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으로 호세아서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호세아부터 말라기까지를 12선지서, 소선지서라고 합니다. 이것을 소선지서라고 제일 먼저 말한 사람은 어거스틴입니다. 어거스틴 이전에 벤시락의 지혜서라는 문서가 있습니다. 그 본문 49장 10절에 보면 ‘12선지자들’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호세아부터 말라기까지의 12명의 선지자들을 하나로 이해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호세아는 북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고 있던 때에 북이스라엘 백성의 사회적인 타락, 종교적인 배교 등을 질타하면서 회개를 촉구한 예언자가 호세아입니다. 호세아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한 분에게만 집중해야 한다는 겁니다. 호세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무엇으로 봅니까? 부부관계로 봅니다. 하나님은 신랑이고 이스라엘은 신부입니다. 하나님은 남편, 이스라엘은 아내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한 남녀가 결혼을 하면서 무엇을 약속합니까? 배우자에게만 배타적인 사람을 죽을 때까지 행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내로서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것을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하나님 한 분에게만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언약을 신실하게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스라엘은 어떤 착각에 빠졌냐면 “우리는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했어, 우리가 아무리 죄를 범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 백성을 버리시겠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호세아는 무엇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언약을 체결한 것보다 중요한 것이 언약을 신실하게 준수하는 거라는 겁니다. 하나님만을 믿겠다고 언약을 체결했는데 하나님만을 믿지 못하면, 즉 언약을 체결했지만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지 못하게 되면 언약은 파기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착각을 강하게 질타하는 것이 호세아서의 주된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은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야, 우리는 하나님의 아내야, 그런데 남편된 하나님이 아내된 우리를 버리시겠어, 우리가 죄를 좀 범했다고 우리를 심판하시겠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호세아는 뭐라고 주장합니까? 언약을 체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하겠다고 다짐하고 결단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현실 속에서는 하나님과 이방의 무수한 우상들을 겸하여 섬기고 있는 이스라엘을 향해 너희가 지금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질타하며 하나님 한 분에게 다시 돌아올 것을 촉구하는 것이 호세아서의 주된 내용입니다. 내용을 몇 군데 보겠습니다.
1장 1절입니다.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왕이 된 시대에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재미있는 것은 호세아는 북이스라엘 사람이고 북이스라엘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호세아가 사역했던 시점을 말할 때 누구를 먼저 기술합니까? 남유다의 왕들을 먼저 열거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에서 사역했지만 호세아서가 기록되어지고 호세아서를 주로 읽는 청중은 남유다 사람들입니다. 호세아는 북이스라엘 멸망을 예언했는데 북이스라엘이 호세아의 예언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이 멸망했습니다. 그리고 호세아는 남유다로 내려와서 남유다에서 호세아를 쓴 겁니다. 그러니까 호세아서를 주로 읽는 사람은 남유다 백성들입니다. 왜 남유다 백성들은 호세아를 읽어야 합니까? 북이스라엘은 멸망 당했고 남유다는 아직 멸망 당하지 않았지만, 남유다의 현실도 멸망 당한 북이스라엘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북이스라엘의 멸망이 곧 너희의 멸망이 될 것이다, 이것을 경고하는 겁니다. 남유다 백성들이 주요 독자이기 때문에 호세아가 사역했던 시점을 말할 때 남유다 왕들의 이름을 먼저 열거하고 있습니다.
호세아서에서 신앙인들이 제일 잘 알고 좋아하는 말씀이 6장 1~3절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너무 멋진 회개의 고백 아닙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이 뭐냐면 6장 4절 이하를 보면 북이스라엘 백성의 죄된 삶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멋들어지게 회개의 고백은 했지만 삶은 바뀌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6장 1~3절의 이 말을 누가 하고 있는 것인가, 즉 여기 화자를 누구로 볼 것인가에 대해 세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호세아, 성전의 제사장들로 봅니다. 첫째, 여기 화자를 이스라엘 공동체로 본다면 이것은 형식적인 회개에 불과합니다. 말로는 하나님께 돌아가자 얘기하고 나서 4절 이하를 보면 여전히 죄된 삶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회개의 고백과 삶 자체가 괴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화자를 호세아라고 본다면 호세아는 북이스라엘 백성의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4절 이하가 보여주는 것처럼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완악한 삶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죄된 삶을 포기하지 않는 겁니다. 호세아의 말을 무시하는 겁니다. 셋째, 여기의 화자를 제사장들이라고 한다면 이 제사장들은 회개할 마음도 없는 사람들에게 수사학적인 멋진 회개의 기도문을 읊어주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정작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이 본문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회개 기도를 얼마나 많이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뭡니까? 회개의 기도 내용과 우리의 삶이 얼마나 일치하는가가 중요합니다.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해봤자 그 기도와 실제 삶의 괴리가 심하다면 이 기도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겠습니다”라고 다짐하고 결단하고 나서 전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많이 기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예언서는 기도를 얼마나 많이 했느냐를 중요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고백에 걸맞은 삶을 살아내고 있는가 이것을 중시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6장 1~3절은 멋진 회개의 고백을 했지만 4절 이하가 보여주는 것처럼 삶은 바뀌지 않은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6장 6절입니다. 이것은 6장의 연장선상에서 보겠습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 여기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되는 겁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겁니다. 호세아서는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계속 강조합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 좀 하지 말고 하나님이 원하는 것에 집중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인애를 원하십니다. 여기 인애가 ‘헤세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웃을 만날 때 변함없는 사랑을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자비롭게 대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의 생각과 너무 다른 겁니다. 우리는 죄를 많이 범해도 하나님께 예배 한 번 잘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종교 의식으로서의 예배보다는 일상의 순종으로서의 예배를 더 기뻐하십니다.
마지막 호세아 13장 11절입니다. 대다수 예언자들이 이스라엘의 잘못된 왕정 제도를 비판했지만 그중에서도 왕정 제도를 가장 강력하게 비판한 사람이 호세아입니다. 13장 1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었고 진노하므로 그 왕들을 폐하였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왕정 제도를 허락한 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행위라는 겁니다. 왕정 제도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세워달라고 고집스럽게 하나님께 메어 달리니까 그 왕정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너희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지 그것을 경험토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허용하신 것이 왕정 제도이다, 그리고 진노하심 가운데 그 왕들을 폐하였다고 왕정 제도를 가장 원색적으로 강하게 비판한 사람이 호세아입니다. 오늘 다니엘서와 호세아서를 함께 보았고 남은 두 번의 시간 동안 소선지서를 자세하게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주 동안도 건강하십시오.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언서 녹취 14 (0) | 2022.01.06 |
---|---|
예언서 녹취 13 (0) | 2022.01.06 |
예언서 녹취 11 (0) | 2022.01.06 |
예언서 녹취 10 (0) | 2022.01.06 |
예언서 녹취 9 (0) | 2022.01.0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