죠. 그런데 니느웨 사람들에게 심판을 경고했을 때 니느웨 사람들은 왕부터 가축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들이 금식을 했습니다. 회개를 했습니다. 이처럼 요나서가 우리의 기대를 뒤집는 첫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 같은 요나는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알 것 같던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무릎을 꿇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요나는 누굽니까?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닮아야죠. 뭇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닮아서 뭇 생명에 대해서 측은지심을 가질 것 같은데 요나는 생명에 대한 측은지심이 별로 없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에 대해 별로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이방인들은 아주 사나울 것 같고 자기밖에 모를 것 같잖아요. 그런데 1장에 보시면 요나 때문에 이런 위기에 처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이방인들이 요나의 생명을 지켜내려고 애를 씁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답지 못하고 이방인들이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다운 이런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면서 자기 반성과 성찰을 촉구하는 것이 요나서의 주된 내용입니다.


핵심은 4장 1~2절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한 결과 하나님이 니느웨를 심판하지 않습니다. 그들 모두가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일에 대한 요나의 반응이 4장 1-2절에 나옵니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지난 시간에 예언과 묵시의 중요한 세 가지 차이를 말씀드렸습니다. 예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심판을 경고하는 그 순간에도 청중의 반응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변경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이 자기를 니느웨에 가라고 하실 때 짜증이 났던 겁니다. 니느웨를 심판하시고자 하신다면 그냥 심판하시면 되는데 굳이 자기를 보내서 심판을 경고하게 하시는 것을 통해 요나는 하나님에게 어떤 마음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겁니까? 자기의 경고를 듣고 니느웨 사람들이 돌이켜서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지 않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마음을 요나가 간파한 겁니다. 그냥 니느웨 사람을 심판하면 되지, 굳이 예언자를 보내서 심판을 경고하게 만들고, 그래서 심판의 경고를 듣고 니느웨 사람들이 마음을 돌이켜서 회개를 하게 되면 심판을 받지 않게 되는 그것이 요나는 너무 싫은 겁니다. 요나는 그냥 니느웨 사람들이 심판받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누구의 마음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입니다. 이방 사람들은 그냥 다 심판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를 니느웨로 파송하는 순간부터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을 구원하고 싶어하시는 그 자비하심에 대해서 짜증이 난 겁니다. 그래서 요나서는 무엇을 책망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라고 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갖고 있는 배타적 선민 사상, 하나님을 독점하려고 하는, 하나님의 무한 자비하심에 대해 분노하는, 그 속 좁은 마음을 책망하는 것이 바로 요나서의 핵심입니다.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하나님을 자꾸 독점하려 하지 말라고, 이 좋으신 하나님을 세상 만민들과 함께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당신의 백성 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무한 자비하심을 기억하라고,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그 자비하심과 오래 참으심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야 될 텐데 하나님의 백성이라 고백은 하면서도 하나님을 닮지 못하는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만들고 성찰하게 만드는 중요한 본문이 바로 요나서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 시간에 예언서 마지막 시간으로 미가부터 말라기까지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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