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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예언서 녹취 13

by 【고동엽】 2022. 1. 6.

오늘은 요엘부터 요나까지를 공부하겠습니다.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예언자들의 사역 시기에 대해 대충 다 알 수 있는데 유일하게 사역의 시점을 정확히 알기 어려운 예언자가 요엘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히브리어 성경으로는 요엘이 4장인데 한글 성경을 비롯한 대부분의 번역 성경에서는 요엘서가 3장입니다. 한글 성경의 2장 28~32절이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3장이고, 우리의 3장이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4장입니다. 요엘서의 가장 중요한 말씀은 2장 13절입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겁니다. 한 마디로 형식적인 회개는 그만하고 진짜 회개하라는 겁니다. 요엘서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여호와의 날입니다. 1장 15절입니다. “슬프다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같이 전능자에게로부터 이르리로다.” 여러분, 여호와의 날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종말의 날과 같은 겁니다. 하나님이 지금은 능력의 오른팔을 움츠리고 계신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이방 백성들에게 핍박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능력의 오른팔을 펼치시게 되면 이스라엘을 괴롭힌 모든 나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이스라엘이 세계 만방에 우뚝서게 된다, 그날을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날로 이해했습니다. 여호와의 날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역사에 자기를 전면적으로 드러내시는 날, 그 날이 되면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이방의 모든 나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그 날을 여호와의 날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엘은 뭐라고 하냐면 그 여호와의 날이 너희에게 구원의 날이 아니라 심판의 날이 될 것이다 라는 겁니다. 왜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답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믿고 순종하는 겁니다. 그런데 요엘이 살았던 당시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도 않았고 순종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방의 온갖 우상에게 무릎 꿇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됨을 저버린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이 땅에 전면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시는 순간,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은 그날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는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날이 되면 자기들은 구원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엘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착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너희가 진짜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이스라엘다운 삶을 살고 있는가를 돌아보라는 겁니다. 이를 강하게 촉구하는 것이 요엘서이빈다.

 

2장 28~29절은 우리가 요엘서에서 가장 잘 아는 말씀입니다. 이후에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가 이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고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다.” 한 마디로 만민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리라는 약속입니다. 여러분, 구약 시대에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을 받았습니까? 왕, 제사장, 예언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이 기름 부음 받음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음,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들이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때에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젊은 사람이건, 나이가 많건, 남자 종이건, 여자 종이건 하나님의 백성된 자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영을 허락해주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신학에서 뭐라 하냐면 영의 민주화라고 합니다. 소수의 사람만이 독점하고 있던 것들이 이제는 만민에게 보편화 되는 겁니다. 이런 요엘서 2장 28~29절의 말씀이 언제 성취되었습니까? 사도행전 2장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입니다. 초대교회의 남성과 여성, 나이가 많은 사람이건 젊은 사람이건 그들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영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요엘서의 말씀이 사도행전 2장 오순절 사건에서 성취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 아모스서입니다. 아모스는 주전 760년 경에 북이스라엘에서 사역한 예언자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사역한 예언자가 호세아입니다. 보통 사역 시기를 아모스가 주전 760년경, 호세아는 주전 750년경으로 봅니다. 재미있는 것이 아모스는 원래 남유다 사람입니다. 남유다 사람인데 북이스라엘에 가서 예언사역을 한 겁니다. 이 아모스가 자기의 이름으로 예언서를 쓴 최초의 문서 예언자입니다. 예를 들어, 아모스 이전의 예언자인 엘리야나 엘리사는 자기의 이름으로 예언서를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모스 이후부터 아모스, 호세아, 남유다에서 사역했던 이사야, 미가 그 이후의 많은 사람들은 자기 이름으로 예언서를 남겼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문서 예언자라고 합니다. 최초의 문서 예언자는 아모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아모스가 주전 8세기 중반 사람인데 왜 주전 8세기 중반 이후부터 자기 이름으로 예언서를 남긴 사람이 이렇게 많이 등장했을까, 왜 그 전에는 자기 이름으로 예언서를 남긴 사람이 없을까 라는 질문을 많이 합니다. 이에 뭐라 대답하냐면, 주전 8세기 때부터 고대 히브리어가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통용 문자가 되었다고 보는 겁니다. 고대 히브리어가 탄생한 이후에 이제는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어느 정도 유통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전 8세기 중반부터 고대 히브리어로 자기 이름을 내걸고 예언서를 기술한 문서 예언자들이 하나 둘 등장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아모스는 핵심이 이겁니다. ‘너희가 원하는 바대로 하나님 섬기지 말고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 집중하라’는 겁니다.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뭡니까? 일상의 삶에서 우리가 공의롭게 살고 정의롭게 사는 겁니다. 이것이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드리기를 원하셔 하면서 종교적 제의에 열심을 다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찬양드리기를 원하셔 하면서 끊임없이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모스는 “너희의 예배와 찬양을 하나님은 열납하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일상의 삶에서 이웃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진실하고 거룩하게 살지 않는 자의 예배와 찬양을 하나님은 열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너희가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다움, 진실함과 정직함과 거룩함을 드러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의로운 삶을 살아내고 연약한 자를 돌보아주는 것이다, 그런 삶을 너희가 살아내는 것을 진짜 하나님이 원하신다, 이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모스서의 내용입니다.

 

아모스 1~2장을 보면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심판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은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대예언서에도 나오는 것입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를 심판하실 때 단 한번도 하나님을 안 믿었다는 이유로 심판하는 경우는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아모스 2장 4~5절을 보겠습니다. ‘유다에 내리신 벌’이라는 소제목으로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유다의 서너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의 조상들이 따라가던 거짓 것에 미혹되었음이라 내가 유다에 불을 보내리니 예루살렘의 궁궐들을 사르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1~2장에서 하나님이 이방 나라를 심판하실 때는 너희가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 너희가 나의 율례를 지키지 않았다, 이런 말씀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방은 주로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까? 일반 은총에 근거하여 그들은 심판을 받습니다. 일반 은총의 대표적인 것이 이성과 양심입니다. 이성과 양심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모든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일반 은총, 보편 은총이라고 합니다. 이성과 양심이라고 하는 것은 신앙인들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모든 사람에게 주신 보편적인 선물입니다. 이방 백성들은 이런 이성과 양심에 근거하여 심판을 받습니다. 지나치게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 나의 이익을 위해 인신매매한 것, 너무 잔혹하게 사람들을 학살한 것 이런 것들에 대해서 심판을 받은 것이지 ’너희 왜 하나님 안 믿었어? 하나님 안 믿었으니까 지옥, 너 왜 내가 명령한 율법에 순종하지 않았어? 순종하지 않았으니까 심판‘ 이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면 하나님의 심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공의로움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실 때 심판을 받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수긍할 것이라고 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심판은 심판 받는 당사자가 수용하고 수긍할 수밖에 없을 만큼 공의롭습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들어볼 기회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너는 하나님 안 믿었으니까 지옥‘ 그러면 심판받는 그 사람이 이런 심판의 내용을 수긍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는 겁니다. 뭘 아셔야 되냐면 구약의 이방 백성들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때 단 한번도 종교적인 이유로 심판받는 경우는 안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대다수가 이성과 양심이라는 일반 은총에 근거했을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다운 삶을 살아내지 못했을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웃에게 자비롭게 행동하지 않은 것들 때문에 심판받는 것이지, 종교적인 이유로 심판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하나님이 뜻이 무엇인지 율법을 통해 알려주셨는데 그 율법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셨는데 하나님이 원하는 바대로의 삶을 살아내지 않았다, 끊임없이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불순종의 삶을 지속했다, 이런 것들 때문에 주의 백성들은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이방 백성들의 심판의 기준이 다른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심판이 공의롭다는 가장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대예언서나 아모스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방 백성들은 일반은총에 근거하여 심판을 받습니다. 심판 받을 때 이스라엘과는 심판의 기준이 다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순종했는가, 하나님만을 신실하게 사랑했는가 이런 것을 기준으로 심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다음에 4장 4~5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고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선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기 보면 벧엘, 길갈, 브엘세바가 나옵니다. 여기가 어디냐면 유명한 가나안의 성소입니다. 오늘날로 이야기 하자면 종교적인 명당입니다. 이런 곳에 이스라엘 백성이 시간 날 때마다 가서 예배를 드리고 제사를 드린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이것은 너희가 원하는 것이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청하신 것이 5장 6절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이 말씀이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여호와를 찾는 겁니다. 여호와를 찾는다는 것을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착각했냐면 벧엘이나 길갈이나 브엘세바 같은 성소에 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을 여호와를 찾는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아닙니다. 여호와를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일상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호와를 찾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종교적인 의식에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진짜 원하시는 공의로운 삶, 자비가 넘치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왜 이것이 문제가 될까요? 종교적인 의식은 내 삶을 바꾸지 않아도 얼마든지 행할 수 있는 겁니다. 내가 1년 내내 거짓말 하고 사기 치고 남에게 폭력행사 하면서도 일요일마다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남을 속였던 그 입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죄악된 삶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드릴 수 있는 것이 종교적 의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종교적 제의에 열심을 다하는 것보다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을 중요하게 보십니다. 이것이 진짜 여호와를 찾는 길입니다.

 

그다음 마지막으로 볼 말씀이 9장 7절입니다. 아모스 9장 7절이 제가 볼 때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충격적인 말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내게 구스 족속 같지 아니하냐,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블레셋 사람을 갑돌에서, 아람 사람을 기르에서 올라오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여기 마지막에 올라오게 하지 아니하였느냐는 말은 올라오게 했다는 말입니다. 여기 올라오게 했다는 말은 영어로 세이브, 즉 구원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구원하신 것이 출애굽 사건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또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만 구원한 것이 아니라 블레셋 사람을 갑돌에서 구원했고 아람 사람을 기르에서도 구원했다는 겁니다. 열왕기하 5장 1절에도 그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아람이 위기에 처했을 때 나아만이라는 군대 장관을 통해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 얼마나 충격이겠습니까? 이스라엘은 우리 이스라엘만 하나님의 백성이야, 우리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그리고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이방 백성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야 이렇게만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아모스를 통해서 무슨 말씀을 하신 겁니까?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이스라엘을 구원해준 것처럼 블레셋과 아람도 하나님이 그들이 고통 가운데 있을 때 그들을 구원하셨다는 겁니다. 얼마나 충격적인 말씀입니까?. 여기서 뭘 기억하셔야 되냐면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예수를 믿건 안 믿건 하나님을 믿건 안 믿건 이 땅의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 본질적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본질적 관계가 있고 언약의 관계가 있습니다. 본질적 관계는 이 땅의 뭇 생명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입니다. 예를 들어 창조자와 피조물입니다. 그들이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에 의해서 지음받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본인들이 인정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과 본질적 관계를 맺고 있는 겁니다. 거기에 우리 같은 신앙인들은 플러스 알파로 또 하나의 관계가 있는 겁니다. 그것이 언약적 관계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뿐만 아니라 왕과 백성, 아버지와 자녀라고 하는 언약 관계를 맺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기억하셔야 할 것이 뭐냐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조차도 하나님과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들이 깨닫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할 뿐이지 그들도 하나님과 본질적인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자들이 불행한 상황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을 때 하나님을 그들을 도와주십니다. 이것이 일반 은총의 선물입니다.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깨우쳐 주고 있는 것이 아모스 9장 7절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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