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1~2절입니다. “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하나님이 에스겔을 이방 땅에서 예언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인 예언 사역을 하기 전에 에스겔에게 말씀의 두루마리를 먹게 하십니다. 예언서 첫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세상은 미래의 일을 미리 말하는 것을 예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예언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하는 겁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를 우리는 대언자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언자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이 맡겨 주신 말씀을 힘껏 선포하는 사람이라면 이 예언 사역을 신실하게 잘 감당하기 위해서 뭐가 필요하죠? 뭐가 전제되어야 하죠? 예언자 스스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서 에스겔이 본격적인 예언 사역을 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먹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도록 하십니다. 선 섭취 후 사역입니다. 이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지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열심을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에서 제일 위험한 것은 분별없는 열심입니다.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이를 분별하지 못하는 가운데 자기 스스로가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좋아하시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열심을 다하는 겁니다. 그런 분별없는 열심이 때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분별없는 열심의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의 인생을 관통하는 한 단어는 열정입니다. 바울은 늘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늘 열심을 다했고 헌신적이었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늘 열정을 다했는데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아, 사울아 왜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자기는 하나님을 위해서 수고하고 애쓴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평가는 바울이 하고 있는 모든 행동이 하나님을 괴롭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이런 것이 바로 분별없는 열심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그래서 다메섹 도상 사건을 터닝 포인트로 잡고 사도 바울의 인생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바울의 삶 전반부와 후반부 모두가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 이전의 전반부는 분별없는 열심이었고 다메섹 도상 이후의 후반부는 분별 있는 열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에스겔을 예언자로 부르시면서 제일 먼저 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케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한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선 섭취 후 사역입니다. 그런데 한국 교인들은 알게 모르게 사역 강박증에 지배를 받습니다. 뭔가 해야 되는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하며 자꾸만 이런저런 사역들을 행하고자 합니다. 뭔가 해야 되는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스스로를 채우는 겁니다. 말씀으로 충만해지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살아낼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4장 이하를 보시면 행위 예언들이 등장합니다. 행위 예언의 대표적 예언자가 에스겔입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존재인데, 예언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예언이라고 하는 것을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는 말로 하는 예언이고 또 하나는 행위로 하는 예언입니다. 우리가 흔히 예언자라 하면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예언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도 하나님의 뜻을 드러낼 수가 있습니다.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선포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것을 행위 예언이라고 합니다. 그 행위 예언의 대표적 인물이 에스겔입니다. 이사야도 그런 행위 예언을 했습니다. 이사야는 3년 동안 벗은 몸, 벗은 발로 다녔습니다. 에스겔도 4장 이하에 보면 많은 행위 예언을 합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좌편으로 390일 동안 누워있고 남유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우편으로 40일 동안 누워있습니다. 그리고 5장을 보면 머리털이나 수염을 깎는 행위들을 합니다. 왜 이런 행위 예언을 하냐면 말로만 예언 행위를 선포하게 되면 듣기 싫으면 귀를 막으면 끝입니다. 나는 힘껏 선포하는데 아무도 들어주지 않으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그런데 행위 예언은 내가 말로 선포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행위를 오랜 세월 지속하는 겁니다. 그러면 궁금한 사람들이 먼저 물어봅니다. 왜 이런 행위를 하냐고. 이사야가 3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닐 때 사람들이 와서 물어보지 않았겠습니까? 평소에 점잖은 사람이 갑자기 옷을 벗고 신발을 신지 않고 다니게 되면 사람들이 물어보겠죠. 지금 뭐하고 있는거냐고. 이사야가 보여준 벗은 몸, 벗은 발은 포로로 끌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이집트를 의존하는 사람들, 그 이집트가 결국에는 포로로 끌려갈 것이다, 이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사야는 행위예언을 한 겁니다. 말로만 선포하는 것이 예언이 아니라 때로는 행위를 통해서도 예언을 선포할 수 있다, 특히 행위 예언 같은 경우에는 기이한 행동을 반복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게 만들고 사람들이 와서 물어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뭡니까, 라고 했을 때 그 질문에 대해서 “내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집트를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무익한 일인지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질문하도록 만드는 하나의 촉진제가 행위 예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 에스겔 8~11장을 보면 여호와의 영광이 점점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담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계십니까? 성전이 성전다울 때입니다. 성전이 성전다움을 상실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점점 타락한 성전을 떠나십니다. 이것을 에스겔이 환상 가운데 봅니다. 여기서 꼭 기억하셔야 할 것이 뭐냐면 성전이라고 하는 것이 항상 거룩한 하나님의 집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성전은 거룩한 하나님의 집과 강도의 소굴 그 경계선상에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바로 서양 사상의 두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헬리니즘과 헤브라이즘입니다. 헬레니즘은 그리스 철학에 기반을 둔 사고 체계를 말하는 것이고 헤브라이즘은 성경에 기반을 둔 세계관입니다. 헬레니즘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원론적 사고입니다. 모든 것을 성과 속, 영과 육으로 나누어 사고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어디가 거룩한 곳이냐 라고 했을 때 헬레니즘의 사고에서는 신전이 있는 곳이 거룩한 곳입니다. 신전을 제외한 모든 곳은 속된 곳입니다. 신전을 신의 집이라 생각합니다. 어떤 것이 거룩한 행동이냐 라고 했을 때 거룩한 집인 신전에서 신이 기뻐하시는 예배, 찬양, 기도 이런 것을 행하는 것이 거룩한 일이다, 그 외에 요리를 하거나 구두를 만들거나 청소를 하는 것은 세상 일로 보는 것이 헬레니즘의 이원론입니다. 헬레니즘에서는 어떤 사람이 거룩한 사람입니까? 거룩한 신의 집에서 거룩한 행위를 집례하거나 거룩한 행위를 행하는 사람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대표적으로 제사장들, 사제들 이런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은 모든 사람들은 세상 일을 하는 세상 사람인 겁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모든 것들을 두 개로 나누어 사고하는 것이 헬레니즘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헤브라이즘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성전은 거룩한 하나님의 집으로 부름받은 겁니다. 현실 세계의 성전은 부름받은 그대로 거룩한 하나님의 집으로 존재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챙기는 강도들이 모여있는 강도의 소굴로 전락할 수도 있는 겁니다. 헬레니즘에서는 예배와 찬양과 기도는 신이 늘 기뻐하시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성경도 그렇게 얘기하나요? 우리가 예배만 드리면 하나님이 무조건 기뻐하신다고 말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예배와 찬양과 기도는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거룩한 행동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우리의 찬양과 기도와 예배가 하나님과 아무 상관 없이 우리의 종교적 감정을 발산하는 종교적 유흥거리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헤브라이즘의 주장입니다. 안수받은 목사는 항상 거룩한 사람이라 말하는 것이 헬레니즘입니다. 헤브라이즘은 안수받은 목사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받았다고 봅니다.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모든 성도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받은 겁니다. 그런데 현실 속에서의 목사나 성도는 부름받은 그대로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도 있지만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세속적 사람으로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헤브라이즘은 모든 것이 경계 가운데 있다고 봅니다. 성전은 거룩한 하나님의 집과 강도의 소굴 경계 가운데 있는 겁니다. 이 땅의 성전은 그 경계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거룩한 하나님의 집이 되기 위해서 깨어있어야 합니다. 목사와 성도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과 세속적 가치의 사람 그 경계에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땅의 목사와 성도가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 경계에서 우리는 깨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애를 써야 하겠죠. 헬레니즘이 근원적으로 영역 자체를 두 개로 나누어 사고 한다면 헤브라이즘은 모든 것은 경계 가운데 있다, 그 경계선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8~11장이 보여주는 것처럼, 예루살렘 성전은 어떤 상황에서도 거룩한 하나님의 집인가요? 아닙니다. 성전은 타락할 수 있습니다. 성전이 타락하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은 그 성전을 떠납니다. 이때 떠났던 하나님의 영광이 에스겔 40~48장 사이에 보시면 다시 성전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면서 성전이 회복되고 성전에서 사역하는 사독 계열 제사장들이 회복되는 이야기가 에스겔 40~48장에 나옵니다.
에스겔 22장 30~31절을 보시면 중보자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한 마디로 하나님의 심판이 집행된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가로 막으면서 이 공동체를 살려달라고 중보하는 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꿔 얘기하자면 이렇게 타락한 세상이 하나님 심판으로부터 보호받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이 땅을 살려달라고, 이 황폐한 땅을 치유해달라고 하나님께 중보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지 않는 겁니다. 한 사람의 중보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말해주고 있는 것이 22장 30~31절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에스겔 36장 27절을 보겠습니다.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보내시는 목적, 오늘날로 이야기 하자면 성령을 보내시는 목적이 나옵니다. 한국교회가 변화되어야 할 신학적인 내용이 많이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를 꼽자면 성령에 대한 잘못된 오해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성령의 임재를 샤머니즘적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부흥회나 찬양 집회에 가보면 앞에서 인도하시는 목사님들이 가끔 이런 멘트를 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뜨겁게 기도하고 열광적으로 찬양함을 통해 주의 성령이 이곳에 임하기를 간구합시다” 이렇게 얘기하면 많은 사람들이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뜨겁게 기도하고 찬양하게 되면 저 멀리 계신 성령께서 이곳 가운데 임재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전형적인 샤머니즘적 이해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보면 “주의 성령이 아니고서는” 즉 주의 성령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자가 없다”는 말이 나옵니다. 바꿔 얘기하자면 우리가 “예수가 그리스도시다, 예수가 우리 인생의 구원자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이렇게 고백한 이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은 성령이 그들 안에 좌정하십니다.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찬양 집회나 부흥회에서는 우리 안에 좌정하신 성령을 저 멀리 보내고 나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령을 저 멀리 보내고 나서 우리의 열정적인 종교 행위를 통해서 저 멀리 계신 성령을 이곳 가운데 임재하게 만드려고 하는 겁니다. 이런 것이 전형적인 샤머니즘적 이해입니다. 무당들이 푸닥거리를 왜 하죠? 신을 기쁘시게 하려고, 이를 통하여 신을 불러내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종교적인 행위는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왜 우리 안에 좌정하신 성령을 저 멀리 보내고 나서 출발합니까? 그 성렁을 이곳 가운데 왜 임재케 하려고 합니까? 이미 성령은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성령을 이곳 가운데 임재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좌정하신 성령의 음성에 존재를 다해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임재를 기대하는 이유가 어떤 능력을 받기 위해서, 그래서 방언을 한다거나 예언을 한다거나 병을 치유케 한다거나 남들이 갖고 있지 않은 놀라운 능력을 성령으로부터 얻어내기 위해서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짧게 정리하겠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된 우리를 위하여 보내어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면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우리에게 왜 성령을 보내주셨을까요? 왜 믿는 자에게 성령을 보내주시죠? 성경에 성령을 보내주신 목적과 관련하여 두 가지가 나옵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에 보면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깨닫도록 도우십니다. 성령을 ‘파라클레이토스’라고 합니다. 이 말은 ‘옆에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말해주신다, 도와주신다’ 이런 말입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성령은 하나님의 백성을 도와주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의 무엇을 도와주시는가?. 우리가 신앙의 삶을 살다 보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궁금할 때가 많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이런 간절한 마음을 갖고 있을 때 하나님의 뜻을 깨닫도록, 중요한 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나도록 도와주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입니다. 그다음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다 보면 무엇을 깨닫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능력이 없고 연약하고 자신이 다짐한 것조차도 살아내지 못하는 허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순종하고픈 마음은 많은데 내 힘만으로는 쉽지 않습니다. 그때 우리의 순종을 도와주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입니다.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에스겔 36장 27절, 로마서 8장 4절입니다. 정리해 보면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 하나님을 보내어 주신 이유는 당신의 백성을 도우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당신의 백성을 어떻게 도와주시는가? 첫째는 말씀을 깨닫고 기억나도록 도와주시고, 둘째는 깨달은 바대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가도록 우리의 순종을 도와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언제 성령의 도우심을 경험할 가능성이 높겠습니까? 성령은 말씀을 깨닫도록 도와주시는 분이시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할 때 성령의 도우심을 경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두 번째 성령은 우리의 순종을 도우시는 하나님이시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할 때 성령의 도우심을 경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성령충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한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순종으로 충만한 것이 진정한 성령 충만입니다. 말씀 충만, 순종 충만이 진정한 성령 충만입니다. 이번 한 주간도 이런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성령 충만의 삶을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대예언서의 마지막 본문인 에스겔을 살펴보았습니다.
4장 이하를 보시면 행위 예언들이 등장합니다. 행위 예언의 대표적 예언자가 에스겔입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존재인데, 예언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예언이라고 하는 것을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는 말로 하는 예언이고 또 하나는 행위로 하는 예언입니다. 우리가 흔히 예언자라 하면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예언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도 하나님의 뜻을 드러낼 수가 있습니다.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선포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것을 행위 예언이라고 합니다. 그 행위 예언의 대표적 인물이 에스겔입니다. 이사야도 그런 행위 예언을 했습니다. 이사야는 3년 동안 벗은 몸, 벗은 발로 다녔습니다. 에스겔도 4장 이하에 보면 많은 행위 예언을 합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좌편으로 390일 동안 누워있고 남유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우편으로 40일 동안 누워있습니다. 그리고 5장을 보면 머리털이나 수염을 깎는 행위들을 합니다. 왜 이런 행위 예언을 하냐면 말로만 예언 행위를 선포하게 되면 듣기 싫으면 귀를 막으면 끝입니다. 나는 힘껏 선포하는데 아무도 들어주지 않으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그런데 행위 예언은 내가 말로 선포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행위를 오랜 세월 지속하는 겁니다. 그러면 궁금한 사람들이 먼저 물어봅니다. 왜 이런 행위를 하냐고. 이사야가 3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닐 때 사람들이 와서 물어보지 않았겠습니까? 평소에 점잖은 사람이 갑자기 옷을 벗고 신발을 신지 않고 다니게 되면 사람들이 물어보겠죠. 지금 뭐하고 있는거냐고. 이사야가 보여준 벗은 몸, 벗은 발은 포로로 끌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이집트를 의존하는 사람들, 그 이집트가 결국에는 포로로 끌려갈 것이다, 이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사야는 행위예언을 한 겁니다. 말로만 선포하는 것이 예언이 아니라 때로는 행위를 통해서도 예언을 선포할 수 있다, 특히 행위 예언 같은 경우에는 기이한 행동을 반복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게 만들고 사람들이 와서 물어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뭡니까, 라고 했을 때 그 질문에 대해서 “내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집트를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무익한 일인지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질문하도록 만드는 하나의 촉진제가 행위 예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 에스겔 8~11장을 보면 여호와의 영광이 점점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담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계십니까? 성전이 성전다울 때입니다. 성전이 성전다움을 상실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점점 타락한 성전을 떠나십니다. 이것을 에스겔이 환상 가운데 봅니다. 여기서 꼭 기억하셔야 할 것이 뭐냐면 성전이라고 하는 것이 항상 거룩한 하나님의 집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성전은 거룩한 하나님의 집과 강도의 소굴 그 경계선상에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바로 서양 사상의 두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헬리니즘과 헤브라이즘입니다. 헬레니즘은 그리스 철학에 기반을 둔 사고 체계를 말하는 것이고 헤브라이즘은 성경에 기반을 둔 세계관입니다. 헬레니즘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원론적 사고입니다. 모든 것을 성과 속, 영과 육으로 나누어 사고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어디가 거룩한 곳이냐 라고 했을 때 헬레니즘의 사고에서는 신전이 있는 곳이 거룩한 곳입니다. 신전을 제외한 모든 곳은 속된 곳입니다. 신전을 신의 집이라 생각합니다. 어떤 것이 거룩한 행동이냐 라고 했을 때 거룩한 집인 신전에서 신이 기뻐하시는 예배, 찬양, 기도 이런 것을 행하는 것이 거룩한 일이다, 그 외에 요리를 하거나 구두를 만들거나 청소를 하는 것은 세상 일로 보는 것이 헬레니즘의 이원론입니다. 헬레니즘에서는 어떤 사람이 거룩한 사람입니까? 거룩한 신의 집에서 거룩한 행위를 집례하거나 거룩한 행위를 행하는 사람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대표적으로 제사장들, 사제들 이런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은 모든 사람들은 세상 일을 하는 세상 사람인 겁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모든 것들을 두 개로 나누어 사고하는 것이 헬레니즘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헤브라이즘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성전은 거룩한 하나님의 집으로 부름받은 겁니다. 현실 세계의 성전은 부름받은 그대로 거룩한 하나님의 집으로 존재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챙기는 강도들이 모여있는 강도의 소굴로 전락할 수도 있는 겁니다. 헬레니즘에서는 예배와 찬양과 기도는 신이 늘 기뻐하시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성경도 그렇게 얘기하나요? 우리가 예배만 드리면 하나님이 무조건 기뻐하신다고 말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예배와 찬양과 기도는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거룩한 행동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우리의 찬양과 기도와 예배가 하나님과 아무 상관 없이 우리의 종교적 감정을 발산하는 종교적 유흥거리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헤브라이즘의 주장입니다. 안수받은 목사는 항상 거룩한 사람이라 말하는 것이 헬레니즘입니다. 헤브라이즘은 안수받은 목사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받았다고 봅니다.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모든 성도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받은 겁니다. 그런데 현실 속에서의 목사나 성도는 부름받은 그대로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도 있지만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세속적 사람으로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헤브라이즘은 모든 것이 경계 가운데 있다고 봅니다. 성전은 거룩한 하나님의 집과 강도의 소굴 경계 가운데 있는 겁니다. 이 땅의 성전은 그 경계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거룩한 하나님의 집이 되기 위해서 깨어있어야 합니다. 목사와 성도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과 세속적 가치의 사람 그 경계에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땅의 목사와 성도가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 경계에서 우리는 깨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애를 써야 하겠죠. 헬레니즘이 근원적으로 영역 자체를 두 개로 나누어 사고 한다면 헤브라이즘은 모든 것은 경계 가운데 있다, 그 경계선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8~11장이 보여주는 것처럼, 예루살렘 성전은 어떤 상황에서도 거룩한 하나님의 집인가요? 아닙니다. 성전은 타락할 수 있습니다. 성전이 타락하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은 그 성전을 떠납니다. 이때 떠났던 하나님의 영광이 에스겔 40~48장 사이에 보시면 다시 성전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면서 성전이 회복되고 성전에서 사역하는 사독 계열 제사장들이 회복되는 이야기가 에스겔 40~48장에 나옵니다.
에스겔 22장 30~31절을 보시면 중보자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한 마디로 하나님의 심판이 집행된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가로 막으면서 이 공동체를 살려달라고 중보하는 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꿔 얘기하자면 이렇게 타락한 세상이 하나님 심판으로부터 보호받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이 땅을 살려달라고, 이 황폐한 땅을 치유해달라고 하나님께 중보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지 않는 겁니다. 한 사람의 중보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말해주고 있는 것이 22장 30~31절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에스겔 36장 27절을 보겠습니다.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보내시는 목적, 오늘날로 이야기 하자면 성령을 보내시는 목적이 나옵니다. 한국교회가 변화되어야 할 신학적인 내용이 많이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를 꼽자면 성령에 대한 잘못된 오해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성령의 임재를 샤머니즘적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부흥회나 찬양 집회에 가보면 앞에서 인도하시는 목사님들이 가끔 이런 멘트를 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뜨겁게 기도하고 열광적으로 찬양함을 통해 주의 성령이 이곳에 임하기를 간구합시다” 이렇게 얘기하면 많은 사람들이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뜨겁게 기도하고 찬양하게 되면 저 멀리 계신 성령께서 이곳 가운데 임재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전형적인 샤머니즘적 이해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보면 “주의 성령이 아니고서는” 즉 주의 성령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자가 없다”는 말이 나옵니다. 바꿔 얘기하자면 우리가 “예수가 그리스도시다, 예수가 우리 인생의 구원자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이렇게 고백한 이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은 성령이 그들 안에 좌정하십니다.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찬양 집회나 부흥회에서는 우리 안에 좌정하신 성령을 저 멀리 보내고 나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령을 저 멀리 보내고 나서 우리의 열정적인 종교 행위를 통해서 저 멀리 계신 성령을 이곳 가운데 임재하게 만드려고 하는 겁니다. 이런 것이 전형적인 샤머니즘적 이해입니다. 무당들이 푸닥거리를 왜 하죠? 신을 기쁘시게 하려고, 이를 통하여 신을 불러내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종교적인 행위는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왜 우리 안에 좌정하신 성령을 저 멀리 보내고 나서 출발합니까? 그 성렁을 이곳 가운데 왜 임재케 하려고 합니까? 이미 성령은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성령을 이곳 가운데 임재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좌정하신 성령의 음성에 존재를 다해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임재를 기대하는 이유가 어떤 능력을 받기 위해서, 그래서 방언을 한다거나 예언을 한다거나 병을 치유케 한다거나 남들이 갖고 있지 않은 놀라운 능력을 성령으로부터 얻어내기 위해서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짧게 정리하겠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된 우리를 위하여 보내어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면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우리에게 왜 성령을 보내주셨을까요? 왜 믿는 자에게 성령을 보내주시죠? 성경에 성령을 보내주신 목적과 관련하여 두 가지가 나옵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에 보면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깨닫도록 도우십니다. 성령을 ‘파라클레이토스’라고 합니다. 이 말은 ‘옆에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말해주신다, 도와주신다’ 이런 말입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성령은 하나님의 백성을 도와주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의 무엇을 도와주시는가?. 우리가 신앙의 삶을 살다 보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궁금할 때가 많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이런 간절한 마음을 갖고 있을 때 하나님의 뜻을 깨닫도록, 중요한 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나도록 도와주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입니다. 그다음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다 보면 무엇을 깨닫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능력이 없고 연약하고 자신이 다짐한 것조차도 살아내지 못하는 허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순종하고픈 마음은 많은데 내 힘만으로는 쉽지 않습니다. 그때 우리의 순종을 도와주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입니다.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에스겔 36장 27절, 로마서 8장 4절입니다. 정리해 보면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 하나님을 보내어 주신 이유는 당신의 백성을 도우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당신의 백성을 어떻게 도와주시는가? 첫째는 말씀을 깨닫고 기억나도록 도와주시고, 둘째는 깨달은 바대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가도록 우리의 순종을 도와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언제 성령의 도우심을 경험할 가능성이 높겠습니까? 성령은 말씀을 깨닫도록 도와주시는 분이시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할 때 성령의 도우심을 경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두 번째 성령은 우리의 순종을 도우시는 하나님이시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할 때 성령의 도우심을 경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성령충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한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순종으로 충만한 것이 진정한 성령 충만입니다. 말씀 충만, 순종 충만이 진정한 성령 충만입니다. 이번 한 주간도 이런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성령 충만의 삶을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대예언서의 마지막 본문인 에스겔을 살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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