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예언서 마지막 시간입니다. 그동안 신실하게 진도에 맞추어서 함께 공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마지막 시간 미가부터 말라기까지를 함께 보겠습니다. 미가는 소예언서 가운데 가장 중요한 본문입니다. 미가라는 사람은 모레셋이라고 하는 지방의 장로입니다. 그래서 지방의 관점으로 당대 예루살렘을 비판한 것이 미가서입니다. 지방의 장로였던 미가의 시선으로 볼 때 이 땅에 있는 어느 도시보다도 거룩한 하나님의 도성이 되어야 할 예루살렘이 죄악의 본부였습니다. 1장 5절에 나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도성이 되어야 할 예루살렘이 도리어 죄악의 본부가 된 것 때문에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3장 12절에 나옵니다. 최초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한 사람이 미가입니다. 이 미가보다 100년 늦게 출현했던 사람이 예레미야이고 이 예레미야가 미가의 예언을 계승했습니다. “여기가 여호와의 전이라고 하는 거짓말을 믿지마라, 여기는 강도의 소굴이다, 여기는 죄악의 본부이다”라는 예언을 한 것 때문에 예레미야가 당대의 종교 권력자들부터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보다 먼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한 사람이 바로 미가입니다. 모레셋이라고 하는 지방의 관점으로 예루살렘을 바라보았고 지방의 관점으로 바라 본 예루살렘은 죄악의 본부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최초로 선포한 사람이 미가라는 예언자입니다.
미가서에서는 두 구절을 보겠습니다. 2장 6절에 보면, 미가가 당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을 향해 책망을 하게 될 때 그 사람들이 보인 반응이 나옵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너희는 예언하지 말라 이것은 예언할 것이 아니거늘 욕하는 말을 그치지 아니한다 하는도다.” 미가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잘못된 정치 권력, 종교 권력을 책망하게 되면 그 사람들이 주로 하는 얘기가 “야 이거는 예언할게 아니지, 이것이 하나님의 뜻과 무슨 상관이 있어”라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 대다수가 신앙의 영역을 지극히 종교 제의적인 것으로 한정시키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무엇으로 생각하는 겁니까?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제사를 지내고 찬양을 부르고 기도를 하는 이것을 종교적인 일로 생각하는 겁니다. 정치는 정치인거고 경제는 경제인거지 왜 종교가 정치에 대해서 왈가왈부하고 왜 종교가 경제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냐, 그러니까 예언자가 아무리 그들의 죄를 질타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촉구한다고 해도 그들이 자기들의 삶을 뒤바꿔내지 않은 가장 중요한 이유가 뭐냐면 정치는 정치, 경제는 경제, 종교는 종교로 제한시켜 버린 겁니다. 종교라고 하는 것을 지극히 의식 중심의 행위로만 제한시킨 겁니다. 그래서 예언자가 잘못된 정치, 잘못된 경제에 대해 책망하면 왜 네가 예언자인데 정치에 대해 뭐라 그래, 경제에 대해 뭐라 그래 라고 하면서 이것은 네가 예언할 영역이 아니라고 선을 긋는 급니다. 오늘날도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오랜 세월 동안 예언자가 등장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질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언자들의 경고를 귀 기울여 듣지 않은 중요한 이유가 그들이 종교라고 하는 것을 지극히 좁은 영역 안으로 축소시켰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정치, 경제, 사법 적인 죄악들을 종교적 삶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정치는 정치인들의 문제이고 경제는 경제인들만의 문제로만 이해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의 말을 그들이 무시한 겁니다. 이것은 예언할 영역이 아니라고 하면서 선 긋기를 하는 겁니다. 그런 모습을 2장 6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미가서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6장 6~8절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1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자, 8절이 중요합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느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여러분 지난번에 아모스 때도 말씀드렸지만 결국 이스라엘 백성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자기들 멋대로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다른 것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자기들이 하기 편한 겁니다. 그래놓고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거야 라고 하면서 마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 자신들이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주장합니다. 그런데 아모스와 미가가 끊임없이 말하는 것은 뭡니까? 그것은 너희가 원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이것이라는 겁니다. 특히 중요한 것이 8절입니다. 주전 8세기 예언자가 4명이 있는데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입니다. 미가가 제일 마지막 사람입니다. 미가가 주전 8세기에 등장했던 중요한 3명의 예언자가 강조했던 메시지를 하나씩 연결해 놓은 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것이 첫째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이것이 아모스 5장 24절에 나옵니다. 두 번째 인자를 사랑하며, 여기 인자가 헤세드입니다. 호세아 6장 6절에 ‘나는 인애를 원하고’할 때의 인애가 ‘헤세드’입니다.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사야 7장 9절입니다. 주전 8세기의 마지막 예언자였던 미가는 8세기 예언자들이 강조했던 것, 아모스의 정의, 호세아의 헤세드, 이사야의 하나님과 신실하게 동행함 이 세 가지를 묶어서 이것이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한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다음에 나훔입니다. 나훔, 하박국, 스바냐 이 세 명의 예언자는 예레미야, 에스겔과 더불어 남유다 패망 직전에 사역한 예언자들입니다. 특히 나훔은 니느웨의 몰락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오바댜가 에돔의 멸망, 나훔은 니느웨의 멸망에 대해서 예언합니다. 앗수르의 왕 가운데 산헤립이라는 왕이 있습니다. 산헤립이 등극한 때가 주전 705년입니다. 산헤립이 등극했을 때부터 앗수르 제국의 수도가 되었던 곳이 니느웨입니다. 그 니느웨의 몰락을 말하는 것이 나훔서입니다. 니느웨의 몰락을 말한다는 말은 바꿔 얘기하자면 이스라엘에게는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니느웨는 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는가?. 3장 1절입니다. “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여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여러분, 예언서에서 계속 얘기했던 것처럼 이방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때 “왜 하나님을 안 믿었냐, 왜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지 않았느냐” 이런 것으로 심판받지 않았습니다. 이방이 심판받는 기준은 하나님이 주셨던 일반 은총에 근거해서 이성에 반하고 양심에 반하는 행동, 대표적인 것이 지나치게 폭력을 행사하고 나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하고 지나치게 학살을 일삼는 그런 행동에 대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나훔 3장 1절도 바로 그겁니다. 왜 니느웨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까? 피로 세운 성이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과도하게 이방 백성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그들의 것을 빼앗은 그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다음 하박국을 보겠습니다. 하박국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건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하박국의 가장 중요한 말씀이 2장 4절입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여기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히브리어로 에무나라는 말입니다. 이 에무나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는 순간에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내 인생이 순탄할 때건 힘들고 어려울 때건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겁니다. 그런 믿음이 있을 때 살 수 있다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하박국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는 그 순간에도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붙잡는 겁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붙잡는 겁니다. 하박국서는 하박국이 하나님께 두 가지 호소를 하고 거기에 대해 하나님이 두 번에 걸쳐 응답을 하는 구조입니다. 하박국은 처음에 뭘로 호소하냐면 지금 남유다 안에 악인들이 판치는데 정의로운 하나님이 왜 이 악인들을 심판하지 않냐고 호소합니다.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뭡니까? 내가 바벨론이라는 막대기를 들어서 남유다에 있는 악인들을 심판하겠다는 겁니다. 이런 응답을 듣고 나서 하박국이 두 번째 호소를 합니다. “하나님, 우리 남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언약 백성을 심판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 그런 악한 바벨론 사람들을 도구로 사용할 수 있습니까”라고 호소 합니다.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지금 바벨론을 통해서 남유다의 악인들을 심판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교만한 자들, 악인들 여기에 누가 포함됩니까? 바벨론 사람들도 포함됩니다. 이런 악인들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고 의인은 그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하박국서는 하박국이 두 번에 걸쳐 하나님께 호소하고 하나님이 두 번에 걸쳐 응답을 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말씀은 아까 보았던 2장 4절입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런데 여러분, 하박국 2장 4절은 신학계에서 굉장히 논쟁이 많은 구절 중 하나입니다. 왜 그러냐면 “여기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할 때 여기 “그”를 누구로 볼 것인가에 대해서 두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를 하나님으로 보는 겁니다. 또 하나는 그를 의인으로 보는 겁니다. 만약 여기 나와 있는 그를 하나님으로 보게 되면 의인은 하나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겁니다. 여기 하나님의 믿음이라 할 때 믿음의 동의어가 뭐냐면 신실함입니다. 한 마디로 얘기하자면 의인은 자기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겁니다.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고 또 하나는 그를 의인으로 보는 겁니다. 그러면 위기의 순간이라 하더라도 의인은 하나님을 붙잡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될 것이다,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비슷한 말씀이 신약에도 있는데 갈라디아서 2장 16절입니다. 이신칭의와 관련된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함을 얻는다.” 이것이 이신칭의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겁니다. 여기도 신학자들은 두 가지로 해석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 것인가와 관련하여, 한글 번역은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로 되어 있습니다. 목적격으로 해석을 한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소유격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는다’라고도 해석할 수 있는 겁니다. 예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예수의 신실하심,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셨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다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박국 2장 4절이나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서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했을 때 여기 나오는 그를 하나님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의인으로 볼 것이냐,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거냐 아니면 예수의 신실하심 때문에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거냐, 이렇게 두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합니다. 그런데 만약 의인이 그 자신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얘기하면 이것은 공로주의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5장 6, 8, 10절에 보면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과 원수관계였을 때, 우리가 악인이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를 위해서 대속의 죄물로 내어주심으로 말미암아 깨어진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는 겁니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선행적인 은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겁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려고 할 때는 의인은 그 의인 자신의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나는 넘어질 수 있는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인은 살게 된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게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붙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리해보면, 의인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를 신뢰함으로 살게 되는 겁니다. 하박국 2장 4절에 그를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게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 이신칭의와 연관해서도 예수의 신실하심이냐 아니면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이냐, 이런 신학적인 해석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3장 17~19절은 찬양도 있습니다. 무화과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고 포도 나무에 열매가 없습니다. 있어야 될 곳에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모든 것이 파멸된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장 18~19절,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한다”고 합니다. 하박국은 모든 것이 사라진 순간에도 누구를 주목하고 있습니까? 여전히 살아계신 하나님을 주목하고 있는 겁니다.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죠? 없는 것에서 모든 것을 만들어내신 창조자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구원자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위로해주시는 위로자 하나님이신 것이고, 아무것도 없는 순간에도 좌절하거나 낙담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뭐냐면 그 없는 것에서 모든 것들을 만들어내실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시니까, 그 하나님이 우리와 여전히 함께 하시니까, 하박국은 새로운 삶에 대한 소망과 기대를 가질 수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고통스러운 현실 가운데 무엇을 바라볼 것인가, 하나님을 주목하는 인생이라면 하박국처럼 이런 찬양이 우리에게도 울려 퍼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미가서에서는 두 구절을 보겠습니다. 2장 6절에 보면, 미가가 당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을 향해 책망을 하게 될 때 그 사람들이 보인 반응이 나옵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너희는 예언하지 말라 이것은 예언할 것이 아니거늘 욕하는 말을 그치지 아니한다 하는도다.” 미가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잘못된 정치 권력, 종교 권력을 책망하게 되면 그 사람들이 주로 하는 얘기가 “야 이거는 예언할게 아니지, 이것이 하나님의 뜻과 무슨 상관이 있어”라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 대다수가 신앙의 영역을 지극히 종교 제의적인 것으로 한정시키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무엇으로 생각하는 겁니까?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제사를 지내고 찬양을 부르고 기도를 하는 이것을 종교적인 일로 생각하는 겁니다. 정치는 정치인거고 경제는 경제인거지 왜 종교가 정치에 대해서 왈가왈부하고 왜 종교가 경제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냐, 그러니까 예언자가 아무리 그들의 죄를 질타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촉구한다고 해도 그들이 자기들의 삶을 뒤바꿔내지 않은 가장 중요한 이유가 뭐냐면 정치는 정치, 경제는 경제, 종교는 종교로 제한시켜 버린 겁니다. 종교라고 하는 것을 지극히 의식 중심의 행위로만 제한시킨 겁니다. 그래서 예언자가 잘못된 정치, 잘못된 경제에 대해 책망하면 왜 네가 예언자인데 정치에 대해 뭐라 그래, 경제에 대해 뭐라 그래 라고 하면서 이것은 네가 예언할 영역이 아니라고 선을 긋는 급니다. 오늘날도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오랜 세월 동안 예언자가 등장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질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언자들의 경고를 귀 기울여 듣지 않은 중요한 이유가 그들이 종교라고 하는 것을 지극히 좁은 영역 안으로 축소시켰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정치, 경제, 사법 적인 죄악들을 종교적 삶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정치는 정치인들의 문제이고 경제는 경제인들만의 문제로만 이해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의 말을 그들이 무시한 겁니다. 이것은 예언할 영역이 아니라고 하면서 선 긋기를 하는 겁니다. 그런 모습을 2장 6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미가서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6장 6~8절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1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자, 8절이 중요합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느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여러분 지난번에 아모스 때도 말씀드렸지만 결국 이스라엘 백성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자기들 멋대로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다른 것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자기들이 하기 편한 겁니다. 그래놓고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거야 라고 하면서 마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 자신들이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주장합니다. 그런데 아모스와 미가가 끊임없이 말하는 것은 뭡니까? 그것은 너희가 원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이것이라는 겁니다. 특히 중요한 것이 8절입니다. 주전 8세기 예언자가 4명이 있는데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입니다. 미가가 제일 마지막 사람입니다. 미가가 주전 8세기에 등장했던 중요한 3명의 예언자가 강조했던 메시지를 하나씩 연결해 놓은 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것이 첫째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이것이 아모스 5장 24절에 나옵니다. 두 번째 인자를 사랑하며, 여기 인자가 헤세드입니다. 호세아 6장 6절에 ‘나는 인애를 원하고’할 때의 인애가 ‘헤세드’입니다.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사야 7장 9절입니다. 주전 8세기의 마지막 예언자였던 미가는 8세기 예언자들이 강조했던 것, 아모스의 정의, 호세아의 헤세드, 이사야의 하나님과 신실하게 동행함 이 세 가지를 묶어서 이것이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한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다음에 나훔입니다. 나훔, 하박국, 스바냐 이 세 명의 예언자는 예레미야, 에스겔과 더불어 남유다 패망 직전에 사역한 예언자들입니다. 특히 나훔은 니느웨의 몰락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오바댜가 에돔의 멸망, 나훔은 니느웨의 멸망에 대해서 예언합니다. 앗수르의 왕 가운데 산헤립이라는 왕이 있습니다. 산헤립이 등극한 때가 주전 705년입니다. 산헤립이 등극했을 때부터 앗수르 제국의 수도가 되었던 곳이 니느웨입니다. 그 니느웨의 몰락을 말하는 것이 나훔서입니다. 니느웨의 몰락을 말한다는 말은 바꿔 얘기하자면 이스라엘에게는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니느웨는 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는가?. 3장 1절입니다. “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여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여러분, 예언서에서 계속 얘기했던 것처럼 이방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때 “왜 하나님을 안 믿었냐, 왜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지 않았느냐” 이런 것으로 심판받지 않았습니다. 이방이 심판받는 기준은 하나님이 주셨던 일반 은총에 근거해서 이성에 반하고 양심에 반하는 행동, 대표적인 것이 지나치게 폭력을 행사하고 나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하고 지나치게 학살을 일삼는 그런 행동에 대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나훔 3장 1절도 바로 그겁니다. 왜 니느웨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까? 피로 세운 성이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과도하게 이방 백성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그들의 것을 빼앗은 그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다음 하박국을 보겠습니다. 하박국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건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하박국의 가장 중요한 말씀이 2장 4절입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여기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히브리어로 에무나라는 말입니다. 이 에무나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는 순간에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내 인생이 순탄할 때건 힘들고 어려울 때건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겁니다. 그런 믿음이 있을 때 살 수 있다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하박국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는 그 순간에도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붙잡는 겁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붙잡는 겁니다. 하박국서는 하박국이 하나님께 두 가지 호소를 하고 거기에 대해 하나님이 두 번에 걸쳐 응답을 하는 구조입니다. 하박국은 처음에 뭘로 호소하냐면 지금 남유다 안에 악인들이 판치는데 정의로운 하나님이 왜 이 악인들을 심판하지 않냐고 호소합니다.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뭡니까? 내가 바벨론이라는 막대기를 들어서 남유다에 있는 악인들을 심판하겠다는 겁니다. 이런 응답을 듣고 나서 하박국이 두 번째 호소를 합니다. “하나님, 우리 남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언약 백성을 심판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 그런 악한 바벨론 사람들을 도구로 사용할 수 있습니까”라고 호소 합니다.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지금 바벨론을 통해서 남유다의 악인들을 심판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교만한 자들, 악인들 여기에 누가 포함됩니까? 바벨론 사람들도 포함됩니다. 이런 악인들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고 의인은 그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하박국서는 하박국이 두 번에 걸쳐 하나님께 호소하고 하나님이 두 번에 걸쳐 응답을 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말씀은 아까 보았던 2장 4절입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런데 여러분, 하박국 2장 4절은 신학계에서 굉장히 논쟁이 많은 구절 중 하나입니다. 왜 그러냐면 “여기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할 때 여기 “그”를 누구로 볼 것인가에 대해서 두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를 하나님으로 보는 겁니다. 또 하나는 그를 의인으로 보는 겁니다. 만약 여기 나와 있는 그를 하나님으로 보게 되면 의인은 하나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겁니다. 여기 하나님의 믿음이라 할 때 믿음의 동의어가 뭐냐면 신실함입니다. 한 마디로 얘기하자면 의인은 자기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겁니다.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고 또 하나는 그를 의인으로 보는 겁니다. 그러면 위기의 순간이라 하더라도 의인은 하나님을 붙잡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될 것이다,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비슷한 말씀이 신약에도 있는데 갈라디아서 2장 16절입니다. 이신칭의와 관련된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함을 얻는다.” 이것이 이신칭의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겁니다. 여기도 신학자들은 두 가지로 해석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 것인가와 관련하여, 한글 번역은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로 되어 있습니다. 목적격으로 해석을 한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소유격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는다’라고도 해석할 수 있는 겁니다. 예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예수의 신실하심,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셨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다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박국 2장 4절이나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서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했을 때 여기 나오는 그를 하나님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의인으로 볼 것이냐,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거냐 아니면 예수의 신실하심 때문에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거냐, 이렇게 두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합니다. 그런데 만약 의인이 그 자신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얘기하면 이것은 공로주의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5장 6, 8, 10절에 보면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과 원수관계였을 때, 우리가 악인이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를 위해서 대속의 죄물로 내어주심으로 말미암아 깨어진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는 겁니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선행적인 은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겁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려고 할 때는 의인은 그 의인 자신의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나는 넘어질 수 있는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인은 살게 된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게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붙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리해보면, 의인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를 신뢰함으로 살게 되는 겁니다. 하박국 2장 4절에 그를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게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 이신칭의와 연관해서도 예수의 신실하심이냐 아니면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이냐, 이런 신학적인 해석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3장 17~19절은 찬양도 있습니다. 무화과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고 포도 나무에 열매가 없습니다. 있어야 될 곳에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모든 것이 파멸된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장 18~19절,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한다”고 합니다. 하박국은 모든 것이 사라진 순간에도 누구를 주목하고 있습니까? 여전히 살아계신 하나님을 주목하고 있는 겁니다.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죠? 없는 것에서 모든 것을 만들어내신 창조자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구원자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위로해주시는 위로자 하나님이신 것이고, 아무것도 없는 순간에도 좌절하거나 낙담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뭐냐면 그 없는 것에서 모든 것들을 만들어내실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시니까, 그 하나님이 우리와 여전히 함께 하시니까, 하박국은 새로운 삶에 대한 소망과 기대를 가질 수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고통스러운 현실 가운데 무엇을 바라볼 것인가, 하나님을 주목하는 인생이라면 하박국처럼 이런 찬양이 우리에게도 울려 퍼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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