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스바냐입니다. 스바냐는 요엘서와 유사합니다. 요엘의 중요한 주제가 여호와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요엘, 스바냐가 여호와의 날이라는 주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언서를 보시면 여호와의 날에 대해서 여러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 여러 번 강조하냐면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날을 오해한 겁니다. 여호와의 날, 하나님이 전면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시는 날, 그날이 우리에게 무조건 은혜가 될 것이라고, 그날이 우리에게 구원이 될 거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요엘이나 스바냐는 끊임없이 뭐를 강조하고 있습니까? 여호와의 날에 누가 구원받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구원받는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됨을 상실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날은 구원의 날이 될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진정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고 있는가 이것을 돌아보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요엘과 스바냐서의 주요 내용입니다. 그래서 요엘과 스바냐는 오늘 우리가 갖고 있는 재림 신학 있죠. 너무나 많은 크리스천들도 주님 재림하시면 당연히 교회 열심히 다니는 나는 구원 받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갖고 있었던 여호와의 날에 대한 이해와 너무 똑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이 땅에 등장하시는 날 이스라엘은 다 구원받을거야, 이방은 다 지옥의 불쏘시개가 될 거야, 그런데 그런 착각하지 말라고 하나님이 예언자를 통해서 끊임없이 경고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이 오늘 재림하시면 나는 교회 다니니까, 나는 세례 받았으니까 당연히 구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내가 진정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살아내고 있는지 그런 정체성을 지켜내고 있는지 스스로를 성찰하게 만드는 본문이 바로 요엘과 스바냐입니다.
그다음이 학개인데 학개와 스가랴는 연결해서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학개, 스가랴, 말라기는 포로 후기 예언자들입니다. 바벨론 포로 이후에 등장했던 예언자가 바로 학개, 스가랴, 말라기입니다. 학개, 스가랴, 말라기는 페르시아 시대 때 사역했던 예언자들입니다. 특별히 학개, 스가랴는 바벨론 포로기에서 돌아온 다음에 남유다 백성들로 하여금 성전 재건을 독려했던 예언자입니다. 그래서 주전 538년부터 515년 사이에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에게 성전 재건을 독려한 예언자가 바로 학개입니다. 그런데 주전 515년에 이 성전이 재건됩니다. 이것을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제 1성전인 솔로몬 성전에 비해서 화려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솔로몬 성전을 예전에 기억했던 사람들은 새롭게 지어진 스룹바벨 성전을 보면서 낙담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학개를 통해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성전을 성전되게 만드는 것은 크기도 아니고 화려함도 아니다, 그러면서 학개 2장 9절에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니까 덜 화려하지만 스룹바벨 성전이 이전에 지었던 솔로몬의 성전보다 더 영광스러운 성전이 될 거라는 겁니다. 왜요? 중요한게 뭡니까? 성전을 성전 되게 만드는 핵심은 크고 거대하고 화려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성전에 기대하시는 것은 딱 하나입니다. 거룩함입니다. 그래서 나중의 성전이 이전 성전보다 더 영화롭게 되는 길은 딱 하나 밖에 없습니다. 솔로몬 성전보다 더 거룩해야 합니다. 크기는 작다고 하더라도 화려하지 않더라도 더 거룩할 수 있다면 여호와의 영광이 스룹바벨 성전을 떠나지 않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이 땅 교회에 기대하시는 것은 큰 교회가 아닙니다. 거대한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에 필요한 유일한 자질은 거룩함입니다.
그다음 스가랴입니다. 스가랴는 소선지서들 중에서 가장 긴 본문입니다. 14장까지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메시아적인 선지서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가랴를 자세히 읽어보시면, 학개와 스가랴는 같은 시대에 사역했는데 학개의 예언이 성전 건축이라고 하는 현실적인 이슈를 다루고 있는 반면, 스가랴는 장차 오시게 될 메시아와 그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이방 나라의 멸망을 말함을 통하여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소망과 기대를 갖게 만드는 것이 바로 스가랴서입니다. 그래서 같은 시기에 사역했지만 학개와 스가랴의 강조점은 좀 다릅니다. 학개는 성전 건축이라고 하는 현실적인 이슈를 강조했고 스가랴는 이스라엘을 돕기 위해서 장차 오실 메시아, 그리고 오랜 세월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이방 나라의 멸망을 말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소망과 기대를 갖게 만들었습니다. 스가랴에서 두 구절만 보겠습니다. 1장 1절입니다. “다리오 왕 제2년 여덞째 달에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스가랴라고 하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는 말입니다. 스가랴가 나중에 신약에 가보게 되면 사가랴로 표기가 됩니다. 스가랴, 사가랴 같은 뜻입니다.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는 뜻입니다. 스가랴서의 가장 중요한 말씀은 1장 3절과 4절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희 조상들을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위를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스가랴서의 가장 중심 단어는 돌아오라는 말입니다. 돌아오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슈브라는 말입니다. 슈브라는 말은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그동안 이 방향으로 걸어갔다면 이제는 돌이키라는 겁니다. 전혀 다른 삶을 살아내라는 겁니다. 돌아오라는 것은 뭡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일상을 살아내라는 겁니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이사야부터 말라기까지 예언서의 일관된 메시지입니다. 제가 예언서 첫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예언서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신앙인들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왜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책망받을 때 단 한번도 ‘너희 예배 안 드리네, 요새 찬양소리가 좀 작네, 기도가 좀 적네’ 이런 것으로 책망받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이 예언자를 보내서 이스라엘을 책망하실 때 이스라엘은 항상 종교의식의 과잉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자주 예배드렸고 뜨겁게 찬양했고 하나님께 예물도 많이 바쳤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해 책망하십니까? 예배는 이렇게 화려하게 드리고 있는데 일상의 삶에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종의 삶을 살아내고 있지 않은 겁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의 예배를 열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예언서가 계속 반복하고 있는 것은 뭡니까? 그것은 너희가 기뻐하는바다,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은 이거다, 스가랴는 뭘 얘기합니까? 제발 조상들 좀 본받지 말라는 겁니다. 조상들은 왜 실패했습니까? 죄를 질타하고 죄를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은 것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스가랴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말은 뭡니까? 예배 많이 드리는 건가요? 아닙니다.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것은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대로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만이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스가랴입니다.
이제 마지막 본문입니다. 말라기입니다. 말라기서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고 나서 다시 가나안에서 성전을 재건하고 일상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시간이 좀 지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빠져 있는 겁니다. 그것을 질타하는 겁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긴 드리지만 전심을 다해 예배드리지는 않습니다. 예배에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그냥 건성건성, 형식적으로 진부함을 반복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형식적인 예배에 대해 질타합니다. 또 하나가 뭐냐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겁니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에 대해서 질타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뭐냐면 십일조라는 것은 구약시대에 헌금이 아니라 세금이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십일조라는 것은 어떤 성격의 세금입니까?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각 가문별로, 각 가정별로 땅을 다 분배받았습니다. 그런데 땅이 없는 사람들이 있는 겁니다. 누구죠? 레위인들입니다. 그 다음에 땅이 있었는데 나중에 땅을 빼앗기는 사람들이 있는 겁니다. 누굽니까? 고아와 과부들입니다. 나그네들입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고대 사회에서는 자기 땅을 경작해서 거기서 나오는 소출을 자기가 먹는 구조입니다. 대부분 자급자족 경제였습니다. 그런데 땅이 없다는 말은 내 스스로 내 삶을 일궈나갈 수 없는 겁니다.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내가 살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땅이 없는 자들, 고아나 과부나 레위인이나 나그네 같은 사람들 이런 사람들의 삶을 돕기 위해서 사회 보장 기금의 세금을 내도록 한 겁니다. 그게 뭐죠?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를 내게 되면 그 모인 십일조로 누구의 삶을 돕는 겁니까? 땅이 없어서 스스로의 삶을 살아갈 수 없었던 사람들의 삶을 도와주는 겁니다. 그런데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특히 말라기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를 내지 않는 겁니다. 십일조를 내지 않게 되면 누구의 삶이 위기에 처하게 됩니까? 자신의 땅이 없어서 누군가가 돕지 않으면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 위기에 처하게 된단 말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책망하는 겁니다. 이웃은 굶고 있는데, 이웃은 지금 삶이 벼랑 끝에 몰려있는데 그 이웃의 삶에 대해서 관심 갖지 아니하고 그들을 돕고자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책망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뭐라 말씀하십니까? 3장 10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면 십일조를 드리라는 겁니다. 왜 십일조를 드리라는 겁니까? 가난한 자들을 도우라는 겁니다. 힘이 없는 이웃들을 도우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을 돕게 되면 하나님이 공동체 전체의 삶을 책임져 주시겠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체다카를 시행하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말라기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형식적인 신앙생활 그리고 자기만을 생각하면서 이웃을 돌보지 않는 모습, 그것이 뭘로 드러나게 된 겁니까? 십일조를 내지 않음,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일조를 드리라고, 바꿔 얘기하자면 이웃을 돌봐라, 연약한 자들을 돌봐라 그러면 내가 너희들의 삶을 책임져주겠다 이런 말씀을 던지시고 계신 겁니다. 4장에는 이제 마지막 때 하나님이 엘리야를 보내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와주시겠다는 그런 말씀, 그 엘리야가 바로 신약에 나오는 세례 요한입니다. 그래서 말라기 4장의 말씀과 복음서가 이 엘리야라는 인물을 통해서 연결되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랜 시간 동안 이사야부터 말라기까지 주어진 시간 안에서 중요한 내용들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어 가시면서 제가 했던 강의의 내용들을 다시 한 번 복기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희가 이후에는 구약을 마무리하고 복음서부터 시작해서 신약을 하나하나 공부해가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그때까지 건강하시길 바라며 이후 신약 시간에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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