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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예언서 녹취 11

by 【고동엽】 2022. 1. 6.

오늘은 다니엘과 호세아를 보겠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한글 성경의 장르 구분에 따르면 이사야부터 말라기까지가 예언서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서는 예언서에 포함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성경 구분법에 따르면 다니엘서는 성문서입니다. 성문서 가운데 묵시 문학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은 성경을 토라, 예언서, 성문서 3개의 장르로 나눕니다. 이 3개의 장르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가장 거룩한 말씀은 토라, 그다음 거룩한 말씀이 예언서, 그다음 거룩한 말씀을 성문서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가장 거룩한 말씀을 앞부분에 배치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이 갖고 있는 성경의 배치는 토라, 예언서, 성문서 순서입니다. 본문으로 보면, 히브리어 성경은 창세기가 제일 먼저 나오고 제일 마지막에 역대기가 자리합니다. 여기서 질문 하나 드려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할 때 역대기는 어느 장르에 해당될까요? 맞습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할 때 역대기는 성문서로 분류됩니다. 다니엘서도 성문서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 70인경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을 다른 나라 언어로 최초로 번역한 성경이 70인경인데 번역하면서 두 가지 수정을 가했습니다. 첫째 원래 히브리어 성경에는 본문의 제목이 없었습니다. 대신 본문의 제일 앞에 나와 있는 단어나 앞부분에 있는 중요한 단어를 책의 제목으로 불렀습니다. 그러다 70인경으로 번역하면서 그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를 뽑아 책의 제목으로 정했습니다. 예를 들어, 첫 번째 두루마리를 읽어보니까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모든 것의 시작을 말하는 제네시스이다, 그래서 오늘날 창세기라는 책의 제목이 만들어졌습니다. 두 번째 두루마리를 읽어보니까 이것은 탈출에 대한 이야기라서 엑소더스라는 출애굽기 제목이 만들어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갖고 있는 것처럼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이런 식의 책의 제목이 만들어진 것이 70인 경부터입니다. 두 번째 중요한 수정은 태초의 창조부터 주전 400년경의 말라기까지 시간적 순서에 따라 성경을 재배치한 겁니다. 창세기부터 말라기 순서로 성경을 배치한 것이 70인 경부터입니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한글 성경은 약간 섞여 있는데, 안에 있는 내용은 히브리어 성경을 번역한 것이고, 책의 배치는 히브리어 성경으로 하지 않고 70인경 배치를 따랐습니다. 그래서 창세기부터 말라기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장르를 4개로 나눴습니다. 창세기부터 신명기를 토라, 율법, 모세오경이라 하고 여호수아부터 에스더를 역사서, 욥기부터 아가까지를 시가서, 이사야부터 말라기까지를 예언서라고 한 겁니다. 그래서 70인경부터 다니엘서는 예언서로 분류가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다니엘서를 성문서로 보았고 성문서 중 묵시 문학으로 보았습니다. 여기서 묵시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묵시문학은 보통 언제 등장할까요? 신앙인들을 탄압하고 괴롭히는 세속에 너무나 강력하고 불의한 권력자가 있을 때 등장합니다. 그 불의한 권력자가 이스라엘이 갖고 있는 신앙을 억압하고 세속의 가치에 추종할 것을 강요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만을 믿고자 하는 신앙인들을 핍박합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박해를 받고 순교 당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은 소수이고 하나님의 백성을 짓밟으려고 하는 세속의 가치, 권력자들은 너무 강력할 때 고난 받고 있는 주의 백성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해 등장하는 것이 묵시 문학입니다. 다니엘, 요한계시록이 대표적인 묵시문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예언과 묵시라고 하는 것을 세 가지 측면에서 구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먼저, 예언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예언은 심판을 경고하는 순간에도 청중의 반응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변경 가능한 것입니다. 두 번째 예언은 예언자를 통해서 주로 전달이 됩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같은 인간 예언자를 통해서 예언의 말씀이 전달됩니다. 이 예언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 세계의 잘못된 정치, 경제, 종교, 사법, 언론 이런 것들을 질타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런 것인데 지금의 모습은 너무나 잘못되어 있다, 이것을 빨리 변화시켜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현실 세계의 잘못된 것들을 변화시켜낼 것을 촉구하는 것이 예언입니다. 그런데 묵시라고 하는 것은 청중의 반응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청중의 반응에 따라 변화 가능하지 않습니다. 묵시는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되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묵시입니다. 하나님이 결정하신 바대로 진행되는 것을 우리 인간은 받아들이고 목격할 수는 있지만 인간의 반응에 따라 이것이 변화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예언과 묵시의 중요한 차이입니다. 두 번째 예언은 인간 예언자를 통해 전달되지만 묵시는 천사와 같은 천상적인 존재에 의해 전달됩니다. 세 번째, 예언은 이 땅의 잘못된 것을 변화시켜내는 것에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묵시는 이 땅의 잘못된 정치를 바꿔내고 경제를 바꿔내면 희망이 있다 라고 보지 않습니다. 이 땅 전체가 총체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무엇인가를 변화시켜 낸다고 한들 더 이상의 희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하늘과 지금의 땅이 없어지고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이 도래하는 것을 소망합니다. 이겄이 바로 묵시입니다. 예언과 묵시는 세 가지 정도의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을 꼭 기억해주십시오. 쉽게 비유를 들자면 집에 청소기가 있잖아요. 그 청소기 부품이 하나 고장 났습니다. 그러면 그 부품을 교체하면 되겠죠? 그 부품을 교체하는 것이 예언입니다. 그런데 청소기 자체가 고장이 났을 경우에는 부품 몇 개 바꾼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때는 청소기 자체를 교체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묵시입니다. 다니엘서는 묵시 문학이라는 것을 기억해주십시오.

 

앞에서 설명드릴 때 묵시문학이라고 하는 것이 언제 등장한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을 대적하는 강력한 권력자가 하나님을 믿는 주의 백성들을 핍박할 때, 세속의 가치가 주의 백성들을 강력하게 덮어쓰기 하려고 할 때 등장한다고 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다니엘서를 보면 느부갓네살이라는 왕에 의해서 금 신상이 만들어집니다. 느부갓네살은 그 금신상을 향해 모든 사람들에게 절하도록 만듭니다. 절하지 않으면 뜨거운 풀무불에 집어넣겠다고 협박을 합니다. 죽여버리겠다는 겁니다. 이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런 핍박의 상황, 박해의 상황, 하나님만을 믿겠다고 했을 때 순교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끝까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들을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보호해주실 것이다, 그들의 삶을 책임져 주실 것이다, 이렇게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해서 기술된 것이 묵시 문학입니다.

 

특별히 다니엘에서 중요한 것이 3장 17~18절 말씀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느부갓네살이 세웠던 금신상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뜨거운 풀무불에 집어 던져짐을 당합니다. 그때 친구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 아옵소서.” 여러분 이 말씀이 다니엘서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18절에 나오는 ‘그렇게 아니하실지라도’, 예전 개역 성경에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라고 되어 있었죠. 한 마디로 말하자면 느부갓네살이 세운 금 신상은 하나님께만 바쳐야 할 우리의 충성심을 가로채는 우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만 순종해야 되는데, 하나님께만 무릎 꿇어야 하는데 느부갓네살 왕은 금 신상을 만들어서 하나님께만 순종해야 할 우리들을 자기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절하지 아니하면 죽이겠다고 협박을 합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신앙인의 기백입니다. 결기 어린 고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누구에게도 무릎 꿇을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만 충성을 바칠 존재이다 그리고 내가 절하지 아니하는 것 때문에 고난과 핍박을 당한다 한더라도 그 고난과 핍박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해 주실 것이다, 우리를 건져주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당장에 구원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지금 당장 구원해 주시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왕이 세운 금 신상에 우리는 절할 수 없다.” 얼마나 담대하고 위대한 신앙인의 결기 어린 고백입니까. 그래서 다니엘의 세 친구는 금 신상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뜨거운 풀무불에 집어 던져짐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살려주셨습니다. 이것이 6장에도 나옵니다. 다니엘이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이유로 인해 사자 굴에 던져짐을 당합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지죠? 사자굴에 던져진 다니엘을 하나님이 살려주십니다. 하나님이 그를 보호해주십니다. 그를 구원해주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금 신상에 절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이고, 하나님께 기도하다가 사자굴에 던져져도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구원하신 것처럼 우리를 반드시 구원해 주실 것이다 라는 공식을 만들면 안 됩니다. 여러분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이유로 풀무불에 집어 던져짐을 당하고 사자굴에 집어 던져짐을 당한 사람 가운데 대다수는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다니엘이나 세 친구처럼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마치 세 친구가 “하나님이 지금 당장 우리를 구원해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일편단심의 신앙을 저버릴 수 없습니다, 왕이 세운 금 신상에 절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순교자들은 즉각적인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의를 지켰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의로운 당신의 백성들을 즉각적으로 구원하지 않은 경우들이 훨씬 더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뭐냐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바대로 행하지 아니하실지라도 라는 고백이 중요한 겁니다. 우리는 무엇을 고백하고 기억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위기에 처한 우리를 구원하실 수도 있고 구원하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왜요? 때로는 순교의 제물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이 상황에서 즉각적인 하나님의 건져주심과 보호하심을 경험하고 싶은데 하나님의 뜻은 다른 곳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와 똑같은 겁니다. 예수님은 이 잔이 지나가기를 간절히 기도했지만 마지막 기도를 어떻게 마무리 하십니까?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나는 이것을 원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다를 수 있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대로 하나님이 행하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그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이자 고백입니다. 그것을 너무 잘 보여주는 것이 다니엘과 세 친구의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세속의 가치가 범람하는 대한민국 사회 안에서 우리가 신앙의 길을 신실하게 걸어가려면 다니엘과 세 친구가 보여주었던 이런 신앙의 결기, 기백이 필요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대로 하나님이 해줄 때만 ‘하나님 사랑해요’라고 말하는 그런 어린 아이 신앙이 아니라 때로는 내가 원하지 않는 결과가 발생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 하나님의 뜻을 아멘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어른 단계의 신앙인으로 성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5장 1절을 보시면 벨사살이라는 왕이 등장합니다. 세계 역사를 잘 아시는 분들은 성경을 읽다보면 이런 질문을 가끔 하십니다. 다니엘서 5장을 보시면 바벨론이 멸망할 때 그때 바벨론의 왕의 이름이 벨사살이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세계 역사를 보시면 바벨론의 마지막 왕은 나보니두스입니다. 당장 충돌이 일어납니다. 세계 역사를 보면 바벨론의 마지막 왕은 나보니두스인데 성경은 벨사살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을 수 없다고 이야기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설명이 좀 필요합니다. 바벨론의 마지막 왕은 나보니두스가 맞습니다. 여기 벨사살은 나보니두스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나보니두스는 어머니가 달 신을 숭배했던 여제사장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보니두스는 어렸을때부터 어머니의 영향으로 달 신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마르둑이라는 신을 섬겼습니다. 당연히 마르둑을 섬겼던 제사장들은 달 신을 숭배하는 나보니두스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나보니두스로 인해 자신들의 입지가 축소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나보니두스는 마르둑이 아니라 달 신 숭배를 바벨론의 국가 종교로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그로 인해 나보니두스와 마르둑의 제사장들은 끊임없이 충돌하고 갈등을 빚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나보니두스가 자신의 본궁을 떠나 별궁으로 이동을 하게 됩니다. 나보니두스가 별궁에 갔을 때 본 궁을 자기의 아들이었던 벨사살로 하여금 다스리게 합니다. 그래서 벨사살왕이 다니엘서 5장에 바벨론으 마지막 왕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벨사살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바벨론의 마지막 왕은 아닙니다. 그는 별궁으로 이거한 아버지를 대신하여 대리통치를 하였던 나보니두스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5장 16절에 보시면 ‘메네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고 하는 벽에 쓰여진 글씨를 해독하는 사람에게 어떤 상을 주겠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너는 해석을 잘하고 의문을 푼다 하도다 그런즉 이제 네가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려주면 네게 자주색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네 목에 걸어주어 너를 나라의 셋째 통치자로 삼으리라.”왜 셋째 통치자일까요? 지금 바벨론 제국의 첫째 통치자는 왕인 나보니두스입니다. 둘째가 누굽니까? 아버지를 대신해서 궁에서 다스리고 있는 벨사살인 겁니다. 그리고 셋째가 바로 이 암호를 해독해주는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나보니두스와 벨사살의 관계를 기억하시면서 이 본문을 읽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6장까지는 왕의 꿈을 해석해주는 사람이 다니엘이었습니다. 그런데 7장 이하에는 꿈을 꾸거나 환상을 보는 사람은 다니엘이고 그것을 해석해주는 존재는 천사입니다. 예언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예언자를 통해서 선포되지만 묵시는 천상의 존재, 천사를 통해서 전달된다는 것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12장 2절에 보시면 부활사상과 심판사상이 등장합니다.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여러분 구약을 찬찬히 읽어보시면 구약에 의외로 부활이나 내세나 심판 사상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활과 내세와 심판이라고 하는 것은 주된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된 관심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것이 주된 관심이었습니다. 내세와 연관된 부활, 심판 이런 것들은 주된 관심은 아니었습니다. 유대 종교 권력을 오랜 세월 장악했던 사람들이 사두개인들 아닙니까? 사두개인들은 부활, 내세, 심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주전 2세기 중반 이후부터 부활, 내세, 심판이라는 것이 강조되기 시작합니다. 그때 등장한 종교 그룹이 바리새인입니다. 왜 이때 이러한 사상들이 등장하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이해하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원래 구약에 부활, 내세, 심판이라는 사상은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있긴 있지만 주된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와 같은 이방의 제국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고 괴롭히고 박해할 때, 그래서 하나님만을 믿었던 주의 백성들이 순교의 제물이 될 때 이런 질문이 등장했습니다. 하나님만 믿던 의로운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고 있는데 이것이 이들의 삶의 마지막일까, 이런 질문이 나왔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그렇지 않아, 이들의 인생은 이렇게 끝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이들의 삶을 반드시 복권시켜 주실 거야, 부활시켜 주실 거야,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영생을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복을 내려주실 거야”라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래서 현세가 전부가 아니라 영원한 내세가 있다는 것을 이런 사건들을 통해서 깨닫기 시작합니다. 더 강조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뭘 기억하셔야 하냐면 오랜 세월 유대교에서 이 부활과 내세와 심판은 중심 주제가 아니었습니다. 오랜 세월 유대인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에 관심을 집중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방의 불의한 권력자에 의해서 하나님만을 믿는 주의 백성들이 순교를 당하게 될 때 이렇게 이들의 삶이 끝나는 것인가 그런 신학적인 질문을 하게 되었고 그때 그들은 무엇을 깨닫게 된 겁니까? “아니다, 현세가 끝이 아니다, 하나님만 섬기다 순교를 당한 사람들을 끝까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거야, 이들을 부활시켜 주시고 영원히 하나님과 더불어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복락을 누리게 하실거야”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주전 2세기 중반 이후부터 이런 부활과 내세와 심판이라는 사상이 강조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주전 2세기 중반에 기록된 다니엘서 12장 2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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