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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의 후손을 통한 문명

by 【고동엽】 2022. 12. 10.

가인의 후손을 통한 문명

첫째, 가인의 후손을 통해 첫 번째 성이 축성되었습니다. 본문 16절 말씀을 보면 가인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에덴 동편의 놋 땅에 거했는데 그 땅은 에덴동산처럼 안전한 땅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17절 말씀처럼 그는 인류 최초로 성을 쌓고 그 성의 이름을 자기 이들의 이름을 붙여 에녹 성이라고 붙였습니다. 그처럼 성으로 둘러싸인 놋 땅은 인류 최초의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본문 18-19절 말씀을 보면 가인의 6대손 라멕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능력 있고 유력한 사람으로 문명이 발달의 와중에 두 아내를 취했습니다. 본문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을 씰라며.” 성경 기록상 라멕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부일처라는 신성한 결혼제도를 파괴시킨 최초의 인물이었습니다.

셋째, 본문 20-21절 말씀을 보면 라멕은 첫째 아내인 아다를 통해서 야발과 유발 형제를 낳았는데 야발은 장막에 거하여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됨으로 인류 첫 목축업자가 되었고, 유발은 소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됨으로 인류 첫 음악가가 되었습니다.

넷째, 본문 22절 말씀을 보면 라멕은 둘째 아내 씰라를 통해 두발가인을 낳았는데 두발가인은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가 됨으로 인류 첫 과학자가 되었습니다.

다섯째, 본문 23-24절 말씀을 보면 라멕은 최초의 시를 썼습니다. 이 구절을 보면 한국어 성경으로는 산문처럼 나와 있지만 영어 성경이나 원어 성경으로는 시로 되어 있습니다. 즉 그 부분은 성경 기록상 나와 있는 인류 최초의 시이자 최초의 문학입니다.

어떤 내용의 시입니까? 본문 23-24절 말씀을 보십시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 배이리로다.”

어떤 내용의 시입니까? 사람을 죽이고 나서 하나님을 조롱하는 시를 지어서 부른 것입니다.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죽이고 나서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누가 가인을 해롭게 한다면 칠 배의 벌을 받게 되지만 라멕은 자기 동생도 아닌 사람을 죽였으니 자기를 괴롭히는 자는 칠십 칠 배의 벌을 받아야 된다고 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패역한 자리까지 나아간 것입니까? 최초의 시와 문학이 아름다운 시와 문학이 아니라 완전히 하나님을 무시한 것이었습니다.

< 잘못된 문명이 말해주는 교훈 >

이렇게 가인의 후손을 통해서 문명이 진보되는 모습을 통해서 어떤 교훈을 얻게 됩니까? 2가지 교훈을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인간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죄의 문제입니다.

가인의 후손을 통해서 문명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인한 또 한 가지 결과를 보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그 다음으로 인간과의 관계 및 환경과의 관계도 단절됩니다. 더 나아가 사람은 죄 때문에 자신과의 관계도 단절됩니다.

자기와의 관계가 단절된 사람은 보통 극단적인 두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하나는 본문 앞에 나오는 12절 말씀처럼 유리하는 자(wanderer)가 되어 끝없이 방황합니다. 좋은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그 일에 나서지 못하고 항상 주저주저하는 것은 자기와 단절된 삶을 살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온유함과 우유부단함은 다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우유부단함은 죄입니다.

또 하나 자기와의 관계가 단절된 사람은 유리하는 자와는 완전히 반대로 행동주의자(performer)가 되어 완벽하게 행동하려고 합니다. 남을 잘 믿지 못하고 괜히 완벽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완벽주의자의 모습도 타락의 결과로 생겨난 죄이고, 주일을 지키지도 않고 쉬지 않고 일을 하는 일 중독자의 모습도 타락의 결과로 생겨난 죄 때문입니다.

아벨을 죽인 후의 가인의 모습은 유리하는 자의 모습이고 가인의 후손이 여러 가지 문명을 발달시키는 것은 행동주의자의 모습입니다. 사실상 그런 인간의 죄성을 이해해야 인간 사회의 문제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바른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인간의 죄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상과 논리로 인간 문제의 해결책을 모색하려 해서 생겨난 것들이 바로 ‘OO주의, OO주의’라는 이데올로기들입니다.

예를 들어, 공산주의의 기본 사상은 “같이 평등하게 나누자!”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생각입니까? 그러나 죄인은 같이 평등하게 나눌 수 없고, 평등한 중에서도 또 불평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의 최대 취약점은 인간이해입니다. 즉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입니다.

사실 이 사회의 모든 단절과 부조리의 원인은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 죄의 문제를 두고 인간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책은 없습니다. 시궁창에 빠진 아이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는 옷만 갈아 입혀서는 안 됩니다. 먼저 몸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고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이 죄인인 바에는 자본주의의 옷을 입혀놔도 썩고 사회주의의 옷을 입혀놔도 썩습니다.

무슨 주의와 이데올로기를 입혀놔도 사람을 사람 되게 할 수 있는 이념은 없습니다. 모든 사회의 문제는 인간이 죄인이라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이것을 해결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못합니다.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국가적이든, 모든 절망의 원인이 죄에 있습니다.

그런 사실을 이해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십자가의 보혈로 죄의 문제를 해결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격적인 사실인지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복음 안에 있게 된 것은 이 세상의 어떤 축복보다 소중한 축복입니다. 그 사실을 깊이 인식하는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 안에 있어도 우리가 죄로부터 전혀 감염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복음 안에 있으면 더 이상 죄가 즐겁지 않습니다. 결국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회개의 영을 부어주심으로 죄의 문제를 극복하고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2. 죄 가운에 이루어진 문명은 축복이 아닙니다.

본문을 보면 가인의 후손을 통해서 분명히 문명은 진보했습니다. 그러나 도시도 쌓고, 문화생활이 좋아지면서 일부다처제로 하나님께서 설정한 가정의 원리를 파괴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풍요와 발전과 문명은 결코 축복이 아닙니다. 진정 축복된 삶은 죄를 떠난 삶입니다. 죄의 터전 위에서 이루어진 문명은 신앙과 양심, 그리고 윤리와 도덕을 부패하게 만들어 폭력을 가져오고 인간의 자멸을 초래케 합니다.

미국에서 처음 원자폭탄을 만들어서 실험했을 때, 과학자들이 사막에다 철탑을 쌓아 놓고 그 위에 원자폭탄을 달아 놓고 수백 킬로 밖에서 스위치를 눌렀습니다. 마침내 원자폭탄이 터지자 그렇게 큰 철탑이 어디로 날아가 버렸는지 흔적 없이 날아가 버렸고 사막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팼습니다. 그 장면을 보고 과학자들이 땅을 치고 통곡하면서 “우리는 지옥을 창조했다!”고 눈물 흘렸다고 합니다. 문명이 잘못된 토대 위에서 발전하면 지옥을 창조하는 통로가 됩니다.

지금도 문명으로 인한 각종 부작용으로 영혼의 상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요새는 성도들조차 문명의 이기를 즐기면서 하나님을 찾는 열심이 상당히 줄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기주의와 기복주의가 만연해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앞으로 우리 사회가 어떻게 될까? 내가 이때 무엇을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때로 들지만 우리는 그런 상황에서도 결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엘리야가 아합 왕 때에 거짓 선지자와 악한 왕과 싸우다가 지쳐서 하나님께 탄원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고 나만 남았는데 나도 죽어야 하겠사오니 하나님이여 죽여주시옵소서.” 그때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엘리야야 걱정마라. 남은 자가 칠천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어둡고 타락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도 아직 남은 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남은 자가 되고, 또 다른 남은 자를 부르는 일을 더욱 열심히 해야 합니다. 전도가 무엇입니까? 남은 자를 부르는 일이고, 남은 자를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전도는 누가 해야 합니까? 우리가 해야 합니다. 아무리 사회가 어두워도 낙심하지 말고 빛을 비추며 살아야 합니다. 어두울수록 적은 빛이라도 더 밝게 비칠 것입니다.

< 일등 교인이 되십시오 >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가인과 같은 사람이고, 또 하나는 아벨과 같은 사람입니다. 엄밀히 얘기하면 중간자의 삶은 없습니다. 우리는 둘 중의 하나에 온전히 속하도록 해야 합니다. 군대에서 중간에 서서 요령 피는 사람은 비겁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중간적인 생활이 요새 성도들의 삶의 전반에 배여 있습니다. 이제는 주일 오전예배만 드리고 특별한 사정이 없는데도 수요예배나 구역예배도 안 드리는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어떤 분은 교회에 깊이 들어가면 골치가 아프다고 적당히 믿겠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똑똑한 것 같지만 어리석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일등 신자가 되려면 골치가 아플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당히 믿고 중간지대에 걸쳐 살면 골치가 사라지고 문제가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초래하는 모든 문제와 골치는 오히려 적당히 살기 때문에 생기는 것들입니다.

사실 무엇이 복된 삶인지 모르고 흐리멍덩하게 사는 것은 복이 아닙니다. 등이 항상 굽어서 아무 일도 제대로 못하고 어디서든지 쓰임 받지 못하고 사는 것은 사실 더 괴롭고 외롭고 골치 아픈 일입니다. 아벨처럼 살려면 때로는 골치 아픈 일도 겪을 수 있으나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우리는 천국 갈 때까지 적당히 믿지 말고, 앞서는 교인이 되고, 일등 교인이 되고, 교회의 대표적인 교인이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지금 세상 문화가 얼마나 사람들을 무섭게 유혹하는지 모릅니다. 그런 상황에서 다시 한번 기독교 신앙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기독교 문화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예술 분야에서까지 기독교인들이 많이 진출하고 영향력을 발취해서 기독교 문화가 널리 펼쳐질 수 있기를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나라 기독교인 중에서 아브라함 카이퍼같은 정치가(목사 겸 수상)도 많이 나와야 하고, 벤허를 쓴 류 월레이스와 같은 소설가도 많이 나와야 하고, 신실한 신앙을 가진 음악가와 영화인들도 많이 나와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배출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힘은 미약합니다. 그러나 미약한 중에서도 꿈과 비전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선한 목적 안에서 큰 꿈을 가지고 열심히 헌신하면 언젠가는 꿈꾼 대로 이루어주시는 꿈같은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항상 사명감을 가지고 우리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더욱 하나님과 교회에 헌신함으로 마지막 때에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복된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 이한규목사(분당 샛별교회)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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